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 너희의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라’는 메시지를 전한 키팅 선생님을 만난 후 필자는 새해를 시작할 때, 새로운 다짐이 필요할 때, 예기치 못한 큰 사건을 마주할 때 늘 이 대사를 떠올리곤 한다. ‘카르페 디엠’, 이 말은 자주 ‘메멘토 모리(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경구와 짝을 이뤄 함께 사용된다. 우리가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그렇기에 주어진 시간을 더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와 달리 서양에서는 죽은 자들의 공간인 묘지를 살아 있는 자들의 일상적인 공간 안에 두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교회나 성당, 공원과 함께 조성된 묘지공원 자체가 여행의 목적지가 된 사례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작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단체관광객에게 입장료를 부과한다고 해 논란이 됐던 빈 중앙묘지공원이 대표적인 사례로 1894년 조성된 이 묘지공원은 음악의 도시 빈을 있게 한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등 위대한 음악가들이 묻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화려한 조각상과 저마다 개성 있는 묘비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마치 잘 조성된 조각공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곳에 잠들어 있는 음악가 중 상당수가 생전 감당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낸 스토리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겪는 삶의 고통도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아름답게 승화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된다. 프랑스에도 빈 중앙묘지공원만큼 유명한 페르 라세즈라 불리는 묘지공원이 있다. 파리 시민과 관광객들이 사랑하는 파리의 명소인 이곳은 오스카 와일드, 발 자크, 짐 모리슨, 에디트 피아트, 쇼팽, 모딜리아니, 마리아 칼라스 등을 추모하는 이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러나 유명인의 묘지가 아니어도 이곳은 영원을 살 것처럼 아등바등 사는 현대인들이 ‘죽음’을 기억하고 일상의 삶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사색의 공간이자 교육의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들이 있다. 서울 마포 양화진에는 개화기 우리나라에 의료, 교육, 복음을 들고 선교를 왔던 이들이 묻힌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 있어 우리나라 근현대 역사와 함께 낯선 이방의 땅에서 ‘특별한 삶’을 살았던 이들의 삶을 마주할 수 있으며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로 순교한 사제들과 무명 신자들을 기념하는 절두산순교성지, 서소문성지 역사공원 등은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은 신자들의 삶을 통해 ‘죽는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서소문성지 역사공원은 ‘종교’가 없는 이들도 공간이 주는 ‘위로’와 ‘치유’를 경험할 수 있어 더 많은 사람이 방문했으면 하는 곳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알지만 의외로 가본 사람은 적은 국립서울현충원이나 6·25전쟁에서 전사한 유엔군이 안장된 부산의 유엔기념공원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희생 위에 우리가 서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공간이자 지금 우리가 누리는 ‘안전하고 행복한 일상’을 만들어준 그들의 죽음 앞에 살아있는 자들의 의무와 책임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2025년이 시작된 지 어느새 한 달이 돼 간다. 희망찬 새해를 시작했다고 하기엔 국내외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로 인해 많은 사람이 우울증과 무기력을 토로하고 있는 요즘 주변을 잠시 둘러보면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을 기억하게 하는 장소, 혹은 이야기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부디 각자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더 사랑하고 충실히 살아낼 수 있기를 응원한다.

[문화산책] 원도심, 문화예술로 유혹?

일상적인 송구영신이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다. 어두운 밤거리에는 응원봉의 불빛이 한데 모이고 안타까운 참사로 수많은 이름들이 밤하늘 영롱한 별빛이 됐다. 전 국민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으려니와 뒤따르는 서민들의 현실적인 생활고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쇠퇴한 원도심 지역의 시장 상인, 자영업자들에게는 이번 겨울이 유난히 추울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전쟁의 아픔을 딛고 빠른 경제 성장을 이뤄내면서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됐다. 그 뒤로 원도심의 쇠퇴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 신도시가 조성돼 인구가 분산되면서 원도심은 쇠퇴하고 도시 격차는 점차 벌어진 것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고, 상권이 무너지면서 과거에 중심이었던 원도심은 그 기능을 잃고 쇠퇴한 지역이 됐다. 우리 사회는 원도심의 활성화를 위해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하고 거리에 문화예술을 접목하는 등 여러 방안을 시도해 왔다. 필자가 살고 있는 지역만 해도 꽤나 여러 곳의 복합문화공간이 있다. 이러한 공간들도 역시 시민과 문화예술을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자 하는 목적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취지와는 다르게 시민들에게 큰 공감을 얻지 못함에 따라 활용되지 않고 또 하나의 유휴공간이 돼버린 곳도 더러 있어 아쉬운 마음이 크다. 다른 예도 있다. 어느 시장 귀퉁이에서 연극 공연이 열렸다. 허름한 곳에서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이 공연은 주변 상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며 무대의 막을 내렸다. 눈물을 흘리는 상인들도 있었다. 원도심에도 문화와 예술에 대한 수요가 있음을 보여준 예시가 됐다. 이 사례는 거리 조성 사업에도 영향을 미쳐 문화의 거리가 만들어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간 복합문화공간을 우선적으로 만들면서 또 다른 유휴공간이 돼버리기도 한 몇 사례와는 달리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예술 콘텐츠가 문화거리 조성사업으로 확장된 일들은 원도심도 문화예술로 인해 활성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단, 그 과정에서 시민들의 공감을 얻고 지역의 고유한 문화를 담아내는 것이 중요한 성공 요인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올해에도 여러 지자체에서 문화예술을 접목해 원도심 지역을 활성화하거나 원도심의 빈 건물을 모집해 콘텐츠 창·제작기지로 조성하려는 계획을 언론을 통해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공간을 먼저 구성하고 그에 맞춰 콘텐츠를 모집하는 모양새다. 이미 정형적으로 지어진 건물에 창의적인 문화예술 콘텐츠를 끼워 맞추는 형국이니 일의 순서가 잘못된 것 아닌가. 지역의 특색을 반영한 ‘콘텐츠’와 ‘공간’이 함께 기획될 때 문화예술과 원도심은 더 효과적으로 상호작용 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복합문화공간을 설계하기 이전에 원도심의 구성원, 문화예술기획자, 지역전문가가 함께 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특색을 반영해 이 공간을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에 대해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한다. 공간을 활용하는 사람의 요구가 반영되지 않은 설계는 공간의 존재 의미를 퇴색시키며 자칫 새롭게 태어날 공간을 미래의 유휴공간으로 전락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무형의 창의이며 문화는 자생적 흐름이다. 그리고 지역은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다. 이러한 지역의 문화예술을 원도심의 재생과 접목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본질적인 특성부터 이해하고 그것을 잘 살려내야 한다. 공간이라는 유형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콘텐츠 기획이라는 무형의 결과물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 지역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문화예술 콘텐츠가 기획되고 그것과 어울리는 공간이 존재할 때 원도심이 가진 특유의 매력을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지 않을까.

