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탄핵정국 이후가 더 문제다

요즘 같아선 처참하게 무너지는 대한민국을 보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법치가 사정없이 길바닥에 내팽겨지고 있다. 국가 기관은 물론이고 국민도 편이 갈려 파국을 위해 싸우는 적들 같아 보인다. 언론의 이간질도 극에 달했다. 층간소음문제 같은 사소한 시비로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탄핵이 인용되던, 기각이 되던 그것은 혼란의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 대재앙의 시작일지 모른다. 저마다 정의를 외치는 세력들은 주말마다 거리에 쏟아져 나온다. 이런 상황에 헌재의 결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회갈등을 해소하고 합의를 찾아내야 할 국회마저도 이 싸움에 합류한 상황이니 무엇을 더 기대하겠는가. 누가 정권을 잡든 간에 이 전쟁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통합? 머리를 처박고 죽일 듯이 싸우던 사람들이 통합을 한다고? 개가 웃을 일이다.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자들 또한 어떻게 하던 이 싸움을 이용해 보겠다는 속셈만 그득하니 이 또한 파국의 징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국민 세금으로 일자리를 몇백 만개 늘려주겠다거나, 아예 돈을 나눠주겠다거나, 나라가 풍전등화인데 안보를 가지고 흥정하며 저마다 가라앉는 배를 살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이다. 우리 속사정이 이렇다고 바깥세상이 우리를 기다려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은 기술이 아니라 문명의 혁명이다. 인간과 기계의 공존이냐 파국이냐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앞으로 경제발전으로 인한 일자리는 사람이 아닌 기계 몫이다. 설사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도 그것은 New Skill(새로운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의 교육과 산업으로 미래가 있겠는가. 불과 15년 내지 20년밖에 남지 않았다. 기존 경제학이 상수로 취급하던 에너지와 환경 그리고 기술을 고려하지 않은 낡은 통치철학은 의미가 없다. 철로를 달리는 게 아니라 길 없는 덤불 속을 헤치고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획기적인 변화 없이 난국을 타개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낙담만 하고 있을 순 없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오로지 가라앉는 배일지라도 선장이 되기만 하면 된다는 탐욕으로 가득한 자들에게 이 중차대한 상황을 내팽개치듯 맡겨서는 우리의 미래가 없다. 우리 민족이 위대한 것은 탐관오리들이 득세하고 기득권층의 탐욕이 극에 달했을 때 예외 없이 백성이 들고 일어나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해 왔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삶을 최적화하라는 ‘홍익인간’ 정신을 뼛속 깊이 새긴 한민족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지 모른다. 이제 다시 조용히 지켜보던 모든 국민이 들고 일어나 이 난국을 헤쳐나가야 한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내가 아닌 인간사회를 이롭게 하며 최적화하는 데 역행하는 세력을 모두 쳐 내야 한다. 한쪽을 이롭게 하기 위해 다른 한쪽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 빈곤한 철학을 가진 지도자를 과감하게 몰아내야 한다. 우리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흔들림 없이 지켜낼 때 이 혼란을 잠재우고,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늘 그러했듯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하나님의 아들딸인 한민족이기 때문이다. 전하진 썬빌리지포럼 의장

[아침을 열면서] 정의와 ‘정의믿음’의 차이

지난 10월부터 시작된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인한 사회 혼란이 해가 바뀌어도 가라앉을 줄 모른다. 아니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은 점점 더 심해졌고 급기야는 ‘촛불’과 ‘태극기’라는 민심의 대립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서 굳이 어느 진영이 더 정당성을 지니고 있는지, 누가 더 옳은지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촛불집회든 태극기집회든 참가자 각자는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본인들만이 더 정의롭다는 확고한 믿음, 즉 ‘정의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정의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의(正義)는 진리에 맞는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이며 동시에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를 의미한다. 이처럼 정의는 사회구성원 간의 관계성, 즉 사회성을 지닌다. 더구나 사회정의라는 개념에서는 정의의 사회성이 더욱 강조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촛불과 태극기처럼 본인들만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정의믿음’은 정의와는 완전히 다르다. (고슴도치)정의론의 저자 로널드 드워킨은 도덕적 판단의 독립성과 가치들의 해석적 특징 그리고 가치들의 통합성을 통해 사회정의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 진리란 해석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공통으로 지닌 사회적 실천 속에서 형성된다. 즉 자유나 평등 등의 가치(도덕적 판단)는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사회적으로 해석되어 타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자기존중과 진정성(자유)과 더불어 타인에 대한 동등한 배려와 인정(평등)이 존재할 때 가치들의 통합성이 만들어진다. 이때 사회정의가 가능한 것이다. 그럼 드워킨의 정의론에 입각해서 촛불과 태극기를 들여다보자! 과연 두 집회 참가자들은 서로 상대 집회 참가자들을 얼마나 인정하고, 배려하고 있는가? 그들이 주장하는 사회정의는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 그것은 단지 나만의 확고한 ‘정의믿음’에서 출발된 정의를 빙자한 독선이다! 상대편도 우리 사회발전을 위한 진정성에서 출발했을 것이라는 상호 배려와 인정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사회갈등은 야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 없이 나만이 옳고 나의 주장만이 정당하다는 자기존중에 대한 집착에서 집단 간의 대립과 사회적 갈등이 야기된다. 촛불이든 태극기든지 자신만이 정의롭다는 ‘정의믿음’이 우리 사회를 갈등과 분열로 몰아간다. 안타깝다! 지난해 본지에 게재한 칼럼 ‘시대정신의 사회성과 개인성’에서 필자는 우리 사회에 절실한 시대정신으로 사회통합을 위한 가치의 회복을 꼽았다. 사회통합을 위해 가장 필요한 요소 중 하나는 타자에 대한 인정과 배려이다. 이를 통해 상호 간의 신뢰와 존중이 형성되고 이런 과정에서 사회정의 역시 구현될 수 있다. 드워킨의 주장처럼 사회정의는 나의 가치와 너의 가치 그리고 그를 연결해주는 가치의 통합성에서 구현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촛불과 태극기처럼 자기만의 ‘정의믿음’에서 나오는 가짜정의(fake justice)에서 벗어날 수 있길 바란다. 최순종 경기대학교 교수

[아침을 열면서] 사드에 가려진 ‘중국 우선주의’

