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잘 알려진 전수일(43ㆍ경성대 교수) 감독의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가 1일 서울 신문로 아트큐브에서 선을 보였다. 99년 완성된 ‘새는…’는 그해 이탈리아 베니스 국제영화제 ‘새로운 분야’에 초청받은데 이어 부산영화제에서 넷팩(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을 받았다. 2000년에도 스위스 프리부르 영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케랄라(인도), 모스크바(러시아), 스톡홀름(스웨덴) 등의 영화제에 소개됐다. 현지 언론과 평단으로부터 “인간 내면의 치밀한 심리묘사와 이미지를 통한 모던한 스타일이 돋보인다”는 평을 얻었으나 흥행 전망이 불투명해 그동안 상영관을 잡지 못하다가 3년 만에 국내 영화팬과의 만남을 이루게 됐다. 주인공은 지방대 영화과 교수인 ‘김’. 영화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펼치라고 가르치지만 장래가 막막한 현실 앞에서 학생들에게는 공허하게만 들린다. ‘김’은 자신에게 휴식처같은 존재인 영희가 가족과 만나줄 것을 요구하자 갑자기 부담을 느껴 도피하고 만다. 영화도 사랑도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현실에 괴로워하던 ‘김’은 진정한 자유를 느껴보기 위해 철새 도래지를 찾는다. 그러나 새 역시 닫힌 곡선을 따라 이동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박하사탕’과 ‘공공의 적’의 배우 설경구가 전수일 감독의 자화상 격인 ‘김’으로 등장하고 연희단거리패 단원인 연극배우 김소희가 영희 역으로 호흡을 맞췄다.
‘충무로의 기대주’ 류승완 감독의 영화는 딴죽부터 걸자면 제목부터 심상치않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아니면 ‘피도 눈물도 없이’라니. 젊음의 패기와 혈기로 보기에는 제목이 주는 위압감이 너무 크다. 죽기살기로 덤비는 사람처럼 갈 데까지 가보자는 감독의 비딱한 심기가 느껴지는 탓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도 이런 식이다. 액션느와르를 표방한 신작으로 오늘 개봉되는 ‘피도 …’는 뒷골목 인생들의 아귀다툼과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세계를 그린다. 철조망 안에 갇힌 개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투견장이 무대. 물지않으면 물려 죽는 개싸움을 인생의 축소판으로 빗댔다니 그 처절함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서로 속고 속이는 치졸한 싸움과 양육강식만 있을 뿐이다. 눈 밑에 난 상처를 가리기위해 항상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여자 수진(전도연). 북어패듯 밤낮 자신을 두들겨패는 투견장 건달(정재영)에게 지금은 발목이 잡혀있지만 언젠가 음반을 내고 가수로 데뷔하는 게 그녀의 꿈. 왕년에 뒷골목에서 한가닥했던 경선(이혜영). 도망간 남편이 진 빚을 갚기위해 택시운전을 하지만 술취한 남자 손님들의 성희롱과 거머리처럼 따라붙는 악덕 사채업자의 등쌀에 편할 날이 없다. 어딘가에 있을 딸을 찾아 함께 사는 게 그녀의 소망. 차 사고를 계기로 우연히 알게 된 두 여자는 투견장 판돈이 든 돈가방을 훔쳐 달아날 모의를 꾸민다. 허나 그 바닥 사람들을 속이기가 어디 쉬운가. 곳곳에서 제2, 제3의 모의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돈가방을 둘러싼 쟁탈전이 시작된다. ‘피도…’는 전작 ‘죽거나…’보다 한층 세련되고 매끈해졌다. 전작에서 보이던 치기어림을 접고 능수능란함과 재기발랄함을 그 자리에 채워넣었다. 악에 받친 인간들의 피비린내나는 싸움과 욕설이 스크린을 가득 메우면서도 불쾌감을 주기보다 흡인력을 발휘하는 것은 이때문이다. 고개를 돌려야 할 정도로 잔인한 액션 장면에서 흥겨운 음악이 흐른다거나 느닷없이 정지 화면과 슬로우 모션이 튀어나와 감정의 강약 조절해 준다. 비장감 넘쳐야할 곳에서 돌연 유머가 등장하는 식이다. 상영 시간 내내 안쓰러움과 웃음, 슬픔 등 다양한 감정이 교차된다. 특히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하나로 모이는 치밀한 구성과 거듭되는 반전에서는 감독의 영민함마저 느껴진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공이 컸다. 서로 안 어울릴 것 같은 조합인, 톱스타 전도연과 중견 이혜영을 내세워 남자들과 육탄전도 마다않는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선보인다. 7년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이혜영의 카리스마와 ‘공포택시’ ‘킬러들의 수다’에서 주로 코믹연기를 선보였던 정재영의 혼신의 연기가 단연 돋보인다. 여기에 임원희, 류승범, 크라잉넛과 신구, 백일섭 등 신·구세대 연기자들이 총출동한 ‘피도…’는 캐릭터 열전에 가깝다.
