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며,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인천 강화군 망월리에 있는 이 돈대는 40∼120㎝의 돌을 직사각형으로 쌓아 올린 것으로, 성곽 위로는 흙벽돌로 낮게 쌓은 담장이 둘러져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망월돈대는 숙종 5년(1679년)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이며, 방형구조로 둘레 124m, 석벽의 높이는 180~300㎝이다. 기존 돈대와 달리 망월돈대는 갯가 낮은 지대에 설치했지만 시야를 가리는 방해물이 없어 경계초소로 부족함이 없다. 남쪽으로 계룡돈대, 북쪽으로 무태돈대가 있다. 돈대와 함께 있는 장성은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해안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쌓아 올린 것으로, 누각을 설치한 출입문이 6곳, 물길이 드나드는 문이 7곳 마련돼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후기의 군사 통신 시설로 총 44기가 있다. 2로 직봉 유적의 제2거는 직봉과 10개소의 간봉으로 이뤄져 있다. 소백산맥의 주요한 영로(嶺路)를 넘는 노선이 모두 봉수로(烽燧路)가 됐으며, 가장 동쪽의 죽령(竹嶺)을 넘는 노선이 직봉(直烽)이 되고, 중앙의 통로인 계립령을 넘는 노선과 보다 서쪽의 추풍령을 넘는 노선이 주요 간봉이었다. 문화재청 제공
용궁사 신중도는 인천 중구 운남동에 있는 1폭 가로 141㎝, 세로 126㎝ 규격의 불교회화로 2022년 인천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기존 불화 도상과 달리 공양물을 독특하게 표현했으며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으로 이어지는 서울과 경기지역 신중도 도상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현재까지 제작 당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1839년 서양인 선교사인 모방신부와 김성우 성인에 의해 구산공소가 설립되고, 6·25전쟁 이후 1956년 신자들의 자발적인 신앙심으로 망월리 358-3번지에 대지 502평을 매입해 현 구산성당을 건립했다. 장식이 없고 작은 성당으로 고딕 건축의 외관으로 강당형 예배당이다. 건축 구조는 무근 콘크리트 줄기초 위에 시멘트 벽돌을 쌓은 조적 구조로 창호는 세로로 긴 창이며, 부축벽을 쌓고 수성페인트로 외부를 마감했다. 문화재청 제공
용궁사 지장시왕도는 인천 중구 운남동에 있는 1폭 가로 104.5㎝, 세로 121㎝ 규격의 불교 회화로, 2022년 인천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용궁사 지장시왕도는 1910년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활동하던 화승이 조성했다. 수화승은 혜과당 봉감, 동참화승으로는 한곡당 돈법이 함께 참여했으며, 지장삼존과 시왕만으로 화면을 구성해 표현했다. 인물들의 도상적 특징은 서울과 경기지역 화승의 계보를 시각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으며 흥국사 화승 집단에 속했던 봉감의 화풍이 잘 나타나 있다. 현재까지도 제작 당시 원형을 훼손하지 않고 복장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안중근의사 유묵-일통청화공’은 안중근의사(1879∼1910)가 중국의 여순감옥에 투옥 중이던 1910년 3월에 쓴 글씨다. 장방형의 유묵으로, 흰 비단에 먹으로 썼다. 글씨는 상관·본문·하관 세 부분으로 나눠 썼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요타선생에게 선사하다. 날마다 고상하고 청아한 말을 소통하던 분. 경술년(1910년) 3월 뤼순 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삼가 절하다.’ 안중근의사의 평화사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이세주묘 출토 관 덮개는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보관 중인 인천시 문화재자료로, 조선 숙종 때 이세주(1626∼1710)의 무덤에서 나온 관 뚜껑이다. 영의정 최석정은 임금이 경서를 강의하던 자리에서, 제운리(현재 학익동)에 서당을 열어 많은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던 이세주 선생에 대해 말했다. 그러자 숙종은 그에게 벼슬을 주고 직접 만나보기도 했다. 처음에 이 선생의 무덤은 연수구 동춘동에 있었으나, 개발사업으로 이장해 옮겼다. 출토 당시에 관을 덮었던 선생의 이름과 관직이 쓰여진 명정(銘旌)이 관 뚜껑에 붙어 있었다고 한다. 문화재청 제공
‘터우5형 증기기관차 700호’는 1914년 제작돼 1919년부터 1935년까지 운행된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터우형 증기기관차다. 운행 종료 후에는 철도학교 박물관으로 이전, 단면을 절개해 내부구조와 작동원리 이해를 위한 교육용으로 80년 이상 활용됐다.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증기기관차이자 유일한 터우형 증기기관차로 1927년 터우6형 증기기관차를 국산화 하는데 마중물 역할을 한 것으로도 평가받았다. 또한 1935년 식민지 상황에서 증기기관차와 철도에 관한 일제와 우리 사회의 인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철도 유산이다. 문화재청 제공