[문화산책] 왕가의 한(恨)을 품은 사찰, 회암사

아파트 숲이 빼곡하게 들어찬 옥정신도시의 천보산 기슭에는 예사롭지 않은 절터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회암사지라 불리는 이곳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이후 나옹, 무학대사 등 수많은 고승이 거쳐갔으며 조선이 건립된 이후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궁궐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녔다. 현재 남아 있는 터의 규모는 262칸이며 이곳에서 수행하는 승려의 숫자도 3천명에 달했다. 특히 서승당은 현재 남아있는 국내 최대 온돌시설로 한겨울에 수행하는 많은 수도승을 배려하기 위해 지어졌다. 크기와 명성만큼 이 절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회암사에서 출토된 유구를 살펴보면 정교하게 조각된 토수와 용두를 비롯해 궁궐에서만 쓸 수 있었던 청기와, 왕실 전용 관요에서 제작된 도자기가 알려져 있다. 그 화려함이나 자태는 다른 곳과 격을 달리할 정도로 품격이 높지만 예사롭지 않은 유물이 하나 있다. 청동금탁이라 불리는 것으로 처마 끝에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를 내는 종이다. 이 종에는 조선의 평화와 번창을 기원하는 글과 함께 ‘왕사 묘엄존자 조선국왕 왕현비 세자’가 상단에 새겨져 있다. 각각 무학대사와 이성계, 그의 왕비 신덕왕후 그리고 세자인 방석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 절의 위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이 금탁이 중심 전각인 보광전터에서 나온 것으로 미뤄 태조 이성계에게는 이곳이 단순한 종교시설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회암사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넘긴 이후 회암사에 머물렀던 기록이 상당수 등장한다. 이성계에게 회암사는 어떤 의미였을까. 숭유억불, 유교를 국가의 근본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 회암사란 존재는 불교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국가의 중추인 사대부의 탄압에 시달렸던 사찰들은 왕실 권력에 기대어 그 명맥을 이어갔다. 아들 이방원의 난으로 아끼던 막내 방석은 죽고 동료도 잃었으니 권력의 허망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에게는 방원이 더 이상 아들이 아니라 짓밟아야 할 하나의 원수였다. 태조는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고는 그 복수를 위한 발판으로 회암사를 선택했다. 이즈음 세간에는 ‘함흥차사’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왕의 자리에 오른 방원이 아버지와 화해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지만 소식이 끊긴 일을 두고 만들어진 사자성어다. 아비는 모든 것을 앗아간 아들을 지우고 싶었고 자기의 몫을 되찾았다 여기는 아들은 아비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부자관계인 둘 사이의 간극은 갈수록 멀어져 가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왕위를 되찾기 위해 난(亂)을 일으킨다. 회암사가 위치한 양주는 이성계가 터를 잡았던 함흥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재기를 꿈꾸기에 완벽한 입지를 지녔다. 고향에는 그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무장세력이 남아 있기에 그들을 활용한다면 백전무패의 장군이었던 이성계는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라 여겼다. 그는 인척인 조사의를 통해 군대를 일으켰지만 이방원의 과감한 결단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꼼짝없는 아들의 포로로 전락한 이성계는 회암사의 부처에 의지하며 회한(悔恨)에 잠겼다. 무학대사의 조언으로 그는 돌아갈 결심을 한다. 궁으로 돌아온 이성계가 아들을 마주했을 당시 심경은 어떠했을까. 세속의 악연은 이제 접어두고 끊을 수 없는 자식과 그 손자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을 것이다. 자식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해 자부심으로 여겼던 이방원이 아닌가. 그도 어쩔 수 없는 아버지였다. 불교를 꺼리던 아들이지만 아버지를 위해 회암사에 땅을 하사하는 등 호의를 베푼다. 그 인연은 왕가의 대를 이었으며 유생들의 방화로 불타 없어질 때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다. 양주 회암사는 부자지간의 골육상쟁과 용서, 한과 소망을 품으며 후세 사람들에게 말없이 전해 주고 있다.

[문화산책] 응원봉의 숨겨진 불빛

독일의 연금술사이자 약사인 헤링 브란트는 1669년경에 ‘인(燐)’을 발견한다. 인은 최초로 발견된 자체발광 물질이다. ‘포스포러스’라 불리는 인의 영문 명칭에도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 단어 맨 앞에 자리한 ‘포스(phos)’라는 말이 그리스어로 ‘빛’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늘 사용하는 포토그래프의 ‘포토’도 포스에서 온 말이다. 연금술은 물질 안에 본질적인 에너지가 숨어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숨겨진 에너지는 불완전한 물질을 완전한 상태로 바꿀 때 나온다. 연금술적 관점에서 볼 때 불완전한 소변을 완전한 인으로 바꿀 때 빛이 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다. 이때 불은 그 빛을 해방하는 도구가 된다. 불은 불순물을 제거해 순수한 본질만 남기기 때문이다. 비금속인 인과 달리 금속인 철은 상대적으로 녹이 스는 불완전한 물질이다. 연금술에서 혼돈과 어둠의 상태를 뜻하는 니그레도(부패, 흑화) 단계는 그러한 불완전함의 시작을 나타낸다. 불을 만나기 전의 철은 불완전한 혼돈과 어둠의 상태 그 자체를 의미한다. 녹이 슨 철의 붉은색은 그래서 인간의 세속적이며 불완전한 측면을 더욱 강조하는 은유가 되기도 한다. 전쟁의 신이면서 농업의 신이기도 한 마르스(mars)의 이름이 철을 상징하게 된 이유는 철은 불을 만나면 유용한 농기구가 될 수 있고 치명적인 전쟁도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대인들에게 붉게 빛나는 별로 관찰됐던 행성의 이름을 마르스를 따 ‘마스’라고 한 것은 불완전한 철이 지닌 세속적인 의미와 더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한자식 표기인 화성에 ‘불 화(火)’자가 있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결국 인은 발광체의 줄기 물질이 됐다. 이를테면 1966년 닉 홀로냑 주니어는 발광다이오드(LED)를 발명해 특허권을 취득했고 1973년 에드윈 챈드로스는 야광봉을 발명해 특허권을 얻었다. 거기에는 모두 인으로 개발한 새로운 물질이 관여한다. 애초에 군사 및 재난, 조난의 응급 구조를 목적으로 발명된 취지와 달리 야광봉은 1980년대 나타나기 시작한 ‘레이브 신(Rave Scene)’이라는 파티 열풍에 휩쓸려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레이브 신이란 어떤 장소에서 많은 사람이 하우스 음악에 맞춰 소리도 지르고 노래 부르며 춤도 추는 대규모 이벤트 혹은 그 파티 현장을 말한다. 영국에서 레이브 신은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지만 혹자에 따르면 이는 결코 무의미한 쾌락적 현실 도피가 아니라 레이브 경험이 주는 연결성, 의식의 변화된 상태, 유토피아적 사회 모델의 구체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마치 민주주의에서의 집회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듯한 이 주장은 레이브 현상이란 현대 사회의 새로운 부흥운동임을 증언한다. 2024년 12월, 한국에서 야광봉은 LED를 장착한 응원봉이 돼 민주주의의 빛을 강하게 드러냈다. 그 빛은 전쟁의 신 마르스의 이름에서 파생된 또 다른 말, ‘마셜’(martial)이라는 용어에 ‘로우(law)’라는 말이 붙을 때 변질된, 다시 말해 농업의 신은 죽고 전쟁의 신만이 살아남아 그 위세를 떨치려는 권력의 니그레도 단계를 마주하면서 더 밝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빛은 불이 돼 부패한 녹슨 철(mars)을 끓이고 태워 버렸다. 응원봉의 빛이 흑화한 그 불순물(martial law)을 불태우자 완전한 민주주의의 불빛은 그렇게 되살아났다.

[문화산책] 변하지 않는 것의 가치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마지막으로 열정을 뿜어냈던 오베르쉬르우아즈에 가면 그가 그렸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강산이 수차례 변해도 마을 곳곳에 자리한 성당과 저택, 심지어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밀밭까지 세대를 뛰어넘어 그 시절과 교감하는 감동을 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고흐를 자랑스러워하는 이 마을 주민들의 수많은 노력이 담겨 있다. 주요 장소마다 작품이 그려진 안내판을 비치해 고흐의 눈과 우리의 시각에 비친 풍경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고 고흐를 찾아다니는 순례자들을 위해 최대한 편의시설을 제공한다. 근래에 전쟁과 각종 개발로 천지가 개벽한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떨까. 일제강점기를 거쳐 폐허가 됐다가 복원으로 되살아난 고궁은 관람객들의 편의와 현실을 고려한 재창조에 가깝고 양반의 행차를 피해 다닌 피맛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땅에 귀를 기울이면 지하에 잠들어 있는 옛터들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급격한 발전으로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우리는 지나가 버린 옛것의 가치를 조금씩 갈구하고 있다. 낡은 기와집만 남아 있어 슬럼화되던 황리단길은 첨성대와 불국사보다 붐비는 경주 최고의 관광지가 됐으며 폐공장과 버려진 집은 독특한 공간을 지닌 카페로 사랑받고 있다.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북촌과 서촌은 항시 외국인들로 붐벼 몸살을 앓는 중이다. 사라져 가는 옛 골목길을 재조명하고 젊은 세대의 감각에 맞게 카페와 상점이 잇따라 들어서며 활성화된다면 무엇보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례를 제외하고 천편일률적인 구성, 건물주들의 임대료 상승으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션이 겹쳐 그 열풍이 사그라든다면 거리는 이내 빈 간판만 덩그러니 남은 채 을씨년스러움만 풍기게 된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걸까. 오베르 마을의 고흐처럼 그곳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가치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튼튼한 스토리텔링을 갖추지 못하고 유행만을 좇는다면 이내 인기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의 본질은 화려한 치장과 그럴듯한 외양이 아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시대를 관통하는 뼈대가 핵심이다. 경주의 황리단길이 날이 갈수록 사람들로 붐비는 이유는 담장 너머 신라 천년의 고분군이 이곳의 정체성을 확연히 증명하기 때문이고 수원화성의 행리단길이 변함없이 사랑받는 이유는 정조 이래 굳건한 성곽이 예나 지금이나 자리를 지켜서다. 켜켜이 쌓이는 세월의 때만큼이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묻어 있기에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자아낸다. 4대 강 이후 남한강의 경관은 완전히 변했지만 여전히 가장 사랑받는 공간은 여강 절벽을 굽어보는 자리에 들어선 여주 신륵사다. 절에서 강의 경관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이 공간에 들어선 다층전탑은 고려시대 이래로 이곳을 지나는 뱃사공의 안전한 항해를 기원했다. 강 건너에 호텔이 들어서고 강변의 모래밭은 점점 사라지고 있지만 신륵사와 전탑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존재들 덕분에 나루터를 오가던 황토돛배가 여행객을 싣고 예전의 수려했던 경관을 만끽할 수 있다. 흔들다리나 케이블카, 각종 위락시설로 치장해도 잠시 사람들의 흥미를 끌 뿐 애물단지로 전락해 버린 케이스가 부지기수다. 우리는 그동안 본질을 유지하고 있는 가치는 애써 무시한 채 시류에 편승한 것이 아닐까.