한반도 사드 배치 결정 이후 계속되고 있는 중국의 한류에 대한 보복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이와 같은 중국의 반(反)한류 현상은 처음이 아니다. 1990년대 중후반 시작한 중국 내 한류 열풍은 2000년대 중반 한국 아이돌 그룹이 중국의 새로운 문화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한국 TV드라마가 중국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중국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맹목적인 한류에 대한 경계와 자성을 촉구하고, 젊은 네티즌들이 한국문화에 대해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중국 정부는 한류가 자국의 문화를 침해한다는 경계심으로 법제적 규제를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당시 반한류 기류에 대해 중국은 한류에 대항 또는 저항한다는 의미로 ‘항한류(抗韓流)’라고 호칭했다. 한류에 의해 잠식당한 자국의 문화 영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류를 배척하겠다는 의도였다. 그 후 일시적으로 한류 인기가 정체 또는 하락세를 보이는 듯했지만, 인터넷과 스마트폰 인구의 급증으로 K팝과 방송영상물이 급속도로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다시 점화됐다. 특히 2010년대 중반부터 가열된 신(新)한류 열풍은 대중문화 콘텐츠 수출의 증가를 견인하는 직접적 효과뿐만 아니라 한국과 관련된 다양한 상품 및 서비스로의 소비 확대, 한국에 대한 투자 수요 유발 등과 같은 긍정적 외부효과도 가져왔다. 최근 반한류 문제의 본질은 사드가 아니다. 중국이 ‘한류를 제한한다’는 의미로 지칭하는 ‘한한령(限令)’ 현상은 한류 열풍이 중국 전역에서 다시 가열되고 다양한 영역에서 자국 시장의 잠식하고 있음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면서 나타난 것이다. 사드는 단지 핑계거리일 뿐이다. 중국은 그동안 한국 상품이 중국에서 인기를 끌면 어떻게든 밀어내려고 했다. 사드 이슈 밑바닥에 도사린 중국의 자국 산업 보호 및 경쟁력 강화에 대한 집착을 보지 못한다면 문제의 근원을 오판할 수 있다. 중국에서 한류는 중국의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며 경쟁력을 강화하는 선에 머물러야 한다. 지금까지 중국은 그 선을 넘어 자국 시장을 심하게 침식한다는 판단이 서면 가차 없이 제재 조치를 취했다. 최근 다보스포럼 기조연설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의 자유주의 체제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며,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보호주의 노선을 겨냥하여 중국이 미국의 빈자리를 메우며 국제 무역질서를 이끌고 가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천의지가 결여된 수사(rhetoric)에 불과하다. 단지 국제질서를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겠다는 의욕의 표현일 뿐이다.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전형이며, 대국(大國) 답지 않은 태도이다. 그렇다고 비난하거나 푸념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중국은 원래 그런 나라이다. 사드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중국의 자국 우선주의에 대한 집착이 사라질 리 없다. 언제라도 또 다른 사드가 이슈로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중국 우선주의(China First)’도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못지않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절실하다. 윤경우 국민대학교 대외협력부총장

[아침을 열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다짐

정유년(丁酉年) 닭의 해가 밝았다. 많은 이들이 새해를 맞이하여 여러 가지 새로운 계획들을 세웠을 것이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이러한 계획들이 생각처럼 잘 달성되는 해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목표가 너무 거창했던 것도 아니고, 많은 시간이나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보면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내 삶의 현재 방식을 바꾸기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겠구나 하는 생각은 든다. 그런데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계획들이 크게 재미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몰입’의 저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사람이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한다. 하나는 적당히 어려운 목표이고 다른 하나는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만약, 자신의 능력에 비해 목표가 너무 어렵다면 그 목표는 영원히 달성할 수가 없어 흥미를 가질 수 없다. 반대로 능력에 비해 목표가 너무 쉽다면 큰 흥미를 얻기 어렵다. 적당히 어려운 그러나 내가 열심히 노력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사람들을 몰입으로 이끈다. 문제는 자신의 주변에서 이른바 ‘적당히 어려운 목표’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 목표를 세워본 적도 달성해본 적도 충분히 많지 않다. 항상 목표는 정해져 있었고, 그 목표는 달성하기에 너무 어려웠다. 성취의 기쁨보다는 패배의 아픔을 끌어안아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어찌 내 스스로 목표를 발굴하고 달성하는 기쁨과 재미를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점을 좀 달리해서 달성가능성에 주안점을 두면 어떨까. 즉, 너무 난해하지 않은 그래서 상대적으로 달성하기 용이한 목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일들부터 목표로 정하고 달성해 보자는 것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가능한 여러 목표를 달성하다보면 성취가 주는 기쁨을 충분히 느끼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보다 난해한 목표를 찾고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고민과 성취, 패배와 아픔의 과정을 거쳐서 성숙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삶의 과정에서의 고민과 성취가 성숙한 나를 만드는 것이다. 아직은 잘 알 수 없지만 고민해야 할 목표는 생각보다 다양하고 많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는 역사상 그 어떤 시기보다도 평화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예측 불가능한 길을 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그때 가서야 깨닫게 될 텐데 그렇다고 과거로 회귀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제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가 하는 다짐은 단기적인 개인의 안녕 추구가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생존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다. 다가올 미래에 탄력적으로 대비할 수 있도록 불확실성과 변화를 포용하고 도전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패의 쓴맛과 미래에 다가올 성취의 즐거움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다. 정남호 경희대학교 호텔관광대학 교수

[아침을 열면서] ‘오바마의 퇴임’서 꼭 배워야 할 것들

미국의 새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자강주의’를 내세우며 미국 중심의 새 시대를 예고했다. 하지만 필자에겐 트럼프의 그것보다 떠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이 더 가슴에 남는다. 오바마는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시카고의 고별 연설에서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를 외치며 감동의 메시지를 남겼다. 퇴임 무렵 오바마의 지지율은 60%대. 정권 말기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는 레임덕마저 그를 비켜나갔다. 재임기간 내내 공정하고 투명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한 결과다. 우리나라 현실과는 너무나 비교되는 것이어서 만감이 교차한다. 지지율 바닥인 탄핵 대상 대통령을 둔 우리네 입장에선 멀고 먼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솔직히 표현하자면 부럽다 못해 화가 나고 슬프다. 왜 우리 지도자들은 감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일까. 언제쯤이면 우리도 대통령의 평화로운 퇴임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까. 임기도 제대로 채우지도 못하고 쫓겨날 대통령을 바라보면서 다른 나라의 경우처럼 멋지고 감동적인 퇴임을 그리는 것은 너무 과한 기대인지도 모르겠다. 미국 대통령들은 퇴임에도 국민들에게 변함없이 존경받는 경우가 많다. 오바마와 함께 현재 생존해 있는 전직 미국 대통령은 지미 카터, 조지 부시, 빌 클린턴, 조지 부시 2세 등 모두 5명이다. 그런데 이들 모두 국민들의 존경 속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지미 카터는 재임 때보다 퇴임 후 더 두각을 나타냈다. 인권ㆍ평화 전도사로 불리며 노벨상을 수상, ‘반전 지도자’로 세계 분쟁지역을 누비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오바마와 클린턴에게 존경받는 정치권의 대부로 불리며 인기가 높다. 아들 부시 대통령은 추리닝 복장에 비닐봉지를 든 ‘동네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 퇴임 후 처음으로 카메라에 포착해 화제였으며, 변함없이 존경받고 있다. 클린턴 역시 재단을 설립해 공익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특히 에이즈 퇴치 운동을 비롯해 아프리카 발전, 재난현장의 구호 등 왕성한 활동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선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우리의 퇴임 대통령들은 불행한 일을 겪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재임 시 비리가 불거져 고초를 겪거나 국민적 지탄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생존하는 대통령 중 국민적 존경을 받는 이는 없다. 존경은커녕 퇴임 후 자신의 안전에 대비책을 강구해야 할 처지로 지낸다. 대통령 탄핵 정국으로 조기 대선이 전망되면서 대선국면으로 성큼 다가선 분위기다. ‘대한민국 새 정치를 위해 한 몸 불사르겠다’는 식의 추상적이고 모호한 각오를 내세우는 대선후보를 국민들은 어떻게 볼까.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겠다’는 등의 알맹이 없는 주장과 정치공학적인 세몰이에만 치중하는 모습은 또 어떻게 보일까. 국민들은 ‘한 번 속지 두 번 속지 않는다’는 마음은 아닐까. 퇴임 후에도 변함없이 높은 지지율 속에서 소박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며 국민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 김정순 신구대 미디어콘텐츠과 겸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4차 산업혁명은 종말의 시작인가

