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계석의 문화돋보기] 평창올림픽 달군 정당한 승리의 가치 조작 벗어낸 진실사회 가능성 엿보다

‘조직이 하는 일을 개인이 이길 수 없다. 누구도 믿지 마라, 어떻게 해서든 살아 남아라’최근 개봉한 영화 골든슬럼버에 나오는 대사다. 촘촘하게 깔려있는 감시 카메라뿐만 아니라 이미지를 조작하거나 성형인간을 통해서도 얼마든 한 개인을 엉뚱한 피해자로 만들 수 있다는 사회상을 반영한 것 같다. 눈만 뜨면 터지는 각종 비리와 구조적 모순 사회의 시나리오들이 영화가 되고 흥행에서도성공한다. 이 만연한 사회 비리들이 검찰 수사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積弊(적폐)’라는 이름의 대청소가 언제 끝날지 예측불허다. 우리가 힘차게 달려온 근대화가 마치 허리띠를 묶지 않은 바지를 입은 듯 절체절명의 위기란 불안감이 깊어간다. 이런 와중에 날아든 평창동계올림픽은 개인과 팀웍을 통해 땀과 진실의 결정체를 보여준다. 결코 선수 혼자가 아닌 코치와 후원자의 조력을 통해 완성의 극치인 금메달의 승리를 보여주고 그 통쾌함에 전 세계가 감동한다. 승부에 승복하는 선의의 경쟁이야 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가운데 최선이 아닐까 싶다. 이런 좋은 합의의 방식이 또 없을까. 거꾸로 가는 시계, 무게를 달 때마다 달라지는 저울의 눈금, 누구도 믿기 어려운 신용불량 사회, 사람들은 얼마나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비리 공화국(?)에선 검찰도 지치고 법원도 힘겨운 신세다. 첨단 장비들이 조작 기술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감시와 통제, 조사와 처벌만으로 세상이 달라지기를 원한다면 착각이다. 많이 벌고 출세해 잘살자고 꿈을 꾸었던 것들이 하나씩 무너져 내린다. 인간 본성에서부터 정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영화‘골든슬럼버’는 나직한 물음을 던진다. 인생의 가장 나른하고 행복한 찰나의 순간을 뜻하는 ‘황금빛 꿀잠’, ‘낮잠’이라는 의미를 지닌 노랫말과 음악으로 세계인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던 비틀즈의 명곡이다. 여기서 영감을 받아 일본작가가 소설을 쓰고, 물론 일본영화도 나온 것을 한국판으로 만든 것이다. 대학 시절 그룹 밴드를 했던 풋풋한 젊음의 시간으로 되돌아가 인간성을 회복하는데 여기에는 믿어주는 친구가 있었다. 사실 영화에서처럼 권력을 얻으려는 정치가는 늘 조작사회의 배후다. 정치가 맑아져야 하는데 국민의 신뢰로부터 멀어지고 관심도 옅어지고 있다. 머지않아 오는 6월 선거가 오고 선거는 보랏빛 희망을 살포할지 모른다. 물론 스포츠에도, 예술에도 가짜그림, 가짜악기, 조작된 오디션과 채용비리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스포츠 우승자를 만드는 것이 혼자가 아니듯이 우리가 졸은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착한 힘들이 뭉쳐야 한다. 정치가들도 진정성을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감화력을 개발해 믿음이 가는 리더십을 내놓아야 한다. 잘못 설계된 공연장 음향은 빙질이 좋지 않은 아이스링커와 다를 바 없다. 공짜로 뿌리는 티켓은 상품 구매력을 상실케 한다. 모든 것을 누구의 책임에 돌리기보다 나의 한 걸음, 하나의 행동이 신뢰에 바탕을 둔다면 한걸음씩이나마 진실사회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이번 평창동계 올림픽은 조작사회의 그물망에서 뛰쳐나올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우리가 2002년 올림픽을 통해 큰 도약을 했듯이 평창올림픽이 또 한 번의 도약 발판이 되었으면 한다. 정직하게 만들어낸 승리를 통해 국민 자긍심이 되고 특히 젊은 세대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인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IMF 때의 금모우기가 아니라 금메달을 따는 1등 국민에 올라야 한다. 시냇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듯 진실이 흘러야 한다. 선한 눈빛 하나로 관객을 사로잡는 배우의 캐릭터처럼 예술과 문화가 정화의 큰 힘을 발휘했으면 한다.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탁계석의 문화 돋보기] 공무원과 문화예술 어떻게 조화 이룰까

