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新동력은 창조인]‘올인의 승부사’ 차민수 카지노 인터네셔널 그룹 회장

“세계에 알린 韓流… 이젠 카지노산업 키워 돈으로 환전할 때”

세간을 들썩이게 했던 이병헌이 주인공으로 나온 TV 드라마 ‘올 인(All In)’이 방영된 것이 어느덧 10여년 전이다.

당시 드라마가 흥행을 거두면서 주인공이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이후 실제 주인공은 세계적 갬블러였던 차민수 카지노 인터네셔널 그룹 회장(62)으로 밝혀졌다.

차 회장은 “드라마에서 경쟁관계였던 이병헌과 지성은 모두 나를 모델로 재탄생한 케릭터로 극적 재미를 위해 나눠졌었다”라며 “그러나 드라마에서처럼 깡패로 살아본 적은 없는 등 일부 허구적인 부분도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어려서부터 꾸준히 단련한 운동 덕분인지 몸매도 얼굴도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이는 차 회장은 여전히 카지노 관련 업무를 하고 있다.

그는 아직은 폐쇄적이고 소수에게만 열려 있는 국내 카지노 사업을 대한민국의 신성장동력의 하나로 키우고자 하는 꿈을 꾸고 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차 회장은 “한류는 한국을 세계에 알렸으며 이제는 한류를 돈으로 환전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 목표를 향해 올 인(All In)하고 있는 차 회장을 만났다.

◇나의 꿈은 아직 현재 진행형

“카지노라는 게 종합엔터테인먼트산업인데 단순히 도박산업으로만 생각하는 게 안타깝다”며 “전 세계 타짜들이 한국으로 모이는 국내 카지노 컨벤션 센터 건립으로 관광산업과 지역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할 때”라고 차 회장은 힘주어 말했다.

그는 ‘복합리조트 산업&서비스산업’을 망라한 카지노 산업을 육성한다면 1조 원의 세수를 거둘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단순히 어림잡아 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미국 라스베이거스 수입의 15% 정도만 카지노 수입이다. 그 1.5배가 회의 등 각종 컨벤션 수입이고, 또 카지노 수입의 3배가 쇼핑 수입”이라고 설명했다.

또 2002년 중국이 카지노산업을 외국자본에 개방해 만든 마카오는 2010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만9천436달러에 이르렀고, 2005년 카지노산업을 개방한 싱가포르도 2015년에는 1천700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할 것으로 예상되는 성공을 거뒀다고 덧붙였다.

프로 갬블러로 라스베이거스를 주름잡던 차 회장은 세계를 매료시킨 게임실력과 더불어 호텔과 카지노, 쇼핑몰, 공연장, 놀이시설 등의 복합·융합시킨 컨벤션 센터(convention center) 전문가로 손꼽힌다.

차 회장은 20세기 말 10년 이상 탑랭커로서의 갬블러로 활동하며 명성을 얻었지만, 헛된 환상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도박쟁이가 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화려한 카지노 산업을 관통하는 돈의 흐름과 이를 활용한 주변 산업에 대한 관심을 두고, 굴뚝 없는 산업인 관광산업 육성을 위한 다양한 캐리어를 쌓는 데 집중했다.

그는 한국도 서비스 산업의 복합체인 카지노산업을 연다면 국가의 새로운 신성장 동력이 된다고 판단했다.

이후 2000년대 초에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게 외국인들이 돈을 쓰도록 하기 위해서는 카지노를 늘려야 한다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런 때문인지 2005년에 한국관광공사 카지노회사 상임이사가 됐다.

서울힐튼호텔과 부산롯데호텔에서 문을 여는 외국인 전용 카지노의 영업과 객장관리를 한동안 맡기도 했다.

그는 요즘도 ‘카지노인터내셔널그룹’의 회장으로 카지노 컨설팅 업무를 해주고 있으며, 제주도를 마카오나 싱가포르처럼 카지노와 컨벤션, 쇼핑이 복합된 관광의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뛰고 있다.

▲화려했던 프로 갬블러

“1970년대 우리나라는 전력난으로 극장에 네온사인도 켜지 못하게 하고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규제하던 시대였으나, 불야성을 이루는 도시였던 미국의 라스베이거스는 나의 피를 들끓게 만들었다”고 그는 처음 라스베이거스를 찾았을 때를 회상했다.