얼마 전 라스베이가스에서는 세계 최대 전자 쇼인 CES가 열렸다. 원래 가전 쇼였는데 이제는 컴퓨터는 물론이고 자동차도 전시되는 쇼가 되었다. 진화는 원래 복잡해지고 고도화되며, 종류는 단순해지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마련인데, 첨단 기술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가전제품과 컴퓨터 그리고 자동차 등이 융합되고 거대한 플랫폼으로 단순화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각종 기기들은 인터넷에 연결되고 인공지능으로 무장하고 마치 사람처럼 소통하려고 한다. 이번 출장 길에 꼭 타보고 싶었던 전기자동차인 테슬라의 모델S를 시승할 기회가 있었다. 성능은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다. 시승 중에 자율주행이 가능한 지 물었더니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기다리고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자동차의 기능을 소프트웨어 다운로드로 구현하다니 전기차를 ‘바퀴달린 컴퓨터’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냉장고나 TV, 집안의 전등이나 커튼 같은 것도 인터넷과 연결되고 알렉사(Alexa)와 같은 음성인식 플랫폼을 통해 한 두가지 일밖에 못하던 머슴에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머슴이 되어간다. 스마트폰에 수많은 앱이 내재화된 것처럼 이제 가전제품도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다. 걱정스러운 점은 이 머슴들의 지적, 육체적 그리고 감각적인 능력이 우리 주인들보다 월등하게 우수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주인이 머슴을 부리는 건지 아니면 머슴이 주인을 통제하게 되는 건지 분간하기 힘든 상황이 아주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공포스러운 일이다. 이런 머슴들의 괄목할만한 진화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들이 우리의 지적수준을 뛰어넘는 판단을 하고, 몇 십 배의 힘을 자랑하며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 갈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그들에 의해 쓸모없는 퇴물이 되어 지구 상에서 사라진 수많은 종처럼 퇴출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우마차 다루듯 자동차를 다룰 수는 없다. 열심히 공부하고, 많은 돈을 벌어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지금의 성공방정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교육으로는 로봇과 일자리를 놓고 싸워야 한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또한 이렇게 많은 로봇의 도움을 받으면 받을수록 게으르고 무기력하며 의존적이 되어 결국 영혼마저 빼앗긴 좀비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을 바라만 볼 수 없다. 기계 머슴보다 영적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 태어나야만 한다. 따라서 교육부터 사회시스템까지 로봇이 아닌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완전히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철학과 인성으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자존적 인간이 될 때 기계 머슴과 차별화될 수 있을 것이다. 로봇이 정치를 하고, 진료를 하고, 변론을 하고, 물건을 만드는 것이 바로 코앞에 다가 왔다. 그때는 너나 할 것 없이 싸잡아 밀려날 것이 뻔하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침몰하는 배 안에서 일등석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짓을 하고 있는 정치권을 비롯한 우리의 모습이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 전하진 썬빌리지포럼의장·前 한글과컴퓨터 대표

[아침을 열면서] 왜 탈진실사회(post-truth society)로 가는가?

새해가 되면 세상이 맑고 밝아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2017년 시작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지난해의 혼돈이 정리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새해로 넘어왔기 때문이리라. 새해 언론의 보도 역시 희망찬 언급은 잠깐이고 지난해에 지겹게(?) 다루었던 내용으로 바로 이어진다. 혼란스럽다! 무엇이 진실인가? 정보가 넘친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다. 정보는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객관적 정보를 토대로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에 대한 다중(多衆)의 의견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여론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론도 객관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형성되고 있는가?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옥스퍼드사전이 2016년 단어로 선정한 ‘post-truth’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post-truth’, 즉 ‘탈(脫)진실’은 ‘여론이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생각이나 판단에 의해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탈진실 사회에서는 정보의 객관성과 책임성은 사라졌고 ‘~라 카더라’가 여론을 만든다. 그 예로 영국의 EU이탈, 미국 대통령선거, 아니 멀리서 찾을 필요 없이 ‘최순실국정농단’등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객관적 정보가 아닌, 검증되지 않은 사실과 주관적 판단이 여론형성의 주요인이 되는 것일까? 왜 진실보다 탈진실이 여론형성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가? 첫째, 정치적 포퓰리즘 때문이다. 사안의 사실성이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보다는 당파적 또는 개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과 선동, 조작과 기만을 일삼는 포퓰리즘이 탈진실사회를 부추긴다. 둘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의 가벼움 때문이다. 다양한 정보를 신속하게 공유하고 확산시키는 SNS는 사실 여부에 대해 묻지 않는다. 아니 묻는 것 자체가 이미 촌스러움이다. SNS상에서 사실여부의 확인은 진부한 것이고 단순명료함만이 소통된다. 진지함 대신 가벼움이 차지한 SNS공간이 우리를 탈진실 사회로 이끈다. 셋째, 그동안 (올바른)여론 형성에 기여했던 언론이 요즘은 유감스럽게도 탈진실 사회를 부추기는 요소가 되고 있다. 언론은 객관적인 정보(기사)와 사안에 대한 가치판단(논평)기준을 제공한다. 그만큼 언론의 사회적 책임은 크고 또한 그래서 우리는 언론을 신뢰한다. 그럼 현대사회 언론은 이러한 책임성과 신뢰성을 지니고 있는가? 종편 등 다양한 채널의 등장으로 생존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일부 언론은 거의 뉴스(fact)를 드라마(fiction)처럼 보도한다. 시청자는 허구(fiction)를 사실(fact)이라고 믿는다. 여기서 탈진실이 만들어진다.정치·SNS·언론! 당연히 사회 발전을 위해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이들은 지난 몇 달 동안 가뜩이나 혼란스런 우리를 더 큰 혼돈으로 빠뜨렸다. 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탈진실사회로 가는 것을 막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이자 사회적 책임이다. 새해 소망을 빌어본다. 새해에는 우리사회가 탈진실사회를 벗어나 사실과 진실이 통하는 신뢰사회가 되게 하소서! 최순종 경기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수

