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이 줄지어 있는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정의 달’, 말만 들어도 푸근하지만 선물에 신경을 안쓸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선물은 주어서 즐겁고 받아서 기뻐야 한다. 1950년~1960년대만 하여도 달걀 한 꾸러미면 기분 좋은 선물이었다. 집에서 기르던 암탉 한 마리는 특별한 사람을 위한 선물이었다. 1970년대 들어선 양철통에 넣은 설탕이나 조미료가 인기였다. 밀가루 10kg들이 한 부대도 큰 선물로 통했다. 부모님께 드리는 선물은 거의 내복으로 통일됐다. 1980년대 초반부터 선물이 다양해졌다. 커피, 비누 선물세트와 어린이용 과자 종합선물세트가 등장했다. 후반에는 옷이나 가방, 넥타이, 스카프, 고급양주 등 선물이 인기를 끌었고 과일 한상자, 갈비, 생선 등도 좋은 선물이었다. 1990년대 이후 건강식품, 안마기 등 건강용품이 어버이날 단골 메뉴가 됐다. 병원 종합건강검진도 어버이 날의 최고 선물이었다. 어린이 날 선물은 종합선물세트에서 장난감, 학용품을 거쳐 최근에는 게임기가 인기를 끌고 있다. 성년이 되는 젊은이에게 신사복이나 숙녀복 정장을 선물하면 좋아한다고 한다. 4 ~ 5년 전부터 백화점 상품권도 인기 선물로 자리 잡았다. 요즘은 어린이, 부모, 성년들이 현금을 좋아하는 추세라는데 스승에게 드릴 선물이 제일 까다롭다. 상품권이나 봉투 한장 건넸다가는 촌지로 오인 받기 십상이어서 여선생님에게는 스카프 등 잡화류나 비누세트 등 생활용품류를, 남선생님에게는 넥타이나 건강식품, 술 등을 선물한다. 그러나 선물을 뇌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전달하기도, 받기도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말로만 고맙다고 인사하기도 뭣한 게 세상 인심이다. 하지만 어린이나 성년, 어버이 날을 맞이하는 가족에게는 무슨 선물을 해도 부담이 안간다. 식솔들이 오순도순 모여 사는 가정은 그래서 편안하다. 가정의 달 5월이 바야흐로 신록에 물들어 가고 있다./임병호 논설위원

어버이 날에 무궁화꽃을

한반도에 무궁화(無窮花)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산해경(山海經)’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서기전 8∼3세기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지리서(地理書)라고 전해 내려오는 문헌이다. 동진(東晋)때 곽박(郭璞)이 그때까지의 기록을 종합, 정리한 것이다. 이 책에 “군자의 나라에 훈화초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君子之國有薰花草朝生暮死)”라는 기록이 있다. 군자국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훈화초는 무궁화의 옛 이름이다. 이로 미루어 아주 예로부터 무궁화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 효공왕이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에게 작성시켜 당나라에 보낸 국서 가운데 “근화향(槿花鄕·무궁화의 나라·신라)은 겸양하고 자중하지만 호시국은 강폭함이 날로 더 해 간다”고 한 것이 있다. 1935년 10월21일 동아일보 학예란에 ‘조선의 국화 무궁화의 내력’이라는 제목 아래 “아마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조선에도 개화풍이 불어오게 되고 서양인의 출입이 빈번해지자 당시의 선각자 윤치호(尹致昊) 등의 발의로 양악대를 비롯하여 애국가를 창작할 때에 애국가의 뒤풀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이라는 구절이 들어가면서 무궁화는 조선의 국화(國花)가 되었다. 안창호(安昌浩) 등이 맹렬히 민족주의를 고취할 때에 연단에 설 때마다, 가두에서 부르짖을 때마다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무궁화 동산을 절규함에 여기에 자극을 받은 민중은 귀에 젖고 입에 익어서 무궁화를 인식하고 사랑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로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이라는 말은 우리 한 민족의 가슴 속에 조국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뜻으로 남게 되었다. 오늘날 어버이 날에 카네이션 대신 무궁화를 달아 드리는 풍습이 생겼다. 수원 영복여자중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각 기관·단체를 다니며 어버이 날에 무궁화를 직접 달아주어 기쁨을 주고 있다. 나라 사랑, 무궁화 사랑 활동에 앞장서는 영복여중의 노고가 재삼 돋보인다. /임병호 논설위원

노동자들

노동자들이 좋아하는 술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모양이다. 농경사회에서 농민 아닌 노동자들도 간식으로 즐겼던 막걸리가 산업사회 들어 소주로 바뀌더니, 이즈음은 정보사회의 영향인지 뭔진 잘 몰라도 맥주가 선호되는 것 같다. 전국 23개 사업장의 노동자 56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노동자 문화실태’에서 이같이 나타났다. 이에 따르면 가장 즐겨 마시는 술이 맥주(55.6%) 소주(30.5%) 막걸리(1.0%) 순으로 맥주가 소주를 25.1%나 앞지르고 있다. 나머지 12.9%는 기타 등이다. 또 접대부가 있는 단란주점 등 유흥업소를 찾는 비율이 28.7%에 이른다. 이는 민주노총과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가 최근 실시한 조사 내용이다. 맥주를 즐기고 유흥업소를 찾는 게 잘못일 수는 없다. 노동자도 사회인이기 때문이다. 맥주보다 더한 것을 마신들 탓할 이유는 없다. 다만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은 있다. 노동자도 노동자 나름이라는 생각도 든다. 블루칼라 일색으로 본 종전의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많이 화이트칼라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나쁜 현상은 아니다. 생활의 질이 전보다 더 나아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되는 점은 있다. 노동자의 계층화가 심화돼가는 것 같다. 노동운동이 노동자의 계층화를 스스로 타파하지 못하면 진정한 노동운동이라 할 수 없다. 이른바 근로 대중을 빙자한 귀족노동자의 노동운동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블루칼라 노동자를 얼마나 위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부단히 성찰돼야 한다. 당장 생계에 쫓기는 블루칼라 노동자는 맥주나 유흥업소는 커녕 삼겹살 안주에 소주 한잔 마시기에도 벅차다. ‘5월 춘투’가 심상치 않다는 우려 속에 5월이 깊어간다. 좀 더 성숙된 노동문화가 정립되면 좋겠다. 사회가 불안하면 블루칼라 중엔 소주조차 못마시는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임양은 주필