[문화산책] ‘K밴드 붐’과 지속가능한 ‘딴따라질’

최근 대한민국 음악 시장에서 DAY6와 QWER이 주목받고 YB와 잔나비 같은 베테랑 밴드들이 여전히 음악 페스티벌의 중심에 서며 밴드 음악의 부흥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K밴드 붐은 정말 기대해볼 만한 걸까. 신진 밴드인 DAY6와 QWER의 활약이 대단하다. DAY6는 3월 발매한 미니앨범 Fourever의 타이틀곡 ‘Welcome to the Show’로 벅스와 바이브 국내 급상승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HAPPY’는 멜론 톱100에서 1위를 차지했다. QWER 또한 9월 발매한 미니 2집 Algorithms Blossom의 타이틀곡 ‘내 이름 맑음’이 발매 직후 벅스 실시간 차트 1위와 멜론 톱100 2위, 유튜브 뮤직 주간 차트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꾸준한 인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이들의 성공 사례는 매우 특이한 케이스다. DAY6는 대형 기획사의 지원을 받으며 아이돌 팬덤과 밴드 팬덤을 동시에 겨냥하는 전략으로 성공을 거뒀고 QWER은 BJ(방송 진행자) 출신이라는 독특한 배경과 참신한 콘셉트로 주목받으며 독자적인 팬층을 토대로 빠르게 팬덤을 확장했다. 이는 일반적인 밴드들의 성공 사례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대부분의 밴드 활동은 어떠할까. “주 수입원은 직장이고 음악이 본업이에요.” 과거 인디밴드를 인터뷰할 때 자주 듣던 이야기다. 물론 스타가 되고 많은 수익을 얻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오랜 기간 음악 활동을 즐기는 데 목적을 둔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하거나 소규모 공연을 개최하며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고 당장 작업한 곡이 음원 차트에 오르기를 기대하기보다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서서히 인지도를 넓혀 간다. 과거 인디밴드가 펑크 음악을 중심으로 ‘저항과 반항’을 내세웠다면 현재는 다양한 장르를 통한 ‘스타일과 패션’이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가사와 사운드 또한 과거의 진지하고 난해한 영역에서 벗어나 간단한 코드 구성과 가벼운 사운드로 변화하고 있다. 권위 있는 대중음악 시상식 중 하나인 한국대중음악상에서도 인디밴드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사례들도 많아졌는데 최근에는 ‘실리카겔’, ‘여유와 설빈’, ‘서울전자음악단’, ‘마하트마’ 등의 밴드들이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밴드의 기본인 록 음악이 재즈같이 다양한 장르로 파생되며 음악적 도구를 확대하고 실험적 사운드를 추구한 점은 밴드 음악이 단순히 장르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을 넘어 문화적 자산으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다매체 시대에 대중음악 취향의 세분화와 아날로그적 감정 소통이 중요해진 상황에서 다양한 밴드 음악을 경험할 수 있는 페스티벌 시장이 부상한 점 역시 밴드 신과 관객들에게 매우 반가운 일이다. 새로운 세대에게 밴드 음악이 경험해보지 못한 ‘쿨함’ 그 이상, 이하가 아니라 해도 또 다른 판타지와 붐업이 가능하다는 점도 각종 공연과 페스티벌 시장을 통해 확인됐다. 이에 따라 장기적인 생활예술 지원 비전을 마련하고 밴드 음악이 미래 세대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미리 기회를 제공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는 K밴드 붐을 기대하는 차원에서 반드시 추진해야 할 일이다. 기획사의 도움도 없고 매니지먼트 개념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음악으로 무언가를 표현하고, 그 결과물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면 이는 생활예술의 정수다. 혼자 음악을 연주하며 만족한다면 단순한 취미로 끝날 가능성이 크지만 이러한 활동이 관객과 소통하며 전달될 때 ‘딴따라질’에 힘이 실리고 ‘창작과 예술’로 가는 길이 더욱 넓어진다. DAY6와 QWER의 사례를 통해 단순히 ‘밴드 붐’을 기대하기보다는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을 지원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문화산책] 블랙마리아 그리고 영화

‘패디 웨건’이라고 알려진 범죄자 수송차 이름의 유래는 1830년대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용어는 대체로, 악의 없이, 아일랜드인과의 연관성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북미 도시 지역에는 아일랜드계 경찰관이 많았는데 마침 ‘패디’라는 용어가 아일랜드어로 패드레이그(영어로는 패트릭)의 줄임말이어서 그렇게 불리게 됐다는 설과 당시 경찰에 연행된 사람들이 대부분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어서 그렇다는 설도 있다. 미 동부 해안의 보스턴 항만 지역에는 많은 수의 아일랜드계 경찰과 더불어 음주 사건이나 폭행 사건에 연루된 많은 수의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있었는데 그들이 연행될 때 아일랜드계 경찰이 운전하고 아일랜드계 범죄자들이 수송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그렇게 불리게 됐다는 설도 있다. 패트롤을 줄여 붙인 말이 패티 왜건이었는데, 당시 아일랜드계인들의 영향으로 패티를 패디로 바꿔 불렀다는 설도 있다. 재미있는 건 패디 웨건이 생뚱맞게 ‘블랙 마리아’라고도 불린다는 사실이다. 1830년대 경찰차가 운용되기 시작했을 때 보스턴 경찰관들이 한 흑인 여성에게서 큰 도움을 받았던 것을 기리기 위해 ‘마리아 리’라는 당사자의 이름을 따 ‘블랙 마리아’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실제로 마리아 리는 그 지역에서 선원들을 위한 하숙집을 운영하던 흑인 여성으로 큰 키와 장정 못지않은 힘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다. 그중 하숙집에서 소란을 피우던 세 명의 난폭한 선원을 마리아 혼자서 경찰서로 연행해 갔다는 일화가 가장 유명한데 이는 실제 신문기사 자료로도 남아 있어 신빙성이 매우 높은 편이다. 그밖에 정의로운 이런 이미지와 달리 뉴욕주 버펄로강, 이리 운하 지역에 위치한 더그스 다이브의 난폭한 손님이었던 건장한 체격의 골칫거리 흑인 여성을 강제 연행한 것이 계기가 됐다는 설도 있고 북미지역의 주요 경마 경주에서 우승한 말의 이름이 블랙 마리아인데 때마침 경찰 수송 차량이 역마차의 기능을 차용하기 시작하면서 그 말의 이름을 따왔다는 설도 있다. 한편 비슷한 시기,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몬태나주 캐스케이드에는 우편물 강도들에 맞서 맹활약하던 인물이 있었다. 그 사람은 역마차를 이용해 가장 험난한 지형과 악천후 속에서도 우편물을 배달해야 하는 초고강도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수배를 피해 떠도는 각종 범법자들로부터 우편물을 지켜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늑대, 곰, 퓨마 같은 치명적인 야생동물로부터도 자신과 우편물을 지켜내야 했다. 성공적인 임무 수행은 결국 미국 우편 공사로부터 스타 루트(역마차를 이용한 우편물배달 서비스)의 임대계약을 따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메리 필즈였으며 마찬가지로 덩치가 매우 크고 힘이 센 흑인 여성이었다. 유사하게도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보며 ‘역마차 메리’ 또는 ‘블랙 메리’라고 불렀다. 1892년. 뉴저지주 웨스트오렌지에 있는 토머스 에디슨의 연구소 소속 연구원인 윌리엄 케네디 로리 딕슨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건축 공간을 설계한다. 그가 설계한 이 공간은 실제 움직임을 시간으로 제약하고 현대 시각이미지 생산의 새로운 개념과 경험 창출에 기여했다. 이곳은 향후 세계 최초의 영화 스튜디오로 더 잘 알려진다. 혁신적인 이 공간의 이름도 ‘블랙 마리아’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센 흑인 여성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검은색과 폐쇄적인 공간 그리고 육체적, 시간적, 시각적 통제만이 남은 범죄 수송차의 기술적 구조와 형태가 외관상 매우 닮아서다. 그 이름이 영화와 만난 지 130여년이 지난 지금, 손바닥만큼 작아진 스마트폰 화면에 들어간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블랙 마리아에 탑승한 범죄자의 느낌을 육체적, 시간적, 시각적으로 자각하기 시작했다.