[아침을 열면서] 강대국 눈치 보지 말고,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이 20일 앞으로 다가옴에 따라 세계는 미국의 외교정책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트럼프가 이끌 미국의 외교정책 방향은 그가 대선과정에서 내세운 공약과 사업가로서 보였던 과거 행태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가 강조한 공약은 크게 볼 때 하나다. ‘미국 우선주의’다. 어떤 경우든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시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목표는 ‘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 우선주의는 고립주의와 보호무역주의 정책으로 나타날 것이다. 일각에서는 대선 기간 공약이 그대로 정책에 반영될 가능성이 낮고, 설사 반영되더라도 실행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미국 우선주의를 외친 트럼프를 유권자들이 지지하고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한 상황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트럼프의 미국이 앞으로 고립주의와 보호무역주의의 고삐를 강화할 것은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기존의 국제질서에 변화가 있을 것이다. 최근 트럼프는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간주하는 ‘하나의 중국’ 정책마저 폐기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무역정책 등과 연계하여 중국을 압박하는 협상카드로 활용하겠다는 뜻을 비친 것이다. 거래에 능통하고 현실감각이 뛰어난 사업가 출신의 트럼프가 앞으로 있을 협상을 대비하여 중국보다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려는 포석이다. 최근 트럼프는 친(親)러시아 행보를 하고 있다. 아직은 판단하기 이르지만, 1970년대 미국이 중국을 국제무대로 끌어내 소련과 경쟁하도록 했던 것처럼 러시아를 중국 견제에 활용할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 트럼프가 적어도 중국의 부상을 관리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 상황에서 가장 난처하고 어려운 형국에 빠질 국가는 한국이다.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어떤 이념이나 가치보다도 미국의 이익을 우선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미국의 이익을 위한 거래에 활용할 카드로 여기고 있는 그에게는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FTA, 북핵 등도 손익계산의 대상이다. 그에 대응하는 한국도 협상과 거래의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는 앞으로 달라진 미국을 상대해야 한다. 이제 동북아와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의 역할이다. 미국과 중국이 동북아에서 협력의 질서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한국이 능동적으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한반도 문제만큼은 당사자인 우리가 주도권을 잡고, 자주적 외교·안보의 폭을 넓혀 나가야 한다. 국제적인 협상에서 어떤 국가든 상대국보다 우월한 지위에서 협상할 수 있는 조건을 선호한다. 강대국들의 눈치만 보며 수동적으로 끌려가면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순 없다. 한·미 동맹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제 한국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주도적으로 입장을 정리하고, 선제적으로 담론과 기류를 주도하면서 협상력을 높일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2017년 한국의 숙제는 역동적으로 변화할 국제무대에서 협상력을 키우는 것이다. 윤경우 국민대학교 대외협력부총장

[아침을 열면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이들에게

매년 맞이하는 새해지만 어떤 새해를 맞이할지는 12월경에 결정된다. 특히 대학과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되는 학생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어떤 친구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학,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게 되어 한없이 즐거운 새해를 보내는 반면 어떤 친구들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좌절감에 시달릴 것이다. 그런데 내 경험에 비추어 보건데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는지 여부와 원하는 직장을 얻었는지 여부는 향후 펼쳐질 이들의 삶의 행복에 대해 반드시 일관성 있는 인과관계를 제공하지 않는다. 다들 잘 알고 있는 이솝우화 ‘토끼와 거북이’는 사실 우리들에게 한번 쯤 생각해볼 만한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나는 우리 학생들에게 거북이가 갖고 있는 ‘좌절극복 능력’에 주목해보라고 하고 싶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거북이는 토끼와의 말도 안 되는 경주에서 얼마나 좌절감을 느꼈을까?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제 갈 길을 감으로써 토끼가 경주 중에 잠시 쉬다가 잠들어 버리는 대운을 맞이하기도 하지 않는가.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토끼들이 있고 하필 이 토끼들은 가다가 쉬거나 졸지도 않는다. 이들은 달성해야 할 목표를 너무도 빨리 그것도 너무 쉽게 달성해 버리고는 아무것도 아닌 듯이 담담해 한다. 거북이가 해야 할 일은 토끼를 부러워하고 따라하려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자기의 방식대로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다. 괜히 토끼를 따라하다가는 자신이 거북이인 것이 너무나 비참하고 한탄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비록 거북이의 성취는 토끼만큼 크고 멋지지는 않을 수 있으나 성취의 과정에서 더 큰 만족과 행복을 느낄 것이다. 이렇게 기대한다면 거북이가 갖고 있는 태생적 능력의 한계가 남의 일 같지 않기 때문일까?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현재 자신의 상태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현재 잘 안된 것 같이 보이는 일이 시간이 지나면 정말 탁월한 선택일 수도 있다.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대학, 회사의 안락함에 너무 안주할 필요도 없고 너무 실망할 필요도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삶의 경주를 어떻게 채워나갈 것이냐 하는 것이다. 우리 삶은 카레이싱이 아닌 관계로 좋은 자동차를 타고 최종 목적지에 빨리 도착해야만 우승하는 것이 아니다. 슬슬 걸어서 주변을 살펴보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늦게 목적지에 도착해도 괜찮다. 오히려 그 사이에 더 좋은 분들을 만나고 삶의 지혜가 쌓일 수도 있다. 나도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여행을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발표를 하곤 했다. 그런데 “좀 돌아가더라도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주변도 쉬엄쉬엄 둘러보면서 깨닫는 것, 그게 여행 아닌가요?” 하던 어떤 교수님의 말씀에 여행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 경험이 있다. 대학이라는 곳에 있으면서 수많은 학생들을 만나고 또 떠나보낸다. 이들이 열정을 잃지 말고 자신만의 꿈과 행복을 찾는 자신만의 삶의 여행을 떠났으면 좋겠다. 먼저 삶의 여행을 떠난 선배 거북이들 중 하나가 큰 박수로 새로운 시작을 하는 이들의 앞날을 축복하고 싶다. 정남호 경희대학교 호텔관광대학 교수

