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新동력은 창조인] ‘대한민국 여성토목기사 1호’ 손성연 CNC종합건설 대표

실력으로 사회적 편견 깨고 또 깨… 건설업계 주류로 ‘우뚝’

어디에나 첫번째는 존재한다. 처음이 있어야 두번째 세번째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맨 앞서 간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그것도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분야라면 왠만한 노력과 깡다귀 없이는 불가능하다. ‘대한민국 여성 토목기사 1호’로 기록된 손성연 CNC종합건설 대표(53)는 그동안 걸어 온 길을 되돌아 보면 험난하다 못해 가시밭길이였다고 고백한다.

여성들이 일반 기업에도 취업하기 어려운 시절, 그녀는 여성에게는 냉혹하기만 했던 건설 현장을 누비며 실력을 인정 받았다.

완벽하고 깔끔한 성격에다 똑부러지는 일처리, 억척스럽기까지 한 그녀지만 엄마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꿈을 접어 둔 때도 있었다. 하지만 두 아이를 키우는 동안 한시도 건설 현장으로 돌아갈 꿈을 놓지 않았기에 서른 중반에 건설사에 재취업하고 마흔에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건설 경기 침체로 많은 건설사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녀는 하루 24시간이 너무나 짧다고 했다. 실제 그녀가 관리하고 있는 현장은 20곳이 넘는다. 사회적 편견을 이겨내고 남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건설업계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창조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장맛비가 지리하게 계속되던 날 만난 손 대표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짜코짜 “기자님 이런거 좀 써 주세요” 한다. 건설 현장은 추우면 추워서 (일을)못하지, 더우면 더워서 못하지, 비오면 비와서 못하는데도 공사 기일을 딱 맞추기가 쉽겠느냐는 거다.  

“이렇게 우리나라가 잘 사는 것도 열사의 땅에서 고생한 건설인들이 있어서였는데 그 얘기는 쏙 빼고 건설사들의 안 좋은 얘기만 보도하니…. 정부도 건설업에 대한 배려가 없다. 힘들고 어려운 얘기, 현장의 노고가 잘 전달됐으면 좋겠다”며 서운한 마음부터 토로했다.

- 당시 여자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토목공학과에 들어간 이유가 궁금합니다.

(사진 기자가 인터뷰 사진을 찍으려 카메라를 들이대자) 손 대표는 “입술 좀 바르고요” 라며 자리를 떴다. 강하기만 할 것 같지만 천상 여자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돌아와 앉은 손 대표의 입술은 무척 빨?다. 또 한번 웃음이 나오는 걸 애써 참는데 답변이 돌아왔다.

“한마디로 아버지가 딜(거래?)을 하신거죠. 난 감성적인 부분이 있어서 사학을 전공하려 했는데 당시 고등학교 때 같은 재단인 명지대 토목공학과 교수님들이 전학년 장학금은 물론이고 취업까지 보장하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해 관심도 없었던 토목공학과에 들어가게 됐죠. 아버지도 ‘기술만 있으면 뭘 해도 먹고 산다’며 권유했어요.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약속대로 취업은 보장 됐나요

“적성에 맞지 않는데다 홍일점이다보니 공부가 힘들었죠. 성적도 좋지 않았어요. 취업은 커녕 졸업도 할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였다니까요. 3학년 2학기때부터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어요. 동기들과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죽기 살기로 했죠.

덕분에 4학년 8월에 있었던 토목기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어요. 졸업을 앞두고 있는 나를 교수님이 직접 데리고 당시 토목 분야에선 최고의 회사를 찾아갔어요. 교수님이 시험만 보게해 달라고 부탁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어요. 물론 취업에 성공했죠.”

-교실에서와 달리 막상 건설 현장에서 일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

“첫 직장부터 워낙 설움을 많이 받았어요. 같이 입사한 남자 동기들보다 월급도 적고 현장 배치는 해 줄 생각도 하지 않았죠. 결국 입사 3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남광토건으로 옮겼어요. 건설회사 치곤 여직원(70여명)이 상당히 많았어요. 당연히 기술직은 거의 없었고 행정ㆍ사무직이 대분이었지만요. 거기서 어린 나이에 여직원회 회장이 됐어요.