[문화산책] 애기봉전망대에서 스타벅스를!

10월 마지막 날, ‘스타벅스, 11월 김포 애기봉전망대 입점’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기사를 읽는 순간 ‘애기봉’과 ‘스타벅스’의 이질감에 살짝 당혹스러웠던 것도 잠시 ‘애기봉에서 스타벅스라니’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애기봉이 어떤 곳인가. 북한 개풍면 해물선전마을과의 거리가 불과 1.4㎞로 남한에서 가장 가깝게 북한을 볼 수 있는 곳, 게다가 일반 안보관광지에서 애기봉 평화생태공원으로 재탄생했다고 해도 여전히 해병대의 까다로운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닌가. 그런 곳에 세계에서 가장 큰 다국적 커피 전문점이 입점한다니 꽤 놀라운 소식이다. 인천 교동도부터 강원도 고성까지 접경지역에는 북한을 조망할 수 있는 꽤 많은 안보관광지가 있다. 교동도의 망향대, 인천 강화의 평화전망대, 파주 오두산전망대와 도라산전망대, 연천의 상승전망대, 태풍전망대, 열쇠전망대, 철원 통일 전망대와 소이산전망대, 양구 을지전망대, 화천 백암산 케이블카전망대,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이들 중 일부는 군부대 내 시설로 우리나라의 분단 현실을 더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고 어떤 곳은 이미 관광지화돼 누구나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됐다(특히 철원평야와 김일성고지 등 이색적인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소이산전망대는 노동당사 등 근대문화재 답사를 묶어 여행하기에 좋아 꼭 한번 가볼 것을 추천한다). 애기봉전망대는 이런 안보관광지 중에서도 북한을 가장 생생하게 볼 수 있는 특별한 곳이다. 과거 애기봉전망대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정상에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점등식을 하는 뉴스를 본 기억이 있다. 그때 뉴스에서 본 애기봉전망대는 낡고 조금은 무서운 안보관광지였는데 한참 후 애기봉전망대를 갔을 때 조강과 북한의 전경이 너무 아름다워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마 애기봉이 보유한 아름다움을 느낀 게 나뿐은 아니었는지 2021년 애기봉전망대는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다양한 문화전시와 공연,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또 크리스마스트리를 본떠 만든 생태탐방로를 통해 아름다운 조강과 북한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올 8월부터는 매주 마지막 주 토요일 조강의 노을과 야경을 감상하며 문화체험을 즐길 수 있는 야간개장 프로그램을 특화해 운영 중이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평범한 일상 중에 애기봉 평화생태공원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빛과 음악 소리들을 북한의 주민들도 보고 들을 수 있을까. 조심스레 그들에게도 일상의 소소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 전해지기를 소망해본다. 몇 해전 인기를 끈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선 우연한 계기에 정을 쌓고 헤어진 남북의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는 모습이 연출됐다. 남으로 돌아온 여주인공은 자주 북한이 보이는 산에 올라 한참 북쪽을 바라보다 오고, 북쪽의 사람들은 가깝지만 닿을 수 없는 남쪽을 그리워하고. 애기봉을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그 드라마 속 상황들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애기봉이나 문수산 정상에선 서울의 북한산보다 개성의 송악산이 더 가깝게 느껴지니까. 애기봉에 들어서는 스타벅스는 10석 내외의 작은 규모라고 한다. 그러나 어쩜 전 세계 약 3만5천개의 점포 중 스토리텔링에 있어서는 가장 특별한 곳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다양한 스타벅스 기념품과 이벤트도 기획된다고 하니 스타벅스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애기봉 평화생태공원을 찾았으면 좋겠다. 남북의 갈등이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이때 그 누구도 서로의 평범한 일상이 깨지는 걸 원하지 않고 있음을 되새기며 평화를 위한 노력을 다시 한번 다짐하는 장소가 되기를 기원한다.

[문화산책] 축제는 祝祭다

축제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올해도 많은 축제가 열렸고 이곳저곳 다니며 축제를 만끽했다. 관객으로 참여한 축제가 있는가 하면 음악감독으로, 연출자로 참여한 것도 있다.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콘텐츠들이 있다. 올해는 드론쇼가 그 케이스인 듯하다. 유명 가수들의 공연은 아직도 축제의 백미로 인식된다. 맛있는 음식도 축제의 큰 즐거움을 담당한다. 지역만 다를 뿐 이곳저곳 같은 프로그램에 같은 가수, 심지어 같은 메뉴의 푸드트럭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이번 축제의 계절에 잊지 못할 두 가지가 있다면 ‘2024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과 ‘아트밸리 아산 제2회 이순신 순국제전’이다. 서울과 수원, 화성에서 한날에 벌어지는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은 그 역사성에서 우선 빛나는 역작이다. 아트밸리 아산 제2회 이순신 순국제전과 더불어 지역과 축제가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의미있는 행사였다. 정조대왕 능행차는 수원시민의 자부심이었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았다. 보통의 행사장에서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시민참여 축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인데 이는 이순신 순국제’에서도 보이는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이다. 특히 정조대왕과 혜경궁 홍씨는 매년 시민들을 대상으로 선발대회가 열린다. 올해 선발대회도 시민들의 큰 호응이 있었다. 축제는 모두가 즐기는 것이지만 이를 만드는 과정에도 시민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새로운 시민 참여 형태뿐만 아니라 시민의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참관’이자 ‘구경’이었던 것에서 ‘고대’하고 ‘참여‘하는 축제로 참여 인식의 변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동안 이 행사들을 준비해온 이들의 노고를 짐작하게 한다. 그들은 무엇보다 역사적인 고증과 지역사회에 맞는 현실적인 재현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복식 하나하나 역사적 고증을 통해 철저히 재현해 내려 논의를 거듭했다. 이러한 노력은 이순신 순국제전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덕수 이씨 종친회와 긴밀한 협의 과정을 거치며 전문가들과 협업해 장례 행렬과 제의를 구성해냈다. 하루 종일 울려 퍼진 만가 행렬의 말미에는 시민들과 함께하는 대합창을 창작해 시민들의 참여를 극대화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지역의 고유한 문화의 한 페이지를 써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런 과정이 쉽게 될 리 없다. 여러 전문가와 논의와 합의를 이뤄야 하고 지역주민들과 협의도 거쳐야 한다. 이런 것이 생략되면 축제는 고유한 정체성을 잃게 되고 시민 참여 축제가 아닌 구경 축제가 되기 십상이다. 지자체나 정부의 과도한 관여 또한 지역공동체 축제의 소멸을 자초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모객되거나 지역경제가 활성화되는 것만을 축제의 성과 지표로 보면 이런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시민들의 자발성과 창의적인 기획이 합해질 때 공동체 고유의 문화를 만들고 발전시킬 수 있다. 이를 축적하는 과정이야말로 축제의 본질적 성과라 할 수 있다. 결국 축제는 지역의 ‘고유한’ 정체성과 문화를 바탕으로 ‘공동체’가 함께 ‘축(祝)’하하고 빌거나 ‘제(祭)’의하며 벌이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 모든 일들은 일정한 공간을 통해 이뤄지고 지역 공동체의 고유한 문화로 정착되기 마련이다. 그 과정을 함께 즐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축제의 의미일 것이다. 축제를 만드는 사람들 역시 공동체와 함께해야 한다. 지역 공동체의 문화와 그 고유한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재구성하며 재창작하는 것.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지향해야 할 ‘祝祭’의 본질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