패럴리 형제의 유머 감각은 남다른 데가 있다.카메론 디아즈의 머리에 정액을 발라 웃음거리로 만든다거나(‘메리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짐 캐리를 정신분열증 환자로 등장시켜 원맨쇼를 펼치게 하는 것(‘미, 마이셀프 앤 아이린’)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번에는 바비인형처럼 늘씬한 여배우 기네스 펠트로를 130㎏이 넘는 뚱보로 만들기에 이른다. 신작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원제 Shallow Hal)’에서다. “늘씬한 미인과 데이트를 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생활 신조로 삼은 주인공 할. ‘작은 키에 아랫배가 두툼한’ 제 외모는 생각지도 않고 미인들만 골라 집적대는 그에게 장단을 맞춰주는 여자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로즈마리(기네스 펠트로)를 만난게 된 것. 우연히 유명 심리상담사 로빈스와 함께 고장난 승강기 안에 갇혔다가 내면의 아름다움만 볼 수 있는 최면에 걸린 직후다. 금발에 늘씬한 몸매, 천사 같은 성품을 지닌데다 할의 회사 사장 딸인 로즈마리는 외모와 심성, 부의 삼박자를 갖춘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는’ 여자였다. 헌데 그녀가 앉는 의자마다 폭삭 주저앉는가 하면 다이빙 한 번에 수영장 물이 반은 넘쳐나고 벗어놓은 속옷은 낙하산만 하니, 이게 어찌된 일일까. “허리가 날씬하다”는 할의 진심 어린 칭찬에도 그녀는 “나를 놀리지 말라”며 토라져 버린다. 엽기와 재기발랄함 사이를 자유자재 넘나들며 웃음을 선사했던 패럴리 형제는 ‘화장실 유머의 대가’라는 평가에만 머물기 싫었는지 이번엔 교훈까지 담아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마음에 있다 쯤 될까.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비틀기를 시도하지만 영화는 여전히 사회적 편견 위에 발을 딛고있어 시각이 썩 신선하지만은 않다. 코미디물에서, 게다가 ‘패럴리표’ 영화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걸까. 영화는 시쳇말로 ‘눈에 콩깍지가 쓰인’ 주인공 할의 시선과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는 관객들의 시선, 두 가지로 전개된다. 기네스 펠트로의 늘씬한 다리를 훑은 카메라는 관객의 눈으로 돌아가 통나무보다 더 굵어보이는 다리 한 쪽을 잡아낸다. 또 실제 늘씬한 미인은 ‘심성까지 고울리 없어’ 할의 눈에는 피부가 쭈글쭈글한 사악한 성격의 할머니로 보이는 식이다. 기네스 펠트로가 뚱보로 변장한 모습은 막판 10분 전에나 볼 수 있다. 그녀의 상대역은 잭 블랙이다. 23일 개봉.
‘뮤턴트 에일리언’은 갖가지 엽기적인 요소로 제목만큼이나 ‘이상한’ 충격을 줬던 애니메이션 ‘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를 선보인 빌 플림턴 감독의 신작이다. 지난해 안시애니메이션영화제는 이 작품에 그랑프리를 안겼다. 우주정거장을 세우는 도중에 음모에 휘말려 우주로 방출된 우주비행사가 수십년뒤 지구로 귀환해 딸과 함께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 기둥 줄거리. 풍자·엽기·성적 코드가 전작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여기에 감독의 독특한 상상력은 일반인의 머리를 훌쩍 뛰어넘어 우주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우주 미아가 된 우주 비행사는 우연히 또 다른 우주선에 갇혀 우주를 떠도는 한무리의 동물들과 만난다. 그는 개·돼지 등 갖가지 동물에게 발정제를 먹인 다음 급기야 그들과 성관계를 갖고 ‘돌연변이 외계인들’(Mutant Aliens)을 낳게 한다. 그는 이들을 ‘살인 병기’로훈련시킨 뒤 20여 년이 지나 지구로 데려가 자신의 복수에 이용한다. 상영 시간 80분 내내 관객들의 짐작과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간다.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이야기가 전개된다. 클로즈업된 부분이 신체의 ‘은밀한 부위’인가 싶더니 카메라를 뒤로 살짝 빼면 마치 ‘거긴 줄 알았지?’ 놀리듯 다른 부위가 나온다. 장난기어린 유머가 가득하다. 한 꼬마 여자애가 아저씨의 손가락을 물어뜯어 삼키는 엽기적 대목에서 경악할 겨를도 없이 잘린 손가락은 장운동에 맞춰 내장을 지나간다. 그 다음은 손가락을 배설하기 위해 변기 위에서 끙끙대는 꼬마의 모습이 등장하는 식이다. 애인과 섹스하려는 순간 여자의 양어깨 위에 갑자기 매춘부와 수녀가 나타나 ‘순결 논쟁’을 벌인다. 이 와중에 남자의 성기는 경적을 울리는 기차에서부터 전기톱, 달리는 코뿔소떼 등 다양한 이미지로 바뀐다. 그런가하면 손가락·발가락·입술·코처럼 사람의 신체 기관을 닮은 외계생명체가 떼거리로 등장해 혼을 빼놓기도 한다. 한마디로 ‘엽기’ 그 자체다. 세상에 대한 감독의 삐딱한 시선도 드러난다. 성조기가 펄럭이고 제법 비장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낭독되는 대국민 연설문은 우주 탐사가 실패했으니 기부금을 많이 내달라는 당부로 끝을 맺는다. 감독은 “탐욕·결탁·관료적인 것들로 대표되는 모든 권력의 남용을 희화화하고 싶다”고 말했다. 22일 개봉.