여직원들의 고충을 들으며 이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면서 오히려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현장에 가면 손 기사 때문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얘기를 듣지 않으려고 현장 방문을 자제하면서도 손 기사가 일하면 ‘일사천리’로 공사 진행이 빠르다는 소리를 들으려고 결제 서류를 들고 하루에도 수십번씩 현장과 회사를 오갔어요. 남자 직원들보다 2~3배는 더 열심히 일했던 거 같습니다.”

-취업한지 얼마 안돼 결혼을 하면서 일을 포기했다고 들었는데, 결정이 쉽지는 않았겠습니다

“83년 중매로 만나 결혼을 했어요. 곧 첫 아이를 임신했어요. 여자가 현장에 나오는 것도 싫어하는데 임신한 여자를 현장 직원들이 용납할리 있었겠습니까. 아예 육아에 전념하기로 했어요. 2년 뒤 둘째 아이를 낳았지만 꿈을 저버리지는 않았어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토목 관련 분야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신문이 큰 도움이 됐죠.”

-13년이라는 공백은 누가봐도 깁니다. 재취업을 생각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그렇죠. 헌데 둘째가 다섯살이 되면 복귀하겠다는 생각으로 그 때부터 현장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고 건설 현장조사 등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첫째가 중학생이 될 무렵(1996년) 건설사에 재취업했습니다.

일과 자녀를 키우는 두가지를 다 잘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회사에서나 가정에서 나에 대한 믿음을 갖게했습니다. 회사에서는 직장 동료, 부하직원, 선배로서 역할을 충실히 했고, 가정에서도 부모, 남편,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어요. 부족한 점은 많았지만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신뢰는 잃지 않았어요. 진심이 통한거죠(하하).”

-결국 건설사 CEO가 되는 것이 꿈이었나요

“마흔이 되면 내 일을 시작하겠다는 꿈이 있었어요. 회사를 만들기 위해 자금도 모으고 인맥도 쌓았습니다. 2000년 4월23일 오전에 양주 포승공단에서 첫 계약을 따내고 오후에 사무실을 개소했어요. 근데, 큰 딸이 다음달이면 결혼을 합니다.”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알려줄 수 있나요

“요사이 화두는 ‘창조 경제’ 입니다. 건설산업에서 창조는 굉장히 중요하죠. 창조는 융복합을 말합니다. 건설업은 단순히 건축과 토목의 결합을 넘어선지 오래됐죠. 환경, 예술, IT 등 기술ㆍ예술ㆍ문화가 복합되는 산업입니다. 향후 건설산업은 기술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뢰를 담보로 한 기술력으로 승부했고, 결국 통했다고 보면 됩니다.”

-대표님을 롤모델로 삼는 후배들이 꽤 많을 겁니다. 부담감도 크시죠

“사실 저는 인터뷰 같은 거 잘 안합니다. 그런데 절대 거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토목공학과 후배들이 강의를 요청할 때죠. 취직도 잘 안되니 사양산업이라며 복수전공을 하는 후배들을 많이 봅니다. 토목은 사람을 위한 공학입니다.

그만큼 인재가 많이 모여야 합니다. 지금 경기가 어렵지만 향후 해외진출도 늘어나고 산업 자체를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후배들을 볼 때마다 계획을 세워라, 진실한 인관관계를 형성해라, 실력을 갖추라고 얘기합니다. 창조는 실력에서 나옵니다. 사람이 곧 창조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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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연 대표는…

‘대한민국 여성 토목기사 1호’로 명지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뒤 지난 1982년 남광토건에 입사했다. 이후 건화기업과 유성건설, 신경건설 등 유수의 건설사를 거쳐 지난 2000년 4월 씨앤씨종합건설을 설립하고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현재 대한토목학회 여성기술위원 위원장과 대한토목학회 이사직도 겸하고 있다.

최원재기자 chwj74@kyeonggi.com

사진=김시범기자 sbkim@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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