“100만 공무원의 1분, 1초가 국민을 위해 바뀌는 방식으로 업무혁신이 돼야 한다” 엊그제 정부가 공무원 조직 혁신에 팔을 걷고 나서면서 한 말이다. 낡은 관행을 쇄신하지 않고서는 국민 피부에 와 닿는 정책 구현이 어렵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불철주야 노력하는 많은 공무원과 혁신해 달라진 모습도 많이 보이고 있지만 구조적 한계를 혁파하려 의지로 보인다. 사실 공무원이 청년 일자리 1위인 것을 생각하면 국민의 기대치도 그만큼 높다. 이번 정부가 내놓은 핵심 카드의 하나는 ‘현장 중심’이다. 늘 정권마다 ‘현장 중심’이란 키워드가 官家(관가)의 寶刀(보도)처럼 사용되었지만 근간이 바뀐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정권은 유한하고. 관료는 영원하다’는 말이 나왔을까. 문화계 입장에선 이번 조치를 크게 환영한다. 예술하는 것 보다 몇 배로 힘든 것이 공무원 상대하는 것이란 자조가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공무원 행정 문법과 예술 문법이 달라 소통되기가 참으로 힘들다. 규정과 원칙을 고수하는 것과 자율과 자유가 절대 필요한 예술이 상극처럼 지금도 반목하고 있지 않는가. 세계에서도 찾기 힘든 공무원 산하 예술단 소속은 우리가 벗어나야 할 최대의 현안 과제다. 최근 10년 사이에 지자체 여러 곳에서도 문화재단이 설립되었다. 점차 나아는 지고 있지만 문화재단 위에 역시 공무원이어서 옥상옥의 피로감은 여전하다. 기존 것을 깨트리고 새로운 것을 창안해 내야하는 예술이 法治(법치)와의 다툼으로 녹다운 되는 현상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한 시립합창단 지휘자가 규정에 묶인 무리한 근무 일수 산정 때문에 과태료 수백만원을 물고 쫓겨난 사례도 있다. 이 지휘자가 와신상담 끝에 중앙에서 최고 합창단 지휘자로 발탁되었다면 이곳 시민들의 반응은 어떨까. 예술가를 존중하고 예술문화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상수원 보호와도 같다. 그 물을 마시는 것이 결국 시민이기 때문이다. 이번 행정안정부는 “공무원의 일하는 방법을 바꾸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정부혁신의 시작”이라며 현장과의 협업을 주문했다. 그러나 고도의 전문성과 창의력, 자율정신으로 만들어지는 예술의 속성을 살리려면 단지 변하겠다는 의자만으론 부족하다. 현재 예술 장르에 따라서는 50~60개에 이르는 전국의 공공예술단체 조례를 재점검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정비해야 한다. 제도 미흡으로 인한 노조 갈등은 비효율의 극치를 이룬다. 한 예로 오케스트라의 경우 음악에 따라, 그날 연습에 참여하지 않아도 좋은 악기 파트가 있는데도 정시 출근해 동료 연주가를 바라만 보아야 한다면 이건 고문이나 다름없다. 예술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에 이제 시민들도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시민 세금이 들어가 있는데 나몰라한다면 그만큼 불이익이 될 수도 있다. 공무원 행정과 예술행정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몇 년 사이에 모든 게 이해되는 것이 예술이 아닐 것이다. 어느 시에서는 예술과 공무원을 잇는 징검다리로 민간전문가를 별정직 자리에 두어 소통하는 것을 보았다. 협업의 구체적인 방법론이 될 것이다. 채용비리, 갑질 행태 등 도처에서 추락하는 과거로부터의 오늘 우리사회 민낯을 보고 있다. 누구를 탓할 게 아니라 모두 힘을 합했으면 한다.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멋진 사운드를 내는 것일까. 이 원리를 協業(협업)의 문법으로 사용해도 좋을 것 같다. 더 이상 복지부동, 철밥통이란 부정적 수식어가 공무원을 따라다니지 않는 건강한 풍토에 물꼬가 터질 수 있도록 예술계도 자정의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탁계석의 문화 돋보기] 문화주권 시대를 열자

