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북한산 산영루지는 북한산성 내에 있는 누각인 ‘산영루(山映樓) 터’다. 1925년 대홍수 때 소실돼 초석만 남았다가 2014년 고양시의 ‘고양 600년 역사복원사업’으로 복원됐다. 문화재청 제공
관동 공회당에서 1923년 이곳 송학동에 벽돌 2층의 서양식 건물을 신축 이전해 공회당으로 사용했다. 1933년 증축한 것으로 기록됐는데 2층에는 1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을 가진 대규모 건물이었다. 1923년 12월부터 건물 서쪽 일부를 인천상업회의소가 함께 사용했다. 1933년 인천상업회의소가 인천상공회의소로 명칭을 바꾸고 이 자리에서 존속된다. 6·25전쟁 당시 상당 부분 파괴됐으나 미군민사원조에 의해 개축, 1957년 3월1일 준공해 인천시가 시민관이라는 극장 형태로 1년여간 운영했다. 이후 문총에 위탁 운영하기도 했으며 1960년대 초반까지 극장으로 운영됐다. 이후 공가 형태로 남아 있다가 인성여고 체육관으로 변모했다. 인천시 제공
해월 최시형 선생(1827~1898)은 동학의 2대 교주로 전국을 누비며 동학교단을 정비하고, 만민평등사상을 전파해 동학 농민운동의 토대를 만든 역사적 인물이다. 해월 최시형 선생의 묘소는 사후 2년이 지난 1900년 현재의 자리로 이장됐다. 문화재청 제공
모오스 저택은 1896년 무렵, 미국인 모오스가 건축한 집이다. 백색 2층 벽돌 양관으로 수목과 등나무가 있는 정원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 저택은 6·25전쟁 당시 소실됐다. 모오스는 아메리카무역상사 사장으로 평안도 운산광산 개발권을 획득했고, 주한 미국공사 앨런의 막후교섭에 힘입어 1896년 3월 조선정부로부터 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냈다. 이듬해 3월22일 인천 우각리(쇠뿔고개, 지금의 도원고개 인근)에서 기공식을 거행한 인물이다. 데쉴러 주택과 위아래로 있었던 이 저택은 후일 경성일보 인천지국을 운영하던 일본인 이마이가 거주했다. 광복 후에는 민의원 의장을 지낸 곽상훈이 거주하기도 했다. 현재는 인성초등학교 부지이다.
흥화학교 회계부(1906년)는 흥화학교의 입출금 내용을 기록한 문서로 일상생활물품, 직원 월급, 구입한 책 내역 등이 확인된다. 흥화학교 포증서, 진급증서, 졸업증서는 윤희겸이 각각 1909, 1910, 1911년에 받은 증서로, 진급·졸업증서에는 과목별 교사의 이름과 날인이 있어 주시경, 이중화 등 당시 지식인들이 교사로 활동했던 상황을 알려준다. 해당 문서들은 구한말 흥화학교의 운영 상황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실증 자료다. 한편 흥화학교는 1898년 민영환이 외국어와 선진 문물의 수용을 목적으로 서울에 설립한 민족사립학교다. 문화재청 제공
오례당 저택은 높고 탄탄한 축대 위에 전면에는 돔을 지닌 거대한 저택이다. 초창기 인천해관 통역관으로 근무한 청국 외교관 출신 오례당이 전임지 스페인에서 결혼한 스페인 출신 부인의 간청에 따라 1909년 지었다. 오례당은 1883년 미국으로 파견된 보빙사 일행의 역관으로도 동행했다. 오례당이 사거한 후 미망인이 일본인 요시다에게 매각해 당시에는 요시다 주택으로 불리기도 했다. 광복 후 미군 독신 장교 숙사로 쓰이다가 우리 군 특수부대가 주둔하던 중 1968년 실화로 소실됐다. 이 자리에는 현재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다. 인천시 제공
화성 전곡리의 물푸레나무는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웅지마을 뒤 산밑에 위치한 수령 350여년 추정(지정일 기준)의 노거수다. 나무 높이 약 20m, 가슴높이 줄기둘레 4.68m로 물푸레나무로서는 보기 드물게 규모가 매우 크며 수형이 아름답다. 물푸레나무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자라는 키가 큰 나무로 목재의 재질이 단단해 괭이자루 등 각종 농기구와 생활용품 등의 용도로 널리 사용했다. 나무껍질은 건위제, 소염제 등의 한방 재료로 사용됐다. 문화재청 제공
지난 1884년 1월 독일 상사 세창양행 직원 기숙사로 만들어졌다. 현재 인천 중구 자유공원 조류사 일대에 지어졌다. 붉은 지붕에 흰 벽, 아치형의 베란다가 있다. 옥상에 사각형의 전망대를 가진 2층집이었고 온갖 수목이 있는 정원을 가진 인천의 대표적인 양관이다. 지난 1922년 인천부가 매입해 인천 최초의 부립도서관으로 문을 열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1941년 도서관이 이전한 뒤 일시 빈집으로 남았다가 생산품 등을 전시하는 향토관으로 탈바꿈했다. 광복 후 이경성이 인천박물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으나 6·25전쟁 당시 소실됐다.