[문화산책] 안일함이 낳은 ‘역사의 비극’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은 주말마다 줄지어 찾는 행락객들로 몸살을 앓는다. 서울에서 가까워 울창한 자연을 마주하며 백숙, 손두부, 산채정식 등 저마다 솜씨를 자랑하는 식당이 모여 있다. 하지만 훈민정음, 거북선, 광개토태왕비, 동궁과 월지 등 역사의 화려한 순간을 간직한 유산들과 대조적으로 이 산성에는 굴욕이라는 낙인이 깊숙이 찍혀 있다. 다른 나라의 군주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한반도까지 침입한 사례는 두 차례 있었다. 그러나 조선을 빠른 시일에 정벌해 후방을 든든히 하고 시들해져 가는 중원을 정복하고 싶었던 청나라의 홍타이지(청 태종)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이런 사태를 예방하거나 막을 순 없었던 것일까. 일본의 침략을 겪은 선조에 이어 광해군은 사르후 전투로 애써 키운 군대를 잃긴 했지만 명과 후금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며 균형을 유지했다. 하지만 인조 정권으로 바뀌자마자 그 균형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재조지은(再造之恩), 임란 때 조선을 구원한 명나라를 어버이처럼 여기고 북방의 후금(청나라)은 오랑캐 취급을 하며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호전적인 홍타이지는 즉위하자마자 그의 사촌 아민과 3만 군대를 파견해 황해도까지 파죽지세로 성들을 격파해 나간다. 인조는 강화로 슬그머니 피란해 형제의 예로 일단락 지었지만 위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젊고 기세등등한 대간들은 대의라는 허구를 쫓아 강경한 자세를 잃지 않기를 강권했고 공신들과 임금은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외교, 방어 어느 것 하나 차일피일 미루기를 반복했다. 만일 청나라가 침략해 온다 하더라도 강화도에서 피란을 가 있으면 임란처럼 의용군과 명나라가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만 갖고 있었다. 이미 명에서 항복한 세력을 통해 수군과 신무기인 홍이포를 입수한 홍타이지는 황제로 등극해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친히 조선을 정복하기로 결심한다. 1636년 12월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청의 10만 대군이 건너며 병자호란이 시작됐다.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전진한 그들은 인조가 대피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홍제원(서울 은평)을 지난 상황이었다. 강화도를 포기하고 남한산성에 웅거해 45일간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척화와 주화의 논쟁만 가득했다.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조선을 구할 방안은 중요하지 않았다. 왕조의 존망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휘청거리는 상황 속에서 왕권을 위협할 장군들에게 지휘권을 허락할 수 없었다. 멀리 다가오는 태풍의 존재는 애써 외면한 채 눈앞의 잔불만 끄기 바빴던 것이다. 사람은 버틸 수 있지만 말은 버틸 수 없다는 명분으로 추위를 피하기 위한 가마니를 거둬 말 먹이로 쓰고 늙은 대신의 어리석은 주장으로 삼백 군사가 북문에서 전멸을 당하는 동안 왕과 신료들은 그저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홍이포가 행궁의 지붕을 박살 내고 강화가 청에 함락되는 순간 항전을 주장하던 신료들은 현실로 돌아왔다. 세 번 무릎 끓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며 청의 속국이 된 것이다. 그들은 지나간 역사의 사례만 생각하고 변해 가는 세상의 흐름을 깨우치지 못한 채 큰 치욕을 맞이하게 됐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교훈을 배운다. 하나 현재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만약 자의적인 해석에 빠져 착각으로 미래를 유추한다면 과거에 평생 얽매일지도 모른다. 이 모두 ‘어떻게든 되겠지’가 빚어낸 안일함의 참혹한 결과다.