산나물 수난

‘아장아장 나물가자/무슨나물 가자느냐/개똥밭에 돌미나리/아삭바삭 도려다가/청강수에 싹데쳐서/한강물에 흔들어서/어머님은 은반상이오/아버님은 금반상이오/오라버닌 꽃반상이오’ 고양군(시)에 전하는 나물캐는 처녀의 음영민요다. 광주군에는 ‘질경(도라지)의 노래’등 전래 나물캐는 민요는 이밖에도 많다. 야생의 식용나물이 한창 돋아나는 5월이다. 자연의 흙내음을 물씬 전하는 야생나물이 식욕을 절로 돋운다. 산자수명한 산과 들에 나는 야생나물은 곧 조상 대대로 우리의 체질이 되어 왔다. 야생나물은 재배나물과 대칭되는 말로 재배나물엔 오이 상추 부추 등이 있으며 이 또한 훌륭한 나물로 모두 26가지가 있다. 야생나물은 또 들나물과 산나물이 있다. 들나물에는 고들빼기 냉이 쑥 등 61가지가 있고, 산나물은 고사리 버섯 더덕 등 97가지가 있다. 이토록 산과 들에 많은 야생나물은 다 약재다. 예컨대 돌미나리는 피를 맑게 해주는 특효가 있다. 모든 야생나물에는 비타민이 풍부하여 사람의 오장육부(五臟六腑)를 고루 좋게 해준다. 오장은 심장, 간장, 폐장, 신장, 비장이며 육부는 담, 위, 대장, 소장, 삼초, 방광 등이다. 산나물이나 들나물은 제철에 먹는 생채도 좋지만 말려 두었다가 비철에 먹는 건채 역시 맛이 일품이다. 예전에 상민들이 육류를 좀처럼 먹기가 어려웠으면서도 양반들보다 더 건강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야생나물을 더 많이 먹었던데 기인한다. 요즘 산나물이 수난을 겪고 있다는 일전의 가평 현지보도는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니다. 산나물 캐는거야 좋지만 캐는데도 도(道)가 있다. 키워가며 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서울 등지서 떼거리로 몰려간 채취꾼 등이 다 자라지도 않은 두릅이며 돌미나리 등을 마구 베어가고 심지어 뿌리째 뽑아 간다니 이건 캐는 게 아니고 자연을 도둑질 해가는 짓이다. 가평지역만은 아닐 것이다. 산나물 절취꾼들의 생태계 파괴를 엄단하는 방안을 강구해봐야 할 것 같다./임양은 주필

봉사는 아름답다

사랑하는 남녀간의 최상·최대의 꿈은 결혼이다. 남녀가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고 한 마음 한 몸으로 한 인격체를 만들어 백년해로를 약속하는 거룩한 만남이다. 가족과 친지, 그리고 만인의 축복을 받으며 거행하는 결혼식은 사랑하는 남녀의 결합을 알리는 가장 경사스러운 인륜대사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경제적 어려움, 또는 눈물겨운 사연이 있어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는 미혼남녀가 있는가하면 결혼식을 못하고 부부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많은 봉사단체들이 무료합동결혼식을 주선하는 이유는 이들에게 행복한 가정을 이뤄주기 위해서다. 모든 남녀의 결혼식은 성스럽지만 지난 달 22일 경기도 신체장애인복지회와 경기일보사가 공동 주최하고 경기도가 후원하여 아주대학교 실내체육관에서 거행된 장애인 28쌍 합동결혼식은 더욱 감동을 주었다. 1천500여명의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이날 결혼식에는 새내기 부부에서부터 30년 이상 살아온 노부부들이 시종 행복해 하였다. 올해로 20회째 무료합동결혼식을 마련한 경기도신체장애인복지회는 1982년3월8일 설립된 이후 신체장애인들의 재활과 자활을 위해 각종 봉사활동을 벌여왔다. 특히 1987년 5월3일 시작한 합동결혼식은 장애인들은 물론 우리 사회에 훈훈한 인심을 심어주었다. 장애인이란 현실 때문에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아픔을 씻어줌은 물론 보다 활기찬 삶을 영위토록 인도해 주었기 때문이다. 도내에 32개 시·군지부를 둔 경기도신체장애인복지회는 300쌍의 무료합동결혼식을 비롯, 장애인 학생 장학금 지급 332명, 영세장애인 생계비 지급 350명, 휠체어 301대를 기증했다. 이러한 따뜻한 일에 5억1천300만원이라는 경비가 소요됐으니 수백억원, 수천억원과 다름 없는 실로 귀중하고 막대한 금액이다. 이렇게 봉사하는 삶은 아름답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일생에 단 한번 밖에 없는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던 이들에게 큰 희망을 준 이용택 경기도장애인복지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의 노고가 재삼 훌륭하다. 합동결혼식을 올린 300쌍의 부부들이 지금 행복하게 아주 잘 살고 있다는 소식도 기쁨을 더 해준다. /임병호 논설위원