어사대는 인천 계양구에 있는 1.3㎡ 규모의 유적건조물로 1990년 인천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조선시대 정조(재위 1776∼1800년)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에 참배하러 가는 도중에 잠시 들러 휴식하던 곳으로 욕은지(浴恩池)와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욕은지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고종 24년(1887년) 수리하면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정조는 활 쏘기를 즐겨 신하들에게도 활을 쏘게 했다는데, 어사대에서 활을 쏘고 욕은지에서 손을 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화재청 제공
항미정은 축만제(일명 서호)에 있는 정자로 1831년(순조 31년) 당시 화성유수였던 박기수가 현재의 자리에 건립했다. 항미정이라는 이름은 중국 시인 소동파의 시구(詩句)에 “서호는 항주(杭州)의 미목(眉目) 같다”고 읊은 데서 그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1908년 10월2일 순종황제가 기차를 타고 수원 능행을 했을 때, 융건릉 참배 후 서호 임시 정거장에 도착해 차를 마시며 잠시 쉬었던 유서 깊은 정자이기도 하다. 현재의 현판은 일제강점기 사진을 바탕으로 근당 양택동 선생의 글씨를 받아 2019년 12월 제작해 현 위치에 걸었다. 정자의 주요 구조부(기둥, 보, 도리 등)가 최초 창건 때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인물사적, 건축사적, 농업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문화재청 제공
부평 산곡동 영단주택 관련 유물은 인천 부평역사박물관에 있는 인천시 등록문화재이다. 영단주택은 1940년대 초반 인천육군조병창의 근로자 사택으로 조성돼, 광복 후에는 미군기지, 부평4공단 근로자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근현대 부평의 지역적 특성과 역사성을 담고 있다. 영단주택 관련 유물은 인천육군조병창 근로자의 공동주택이 광복 이후 일반에 불하된 정황, 당시 주택거래방식과 물가(토지 및 주택 가격, 정부수입인지세) 등 시대상과 영단주택에 대한 당시 인식, 관련 지명, 관련기관(조선주택영단, 대한주택영단, 대한주택공사)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사료다. 도시개발로 사라져 가는 영단주택과 관련한 실물자료로서의 중요성이 인정돼 인천시 등록문화재로 등록할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의 셋째 아들 안양군 이항(1480~1505)과 부인 능성 구씨(1480~1556)의 합장묘다. 안양군묘는 처음에 유배지였던 거제도에 있다가 능성 구씨 부인의 상소에 따라 중종 15년(1520년) 현재의 경기 남양주 지역으로 옮겼다. 그리고 1900년 고종이 명성황후의 홍릉을 조성하면서 현재의 지역으로 이장했다. 양쪽으로 망주석, 문석인, 양석이 각 1쌍씩 배치돼 있어 사대부 묘역의 전형적인 석물 구성을 갖췄다. 문화재청 제공
일제강점기 인천육군조병창 관련 유물은 인천 부평역사박물관에 있는 인천시 등록문화재다. 인천육군조병창은 일제가 아시아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해 인천 부평에 설치한 한강 이남 최대 규모의 군수제조시설로, 이를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 및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조병창 근로자의 생활상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인천육군조병창 관련 유물은 인천육군조병창 건설을 위한 토지매입 관련 문서부터 생산된 무기, 조병창 근로자의 서간(엽서)까지 인천육군조병창의 시대상(역사성)과 유물의 다양성을 갖추고 있어 보존가치가 있다. 일제 지배정책의 성격, 침략 전쟁과 강제동원 실상, 인천시 지역사와 지역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인천시 등록문화재로 보존, 활용할 필요성이 있다고 평가된다. 문화재청 제공