[문화산책] AI와 음악산업의 미래

인공지능(AI)이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면서 음악 산업 역시 AI의 발전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AI 작곡 프로그램은 이미 음악 창작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기술적 발전을 넘어 창작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AI 작곡 프로그램은 기존 곡들을 학습해 새로운 멜로디를 자동으로 생성하거나 특정 스타일을 모방한 음악을 만든다. 과거에도 작곡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AI 기술을 창작에 활용해 왔다. 1950년대부터 알고리즘 기반 작곡 방식이 있었고 1980년대 EMI(Experiments in Musical Intelligence) AI 프로그램은 다양한 작곡가의 스타일을 학습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곡을 작곡했다. 1990년대 신경망 기반 작곡 프로그램은 리듬, 화성, 멜로디를 학습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냈고 2010년대 AI 기반 음악 플랫폼 앰퍼뮤직(Amper Music)은 사용자가 원하는 스타일과 분위기에 맞춰 새로운 음악을 생성하는 도구로 활용됐다. 이처럼 AI 기술은 과거부터 실험적 도구이자 창작 도우미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현재 AI 음악 플랫폼 발전의 기반이 됐다. AI가 제공하는 이러한 기술은 작곡가에게 반복적인 작업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부분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최근 많은 창작자가 활용하는 AI 플랫폼 수노(Suno)는 실시간 음악 생성, 사용자 인터랙션, 다양한 장르의 음악 생성 기능을 제공하며 전문적인 작사·작곡 지식이 없어도 음악을 창조하는 도구로서 획기적인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AI는 단순히 데이터 기반의 모방을 넘어 독특한 창작물을 제시해 인간과의 협업을 강화한다. 이로 인해 창작자들은 새로운 스타일을 실험하거나 음악적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된다. AI가 창작에 개입하면서 음악 창작자의 역할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작곡, 편곡, 녹음 등 모든 과정을 하나의 작곡가나 팀이 담당했으나 이제는 AI가 일부 작업을 분담하면서 창작자의 역할이 넓어지고 있다. 창작자는 AI가 제안한 아이디어 중에서 선택하고 이를 인간의 감성과 경험으로 다듬는 새로운 작업을 한다. 이는 창작자가 단순 기술자가 아닌 더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존재로 변모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AI가 인간의 창작을 대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AI가 과거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음악이 인간 고유의 감성을 지켜낼 수 있을지, AI가 창작을 기계화할지에 대한 논의도 있다. 전문 영역에서는 악기별 스템 파일 분리, 믹스, 마스터 등의 영역에서 한계가 있어 현재 스케치 용도로 사용되지만, 기술 발전 속도를 고려할 때 이 역시 극복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AI가 창작의 한 축으로 자리 잡으면서 음악 창작의 미래는 더욱 다채롭게 변화할 것이다. 첫째, AI 기술의 발전으로 음악 창작이 민주화될 가능성이 높다. AI를 활용해 누구나 쉽게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 수 있으며, 이는 아마추어 창작자의 참여를 촉진하고 음악 시장의 다양성을 증대시킬 것이다. 둘째, 맞춤형 음악 서비스의 발전이 기대된다. AI는 사용자의 음악 취향과 감정을 분석해 개인화된 음악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청중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창작자는 청중의 피드백을 실시간으로 반영해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셋째, AI와 인간의 협업이 더욱 심화될 것이다. AI가 자동으로 음악을 생성하는 것을 넘어 창작자와 AI가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음악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미 많은 아티스트가 AI와 협업한 곡을 발표하고 있으며 이는 더 복합적이고 독창적인 음악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고 있다. AI와 음악의 결합은 단순한 기술 혁신을 넘어 창작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AI는 음악 산업의 다양한 영역에서 창작 효율성을 높이고 인간 감성과 결합해 새로운 음악적 경지를 열어 가고 있다. AI 기술이 가진 데이터 의존성에 의한 창의성 한계, 저작권 문제, 연관 직업군 감소 등 다양한 문제점이 있지만 AI 기술의 활용법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러한 문제점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인간과 AI의 균형 잡힌 협력과 문제점 해결은 어디까지 가능할지, 새로운 형태의 창의성을 넘어 AI 기술과 음악이 만들어갈 미래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문화산책]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얼마 전 타계한 컨트리뮤직의 거장이자 배우인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 미국 문화계에 끼친 그의 깊은 영향력은 밥 딜런과의 관계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0년대 중반 컨트리뮤직의 본거지 내슈빌에 정착한 후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건물 관리인으로 일할 당시 일곱 번째 앨범인 ‘Blonde On Blonde’의 녹음 작업에 빠져 있던 딜런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경험이 그와 딜런의 첫 인연이었다. 음악적 성공 이후 다시 만난 자리에서 크리스토퍼슨은 열렬한 팬임을 자처하며 딜런과 음악적 친분을 쌓기 시작한다. 둘이 함께한 본격적인 첫 작업은 음악이 아니라 영화였다. 시작은 실존 인물인 무법자 ‘빌리 더 키드’를 다룬 샘 페킨파 감독의 서부극 ‘관계의 종말(원제 Pat Garrett & Billy The Kid·1973년)에 크리스토퍼슨이 캐스팅되면서부터다. 당시 감독은 크리스토퍼슨의 음악적 색깔이 빌리 더 키드의 강렬한 남성미, 그리고 자유롭지만 고독한 영혼과 반항적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주저 없이 그를 낙점한다. 이후 크리스토퍼슨은 감독에게 딜런을 영화 사운드트랙 작곡가로 추천했는데 딜런의 타이틀곡을 들은 페킨파 감독은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게다가 딜런의 시적이며 반항적인 이미지가 감독이 추구하는 서정적이면서 폭력적인 서부극 분위기에 잘 녹아들 수 있을 것이라며 또다시 설득해 이번에는 ‘앨리어스’라는 캐릭터를 딜런에게 연기하게 했다. 이 영화에서 딜런이 작곡한 노래 중 하나가 바로 ‘Knockin' on Heaven's Door’다. 후에 이 노래는 딜런의 대표곡 중 하나이자 버디 무비의 상징적인 음악이 된다. 1962년 발매된 첫 번째 앨범 ‘밥 딜런’은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하지만 1963년 발매된 두 번째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은 달랐다. 여기에 수록된 노래 ‘Blowin' in the Wind’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노래는 단순한 멜로디에 깊이 있는 사회적 메시지를 산문 형식으로 담아내 미국의 60년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시민권운동과 반전운동의 상징적인 곡이 됐다. 혹자는 이 노래가 발표된 그해가 바로 미국에서 ‘60년대’라는 용어가 선취한 새로운 문화적 현상의 시작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 카운트다운에 돌입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Blowin' in the Wind’는 딜런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폴 로브슨의 ‘No More Auction Block’ 멜로디를 사용해 작곡했다. 노예제도에서 벗어나기까지 수없이 죽어간 흑인들의 영혼을 달래는 동시에 거기에서 벗어난 그들의 자유를 이 노래는 축복한다. 하지만 그들이 맞이한 것은 60년대에 만연한 인종적 불의다. ‘짐 크로우 법’. 흑백 인종 간 분리를 합법화한 이 법은 그들이 자축하는 자유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Blowin' in the Wind’는 이런 면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깊고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20세에 불과한 백인 남성이 당시 흑인들이 느꼈던 혼탁한 좌절감을 정확하게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짐 크로우’는 1830년대 백인이 검은색으로 얼굴을 덧칠해 흑인을 연기하는 코믹극, 민스트럴쇼의 한 캐릭터 이름이다. 130여년이 지난 뒤 딜런은 백인이 노래로 흑인의 정서를 덧칠해 그들에게 영적인 위로를 선사한 전혀 다른 의미의 ‘짐 크로우’가 됐다. 앞에 이름과 뒤에 이름 사이에 고독하지만 자유분방하고 저항의 힘을 지닌 문화적 빌리 더 키드가 존재한다. 크리스토퍼슨과의 교류로 딜런은 인종과 문화 사이에 놓인 거대한 공감의 다리를 더욱 예민하게 깨달은 것이다. 그의 노벨 문학상은 그 다리 위에 서서 역사의 자각과 자기 존재 탐구의 미묘한 균형을 끝끝내 감지하려 한, 의미 측정이 불가능한 질문과 끈기를 향해 안도의 박수를 보낸 것일지 모른다. 나는 한강 작가의 이번 노벨 문학상 수상 이유도, 어쩌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문화산책] 한 걸음 한 걸음 대한민국을 발견하라

지난 9월23일, 문화체육관광부가 2009년부터 추진한 ‘코리아둘레길’의 전 구간이 개통됐다. 코리아둘레길은 우리나라 외곽을 잇는 초장거리 걷기여행길로 동해안(해파랑길), 남해안(남파랑길), 서해안(서해랑길), DMZ접경지역(DMZ평화의 길) 4개 구간(294개 코스) 약 4천500㎞에 달한다. 2009년 시작한 동해안 해파랑길이 2016년 개통된 이후 나머지 3개 구간 개통까지 8년의 시간이 더 흘렀다. 필자가 일하는 기관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의뢰를 받아 동해안 탐방로 조성 타당성조사 연구를 수행했고 2017~2019년엔 필자가 남해안, 서해안, DMZ평화의 길 프로젝트에 참여했기에 코리아둘레길 전 구간 개통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필자가 프로젝트를 시작한 2017년엔 2000년대 초반 제주올레의 선풍적인 인기에 편승해 전국에 경쟁적으로 조성된 ‘걷기여행길’이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않아 자주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필자 역시 4천500㎞에 달하는 초장거리 걷기여행길이 과연 실효성이 있는 사업일지, 지역연계와 체류관광 증진에 도움이 될지 고민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코리아둘레길은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닌 지역의 길을 연결하고, 새로운 브랜드와 콘텐츠로 기존 길의 매력을 제고하는 사업으로 추진됐다. 그간 이 길이 지역을 더 가깝게 만나고, 치유 경험을 제공하는 관광 콘텐츠가 될 수 있도록 참 많은 사람들이 애를 썼다. 노선 조사에 참여한 열정적인 걷기 동호인들, 코리아둘레길 지킴이들, 좋은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위해 애쓴 단체들까지. 15년간 정권이 몇 번 바뀌는 중에도 변함없이 사업의 취지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애쓴 문체부와 지자체 공무원 및 한국관광공사 관계자들의 수고도 참 많았다. 가끔 출장지나 여행지에서 코리아둘레길임을 알려주는 리본과 스티커 등을 마주치면 지난 15년간 이 길에 뿌려진 많은 수고에 감사하게 된다. 코리아둘레길은 참 많은 매력을 갖고 있다. 지역의 대표 관광자원을 지나고, 종일 바다만 바라보며 걷기도 하며, 소박한 포구 어촌마을을 자주 지난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가파른 산길을 따라 걷다가 숨 막히게 아름다운 경관을 마주하고, 해를 피할 그늘 하나 없는 길을 따라 걷다가 인생 노을을 만나기도 한다. 시끌벅적한 지역 전통시장을 지나기도 하고, 철책을 따라 걸으며 새삼 우리나라가 분단국가임을 실감하기도 한다. 때로는 아주 쾌적하고, 때로는 흙길과 무성한 풀숲을 헤쳐야 하는 길. 그래서 이 길은 인생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이런 연유로 인생의 여러 고비를 마주하거나 지나고 있는 세대들이 더욱 이 길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한 걸음 한 걸음 대한민국을 발견하라’는 2017년 코리아둘레길 브랜드 선포식에서 발표된 캐치프레이즈다. 거창한 타이틀 같지만 한 걸음, 한 걸음에 초점을 맞추면 이 길은 바로 우리 주변에서 시작함을 알 수 있다. 경기도의 경우 평택섶길, 안산대부해솔길, 평화누리길 중 일부가 코리아둘레길에 포함돼 있다. 4천500㎞ 전 구간을 도전적으로 완보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는 요즘, 전 구간 완보는 아니더라도 내 주변부터 한 걸음을 내디뎌 보는 건 어떨까. 내가 사는 지역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 걷는 것이 주는 치유의 경험을 더 많은 이들이 경험하길 기대해본다. 참고로 코리아둘레길에 대한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는 두루누비 서비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화산책] ‘5세대 아이돌’에 대하여