王孫

조선조 제26대 임금 고종 황제는 슬하에 순종, 의친왕, 영친왕 3형제를 두었다. 순종은 대를 잇지 못했고 그 뒤를 이은 조선조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1920년 4월28일 일본 왕족 나시모토(梨宮)의 장녀 마사코(方子)와 일본 도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일제가 왕실규정을 고쳐가면서까지 둘의 결혼을 고집한 것은 양국간 잡혼을 통한 내선융합(內鮮融合) 정책때문이었다. 고종과 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난 영친왕(李垠)은 조선조 마지막 왕 순종의 이복동생이다. 1900년대에 영왕(英王)으로 봉해지고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됐으나 그해 말 이토(伊藤) 조선통감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가 1910년 국권상실과 함께 왕세자로 격하됐다. 마사코는 원래 왕세자 히로히토(裕仁)의 비(妃)로 간택됐으나 임신불능 판정을 받아 조선 왕손의 절손을 노린 일제에 의해 조선 왕족의 세자로 자리바꿈했다. 영친왕은 이방자(李方子·마사코)여사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뒀다. 이 가운데 장남 이진씨는 어려서 세상을 떴고 차남 이구씨는 미국 여성 줄리아와 이혼하고 현재 일본 여성과 자식없이 일본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둘째 아들 의친왕은 13남 9녀를 낳았으나 11번째 아들 이해석(예명 이석)씨를 제외한 형제 모두가 미국에 살고 있거나 사망했다. 고종 황제의 손자 이해석씨는 조선왕조 마지막 왕손으로 보다는 ‘비둘기집’을 부른 가수 이석(李錫)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외국어대 서반아어과를 다니다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수로 데뷔했으며 1970년대 ‘비둘기집’을 히트시켰다. 1979년 가수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떠났다가 1989년 작은 아버지인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의 장례식 때 영구 귀국했다. 2000년 총선에 출마해, 현재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석씨에게 최근 전주시의회의 제의가 들어왔다. 전주시가 최근 전통 한옥마을을 조성하고 있는데 “조선을 창업한 이씨 왕가의 발상지인 전주의 전통 한옥 마을에 마지막 왕세손을 모시자”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통 한옥마을에서 왕손 대접 받으며 살게 될테니 이석씨가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런 제의에 긍정적인 의향을 내비쳤다고 한다. 역사적으로나 관광적인 차원에서 왕가의 전통이 계승됐으면 좋겠다. /임병호 논설위원

봄 詩

“멧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손데./자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밤비에 새잎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조선 선조 때 명기 홍랑이 지은 시조다. 1573년(선조6) 최경창이 북평사로 함경도 경성에 가 있을 때 친해진 홍랑이 이듬해 최경창이 귀경하게 되자 영흥까지 배웅하고 돌아가는 길에 함관령에 이르러 저문 날 비 내리는 속에서 이 시조와 함께 버들가지를 함께 주었다고 한다. “이화우 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추풍 낙엽에 져도 나를 생각는가./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매.” 조선시대 부안의 명기 계랑(桂娘)의 작품이다. 계랑의 성은 이(李), 본명은 향금(香今), 호는 매창(梅窓)·계랑·계생(桂生)으로 가사·한시를 비롯하여 가무·현금(玄琴)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예인이다. 학자인 유희경(劉希慶)과 사귀어 정이 깊었으나 그가 상경한 후 소식이 없으므로 이 노래를 짓고 수절했다고 전해진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일지 춘심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고려 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문신 이조년(李兆年·1269~1343)의 시조다. “도화는 흩날리고 녹음은 퍼져 온다./꾀꼬리 새 노래는 연우(烟雨)에 구을거다/맞추어 잔 들어 권하 제 담장 가인(淡粧佳人) 오도다” 조선 고종 때의 가인(歌人) 안민영(安玟英)의 작품이다. 1876년(고종13) 스승 박효관과 함께 조선 역대 시가집 ‘가곡 원류’를 편찬 간행, 근세 시조문학을 총결산 하는 데 공헌했다. “꽃이 진다 하고 새들아 슬워마라./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워 무삼 하리오.” 조선시대 우참찬을 지낸 송순(宋純·1493 ~ 1583)의 시조다. 1545년(인종1) 을사사화 때 희생된 인재들(윤임 일파)을 꽃, 새는 세상 사람들, 바람은 가해자인 윤원형 일파, 봄은 민족의 운명으로 비유했다. 홍랑·계랑·이조년·안민영의 시조와는 달리 현실을 비판했다. 봄날의 시심은 각별히 유정하다. 세상사 시름일랑 잠시 잊고 꽃그늘에 앉아 마시는 ‘낙화주(落花酒)’가 생각나는 시절이다./임병호 논설위원

사스(SARS)