이어 그는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힌 나에게 남과 다른 일에 올인하자는 꿈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고 갬블러로서의 입문계기를 말했다.

그가 10여년 간 프로갬블러로서 군림하기까지는 수많은 역경과 좌절도 있었다.

그는 “1984년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수중에 18달러 밖에 없었다”며 “20달러 내기바둑으로 돈을 모아다시 카지노에 입성했다”고 말했다.

이어 “100달러로 석 달간 카지노에 올인했는데 1천600달러가 되더라. 5천달러만 마련하면 스왑 밑(swap meet : 벼룩시장 같은 좌판)을 하려고 했는데 따기는커녕 100달러 밖에 남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제 일어나야겠다 했는데 희한하게 그때부터 좋은 카드가 들어와 기사회생했고, 그로부터 한 달간 매일 1천달러씩 땄다고 설명했다.

이미 1970년대 말 카드의 고수인 캘리포니아주립대 포커학 교수 치프 존슨과 단 게롯이라는 스승 2명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가능한 실력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프로갬블로러 활동하면서는 카드 실력이 세계 톱 랭커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있아는 사실을 절감해야 했고, 톱클래스가 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실전경험을 쌓아간다.

2년 뒤인 1986년부터 그는 카지노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해부터 1997년까지 포커게임 수입 1위를 기록했다.

한 해 100만 달러를 넘게 버는 갬블러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는데, 그는 당시 한 해에 250만 달러에서 4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러나 그는 1997년 프로 갬블러 세계를 떠났다.

그의 애틋한 사모곡 때문이다.

차 회장은 “그해 어머니가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가장 귀여워했지만 불효했던 내가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유년시절

“오늘의 나를 만들어 주신 건 바로 어머니”라는 차 회장.

그의 집은 예식장을 하다가 영등포 경흥극장을 운영하기도 했던 부잣집이었다

그랬기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의 어머니는 4남매의 막내로 유복자인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려 했다.

차 회장은 “1950년 전쟁 중에 유복자로 태어난 나에게 어머니는 혼자서도 먹고 살 수 있는 재주를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신것 같다”며 “어린 시절 무려 15가지를 배웠다”고 설명했다.

차 회장은 “당수, 쿵후, 수영, 탁구 같은 운동뿐 아니라 피아노, 기타, 바이올린 등 악기도 부는 것 빼고는 거의 배웠다”며 “한때는 바이올린으로 대학을 가려 했을 정도였으며, 지금은 기타를 연주하며 살아도 밥을 굶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으로 가게 된 계기도, 이후 고독한 승부사로서의 삶을 살아왔던 것도, 현재 카지노 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어려서부터 스파르타 식으로 가르킨 어머니의 영향이 지대했다고 했다.

그의 승부근성도 어려서 만들어졌다.

그는 “어려서 기원에 다닐 때 했던 내기 사탕바둑에서 시작됐다”며 “기원 할아버지가 먼저 사탕을 듬뿍 주고는 내기 바둑을 두자고 했는데, 사탕을 뺏기기 싫어 악착같이 뒀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에게 포커란, 또 바둑이란

그는 프로바둑 4단의 고수이기도 하며 바둑리그 한게임 감독을 수년간 맡기도 했다.

그런 그는 바둑과 포커의 차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는 “포커게임은 나에게 생업이다. 바둑은 내가 제일 사랑하고 좋아하는 게임”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프로바둑기사는 대회에 출전하면 수당과 상금을 받지만, 포커는 참가하면 모든 돈을 잃을 수도 있다고 차이를 설명했다.

그는 “포커는 일종의 생존게임으로 처절하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 그만큼 여유가 없다. 또한 일반인들에겐 돈을 잃는 곳으로 보면 맞다”고 잘라 말했다.

또 “포커가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는데, 사실 실력이 100%다”라는 차 회장.

그는 “바둑이나 골프 같은 운동은 잘 못하는 사람에게 핸디캡을 주지만, 포커는 핸디캡을 주는 경우가 없다”며 “바둑으로 치면 프로나 아마추어나 모두 맞바둑을 두는 셈으로,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들이 같이 포커를 친다는 것은 사실상 학살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대한민국이 카지노를 신성장동력으로 해 또 한번의 도약을 해야한다는 신념을 가진 차 회장이 가고자 하는 길은 이제껏 세상의 거친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워오면서 만들어진 그 무엇인가와 일맥상통했다.

이명관기자 mklee@kyeonggi.com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