“근데 왜 그렇게 세대를 나누는 거야? 애플도 아니고 1세대, 2세대..” 어느 가수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한 말이다. 케이팝 ‘세대’론에 대해 기기도 아닌데 그렇게 구분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에 대한 댓글들 또한 다양하다. ‘4세대가 신인인데 무슨 5세대인지, 5세대를 누가 열었는지 아무도 모르는데, 5세대는 뭐임? 누군가 신박한 걸 해야 5세대가 될까말까 인데..’ 케이팝(K-POP) 시장에는 암묵적으로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는 이른바 ‘세대론’이 있다. 2024년 현재 무려 ‘5세대’ 아이돌까지 등장했다. MZ세대라 불리는 나는 어렸을 적 가수 ‘H.O.T’의 팬클럽이었다. 이들이 ‘1세대 아이돌’이라는 것에 반박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때부터 K-POP 아이돌 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들의 홍보·소통의 매체는 전통적인 미디어였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의 이야기다. 이후로 확연한 구분점들을 보이며 아이돌의 ‘세대’가 교체됐다. 2004년 동방신기가 데뷔하고, 원더걸스, 빅뱅의 히트에 이어 2009년 소녀시대의 ‘Gee’에 이르면서 이들은 전 세계에 K-POP을 알렸다. 서구권까지 K-POP의 시장 환경과 팬덤이 확장되었다. 유튜브와 인터넷 블로그, 웹진을 비롯한 새로운 매체가 K-POP을 글로벌 시장에 소개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 ‘2세대 아이돌’이 세계로 나아가는 로켓이 됐다.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포문으로 ‘3세대 아이돌’이 글로벌, 팬덤 산업의 본격화를 일궈냈다. ‘EXO’, ‘블랙핑크’, 수많은 신기록을 남긴 ‘BTS’까지. 이들은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강력한 팬덤의 지원을 받아 영미권 팝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K-POP이 한류를 이끄는 선두에 선 것이다. 빌보드 차트 1위는 더 이상 우리에게 놀라운 일도 아니다. ‘4세대 아이돌’은 2020년대 들어 데뷔 즉시 글로벌 스타로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르세라핌, 뉴진스, 아이브, 엔하이픈,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등이 그들이라 하겠다. 이 당시 유행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한 데뷔의 형태는 해외에서 K-POP이 현지화하는 모델로 발전되고 있다. 2024년. 갑자기 ‘5세대 아이돌’이 출범했다. ‘5세대 청량돌’, ‘5세대 모델돌’ 처럼 수식하는 말도 각양각색이다. 아일릿, 투어스, 라이즈, 제로베이스원 등 2020년대 중반 등장한 그들은 국내·외로 우수한 성적을 보이고 있고, 팬덤 문화 또한 복합적으로 확대되었다고 말한다. 알파세대의 본격적 팬덤 유입, 숏폼의 생산, AR·VR의 성과 또한 그들의 특징. ‘5세대’ 아이돌이 과연 ‘4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변화를 보이고 있는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오히려 ‘5세대 아이돌’에서 이전 세대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이전 세대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다고 특징짓기에도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1~2년만의 세대교체이다. 자칫 작위적인 느낌이다. 이 5세대론이 과연 문화 생산자와 소비자가 주체가 된 것인지, 오히려 그들이 마케팅을 위해 수단으로서 소모되고 있는 현실은 아닐는지. K-POP의 정점, K-POP의 위기론이 회자되는 요즘, 이는 ‘5세대’ 아이돌이 이렇다 할 큰 특징과 변화를 불러오지 못하는 것으로도 증명되는 것은 아닐까? 이들이 앞선 세대들보다 대단한 성과를 이루었다면, 분명 이후 K-POP 시장은 한층 더 확장, 발전할 것이다. 좋건 싫건 지난 시대는 물러가고 새로운 시대는 온다. 그러나 인위적인 세대 구분은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어있다.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5세대’라는 이름을 당당히 부여받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 변화가 아니라면 대중은 이름뿐인 ‘5세대’를 인정하는데 야박할 것이다.

[문화산책] 아름다움이 적을 이기느니라

경기도를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움을 지닌 성곽으로 유명하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는 방화수류정, 중국의 공심돈을 우리만의 스타일로 재탄생시킨 동북·서북공심돈, 산과 강, 평야를 휘감아 몰아치듯 뻗어 있는 화성의 성벽 등 하나의 성곽에서 다양한 매력을 동시에 살필 수 있는 장소는 흔치 않다. 분명 방어에 주목적을 두고 만들어진 건축물인데 미학이 도드라지게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해답은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정조 17년 12월8일 정묘 첫 번째 기사를 살펴보면 화성 건설에 관해 왕이 특별히 하달한 지시가 눈에 띈다. “한갓 겉모양만 아름답게 꾸미고 견고하게 쌓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면 참으로 옳지 않지만 겉모양을 아름답게 하는 것도 적을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구절을 통해 정조가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의 가치를 새삼스레 되뇌게 된다. 정조는 아름다움을 통해 적들이 기가 꺾이게 될 것이고 방어하는 사람들의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정조가 통치했던 18세기는 가히 조선의 르네상스라 부를 만큼 문예부흥이 활발하게 벌어졌던 시기로 알려졌다.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 회화로 이름을 날렸으며 유득공은 ‘발해고’를,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저술했다. 물론 정조 자신도 문무에 뛰어난 수재였으며 수많은 시와 그림을 남긴 예술가였다. 그는 예술이 지닌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조의 대단한 프로젝트 중 하나인 수원화성은 수도를 천도하기 위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가까이 하기 위해,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은거를 위한 용도 등 다양한 추측이 난무한다. 그러나 읍치를 지금의 수원으로 옮기고 화성을 쌓은 원인은 한 가지 요인이 아닌 시대적 상황과 요구, 정조 개인의 예술적인 욕망이 작용한 결과다. 우선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의 옛 읍치에 건설하며 생긴 이주민들을 지가(地價)의 3배나 쳐주는 보상금과 온갖 감면책으로 유인해 새로 건설되는 위대한 도시에 자리 잡게 했으며 전국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행궁을 지어냈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신하 다산 정약용을 총책임자로 임명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정약용은 정조가 원하던 구상을 차질 없이 해냈다. 그는 중국의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고해 고안한 거중기를 이용해 화성 건설의 공기를 대폭으로 단축시켰으며 조선에서 보기 힘든 건축자재인 벽돌을 적극 활용했다. 곳곳에 들어서 있는 치성과 옹성, 암문과 포루는 위치한 지형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남문과 북문인 팔달문과 장안문은 한양 도성의 사대문보다 웅장하고 철옹성 같은 자태로 우리를 맞아준다. 정조가 완공된 수원화성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기록도 실록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성을 순행하며 시설을 돌아보다가 서북공심돈에 이르러 “우리 성곽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니 여러 신하들은 마음껏 구경하라”(정조 21년 1월29일 경오 두 번째 기사)라는 대목에서 그가 얼마나 가슴에 벅찼을지 짐작된다. 그는 조선을 아름다움이 가득한 세상, 시와 글이 땅에서 샘솟는 것처럼 넘쳐 나고 독창적인 건축물과 노래와 그림으로 태평성대를 이루는 미완(未完)의 꿈을 꾸고 있었다. 정조의 꿈이 서린 수원화성은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운 자태로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광교신도시의 독창적인 건축물도 정조의 이런 말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은 조선시대,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아름다움을 추구해 만든 이 성곽은 방어의 목적을 넘어 도시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효율성이 우선시되는 현대사회에서 예술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가치를 재고해 봐야 한다.