의사가 환자의 병명을 진단하면 으레 “왜 이런 병에 걸렸느냐?”고 묻곤 한다는 것이다. 물론 원인을 설명하지만 그때마다 내심 답답하다는 게 어느 의사의 고백이다. 다 같은 원인을 두고도 발병하는 사람도 있고 건강한 사람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속으로는 병에 걸리려니까 걸렸지…라고 밖에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게 의사의 입장이 아니냐고 반문까지 하면서 그 분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전에 국립의료원의 어느 의사가 술자리에서 농반진반으로 한 이런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공포가 심각하다. 발병국인 중국은 더 말할 것이 없는 가운데 사스의 위해는 인체도 인체지만 이러다가 세계의 교류를 가히 마비시키지 않을까 걱정된다. 오늘의 지구촌은 유통생활이 근간을 이룬다. 인적 및 물적 왕래가 지구촌 생활의 중심인 것이다. 사스 공포는 무역 등 물적 교류뿐만이 아니라 문화 등 인적 교류까지 장애를 주는 지경이 됐다. 동물성 바이러스의 돌연변이가 병원체라고 하지만 전에 없던 이런 병이 왜 생겼는지 도대체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 의사 말대로 그런 병에 걸리려니까 걸린 것 처럼, 사스같은 병이 생기려니까 생긴 것인지 도무지 그 조화속을 알길이 없다. 경제성장에까지 치명상을 주는 사스란 괴질을 금세기 초 인류의 재앙으로 내린 자연의 섭리가 무엇 때문이지는 모르지만 병마에 좀 더 적극 대처해야 할 것 같다. 정부는 이에 따른 다각적 종합대책을 세우고, 보건 당국은 의심 환자의 신속한 신고 체계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또한 개인 위생이 중요하다. 지난 일요일 어느 TV프로에서 ‘손만 자주 씻어도 모든 전염병이 그런 것처럼 사스 예방 또한 상당히 효과가 크다’고 밝힌 국립보건원 방역과장의 말은 귀담아 들어 둘만하다. 비록 병원체는 발견됐어도 백신은 발명 못했으니 아직도 괴질은 괴질이다. 우리 모두가 사스 괴질의 시련을 지혜롭게 극복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갖는다./임양은 주필

향토기업 S.K

일제시 일본인 것이든 수원 선경직물주식회사를 이 회사에 몸담고 있던 최종건씨가 1953년 정부로부터 불하받았다. 선경직물은 첫 폴리에스테르 공장을 세우고 국내 최초로 합성직물 수출의 금자탑을 쌓는 등 우리나라 섬유산업을 주도하였다. 또 오늘의 S·K그룹이 있게 한 모기업이다. 섬유산업을 발판으로 건설·화학·정유·플랜트 산업 등 여러 분야에 괄목할 성장을 보이면서 국민경제에 중추적 기여를 했다. 1973년 11월 정부로부터 9번째의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은 이후 국내 3위의 그룹으로까지 떠오른 S·K가 지금 크게 흔들리고 있다. 분식회계로 그룹 총수가 사법처리되고 주식을 15%까지 집중 매입한 영국계 투자 펀드업체로부터 경영권을 위협받고 있다. 분식회계나 경영권 위기엔 과다 규제탓도 있지만 경영의 잘못인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것 저런 것을 떠나 향토기업인 S·K가 오늘날 이렇게 된 것은 정말 가슴 아프다. 고인이 된 창업주 최종건 회장은 재벌 총수가 되고도 선경직물 자리인 시내 평동에 곧잘 들려 옛 친구들과 막걸리를 나누곤 하였다. S·K는 국내 굴지의 선경도서관을 지어 수원시에 기증하는 등 고향의 발전에 많은 관심을 보여왔다. 수원상공회의소가 수원을 뿌리로 성장한 S·K의 조속한 정상화를 위하는 지역 캠페인을 벌여 눈길을 끈다. ‘수원사랑! S·K사랑!’ ‘수원의 힘으로 S·K의 조속한 정상화를!’ ‘수원의 향토기업 S·K, 수원의 힘으로 지킵시다’라고 쓰인 곳곳의 현수막 외침은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다. 수원 시민의 마음속이나마 동참을 호소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는다./임양은 주필

카파라치 재등장?

교통법규 위반 신고보상금제도(카파라치제도)가 폐지된 후 불법 유턴·중앙선 침범·불법 좌회전 등 교통법규 위반차량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전문신고꾼인 카파라치가 사라지면서 사소한 교통법규 위반은 문제될 것 없다는 의식이 고개를 들어서다. 지난해 1만6천539건의 카파라치가 접수된 지역에서 중앙선을 침범, 유턴하면서도 운전자들은 “교통경찰이 안보이면 불법을 해서라도 빨리 갈 수 밖에 없다”고 위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카파라치제도가 폐지된 것을 제일 아쉬워 하는 사람은 아마 경찰일 것이다. 카파라치제도가 폐지된 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교통법규 위반이 일어나고 있지만 경찰은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출퇴근 시간대에 교통경찰을 배치해 단속을 하지만 ‘제대로’하면 교통체증이 심해져 단속이 어렵고, 낮 시간대나 밤에는 경찰력이 미치지 못한다. 경찰들은 카파라치가 법규위반과 사고를 억제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고 이구동성이다. 교통시민연합이 5월부터 다른 시민단체들과 자체적인 교통문화 감시 활동에 나서 법규 위반 차량 중 고의성이 짙은 차량은 경찰에 고발하고 경미한 위반자는 시민단체 차원에서 계고장 엽서를 보내기로 했으나 법규 위반자들의 태도가 걱정된다. 경찰에게 적발돼도 ‘오리발’을 내밀며 되레 항의하는 경우가 허다한 판에 시민단체들의 계도성 감시활동에 순응할 것 같지 않아서다. 무분별한 카파라치제도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카파라치가 없어졌다고 교통 법규를 위반하는 차량이 크게 늘어난 것은 더욱 심각하다. 사회적 도덕성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운전습관은 별개의 것으로 여기는 시민의식 자체가 변화해야 하는데 아직은 그렇지 못한 게 사실이다. 경찰의 단속이나 남의 눈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나와 타인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교통법규를 준수해야 함은 운전자의 상식 제1조 제1항이다. 국민의식 개선과 함께 카파라치 제도의 부작용을 보완해 효과적으로 다시 시행하는 것을 생각해 볼만 하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상습 법규위반 현장에선 마음놓고 불법운전을 할 것이다. 목숨 아까운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다./임병호 논설위원