‘미사일록’은 19세기 말 주미공사를 지낸 이범진(1852~1911)이 주미공사로서 활동한 내용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며, 공사관 서기생 이건호가 필사한 자료다. 이범진 공사의 부임 경로와 미국 측 인사 접견 내용, 미국 주요 기관과 문화시설 등을 답사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주미공사의 외교활동, 당시 영어 사용 용례 및 표기, 19세기 말 지식인으로서 서양국가에 대한 인식 수준 등 다양한 역사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상륙작전 당시 가장 먼저 상륙한 사적지임을 기념하기 위해 인천시장 김정렬이 시민의 뜻을 모아 세웠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이후 이 자리에 임시 헬리콥터 착륙장을 조성해 미군 포로 송환 장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북한에 포로로 잡혔던 미 24사단장 딘 소장이 송환되기도 했다. 그 후 목조 단층의 한국군인회관이 들어섰다가 철거된 후 맥아더 장군 동상이 그 자리에 설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천시 제공
일본 빅타축음기주식회사가 1935~1940년 유성기 음반을 찍기 위해 발매한 금속원반 587장으로 1992년 우리나라 ㈜서울음반(현 ㈜카카오엠)에 양도했다. 이 유물에는 전통음악, 대중음악 등 당대 공연예술 전반에 걸친 다양한 음악들이 수록돼 있으며 특히 빅타판 춘향전 전집은 판소리사의 불후의 명연으로 꼽히고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근대적 대중문화의 초기 발전과 성장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음원이란 측면에서 가치 있는 유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제공
만국공원은 1888년 11월9일에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러시아 토목기사 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외국인 거류민단에서 경영해 만국공원, 혹은 각국공원이라 불렀다. 공원 중앙 광장에는 맥아더장군 동상이 서 있고, 남쪽에는 1965년 6월1일 제1회 시민의날 시민헌장비와 다짐을 선포한 시민의 다짐비가 있다. 약 100m 전방 서북쪽 봉우리에는 1982년에 건립된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리는 기념탑이 서있다. 남쪽 언덕 기슭에는 석정루와 연오정이 있다. 인천시 제공
16세기 중기 복식 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복식과 장례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특히 ‘직금사자흉배 운문단 접음단 치마’는 조선전기 연금사(撚金絲)로 비단 바탕에 무늬를 짜 넣어 만든 사자흉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양반층 부녀들이 예복으로 착용한 ‘장삼(長衫)’ 역시 그동안 출토된 형태가 젖힌 깃인 데 반해 곧은 깃으로 제작한 여성용 습의로 희소성이 있다. 이외에도 치마의 앞부분을 접어 앞은 짧고 뒤는 길게 만든 ‘전단후장형 치마’는 허리말기 가까이에 잡았다는 점에서 치마의 새로운 제작법을 보여주는 자료다. 문화재청 제공
세창양행은 독일인 마이어가 지난 1884년 제물포에 설립한 상사다. 독일 함부르크에 본사를 두고 동아시아 무역사업에 적극 참여했다. 초기에는 바늘, 염료, 면포 등 생활용품을 수입 판매하다가 점차 쇠, 강철, 약품, 기계, 무기 등의 중개 무역으로 큰 수익을 올렸다. 이 회사의 판매 품목 중 특히 옷을 꿰매는 바늘은 그 강도가 뛰어나 유명했고, 의약품 중 학질 치료약으로 알려진 금계랍 역시 상비약으로 이름을 알렸다. 세창양행은 동양 3국을 상대로는 영문 상호 대신 한자 상호를 사용했다. 1907년에는 이 회사 직원이었던 칼 월터가 단독으로 맡아 칼 월터 양행으로 개칭하기도 했다. 세창양행은 1896년 덕상세창양행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 광고를 낸 상점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인천시 제공