[아침을 열면서] ‘도덕적 촛불’ 유치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다

올 한 해가 우울하게 저물어 간다. 대통령과 그 일당의 일탈 행각이 낱낱이 드러나면서 한숨과 탄식이 그칠 줄 모른다. 대한민국 최고지도자와 시정잡배들의 엽기 행각에 국민들은 기가 막힐 뿐이다. 대통령, 정치인, 공무원 등 지금의 위정자들은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낙담으로 정유년 새해를 맞을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최근 여덟 차례에 걸친 거대한 국민 촛불집회를 보면서 희망을 끈을 다시 부여잡는다. 민주주의를 망가뜨린 위정자들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권력욕을 지독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국민들은 이 땅이 민주주의 국가이며 평화와 자유의 터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또 도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정치가 망친 자리를 촛불로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촛불집회를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한다. 해외언론들이 그렇게 극찬하고 있는 비폭력 촛불집회의 모습 속에서 특별한 우리의 저력을 다시금 배운다. 군중이 모인 시위 현장은 폭력끼리 부딪히기 십상이다. 세계 어느 곳이나 비슷한 양상이어서 우리나라가 연출하고 있는 수백만 촛불집회 현장은 전에 없던 기적적인 현상이라는 평가까지 받는다. 과거엔 우리의 시위도 꽤나 폭력적이었지만 최근엔 확 달라졌다. 왜일까. 대통령과 그 일당의 국정농단이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기에, 또 이를 비호하는 위정자들의 모습이 너무나 철딱서니 없어 보이는 탓에 국민들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 도리인 ‘도덕’과 ‘질서’ 그리고 ‘양심’을 담은 사상 초유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귀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 수준이 낮은 사회에선 피해를 입는 이들이 많다.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들은 자신의 이득 이외에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도덕 수준이 낮은 사람의 언행을 두고 흔히 ‘유치하다’고도 한다. 아직 덜 자랐다, 철이 덜 들었다는 의미가 곁들여져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만으로 대통령과 사사로운 그 일당의 도덕성은 지극히 낮은 수준이다. 이들의 유치한 행각으로 너무 많은 국민이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기업들도, 공무원들도 불필요하게 혼쭐이 났다. 학생들도 학부모들도 상처를 크게 입었다. 사람은 살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배움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은 ‘도덕’이다. 학식이 아무리 출중하고 지식이 풍부하다 하더라도 도덕이 전제되지 않으면 오히려 독이 된다. ‘우리나라가 선진국 문턱에 있다’는 얘기를 예전부터 많이 들어왔다.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서 정치권과 다르게 국민들이 보여준 자세를 보면 오히려 정말 선진국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촛불로 승화된 국민들의 도덕성과 양심과 용기를 보았다. 이제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국민들에게 이런 점을 배우고, 따르고 받들고 섬겨야 한다. 위정자들에게 도덕의 가치를 가르치는 수준 높은 국민들이 ‘유치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있다. 김정순 신구대 미디어콘텐츠과 겸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알파고 시대 정치를 만들어야

요즘 언론은 온통 최순실 게이트뿐이다. 국민들은 분노와 집단적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아마도 박근혜 정부는 5년 임기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마무리될 것 같다. 아주 건조한 시각으로 이 사태를 바라보면 과거 산업화 정신으로 무장된 정부, 국회, 언론 등이 빠르게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대통령에 대한 분노 수위가 높아질수록 국회에 대한 분노도 증가하고 있고, 마녀사냥식 보도를 일삼는 언론이나 시위를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까지도 싸잡아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국민의 요구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틀을 짜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사회는 단기간에 산업화, 정보화, 지능화를 추구하는 상황에서 각각의 시대정신이 혼재되어 있는 복잡한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도 정치권과 정부는 산업화의 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언론이나 법조계, 교육계, 노조 그리고 재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제 그 수명이 다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낡은 구조로 알파고 시대를 헤쳐나갈 수 없다는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이 내려진 것이다. 인류는 산업화로 인해 근육을 대신하는 로봇을 그리고 정보화로 인해 감각기관을 대신하는 로봇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지능을 대신하는 로봇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인간 능력의 대부분을 로봇이 감당하게 되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나? 그것은 아마도 사랑, 영성, 의식 등 아직 로봇이 대신하지 못하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인간의 역할을 로봇에게 그리고 그 이외의 무언가를 인간이 맡아 로봇과 공존하는 세상을 창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코앞에 와 있는 알파고 시대인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이런 미래 세상을 리드하며 해결책을 제시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최소한 ‘2030년 대한민국 그리고 인류 미래를 그려낼 수 있는’ 지도자를 찾아야 한다. 눈앞에 자리를 위해 얕은수를 쓰는 지도자는 과감하게 배척해야 한다. 표를 얻으려고 사라지는 일자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거짓말을 하거나 힘들어지는 기업들로부터 세금을 많이 거둬 나눠주겠다는 포퓰리즘의 유혹도 뿌리쳐야 한다. 로봇과 싸워 승자가 되라고 가르치는 교육에 우리 아이들을 맡길 수도 없다. 눈앞에 이익을 위해 편파적 행동을 하는 언론이나 법조계, 국회 등도 냉정하게 개혁해야 한다. 집단지성이 이끄는 세상이다. 집단의 지성을 중시하는 피라미드 구조가 아닌 홀라키 구조를 이해하는 지도자를 찾아야 한다. 일자리를 빼앗기는 사람에게 희망을 제시하고, 사라진 일자리 대신에 인간이 추구해야 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지도자를 찾아야 한다. 기회가 왔다. 지혜를 모아 알파고 시대에 맞는 정부, 국회, 언론, 교육, 기업, 법조계 등 사회 전반을 정신부터 시스템까지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이 기회를 살리면 우리는 알파고 시대의 주역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우리 모두 함께 나서야 한다. 그것만이 이번 최순실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이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지혜로운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길이요. 우리 후세들에게 자랑스러운 선조가 되는 길이다. 전하진 썬빌리지포럼의장·前 한글과컴퓨터 대표

[아침을 열면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의 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보면 다양한 인간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렇듯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한 걱정과 보살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는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라는 글귀에 이르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한국인들은 무엇으로 살까? 적어도 내 생각에 한국인들은 ‘성공’하기 위해 사는 것 같다. 누구나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많은 돈을 벌고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사고 그리고 또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자신과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한다.그런데 대단히 불행하게도 이러한 삶은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성공하지 못한 실패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최근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혼란이 단지 몇몇 사람들의 전횡 때문에 그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확실한 것은 이 모든 일들이 이른바 일부 ‘성공’한 사람들의 지원과 방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업으로 많은 돈을 모으고, 많은 권한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그들의 권한과 누릴 수 있는 권력은 알았는지 몰라도 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한 것 같다. 모든 일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르고, 특히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에게 바라는 기대치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높다. 이들을 보면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염증과 이들에 대한 분노가 교차된다. 이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공정치 못하고 부당한 일, 정의롭지 못한 일에는 과감하게 ‘아니오’ 라고 할 수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정의롭지 못한 여러 순간에서 이들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는 아쉬운 대목으로 남는다. 특히 권한과 권력이 많은 사람들이 정의롭지 못한 의사결정과 행동을 하는 경우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들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이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에 대한 개념을 재정의해야 하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달성하기 어려운 ‘성공’이라는 신기루를 쫓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앞만 보고 달릴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똑같은 사람의 모습은 하나도 없듯이 성공의 모습도 그 내용도 모두 다를 수 있다. 좋은 대학을 들어가지 않아도, 좋은 직장에 들어가지 않아도, 많은 돈이 없어도 우리는 충분히 다른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행복은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중심을 갖고 온전히 내 삶을 살아갈 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혼란의 시기에 일부 성공한 사람들의 행동에 분노하고 한탄하기보다는 이럴 때일수록 나와 우리를 잘 건사할 필요가 있다. 지금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뜬다. 정남호 경희대학교 호텔관광대 교수