신풍초등학교

신풍(新豊)초등학교는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에 있는 한국에서 최고(最古)에 속하는 공립학교다. 1896년 경기도관찰부 공립소학교로 설립됐다. 수업연한 4년의 보통과로 출발, 남학생 4학급을 편성했으며, 1906년 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1911년부터는 여학생을 모집하여 남녀공학으로 운영하였고 1921년 수업연한을 6년으로 연장했다. 1937년 수원신풍공립보통학교, 1938년 수원신풍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수원신풍공립국민학교로 개칭했으며 1942년 8월 고등과를 설치하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고등과는 폐지되고 9월 재개교하여 32학급을 편성했다. 현재 신풍초등학교 동문은 3만명이 넘는다. 그런데 107년 전통을 자랑하는 신풍학교에 문제가 생겼다. 1790년 조선조 제22대 정조대왕 때 건축된 21개 건물 576칸의 화성행궁(華城行宮)을 완전히 복원하려면 신풍학교가 이전돼야 하기 때문이다. 화성행궁은 일제가 조선의 역사와 정기를 말살할 목적으로 강제로 철거, 그 자리에 수원경찰서, 경기도립병원, 신풍초등학교 등이 들어선 것이다. 화성행궁은 1989년 당시 김동휘 전 예총수원지부장, 심재덕 수원문화원장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주축이 돼 행궁복원추진위원회를 결성, 그 이후 각계의 노력이 결집돼 지난해 1차 복원사업이 끝났다. 이 사업으로 전체 576칸 가운데 482칸이 복원됐으나 연회나 과거시험 등이 있을 때 객사(客舍)로 사용되던 우화관과 그 주변 정원 등은 미복원 상태다. 수원시측은 신풍학교가 20년전 40학급에 이르던 규모에서 현재 18학급으로 줄어 이전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학교측과 특히 동문들이 학교이전을 반대하고 있는데, 수원시가 당사자인 학교와는 협의나 의견수렴 없이 도 교육청만 상대한 것도 문제가 된 모양이다. 수원시는 화성행궁 100% 복원을 위해 학교 이전의 대안으로 교사(校舍)를 신축하는 방법과, 신설지구의 초등학교에 ‘신풍’명칭을 부여, 전통을 잇는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풍학교측과 동문들이 어떻게 대응할는지 귀추가 주목된다. /임병호 논설위원

거지신세

최규화 전 대통령은 철 지난 달력을 잘라 메모지로 쓰고 50년된 낡은 선풍기를 쓰는 등 근검절약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전두환·노태우·김영삼(YS) 전 대통령은 ‘거지 신세’ ‘돈이 모자란다’ ‘진짜 어렵다’고 생활고(?)를 호소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YS의 경우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대통령시절 월급의 95%를 연금으로 받는다. 국고 지원으로 비서관을 3명까지 둘 수 있다. YS는 비서관을 7명까지 두고 있고, 가정부, 기사 외에 주방장까지 고용하고 있어 돈이 많이 필요하긴 할 것이다. 지난 7일에는 한나라당 김덕룡 강인섭 박종웅 김무성 이경재 김영춘 이성헌 의원 등 비서출신 국회의원들이 1차로 3천만원을 전달하고 앞으로도 계속 지원키로 했다고 한다. 비서출신 의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전달한 3천만원은 그러니까 생활비인 셈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는 노태우 전 대통령처럼 대법원 판결이후 연금이 끊겨 진짜 어렵다고 한다. 전 전대통령은 추징금 2천205억원중 14.3%인 314억원 정도만 내고 “돈이 없다”고 버티고 있는 중이다. 전 전대통령의 대변인인 이양수 변호사는 “지방에 가도 호텔에 한번 묵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전 전대통령의 재산은 연희동 별채와 가재도구 등 5억원 정도이지만 연희동 자택의 본채는 부인 이순자 여사의 명의로 돼있어 국가에서 추징을 못하고 있다. 노태우 전대통령은 추징금 2천628억원 중 78%인 2천73억원을 낸 상태로 최근 사위인 SK그룹 최태원 회장이 구속돼 딸 소영씨를 위로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돈이 없어’ 외부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비서관이 전했다. YS는 비서관이 7명이고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은 추징금을 314억원, 2천73억원을 낸 저력과 재력이 있는데 돈이 없다고 ‘엄살’을 부리고 있다. 대통령까지 지냈겠다, 빚 안지고 밥 굶지 않고 살면 됐지 다시 정치할 것도 아닌데 웬 돈이 그리 많이 필요한가. 아직도 현직 대통령인줄 아는 것 같아 안타깝다. /임병호 논설위원