[문화산책] IP 가치와 팬덤의 중요성

퍼블리셔들은 ‘좋은 곡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작곡가들은 ‘곡을 팔 곳이 없다’고 한다. 기획사들은 ‘키울 만한 팀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을 팔아야 하는 아티스트는 ‘팔 곳이 없다’고 한다. 이는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본질을 설명하는 말들이다. 이 모든 말은 결국 IP 가치의 확산과 팬덤 형성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스포티파이 기준 하루 10만곡 이상이 업로드되는 시대에 음악 소비 방식이 개인 미디어 환경으로 변화하면서 음악 시장에 진입하는 장벽은 낮아졌지만 아티스트가 시장에서 자리 잡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매스미디어의 몰락과 파편화된 콘텐츠 소비 패턴으로 인해 과거처럼 하나의 콘텐츠가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기는 어려워졌고 설사 대중의 관심을 받더라도 콘텐츠 소비 주기가 짧아 오랜 기간 소비되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다. 음원 수익만으로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든 현실과 대중의 평가조차 받지 못하고 사장되는 음원이 넘치는 상황에서 아티스트가 오래 활동하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콘텐츠 IP의 가치를 키우는 작업이다. 지식재산권(IP·Intellectual Property Right)이란 ‘인간의 창조적 활동을 통해 창출한 지식, 정보, 기술이나 표현 등의 무형적 창작물에 부여된 재산에 관한 권리’로 기술 환경 변화에 따라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음악 시장에서는 음원이라는 원천 콘텐츠를 기초로 2차, 3차로 판매되는 모든 상품이 포함된다. IP 가치가 큰 콘텐츠는 대중의 취향을 지속적으로 자극하며 오랜 기간 사랑받고 판매된다. 과거의 명곡들이 커버되거나 리메이크돼 판매되고 있는 것이 그 예다. IP 핸들링이 비교적 쉬운 음악 콘텐츠의 경우 다매체 시대에 다양한 형태로 재판매되면서 부가가치가 높아지고 음악 시장 내에서의 파급력도 커진다. 이런 과정에서 역주행하며 성공한 콘텐츠도 많다. 아티스트가 음악을 만들고 방송이나 페스티벌 무대에 서는 순간 그 자체로 IP가 된다. 이 IP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공연 시장에서 팬들의 결속력을 높이고 팬덤의 규모를 키우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팬덤은 단순한 소비자 집단을 넘어 특정 팀이나 아티스트에 대해 강한 애착과 헌신을 보이는 집단이다. 단순한 소비 만족을 넘어 충성도 높은 팬으로 발전하며 브랜드 충성도를 결집시키고 감정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든 결과물이 브랜딩되는 콘텐츠산업에서 팬덤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들은 열정적 애정으로 교류하며 다른 고객을 영입하기도 한다. 팬덤과 IP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가진다. 강력한 팬덤은 특정 IP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핵심 요소이며 반대로 IP는 팬덤의 충성도를 강화시킨다. 이 둘의 관계는 아티스트의 지속적인 성장과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과거에는 팬덤의 파워가 앨범 판매 차트 순위에서 나타났지만 이제는 다양한 플랫폼에서 IP를 확산시키고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 아티스트의 역할도 다양해져야 한다. 레이블 소속 유무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스스로 기획자, 행정가, 마케터는 물론이고 다양한 소셜미디어 계정을 운영하며 활동할 수 있는 콘텐츠 생산 능력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면 국내외 에이전트 및 다양한 서비스 플랫폼에 소개할 수 있는 EPK(Electronic Press Kit)를 제작해 대표곡, 사진, 영상, 공연 일정, 연락처 등의 정보를 소셜미디어 및 웹사이트 링크를 통해 홍보할 수 있다. 또 정례화된 공연으로 청중과의 소통을 일상화하고 입소문이 날 수 있는 이벤트와 굿즈 판매 등을 통해 소수의 팬부터 확보하는 기획력과 팬데믹 이후 공공 부문에서 지원하는 아티스트 지원 사업도 다양해진 만큼 사업에 참여하고 결과를 보고하기 위한 문서 작업 능력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라이브 실력과 콘텐츠 결과 품질이 일정하게 담보된다면 기회는 어떻게든 찾아온다. 그 기회는 방송 및 대형 오디션 프로그램일 수도 있고 유명한 영상물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Original SoundTrack), 혹은 크고 작은 국내외 페스티벌 출연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최근 재결성하며 큰 기대를 모으고 있는 밴드 오아시스가 강력한 팬덤을 형성한 이유 중 하나는 레이블 없이 클럽 공연부터 출발해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오아시스도 곡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IP 파워가 생기고 충성도 높은 팬덤이 형성되기 전까지는 일반 대중의 관심을 얻지 못했다. 메이저 기획사에서 기획된 아티스트를 포함해 활동하는 모든 아티스트 역시 시작 지점과 기대치가 다를 뿐 IP 가치 상승과 팬덤 형성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은 비슷하다. 현 시대의 아티스트가 꿈꾸는 것은 소비자와의 관계를 평생 동안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경험과 환희를 선사하며 팬들이 지루해하지 않고 열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계속 찾아나가야 한다.

[문화산책] 스니커즈와 트럼프

어떤 회사가 흰색 하이탑 스니커즈 운동화를 ‘299달러’에 판매하고 있다. 하이탑 스니커즈 운동화는 ‘스니커즈 헤드’(스니커즈를 수집, 거래하고 이를 동경하는 개인 혹은 그룹)의 문화에서 자기 표현과 창의성을 나타내는 포괄적인 플랫폼이다. 그들에게 스니커즈 운동화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에게 정체성의 중요한 측면을 제공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유행으로 인식됐지만 스니커즈 운동화 산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스니커즈 헤드 문화에 주목하게 됐다. 그들은 스니커즈 컬렉션의 희소성으로써 희열을 느낀다. ‘나이키 에어 조던 1’의 출시와 함께 그들의 문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스니커즈는 1970년대 힙합 커뮤니티와 농구 스포츠가 결합되면서 운동화에 대한 인식을 단순한 운동화에서 자아 및 문화적 표현의 매개체로 바꿨다. 그런 이유에서 공유문화를 통한 강한 공동체 의식과 배타적 소속감을 느낀다. 현대사회에서는 스니커즈를 사용해 물질적 지위와 부를 상징하려 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달하려 한다. 스니커즈의 희소성은 제품에 대한 기대감을 극대화하고 높은 수익을 의도한다. 이로 인해 사회적 가치관의 불균형, 사회계층과 인종 간의 불평등 등 스니커즈 소비와 관련된 폭력적 배타성이 스니커즈 문화의 긍정적 효과를 뛰어넘기도 한다. 애초부터 흑인에 대한 편견이 작용했다는 의견도 지배적이다. 스니커즈 소비는 자의든 타의든 인종적 정치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분명 스니커즈 문화는 인종을 통합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으로 여길 수도 있었지만 먼저 사회를 분열시키는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뉴발란스 부사장이 뉴발란스 운동화를 “백인의 공식 신발”이라고 선언했을 때, 또 나이키가 경찰의 흑인 살해 사건을 알리기 위해 국가 연주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 미식축구선수 콜린 캐퍼닉이 등장하는 소셜 광고 캠페인을 공개하면서 논란이 터졌을 때 이러한 분열의 조짐은 강렬하게 나타났다. 이런 스니커즈 운동화는 인종 갈등에서 갱단 범죄의 문제로 비화되기도 한다. 범죄조직들이 조직을 차별화하기 위해 스니커즈의 색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주로 빨간색 리복 운동화를 신는 ‘더 블러드’와 파란색으로 자신을 구분하는 ‘크립스’ 등 두 갱단이 대표적이다. 두 집단 간에 벌어지는 극렬한 폭력적 행태를 예방하기 위해 유명 힙합 가수 켄드릭 라마가 갱단의 통합을 위해 리복과 협력해 빨간색과 파란색이 혼합된 스니커즈 운동화를 출시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스니커즈 운동화 회사들은 자신들의 광고가 스포츠에 맞춰져 있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에서 판매되는 운동화의 80% 이상은 운동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다. 흰색 스니커즈 하이탑 운동화는 트럼프가 2023년 재무 공개에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다고 밝힌 회사, ‘CIC Ventures LLC’가 운영하는 웹사이트에서 ‘FIGHT FIGHT FIGHT 하이탑’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고 있는 상품이다. 이 회사는 피 묻은 트럼프 이미지를 새겨 넣은 하이탑 운동화를 한정판으로 5천켤레만 판매한다고 밝혔으며 그중 10켤레는 무작위로 트럼프의 친필 사인을 받을 수 있다고 광고했다. CIC 벤처스는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한 이 특별한 스니커즈로 지지와 애국심을 보여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는 펜실베이니아 집회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한 직후 트럼프의 기적적인 생환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활용하려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당시 트럼프는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를 크게 외쳤다. 트럼프 캠프 관계자들은 온라인 게시물을 통해 이 판매 행사를 홍보했지만 CIC 벤처스 측은 이 행사가 정치적이지 않으며 정치 캠페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스니커즈 헤드의 문화를 이해하고 나면 현재의 트럼프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스니커즈 회사를 통해 무엇을 자극하고, 무엇을 이용하려 하는지 그 속내가 빤히 보인다.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