[아침을 열면서] 대통령이 배워야 할 발달장애인들의 ‘소통 지혜’

요즘은 솔직히 TV 켜기가 겁난다. 거의 모든 뉴스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국정농단’이라는 전무후무한 정치권 스캔들을 다루고 있는데, 방송을 보면서 느껴지는 분노와 참담함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통령 지지율 5%. 국정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정국의 주도권을 내려놓지 않겠다며 버티는 청와대를 보면서, 또 이를 옹호하는 여권 일부의 고집스러운 모습을 접하면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내가 이런 모습 보려고 투표했나’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또 이 판국에 성난 민심을 지렛대 삼아 권력을 쟁탈해보겠다는 속내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는 야권의 허술하기 짝이 없는 모습까지 뉴스를 채우고 있다. 하나같이 볼썽사납다. 정치인 특유의 구린 냄새를 역겨워하는 비위 약한 국민들은 당분간 뉴스 보기를 멀리할 것 같다. 대대적인 촛불집회가 벌써 4번째를 넘겼다. 성난 민심이 이처럼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지만 우리나라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마치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보이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일까. 이들은 ‘소통의 지혜’와는 담을 쌓고 사는 듯 보인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은 이 엄중한 명제를 다시금 새기고 또 새겨야 한다. 지금이 그런 때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국가 운영 책임을 맡고 있는 박 대통령은 주인인 국민의 목소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전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을 정작 대통령 자신만 모르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든다. 우울하고 답답한 보도에 지친 필자는 스스로 정보소외계층이 되기를 자처하면서 지겨운 뉴스를 피해보려고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하나를 접했다. 오로지 자신들의 영달만 생각하며 별별 만행을 저지른 그들의 ‘막장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자폐성장애를 지닌 아들과 엄마가 클라리넷 연주단을 꾸리며 겪게 되는 사연이었다. 연주단원 전원이 발달장애인들로 구성돼 있어 애로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정상적인 소통이 어려운 이들의 모임이라 짐작할 만 하다. 하지만 이 악단은 서로를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 안고 배려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단체는 사회적협동조합 인가를 받아 냈다. 그리고 구성원들은 연주자라는 직업인으로 보람 있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발달장애인들이 소통의 장애를 극복하면서 사회 곳곳에서 희망의 불씨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배워야 한다. 국민을 대표하고 이끌 지도자는 발달장애인들과 그 가족들이 어떻게 불통을 극복하고 있는지를 눈여겨봤으면 좋겠다. 필자는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정보격차 해소 실천과 이들의 미디어 이용 증진 활동을 벌이고 있는 터라 발달장애인들의 연주활동을 그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유독 더 깊은 감동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등장한 발달장애인들은 최소한 지금의 대통령보다 훨씬 뛰어난 소통의 지혜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김정순 신구대 미디어콘텐츠과 겸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사치와 가치의 충돌

상당한 규모의 기업을 일군 한 여성기업인이 최고급 호텔 헬스클럽에 다니면서도 다른 회원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서로 무관심한 듯해 어울리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구민회관 수영교실에 나가게 되면서,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매일 아침 수영교실에 나와 서로 먹을 것을 나누고, 수다를 떨고 행복한 표정으로 수영을 배우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 것이다.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일에만 몰두해 온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사치’의 사전적 의미는 ‘필요 이상의 돈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재산이 있다고 해서 자신의 ‘가치’에 보탬이 되지 않은 소비는 ‘사치’다. 즉 사치는 남을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인류는 산업화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해 왔다. 주변에 들어선 수많은 고층건물들, 도로들, 고속철 등 넘치는 물건들과 먹을거리, 이런 것들이 다 인류발전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언제부턴가 가치가 아니고 사치로 전락하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이에게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치를 조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사치에 투자하고 있다.분수라는 것은, 스스로가 가치로 인정할 만큼의 행위를 뜻한다. 행복하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의미있는 삶을 위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있는가? 매사를 ‘사치’와 ‘가치’로 구분하고 ‘사치’를 배제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여유를 되찾을 수 있을까. 사치는 남에게 부러움을 줄 수는 있어도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지는 못한다. 이제 사치를 조장하는 사업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반면에 새로운 미래를 위한 진정한 가치에 대한 투자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페이스북의 마크 주커버그가 주도하고 있는 internet.org는 전 세계에 아직 연결되지 않은 인류를 인터넷에 연결해 그들에게 문명을 제공하려고 노력 중이다. 이렇게 되면 2조달러 이상의 경제유발효과가 발생할 것이고, 1억6천만 명이 극빈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1억4천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연결된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며, 또 다른 경제가 창조될 것이다.미니멀리즘, 공유경제, 검약적 혁신(frugal innovation) 등이 확산되는 것도 바로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다. 모든 인류가 새로운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일, 지속 가능한 인류 미래를 위한 특이점에 대한 도전 같은 일이 바로 4차 산업혁명 이후 우리 인류의 도전과제가 되리라 생각한다.인도에서 팔리고 있다는 5백만 원짜리 자동차, 5만 원짜리 스마트폰, 더러운 물 때문에 죽어가는 인류를 위한 새로운 식수공급방안, 발전소가 필요없는 신재생에너지, 인터넷을 활용한 새로운 교육시스템, 원격 의료시스템 등 진정한 인류가치에 투자하는 기업들은 그 시장을 계속 넓혀나가고 있다.이것이 바로 신성장 산업일지 모른다. 급격히 꺼져가는 경제침체를 극복하고 우리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해결책이 ‘사치가 아닌 가치를 추구하는 경제로의 전환’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전하진 썬빌리지포럼의장·前 한글과컴퓨터 대표