안막, 최승희 부부

안성 사람인 안필승(안막)이 서울 출신의 최승희와 결혼한 것은 1931년 일본에서다. 안막은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스물한살의 와세다 (早稻田) 대학생이었고 최승희는 서울 숙명학교를 나와 무용 유학중 벌써 두각을 드러낸 스무살의 촉망받는 신인이었다. 안막은 문학평론가로 날렸고 최승희는 세계적인 무용가가 됐다. 1945년 유럽 등지를 절찬리에 순회 공연한 게 계기가 되어 화가 피카소는 파리 상젤리제 극장에서 공연하는 최승희의 얼굴을 그린 소묘(素描) 그림을 선물하기도 하고, 영화배우 로버트 테일러는 연서를 보내기도 했다. 또 숱한 제자를 배출했다. 지난해 9월30일 최승희 탄신 90주년 땐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 몽골 등지서 지금은 각기 원로급 지도자인 10여명의 제자들이 한국 프레스센터에 모여 고인을 추모하는 행사를 가졌다. 안막, 최승희 부부는 특히 금실이 좋았다. 1946년 그녀가 남편 따라 월북한 것은 사상보다는 남편과 함께 하고자하는 사랑이었다. 안막(안필승) 형제는 모두 예술가다. 형 안보승은 성악가였고 동생 안재승은 무용평론가다. 현재 무용계의 거목이며 경희대 명예교수인 김백봉은 안막의 친동생 안재승의 부인이다. 그러니까 최승희의 아래동서이며 또한 제자다. 안막은 1958년, 최승희는 1969년 평양에서 병으로 타계했다. 그녀의 비문엔 ‘인민배우’와 ‘무용가동맹 중앙위원회위원장’이라고 새겨있다. 숙청의 비운을 맞은 뒤에 복권됐다. 이들 부부의 초혼제가 오는 26~27일 안막의 고향이며 최승희의 시댁인 안성시 고삼면 봉산리 꽃뫼마을에서 ‘꽃뫼예술제’ 행사로 펼쳐진다. 남한에서는 월북했다고, 북한에서는 숙청 당했다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천재적 문학가며 천부적 무용가다. 천리 타향에서 숨져간 두 부부의 혼백이나마 그 옛날 새 색시시절 시댁을 찾던 신랑신부처럼 다정하게 손잡고 찾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임양은 주필

심리전

전쟁은 화력전만이 있는 건 아니다. 국제적으로 금지된 대량살상의 생화학전도 있고 이밖에 심리전도 있다. 이라크 전쟁에서 후세인 자신은 막상 땅 속에 숨어 있으면서 TV를 통해 국민들에게 이른바 성전 독려를 외쳤던 것은 심리전이다. 후세인의 두더지 심리작전 주연에, 주연급 조연을 한 사람이 모하메드 사이드 알 사하프 공보장관이다. 그는 국내 TV 시청자들에게도 낯이 익었을만큼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후세인의 연설을 대독하기도 했다. 사하프는 후세인 못지않은 허황한 말을 많이 했다. ‘승리’를 자신한다면서 연합군을 ‘격퇴’하고 있다고도 했다. 심지어는 지난 9일 바그다드 함락 직전의 TV화면이 세계에 방영되는 시간에도 “바그다드가 연합군의 무덤이 될 것”이라며 이라크의 승리를 호언했다. 그러고 보니 6·25 한국전쟁 때가 생각 난다. 국군은 단 한 대도 갖지 않은 탱크를 앞세우고 쳐들어온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개성이 빼앗기고 장단을 거쳐 의정부가 뚫리고 있는 순간에도 중앙방송국(KBS전신) 라디오는 국민들에게 ‘안심하라’고 했다.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은 ‘용맹무쌍한 국군이 적을 격퇴시키고 있다’고 허위보고해 이승만 대통령은 그 말을 곧이 듣고 대국민 방송을 했다. 당시 서울 시민의 희생이 컸던 것은 이런 엉터리 심리전 때문이었다. 다시 이라크 얘기로 돌아가 바그다드 함락 이후 허풍쟁이 사하프의 종적이 묘연한 가운데 이란 신문에 자살설이 보도됐다. 목을 매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추측일뿐 확인된 것은 아니다. 이라크 지도부의 행방중 가장 관심이 큰 후세인 다음으로 사하프가 인기랄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그 우스꽝스런 심리전의 배우 노릇을 한 탓인 것 같다./임양은 주필

곡우 무렵

24절기의 하나인 ‘곡우(穀雨)는 청명(淸明)과 입하(立夏) 사이에 들어 있으며 태양의 황경(黃經)이 30도에 해당할 때이다. 음력 3월 양력 4월20일경이 되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된다. 곡우때쯤이면 봄비가 잘 내리고 백곡이 윤택해진다. 그래서 ‘곡우에 땅이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 즉 그해 농사를 망친다는 말이 있다. 옛날에는 곡우 무렵이면 농가에서는 못자리를 하기 위해 볍씨를 담갔는데 이때 볍씨를 담가 두었던 가마니는 솔가지로 덮어두며 밖에서 부정한 일을 당했거나 부정한 것을 본 사람은 집앞에 와서 불을 놓아 악귀를 몰아낸 다음에 집안에 들어오고 들어와서도 볍씨를 보지 않았다. 만일 부정한 사람이 볍씨를 보게 되면 싹이 잘 트지 않고 농사를 망치게 된다는 속신이 있어서다. 곡우 무렵은 나무에 물이 가장 많이 오르는 시기다. 그래서 전라남도와 경상남·북도, 강원도 등지에서는 깊은 산이나 명산으로 곡우물을 먹으러 간다. 곡우물은 주로 산다래나 자작나무, 박달나무 등에 상처를 내 거기서 나오는 물을 말하는데 그 물을 마시면 몸에 좋다고 하여 약수로 먹는다. 곡우물을 먹기 위해서는 곡우 전에 미리 상처 낸 나무에 통을 달아두고 여러날 동안 수액을 받는다. 강진이나 해남 등지에서는 곡우물을 먹으러 대흥사(大興寺)로 가고, 고흥 등지에서는 금산으로, 성주 등지에서는 가야산으로 가서 먹는다. 거자수(자작나무 수액)는 특히 지리산 아래 구례 등지에서 많이 나며 그곳에서는 곡우 때 약수제까지 지낸다. 특히 신병이 있는 사람이 병을 고치기 위해 그 물을 마시는데 그것은 외지 사람들에게 더 약이 된다고 한다. 경칩무렵에 나오는 고로쇠 나무 물은 여자물이라 하여 여자들에게 더 애용되고 있다. 곡우 때가 되면 흑산도 근처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가 북상해 격렬비열도 부근에 올라 온다. 그때 잡는 조기를 특히 ‘곡우살이’라 한다. 곡우살이 살은 아주 적지만 연하고 맛이 있어서 서해는 물론 남해의 어선들도 모여 든다. 볍씨를 신성시 했던 옛 풍속이 점점 사라지는 것도 아쉽거니와 몸에 좋다고 나무에 상처를 내 수액을 먹는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곰 몸 속에 호스를 꽂아 웅담을 빨아 먹는 것 같아서 좀 뭣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기부문화

