북 포격에서 협상타결까지…'불안·답답·기대' 오간 접경지

"긴급 상황입니다. 주민 분들은 신속히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20일 오후 5시 8분 경기도 연천군 중면 횡산리. 민간인 출입이 통제돼 적막한 이 마을에 스피커 소리가 느닷없이 울려 퍼졌다. 조금 전 들린 천둥소리가 군부대의 단순한 사격훈련이 아니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 북한, 10개월 새 두 번째 접경지 기습 도발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항의로 북한군이 쏜 고사총 실탄 2발이 마을로 날아든 지 10개월 만이다. 주민 30명은 평소 연습한 대로 마을 안에 마련된 대피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TV에서 '1시간 전쯤 두 차례 북한군의 기습 포격이 있었다'는 내용의 자막이 나오자 예상은 했지만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인근 삼곶리 주민 역시 면사무소에 있는 대피소로 이동했다. 파주지역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북방 3개 마을에도 외출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김포시는 횡산삼곶리 주민보다 30분가량 앞서 월곶면 주민 110명을 대피시켰고, 휴전선과 접한 강원지역 지자체도 영농 활동을 자제시키며 대피령에 대비하는 등 긴박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다 북측이 "22일 오후 5시까지 대북 심리전 방송을 중지하지 않으면 군사적 행동을 개시하겠다"고 통보, 48시간의 말미가 생기자 대피 주민 대다수가 군 통제에 따라 귀가했다. ◇ 불안한 마음에 잠 못 이룬 대피소 주민들 횡산삼곶리 주민 가운데 58명은 대피소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덥고 습한 날씨에 낡은 선풍기 56대에 의존해 공기도 잘 통하지 않는 지하 대피소였다. 선풍기 회전 소리 때문에 제대로 잠도 못이룬 주민들은 "언제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며 "대피소에 TV라도 있어야지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지 답답하다"며 불평했다. 장관과 도지사, 정치인들이 21일 대피소를 방문해 주민의 불편을 들었고 그 와중에 북한군이 제2의 도발을 준비하는 정황이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급기야 국방장관이 "22일 오후 5시 도발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하면서 주민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군은 지금 당장 북측의 특이동향이 없다고 판단, 21일 오후 6시 횡산삼곶리 일대 주민 대피령을 해제했다. 대피소에 잔류한 주민 58명은 24시간 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 일촉즉발 위기에 주민 불안 가중 북측의 최후통첩 시한이 다가오면서 남과 북이 전력을 증강하자 접경지 주민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결국 22일 오전 11시 30분 주민 대피령이 다시 내려졌고 "오후 4시까지 대피소로 이동해 달라"는 방송이 나왔다. 예정된 오후 5시가 다가오면서 불안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린다는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주민들은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벗어난 데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지만 긴장의 끈은 놓지 못했다. 박용호 삼곶리 이장은 "대피소에 들어올 때만 해도 주민들이 예민했는데 이제는 안도하는 모습"이라며 "남북 대화가 원만히 진행돼 전화위복이 되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이날 회담은 예정보다 30분 늦은 오후 6시 30분 시작됐다. 그러나 주민들의 기대에도 회의는 끝날 줄을 몰랐다. ◇ "회담 결과 없어 아쉽지만 의연하게 기다려" 10시간가량 진행된 회의 결과에 촉각을 세웠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고 오후 3시 재개된다는 소식에 주민들은 다소 실망했다. 대피령이 해제되지 않아 집에 가지도 못해 아쉬웠다. 그러면서도 오후 재개될 회담에서 좋은 결과가 나와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다시는 대피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를 기대했다. 주민들은 "나이 많은 주민들이 힘들어하고 농번기라 할 일도 많지만 접경지 주민으로서 정부 방침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하며 버티고 있다"며 곧 재개될 회담에서 좋은 결과가 나와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길 바랐다. 대피소에 다시 모인지 또 24시간이 지났지만 기다리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협상이 길어지고 견해차를 좁히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자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주민들은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좋은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신중한 논의를 해 좋은 결과를 내놓기를 기다려 보자"는 것이다. ◇ 협상 극적 타결에 57시간만에 대피소 벗어나 주민들은 "지난해 10월에 이어 10개월 새 우리 지역에 북측이 벌써 두 번째로 도발했다"며 "정부가 북측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해 재발방지책을 마련케하는 등 강력한 의지를 보여줬으면 한다"고 입을 모았다. 손을 놓은 농사일이 걱정되고 대피소 생활이 불편했지만 대다수 주민들은 접경지에 살면서 정부의 방침을 잘 따르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최대한 협조했다. 급한 용무가 있는 주민들과 오랜 대피소 생활을 견디기 어려운 노약자는 대피소와 집을 오가기도 했다. 지난 22일 회담이 시작된 지 43시간 만에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됐다.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에 대피소에 있던 주민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며 반겼다. 22일 오후 4시 2차 대피령에 따라 대피소에 들어온 지 57시간 만이다. 주민 이모(51)씨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남북 간 문제가 쉽지 않아 시간도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타결이 돼 천만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연합뉴스