[아침을 열면서] 변화 수용에도 때가 있다

증명사진이 필요해서 사진관을 찾았다. 디지털 카메라도 있고 컬러 프린터도 있으니 집에서 촬영하면 저렴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증명사진은 왠지 사진관에서 찍어야만 할 것 같다.바로 출력된 사진을 받아들고 가만히 보니 익숙한 모습이기는 한데 어딘가 점점 더 중년아저씨가 되어가는 것 같아 약간은 서글프기도 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변할까’ 하는 생각도 잠깐 하게 된다. 그런데 나만 변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의 역할도 변하고 직장의 역할도 변하고 사회와 세계도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다. 또한 이를 둘러싼 규범과 제도도 변하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만큼 가족들과 식사하는 시간을 갖기 어렵고 직장이 나를 평생 돌봐주길 기대하기도 어렵다. 국내외 상황은 그 어떤 시기보다도 불확실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를 둘러싼 환경이 변하는 만큼 나는 잘 변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변화를 수용하려면 많은 노력이 드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변화가 두렵고 귀찮기만 하다. ‘현상유지 편향(status quo bias)’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현재 상황을 바꾸는 변화를 부담스러워 한다. 문제는 작금의 변화가 자신의 외부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본인도 변화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변화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게 아니라 그때는 맞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틀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니 변화는 틀림이 아니라 다름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우리에게 불편함을 강요한다. 정년을 보장받은 교수는 연구성과로부터 자유로운 시기가 있었지만 이제 대학은 정년 보장 후 재심사를 통하여 정년보장 받은 교수도 평가하는 체제를 도입하고 있다. 성과 연봉제를 도입하여 저성과자와 고성과자를 차별 대우하는 제도도 검토 중이다.10년전만 해도 대학에서 이런 제도를 도입한다고 했다면 엄청난 반발이 있었겠지만 학령인구의 감소와 대학의 역할에 대한 재정의는 이러한 제도를 기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고 있다. 조직 내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는 태도에 따라 갈등이 유발되고 있다. 변화를 수용하자는 측에서는 변화에 거부감을 보이는 측을 이해하기 어렵다. 앞으로 더 어려운 시기가 올 것이 눈앞에 뻔히 보이는데 답답하다. 변화를 거부하는 측에서는 변화를 수용하자는 측이 섭섭하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모습이 야속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맞고 틀림의 문제가 아니라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를 이끌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다. 한쪽의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양측이 같이 변화를 어떻게 수용할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그 어떤 시대보다도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변화의 수용에 대해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무엇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인지에 대해 충분한 논의와 검토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변화 수용에도 때가 있다. 정남호 경희대 호텔관광대학 교수

[아침을 열면서] 종편 시사프로그램의 ‘호들갑’ 피곤하다

최근 방송인 김제동씨의 발언이 방송에서 화제였다. 김 씨는 지난해 7월 한 방송에서 “방위병 근무시절 장성들이 모인 행사에서 사회를 보던 중 4성 장군의 배우자를 ‘아주머니’라고 불렀다가 13일간 영창에 갔다”고 말한 일화가 국감 도마 위에 오르면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 그는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면 답이 없다”며 군 명예를 실추시켰다면 책임을 지겠다고는 하는데 영창 관련 사실 여부를 명쾌하게 해명하지 않고 있어 모양새가 좋아 보이진 않다. 일각에서는 김 씨에 대해 책임 있는 방송인으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며 거짓이라면 시청자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 비난한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공감되는 부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지 혹은 개그맨일지라도 자신이 내뱉은 말이 문제가 되었을 경우, 그 진위 여부는 당사자 스스로 명료하게 밝혀야 한다. 더구나 웃자고 한 얘기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개그맨이 한 가벼운 얘기가 국회 국감에 거론될 만큼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안인지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영창 발언이 종합편성채널(이하 종편)의 시사프로그램에서 그토록 비중 있게 다뤄야 할 중요한 이슈였는지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실제로 지난 10월6일부터 4일 동안 JTBC를 제외한 종편 및 보도채널 5개사 시사 프로그램 총 67편 중 37편에서 ‘김제동 영창 논란’을 다뤘다고 한다. 이정도면 ‘종편이 김제동에 올인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최순실 게이트’ 등 굵직한 이슈가 넘쳐나는 시점에 언론의 공적 책무 기능을 제대로 수행했다고 보기 어렵다. 언제부터인지 종편 시사프로그램이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기는 고사하고 민원제기의 온상이 돼버렸다. 올 상반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시청자 심의 민원이 가장 많이 제기된 종편 프로그램 10개 모두 시사·보도 장르로 종편의 시사토크 프로그램 TV조선 ‘시사탱크’와 채널A ‘쾌도난마’이며, 채널별로 보면 TV조선 5개, 채널A 4개, MBN 1개 순이고, JTBC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민원내용을 보면 진보에 대한 비판이 너무 많다며 편향성에 대한 지적이 대부분이다. 시사토크 프로그램 정치 패널의 선동하는 듯한 발언이 반복적으로 다뤄지면 시청자들은 이를 중요한 이슈로 착각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정치 혐오에 빠지게 될 개연성도 있다.균형감 없이 편파적인 내용을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얼마 전 연예인 박유천 성폭행 사건에서 보여준 것처럼 선정성도 심각한 수준으로 보인다. 종편의 시사보도 문제점이 개선되지 않는 배경에는 자본 문제와 정치권력의 이해가 깔려있다는 것 쯤은 시청자들도 알고 있다. 그런 탓에 종편 시사보도의 진행자나 패널들이 보여주는 자극적 언사와 선동하는 듯한 모습은 시청자들을 더욱 불편하게 만든다.마치 대한민국에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이들이 보여주는 말의 가벼움은 시청자들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만든다. 김정순 신구대 미디어콘텐츠과 겸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대선 과정에서 드러난 미국의 민심

온갖 기행과 추문으로 숱하게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면서도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 후보로서 막판까지 건재하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트럼프의 견고한 지지층이 중년 이상의 백인 중산층 남성이다. 물론 백인 지식인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이 왜 나타나는 것일까? 트럼프가 제시하는 정책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미국 우선주의’다. 트럼프는 미국이 실속 없이 세계 도처에 너무 많이 개입하여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고 주장한다. 해외 개입을 자제하여 엉망이 된 경제를 살려 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 만들겠다고 공언한다. 이에 동조하는 미국의 민심이 트럼프 현상의 배경이다. 최근 방미 기간에 미국 지식인들을 만날 때마다 트럼프 현상은 화제가 됐다. 모두 트럼프에 대해서 우려를 표했지만, 누구를 지지하는지 물어보면 대부분 선뜻 대답을 못했다. 그들은 대통령으로서 자질이 부족한 트럼프를 지지하면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본심을 감추며 지지 의사를 숨기는 잠재적인 트럼프 지지층이 여론조사에서 제대로 포착되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10%이상의 차이가 벌어져야만 클린턴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한다.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한국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는 이미 발효 4년 된 한·미 FTA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갈 수준의 발언도 서슴없이 하고 있다. 그의 신고립주의 정책은 중국이 보다 과감하게 나설 여지를 주고,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과 조율하며 보조를 맞추기 어렵게 할 것이다. 그는 벌써부터 한국을 미군 주둔 비용 전액을 부담해야 하는 부국으로 꼽으며 미군을 철수하겠다며 위협하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트럼프가 한국을 무시하고 미군철수와 동시에 북한과 교섭해버리는 최악의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북한 남침의 동인이 된 ‘애치슨라인 선언’을 기억하고 있지만, ‘닉슨 독트린’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1969년 닉슨은 미국의 새로운 외교정책을 선언하며 아시아에서 더 이상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 후 미군은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남베트남은 패망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한국에서도 주한미군 3분의 1을 철수했다. 미국이 중국과 화해하고 수교함에 따라, 대만은 고립됐다. 동시에 북한도 고립되기 시작했고, 결국 체제유지를 위해 핵무기 개발의 길로 들어섰다. 이와 같이 미국의 정책 변화가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이 급변하게 된다면, 그 때 한국은 상황변화를 파악할 여유조차 없을지 모른다.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리가 없다는 희망적 사고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위험을 간과하게 만든다.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한다. 설사 트럼프가 도중에 낙마하거나 당선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트럼프 현상의 배경인 미국의 민심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클린턴이 당선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민심은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윤경우 국민대학교 대외협력부총장