안성천과 잇닿은 나지막한 구릉지에 지형을 따라 축조된 산성이다. 구조와 출토유물로 볼 때 4~6세기에 백제가 축조했고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고구려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활용한 목책성이 경기 남부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됨에 따라 진천 대모산성, 세종 부강 남성골산성 등 기존의 고구려 관련 유적과 연계해 한강 이남 지역에서의 고구려 영역확장과 남진 경로를 살펴 볼 수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또 목책 구조가 잘 남아 있는 드문 사례로 삼국시대 책(柵)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어 고대 성곽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다. 문화재청 제공
이 가옥은 우리나라 서양화가 1세대로 근현대 화단에 큰 발자취를 남긴 장욱진 화백(1917~1990)이 1986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한 곳이다. 한옥은 안채와 사랑채, 광으로 구성돼 경기도 전통적인 민가의 튼 ‘ㅁ’ 모양이며, 장욱진 화백이 직접 수리해 작업실과 거주 공간으로 사용했다. 문화재청 제공
일본인 해운업자 호리 리키다로가 1887년 착공해 188년에 완공한 벽돌 3층의 양관이었다. 1902년 서울 중구 정동에 들어선 손탁호텔보다 14년이나 앞선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다. 호텔이 생겨난 이유는 개항 이후 제물포에 들어오는 외교관, 선교사, 여행가, 사업가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숙박 문제가 크게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아직 철도가 부설되기 전이어서 제물포에 입항한 이들이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전 하룻밤을 묵거나, 또 출국하는 경우 배편 스케줄에 따라 불가피하게 숙박해야 하는 점 등으로 인해 호텔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1899년 경인철도 개통, 이어 1904년 경부선 개통, 1906년 경의선 개통 등으로 숙박 손님이 줄어들면서 경영이 어려워지자 1918년 청국인에게 매각해 북경식 요리 전문점으로 변신했다. 이는 1970년대 초반 무렵 폐업한 뒤 1978년에는 건물마저 철거되었다. 근래 2018년 3월에는 대불호텔 전시관으로 개관했다. 인천시 제공
안성향교 대성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7세기 중엽에 재건된 이후 현재까지 여러 차례 수리가 이뤄졌으나 건축의 형태와 구조, 의장 등 전반에 걸쳐 건립 당시의 고식기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또 지붕 가구의 삼중량 구성은 구부러진 대들보와 반듯한 직선의 중량, 종량들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시각효과는 17세기 전반에 자연 곡선의 목재를 사용하는 시대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1885년 9월 본원사 부산별원 인천지원으로 인천에서 개교를 시작했다. 1891년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인천 거류민 2세 교육 사업도 펼쳤다. 교세 확장에 따라 1894년 관동에 200평 정도의 땅을 마련해 가본당을 짓고 점차 거류민들의 장례식, 군 묘지와 일반인들의 묘지 관리를 맡았다. 1899년 인천지원에서 인천별원으로 승격, 1900년 3천평 대지 안에 절을 지으면서 본격적인 사찰로 출발했다. 현재 답동 로열맨션이 들어선 자리다. 인천시 제공
석왕사 소장의 ‘불조삼경’은 원나라 판본을 저본으로 1361년(공민왕 10년) 전주의 원암사(圓嵓寺)에서 번각한 목판본이다. 권말에 간기(刊記)와 유판처(留板處) 기록이 있어 비구 행심(行心)이 발원하고 법공(法空)이 간행의 책임을 맡아 윤선(尹善) 등의 도움으로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