"빨리 끝났으면"…연천·파주 주민 '아쉬움'

23일 아침 남북 고위급 접촉이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정회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피소에 나와 있던 경기도 연천과 파주 주민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날 오후 4시부터 집을 떠나 대피소에서 지낸 주민들은 잠을 설치며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다렸다. 접촉이 시작됐을 때만 해도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이날 오전 언론을 통해 '한반도 긴장 고조 상황을 해소하기 위한 고위급 접촉이 최종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정회, 오후 3시부터 재개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다소 아쉬워하며 원만히 해결되길 기대했다. 비무장지대(DMZ) 내 파주 대성동 마을 김동구 이장(46)은 "어르신들은 대피소 생활이 불편해 대부분 자택에서 보냈다"며 "어렵게 이뤄진 회담인 만큼 서로에게 좋은 결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말했다. 불편한 대피소 생활에 잠을 쉬 이루지 못하고 늦은 밤까지 대피소 주변을 서성거렸던 연천군 중면 주민들도 접촉이 길어지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중면사무소 민방위대피소에서 밤을 보낸 삼곶리의 한 주민은 "잠을 제대로 못 잤다"며 "빨리 마무리가 돼야 일을 하러 가는데 아쉽다"고 했다. 김용섭 중면 면장도 "대피소 대기 기간이 길어져 주민들이 많이 지쳤고 고령인 몇 분은 밤사이 집에 갔다"며 "빨리 뭔가 마무리가 돼서 생업으로 돌아가면 좋겠다"고 오후 접촉에 대한 기대를 밝혔다. 지난 22일 오후 4시 대피령이 내려진 연천파주김포 등 3개 시군 접경지역 마을 주민 300여 명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대피소에서 밤을 보냈다. 연합뉴스

'北 통첩시한' 경기 최북단 마을, 긴장 속 일상 복귀

북한의 대북 확성기 철거 요구 시한인 22일 경기도 최북단 마을 주민들은 긴장 속에서 일상으로 복귀했다. 지난 21일 오후 6시를 기해 연천군 중면 대피소에 남아 있던 주민 58명에 대한 대피령이 마지막으로 해지되면서 22일 오전 7시 현재 도내 대피 인원은 없다. 주민들은 지난 20일 오후 북한의 포격 도발에 급작스레 일손을 내려놓았던 농경지로 돌아갔다. 다만, 외지 영농인들의 민통선 마을 출입은 여전히 제한되고 있다. 비무장지대(DMZ) 안보관광지 방문도 통제 중이다. 연천군 중면 김용섭 면장은 "주민들은 대부분 농사일에 복귀했다"며 "면사무소 직원들이 비상근무하면서 주민들과 연락할 수 있는 비상연락망을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기도 통합방위지원본부와 연천군파주시김포시 위기대응상황실은 북한이 통첩 시한으로 제시한 이날 오후 5시 30분(평양시 5시)을 앞두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다시 군의 대피 명령이 내려질 가능성에 대비해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이날 오전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은 파주 임진각 대피시설을 점검한데 이어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 재해구호물류센터를 방문한다. 개성공단을 오가는 파주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CIQ)의 출입경은 정상 진행됐다. 연합뉴스

[현장] 연천군 중면 지하대피소 주민 60여명 “훈련인가 했는데… 아직도 얼떨떨”

20일 오후 7시30분께 북한군의 포격 도발로 긴급 대피령이 내려진 연천군 중면 면사무소. 면사무소 한켠에 위치한 지하대피소 현관을 열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으로 들어서자 퀴퀴한 물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후텁지근한 공기로 가득 차 있는 60여㎡ 규모의 지하대피소에는 긴급 안내 방송을 듣고 대피한 삼곶리 주민 60여 명이 은색 돗자리 위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빵과 우유로 저녁을 해결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빵과 우유로 끼니를 해결하면서도 실시간 뉴스가 흘러나오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또 갑작스런 북의 도발 소식을 듣고 전화를 걸어온 친인척들에게 아무 일 없다고 소식을 전하는 주민들도 눈에 띄었다. 군사 접경 지역인 만큼 평소에도 포탄 소리를 들어왔던 주민들 대부분은 북의 포격 도발에 대해 실감하지 못한 채 얼떨떨해하는 모습이었다. 삼곶리 주민 박점규씨(68)는 포탄 소리를 수차례 듣긴 했지만 평소와 다름 없이 군사훈련이 있다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만 생각했다라며 긴급 대피방송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북의 도발 소식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포격 도발로 군사 접경지역 인근 농지의 출입이 제한됨에 따라 농사일에 대해 걱정을 털어놓는 농민도 있었다. 박영관씨(61)는 삼곶리에서 벼와 콩, 오이, 고추 등의 농사를 짓고 있는데, 포격 도발로 출입을 못하게 된 농지가 전체의 70%가 넘는다라며 지금 농사일 걱정할 때가 아니긴 하지만 장기화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라며 더 큰 사태로 번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아무런 사전준비 없이 곰팡이 냄새 가득한 대피소로 몸을 피한 주민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연천=정대전ㆍ박민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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