[아침을 열면서] 일자리의 역설

2030년이면 현존하는 일자리 중 20억개 정도가 사라진다고 한다. 베이비붐 세대는 펄펄한 신체를 가지고도 정년퇴직을 해야 하고, 젊은이들에게는 주어질 일자리 자체가 없다. 이제 사피엔스를 대신하는 인공지능들이 고도의 지능을 갖추고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대회는 인공지능의 능력을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이후 가천대의대는 암진단률을 높이기 위해 로봇의사를 도입했다. 최근에는 정책보좌로봇인 ‘로바마’를 개발한 벤 고르첼씨가 방한을 하기도 했다. 자율자동차, 자율비행 등은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슈가 되었다.머지 않아 이것들이 상용화되면 운전기사나 비행조종사, 정책보좌관, 의사, 변호사, 기자, 교사 등 전문직 상당부분이 사라지게 된다. 은행의 대출심사자료를 만드는 일도 인공지능이 6주 훈련을 받고 대체해 버렸다. 비용은 25분의 1로 줄었다. 이로 인해 수 만명의 일자리가 이미 사라졌다. 기술 혁신은 그것이 가성비를 갖출 때까지는 마치 수면 밑에 감춰져 있는 빙산같은 것이다. 하지만 경제성을 갖추고 편의성이 확보된 상황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시점을 뛰어넘으면 마치 태풍처럼 우리 사회를 변화시킨다. 더 놀라운 것은 확산과 함께 가격은 급속히 저렴해지며 확산을 더욱 부추긴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현재 성능이 좀 떨어지거나 가격이 비싼 문제 등은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다. 그 진행을 멈추게 하진 못한다. 산업구조 재편으로 일자리 자체가 사라지고 그나마 존재하던 일자리를 로봇이 대체하면 우리들은 무엇을 하며 먹고살아야 한단 말인가? 앞으로 수 년 내에 정말 수 많은 실직자들이 주변을 배회할 것을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청년도 장년층도 모두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충격적인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관점을 바꿔 자세히 들여다 보면 꼭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자율주행택시나 자율주행비행기는 그만큼 원가절감 요인이 발생할 것이고, 의사들이 줄어든 병원도 마찬가지다. 전기차를 사용하면 연료비도 획기적으로 줄어들고 신재생에너지로 전기요금도 싸지게 된다.인터넷기반의 교육시스템 덕분에 학교를 가지 않거나 아주 저렴한 학비로 공부를 하게 된다. 집마저도 하루에 한 채 정도를 프린트하는 세상이면 주택비 부담도 확 줄어들 게 된다. 이렇게 되면 조금만 벌어도 먹고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먹고사는 문제 해결에는 그다지 큰 걱정이 없다는 의미다. 이제 일하기 위해 휴식을 취했던 삶의 방식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놀기 위해 일을 하는 파격적인 삶의 방식에 적응해야 한다. 따라서 자급자족은 아마도 가장 많은 사람이 하는 주요한 일자리가 될 것이다.다행스러운 것은 자급자족을 위해 투자해야 할 시간이 우리 부모세대 때보다 현저히 줄어들 것이라는 점이고 그 나머지 시간을 가슴뛰는 일에 투자할 수 있게 되리라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실업을 두려워하는 세대가 아니라 귀족처럼 살 수 있는 첫 번째 인류로 거듭 태어날 수 있을 지 모른다. 전하진 썬빌리지포럼의장·前 한글과컴퓨터 대표

[아침을 열면서] 지진 그리고 트라우마

한국 역대 최강으로 기록될 지진이 경주에서 발생하였다. 서울지역 아파트에서도 그 흔들림을 느꼈을 정도였다고 하니 경주시민들의 공포감은 대단했을 것이다. 경주가 지진의 피해와 공포에서 속히 치유되기를 기원한다. 지난 1993년 8월12일 괌에서 진도 7.9 정도의 강진을 경험한 적이 있다. 당시 휴가차 방문한 괌에서 처와 묵었던 숙소는 36층짜리 PIC호텔이었다. 5층 객실에서 쉬던 중 갑자기 ‘쿵쿵..’하는 진동소리와 함께 전기가 끊기고 스프링클러가 터지는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요동치는 건물 속에서 균형을 잡고 서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냉장고가 뒤집히는 등 생지옥이었다. 호텔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체감으로 느끼기에는 5분 정도는 족히 되리라 싶었는데 실은 약 1~2분 정도 그렇게 건물이 요동쳤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그토록 좌우로 너울거렸던 호텔건물이 멀쩡했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우리는 살 수 있었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환태평양지구대에 속한 괌은 일찍부터 철저하게 시행한 내진설계 덕분이었다고 한다.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릴 듯한 기세의 강진 속에서 요동은 쳤을망정 건재한 고층 호텔. 이를 직접 목도하였기에 내진설계야말로 지진대책의 중요한 첫 발걸음이라고 감히 말씀드린다. 경주 지진을 계기로 내진설계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허나 용두사미로 끝나서는 안 된다. 엄격한 내진설계만이 거대한 지진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3층 이상, 500㎡ 이상 건축물에 대해 내진설계를 의무화한 건축관련 규정의 보완과 함께 내진설계 제도의 확실한 정착이 절실히 요구된다. 기존 건물에 대한 안전대책과 함께. 괌에서의 지진경험은 또 하나의 불편한 추억(?)을 선명히 남겼다. 지진공포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것이다. 맞닥뜨린 지진 앞에서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그 절박한 순간 ‘아! 이렇게 죽는구나’라는 외마디 외침 속에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일 외에는 말이다. 그 순간의 공포는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었다. 사고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사고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되면 불안해지는 현상을 트라우마라고 한다. 여행을 통한 아름다운 추억 대신 지진이 만들어낸 트라우마가 이를 대신한 것이다. 그 후 한동안 위층에서 ‘쿵쿵’하는 진동, 영화관 같은 밀폐된 공간, 심지어 건강검진을 위한 MRI 촬영조차도 공포스러웠다. 트라우마는 치유가 중요하다. 공포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경주 지진으로 인하여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분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전문가들의 조언하에 적극적 치료가 필요하리라고 생각한다. 천재지변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지진에 대비한 유비무환의 노력, 후유증을 겪는 분들에 대한 치유는 우리가 할 몫이다. 다시 한 번 경주 재난지역의 재건과 치유를 기원드린다. 박요찬 경기도 고문 변호사ㆍ세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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