선돌은 고인돌과 함께 청동기 시대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자연석이나 자연석을 일부 다듬어 세워 놓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고인돌과 함께 세워진 선돌은 무덤 공간임을 알리려는 묘표석(墓表石)의 기능을 하며, 마을 입구에 세워진 선돌은 벽사 또는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 마을 수호물이다. 경계와 이정표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처리 선돌’은 산 흐름이 끝나가는 구릉에 위치해 청미천과 그 주변의 들판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선돌은 화강암질 편마암을 이용해 다소 넓적하게 가공했으며, 윗부분은 평평하다. 처리 선돌은 청미천과 그 주변의 농사지을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얕은 구릉에 세워져 있어 풍요와 관련된 숭배 대상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금풍양조장은 인천 강화군에 있는 산업시설로, 지난해 10월 인천시등록문화재로 등록됐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건립된 금풍양조장은 지상 2층, 연면적 433㎡ 규모로 근대 공장의 건축양식이 보존·유지되고 있다. 건축 당시 원형을 대체로 유지하고 개항기 이후 강화도 지역의 산업화(양조산업) 과정 및 변화·발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인정된다. 현재 양조장 1층에는 100년 이상 된 우물과 왕겨를 사용한 벽체가 남아있다. 2층에는 누룩을 띄우던 창고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하우현 일대는 청계산과 광교산이 위치한 덕에 박해를 피해 모여든 천주교인들의 교우촌이 형성됐다. 1894년 5월 초가 목조 강당 10칸이 건축됐으며, 1900년 하우현은 왕립 본당에서 분리됐다. 이후 1906년 하우현성당사제관이 지어졌다. 일반적인 성당과 달리 성당 뒤편에 성당과 나란히 사제관이 위치해 있다. 팔작지붕의 목구조와 석조벽체 그리고 온돌을 갖춘 입식 공간 구성 등에서 독특한 한양 절충식 근대 건축 유산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구 미쓰이(三井)물산 인천지점은 인천 중구 신포로에 있는 1930년대 유적건조물로, 지난해 인천시 시도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구 미쓰이 물산 인천지점은 본동(2층∙369㎡)과부속동(1층∙138㎡)으로 이뤄져 있으며 본동은 한국근대문화관기획전시관으로, 부속동은 수장고로 각각 활용 중이다. 조적조와 목조트러스가 결합한 건축양식과 정면의 고전건축 의장요소 등을 통해 근대건축의 과도기적 특징을 이해할 수 있고 상사(商社)건축의 중요한 요소인 물류창고가 부속채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인천시 등록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제7대 국왕세조와 부인 정희왕후 윤씨의 무덤이다. 세조는 계유정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군제 개편·집현전 폐지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토지제도 정비·서적간행 등의 업적을 남긴 뒤146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시대 최초로 수렴청정을 시행한 정희왕후 윤씨는 성종 14년(1483년) 세상을 떠났다. 왕의 유언에 따라 무덤방은 돌방 대신 석회다짐으로 막았고,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다.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겼는데 이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릉은 두 언덕을 한 정자각으로 묶는 새로운 배치로 후세의 무덤 제도에 영향을 끼쳤다. 문화재청 제공
소래역사관에서 관리하고 있는 협궤 증기기관차 ‘혀기-7형’은 1952년에 수원 기관차사무소에서 조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협궤용 증기기관차로 1978년까지 수인선 등에 운행됐다. 협궤 증기기관차는 수인선·수여선 운행 중단 이후 대부분 폐차됐고, 현재 국내에 6량만 현존하고 있다. 이 중 혀기-7형은 원형 보존상태가 양호해 국가적으로도 문화재로 보호할 희귀성이 있다. 현재 실제 운행됐던 소래역과 소래철교 인근에 전시되고 있어 소래포구만의 독특하고 지역적인 정서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산업화 시기에 수원과 인천 사이에 도로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오지 등을 통과하는 노선으로서 서민들의 발이 되고 주민들과 애환을 함께한 수인선 협궤 증기기관차는 인천의 근현대 지역사를 보여주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는 대표적인 유물로 가치가 높다. 문화재청 제공
안표(1710~1773)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정숙(定叔)이다. 1754년(영조 3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승문원에 봉직하다가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됐고, 1763년 헌납(獻納)이 돼장령(掌令)을 거친 뒤, 1764년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대사간, 병조참의 등을 거쳐 여주목사를 지냈다. 교지에는 안표가 1754년 증광문과에 급제할 때 받은 홍패로 통덕랑 안표가 문과 병과 제9인으로 급제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