B종합사회복지관은 올 연초에 1.5t 트럭 2대 분량의 ‘기부물품’을 내다 버린 기억이 아직도 씁쓸하게 남아 있는데 얼마전 또 상당수의 기부물품을 받고 고민에 빠졌다. 입던 옷·이불·TV·냉장고·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 장롱 등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이 물품들이 거의 폐품에 가깝기 때문이다. 폐품이 다 된것인 줄 알면서도 ‘기부’를 한다는 사람의 성의를 거절하기도 어려워 일단 받기는 했지만 처리문제가 먼저 걱정됐다. 신발제조업체로부터 신발 15포대를 기증 받은 C종합사회복지관은 분류 결과 절반 이상이 한쪽 밖에 없는 것들이어서 대형 쓰레기종량제 봉투 15장에 담아 버려야 했다. 최근에는 컴퓨터도 많이 기부되지만 사실상 워드프로세서 기능밖에 할 수 없는 386 기종이 많다. 기부 받은 중고물품중 30% 이상이 고장난 것이거나 고장률이 높아 가전회사에서 고쳐주고 때로는 대신 폐기처분해 주는 일까지 하고 있다. 이같이 전혀 쓸모없는 기부물품이더라도 면전에서 거절하지 못한다. 물품이 당장 쓸수 있는 지 여부를 떠나 기부자들의 성의를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데다 ‘가려 받느냐’는 시선도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심지어 밤중에 전혀 쓸모 없는 물건을 복지관 앞에 잔뜩 버리고 가는 얌체 주민들도 있는 실정이다. 국민의 의식이 아직도 이 정도다. 그러나 이제는 물품 기부에도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한다. 복지시설에 물품을 기부할 때는 물품을 받을 수 있는 지 미리 묻고 사용가능한 물품을 제공해야 한다. 특히 최소한의 수선 및 세척을 한 뒤 기부해야지, 쓰레기 처리하 듯 해서는 곤란하다. 점차 기부문화가 확산되고 있지만 물품기부는 예전 입고 먹을 게 모자라던 시대의 기부형태를 못벗어났다. 내집에서 못쓰는 물품은 복지관에서도 쓸모 없는 것이다. 진정한 기부는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아끼고 소중한 것들을 나누는 것이다. 마땅히 정성이 중요하다./임병호 논설위원

단속권이 없다?

경기북부지역 미군부대에서 오·폐수를 제대로 정화처리하지 않고 방류하거나 기름을 유출하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는 보도가 여러차례 나왔다. 그러나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규정에 환경관련 조항이 없어 오수의 무단방류를 단속하지 못하는 데다 미군부대의 노후 하수처리장시설 마저 제대로 가동이 안돼 오·폐수가 그대로 농경지와 하천에 방류되고 있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5일 오전 10시쯤 유엔사령부 경비대대가 주둔중인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의 캠프 보니파스는 정화처리하지 않은 하수 및 폐수를 부대 앞 소하천과 용수로에 그대로 방류, 임진강과 농경지를 오염시켰다. 지난 1월에는 의정부시 금오동 미군부대 캠프 카일에 설치된 정화조 탱크와 장암동 하수종말처리장을 연결하는 오수관이 부대 앞 하수구에서 터져 10여t의 오수가 부용촌에 그대로 방류되기도 했다. 지난 1999년과 2000년 기름 수송라인과 유류저장탱크에서 두차례 1천ℓ의 기름이 유출된 파주시 조리면 캠프 하우즈는 인근 토양까지 기름에 오염된 것으로 알려져 오는 2006년 반환이후에도 100억원 이상의 복구비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같은 사례를 열거하려면 끝이 없을 정도인데도 파주시청 등을 통해 미군부대에 몇차례 건의했으나 시정되지 않았다. 의정부시는 주민신고를 받고도 부대현장을 조사하지 않은데다 SOFA 규정에 환경단속권이 없다는 이유로 수질검사를 실시하지 않다가 한달 뒤에야 하수도 바닥을 콘크리트와 자갈로 덮는 복구작업을 벌였다. 경기도가 미군부대 환경오염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국내법과 동일하게 오염원인자 부담원칙을 적용하는 근거조문을 SOFA 조항에 포함토록 지난해 9월 환경부와 외교통상부에 요청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미군부대 환경오염 사고에 대해 인근주민들이 피해 보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미군측에 보상을 요구할 법적 근거가 없어 속수무책이라니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미군부대의 잇단 폐수·기름유출은 경기 북부지역뿐이 아니다.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이 요구된다. /임병호 논설위원

저주(詛呪)