얼마 전 지역에서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 설치된 세계적인 작가의 전시 작품을 민원이 들어왔다고 해서 공무원이 철거해 버린 것이다. 거센 여론의 비난이 일었다. 민원 제기의 시민 안목도 문제지만, 설치한 예술가에게 묻지도 않은 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다. 예로 유명 시인이나 작가에게 去處(거처)를 마련해주고 지역 브랜드화 하면서 갈등을 빚은 일도 일어나곤 했다. 어떤 경우든 예술의 가치 훼손은 모두에게 이롭지 않다. 핀란드의 세계적인 작곡가 시벨리우스는 정부가 그의 작업을 위해 비행기가 날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고 하니 마치 동화처럼 들린다. ‘문화 주권’이란 말이 생소하겠지만, 100세 시대를 살아가려면 문화를 놓치면 큰 것을 잃는 것이기에 일반인도 관심이 필요하다. 문화 예술에 활발한 담론이 펼쳐졌으면 한다. 오페라의 나라 이탈리아에서는 공연 후 커피숍에서 화제가 되고, 언론도 기사화에 열을 올림으로써 안목이 매우 높다고 한다. 예술의 관심이 문화의 質(질)을 향상시킨다. 각계각층이 문화로 소통하는 법을 안다면 갈등 해소에도 도움이 되는 문화시대다. 정부도 저녁이 있는 삶을 강조하고 나섰다. 특히 청소년에게 말로 하는 것보다 동아리 단체들을 지원하면 원천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당장은 우리지역 오케스트라나 합창단에 자리가 비었는데, 어떤 지휘자가 오는 것이 좋을까? 전문성의 문제이긴 하지만 예술가의 논의조차 없다면 지역 문화를 누가 이끌 것인가. 무관심하는 사이 전통과 어울리지 않는 과다한 사대주의 문화가 범람해 균형을 깨트리있다. ‘지휘자가 바뀌고 예산도 늘었는데, 도무지 뭐가 감동적이란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회의장엔 침묵만 흘렀다. 오케스트라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감동적인지를 설명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시의원이 했다는 이 말은 정서로 통하지 않는 음악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캐나다의 한 교향악단 부사장은 ‘영국의 교향악단과 독일의 베를린 오케스트라가 러시아에 가서 쇼스타코비치를 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오케스트라가 유럽 본고장에 가서 그들 작곡가의 작품들을 하는 것을 자랑하지 말라는 뜻과도 같다. 대신 우리 것의 매력을 잘 가공하여 선보이는 것이 국가의 정체성에도 어울린다. 원로 이영조 작곡가는 ‘그릇은 빌려도 내용은 우리 것을 담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연주 역량은 크게 늘어나 국제적인 콩쿠르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있다. 때문에 기술의 문제는 상당히 극복되었고 이를 토대로 우리 작품의 차별화 전략을 구사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수입 일변도 예술시장에서 수출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전통이란 보물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가공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2~3년 하다 가고 나면 제자리가 되는 손님 예술가가 아니라 지역에 살고 있는 예술가들이 뿌리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서양예술과 우리 것을 모두를 가진 세계에서도 거의 유일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콘텐츠 융합의 제 4차 산업시대는 정보가 아니라 새로운 소재가 필요하다. 그래서 문화 주권이 중요하다. 알아야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그 궁극의 목표는 시민의 향수권이고 예술가의 선순환 시장의 확보다. 남의 것을 빌려 쓰기만 하면 더 이상 발전이 없다. 평가와 감시 기능까지 시민문화가 맡아야 한다. 도처에 명소가 많은 경기도가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문화 요리를 개발에 나서야 한다. 선조들은 인류문화유산이란 큰 선물을 남겨주었는데 후손들이 뭘하고 있는가. 거리는 수도권이지만 문화가 중심이 되는 변화에 문화 주권의 힘이 필요하다.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은…-경기문화예술위원회 전문위원-한국음악협회 부회장-문화저널21 논설주간-세종문화회관·국립극장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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