한글사전은 저주(詛呪)를 ‘남이 못되게 되기를 빌고 바람’이라고 풀이 하였다. 그러므로 그냥 못되길 바라는 것을 고전적 저주라고 까진 할 수 없다. 어떤 주술, 즉 기원하는 행위 등 목적 의식(儀式)이 수반돼야 저주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주술은 여러가지 방법이 있으나 대체로 유감법칙(類感法則)이 많이 쓰인다. 저주하는 대상의 인물을 이를테면 그림으로 그린 화상이나 인형으로 만들어 바늘로 찌르고 칼침을 되풀이해 놓는 것 등이 유감법칙이다. 비록 모형물이지만 저주의 대상이 그렇게하여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만족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될 것으로 아는 의제화(疑制化) 심리를 갖는 것이다. 저주의 주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근대까지 많이 쓰였다. 그 어떤 믿거나 말거나 하는 초인적 힘을 개인적 보복 심리로 원용하였다. 고대사회에선 국가적인 주술행사도 있었다. 그러나 과학문명이 극도로 발달하면서 저주는 한낱 관념적 개념으로 치부하게 됐다. 이런 21세기에서 이라크 전쟁을 통해 기막힌 주술이 발견된 것은 비극 중의 희극이다. 바그다드시내 라시드 호텔 현관 바닥에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초상화가 타일로 만들어져 투숙객들의 구둣발에 밟혀온 것이다. 후세인은 1991년 걸프전 당시의 아버지 부시를 그렇게 만들어 저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상화는 고통으로 이를 드러내며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에다가 ‘부시는 범죄자’라고 써놨다. 이에 발끈한 현 미국 대통령인 아들 부시는 아버지 초상화를 뜯어낸 자리에 후세인 초상화를 만들어 넣기로 했다고 전한다. 저주는 일종의 비합리적인 복수다.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선다. 현대사회에서 고전적 초상화 주술이 교차되는 것을 보면서 증오에 찬 인간의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본다. /임양은 주필

판사의 고독

재판정의 법대위에서 재판해오던 판사가 그만 둔 뒤 변호사가 되어 법대를 바라보니 그렇게 높아보일 수 없었다는 얘기는 맞는 말이다. 피고인들에게는 법대 위의 판사가 또 그렇게 보여 실제의 체구와 관계없이 무척 커 보인다. 법대 위의 판사는 그만큼 외경심의 대상이다. 민사·형사사건은 물론이고 비송사건 등을 판결하고 결정하는 판사의 권능은 실로 막강하고 절대적이다. 이 때문에 고독한 직업이기도 하다. 사회생활에 제약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조심해야 할 점이 많다. 예컨대 술 자리도 가려서 나가야 하고 사람도 가려서 만나야 한다. 자신도 모르게 사기꾼 같은 위인에게 팔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김동건 서울지방법원장이 240여명의 소속 판사 전원에게 변호사들로부터 골프 접대를 받지 말라고 강력히 지시했다고 한다. 지금은 변호사의 판사실 출입을 어떻게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으나 전엔 이도 제한한 적이 있었다. 변호사로부터 골프 접대를 받지 말라는 것은 공연한 오해를 사지않기 위해서다. 판사실 출입도 이래서 제한했었다.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는 법정에서만 만나야 한다. 법정 밖에서 만나는 것은 직업상 좋은 모양이 아니다. 얼마전에 모경찰서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던 판사가 변호사로부터 골프 접대 등을 받은 사실이 구설수에 올라 스스로 법복을 벗은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 판사란 직업은 권능이 지고한 것만큼 주변을 통제할줄 아는 고독이 요구된다. 이는 판사의 권위를 위하고 법원의 신뢰를 위해서다. 법정의 법대는 높아 보이고 그 위의 판사는 커보이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판사도 언젠가는 그만 두면 자유로운 변호사가 되지만 판사로 있을 땐 어디까지나 고독한 판사가 되어야 한다. /임양은 주필

종군기자들의 희생

이라크 전쟁에서 종군기자 사망 비율이 연합군 사망 비율보다 높다. 종군기자는 1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14명이 희생돼 1.4%에 이른다. 이에 비해 연합군은 30만여명 중 116명이 전사하여 0.04%에 머문다. (걸프전 땐 1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았던) 종군기자의 사망이 이처럼 많은 것은 걸프전과는 달리 지상군의 활약이 컸기 때문이긴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연합군의 부대 배속기자와는 별도로 독자적 취재기자가 많았던 탓이다. 희생된 종군기자는 대부분 이들이다. (부대 배속기자가 600여명이고 단독 취재기자가 400여명이다) 외신 기자들이 묵고있던 바그다드 팔레스타인 호텔에 대한 미군의 포격으로 3명의 종군기자가 숨진 것을 미국은 ‘오인 폭격’이라고 해명하고 있으나 국제 언론단체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국제기자연맹(IFJ)은 “이 공격은 기자들을 겨냥했다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서 부대 배속기자와 독자 취재기자의 차별대우에 항의했다. 언론인보호위원회(CPJ)와 ‘국경없는 기자회’는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에게 진상조사를 촉구하는 항의 서한을 보냈다. 이밖에도 스페인의 텔레비전 카메라 기자가 바그다드에서 미군 발포로 숨지는 등 연합군에 의한 종군기자의 피해가 의외로 많다. 연합군측은 독자 취재기자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고 하였으나 책임을 안지는 것은 그만 두고 되레 고의든 과실이든 쏘아죽였다. 특히 독자 취재의 종군기자들은 연합군과 이라크군 양측의 공격을 받는 가운데 사선을 넘나 들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 취재에 몸을 던진 종군기자들의 투철한 직업의식이 존경스럽다) 이라크 전선에서 희생된 종군기자들의 명복을 빈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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