미 9.11 테러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아널드 슈워제네거를 내세운 영화 ‘콜래트럴 데미지’는 분명 ‘볼만한’ 액션물이었을 게다. 콜럼비아 반군조직이 미국의 도심 한가운데서 자행한 건물 폭파 테러로 가족을 잃은 한 소방관이 복수심에 불타 직접 테러범을 응징한다는 내용이 기둥 줄거리다. 당초 지난해 10월 선보일 예정이었으나 실제 발발한 테러 참사와 유사한 내용때문에 개봉이 무기한 연기됐다가 이번에 빛을 보게 됐다. 테러의 충격이 아직 채 가시지않은 만큼 ‘콜래트럴…’은 단순한 ‘오락’ 영화를넘어 미국인들의 충격과 아픔을 대변하고 위로해 줘야하는 새로운 임무까지 떠안게됐다. 쉰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는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테러로 숨진 ‘무고한 희생자(Collateral Damage)’들의 유족으로 나와 아픔을 연기했다. 몇달 째 이어지고 있는 미 정부의 파상 공격에도 ‘테러용의자’ 오사마 빈 라덴의 행방이 묘연한 현실과 달리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첩첩산중에 위치한 콜럼비아 반군기지에 혈혈단신으로 숨어들어가 게릴라들을 소탕함으로써 미국의 영웅이 된다. 울창한 밀림과 웅장한 폭포, 화산 등 거대한 자연 풍광을 카메라에 담아내 스케일을 키웠고 건물폭파신과 화재 장면, 급류타기 등 볼거리도 꽤 많다. 아널드가 밀림을 따라 반군기지로 가는 신은 ‘지옥의 묵시록’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수십미터의 폭포에서 뛰어내리고도 흠집하나 안나는 아널드의 ‘불사조’활약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속성을 드러낸다. 모든 게 너무 순조롭게 진행돼 가는 전반부는 그래서 약간 지루한 편이다. 가족과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LA소방관 ‘고디 브루어’. 그는 시내 고층건물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아내와 아들을 만나러 가던 중 콜럼비아 영사관 직원들을 타깃으로 자행된 폭턴 테러를 목격한다. 이 사고로 순식간에 아내와 아들을 잃은 고디는 테러수사가 지지부진하자 직접 테러리스트를 응징하기위해 콜럼비아 정글로 향한다. 우여곡절 끝에 반군기지에 접근한 그는 반란군의 지도자 ‘끌로디오’를 처단하기위해 폭탄을 설치하지만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반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8일 개봉.
국내 SF영화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2009 로스트메모리즈’가 화제속에 내달 1일 개봉된다. 서울이 여전히 일제 치하에 있다는, 역사를 뒤집는 이 황당한 발상이 어떻게 관객들의 입맛에 맞게 요리됐을지 관심거리다. ‘…로스트 메모리즈’는 SF물의 모양새를 제법 갖추면서 더 이상 한국 영화가 규모와 기술에 주눅들지 않음을 입증한다. 80여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총격전과 폭발신, 대규모 세트 등에 공을 쏟은 물량공세의 위력이 컸다. 친일논쟁을 유도했던 가상 역사도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이었음이 드러난다. 제작진이 “시대만 미래로 옮겨온 독립군 영화로 비칠까” 걱정했을 정도로, 극전반에 깔린 감상은 ‘애국심’이다. 영화는 ‘1909년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는데 실패했다면 ‘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복거일의 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빗나간 총알 한 발은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사를 통째 비틀기에 이른다. 2차대전 당시 원폭은 베를린에 떨어져 일본은 승전국이 되고, 조선은 여전히 일본 통치하에 놓인다. 이후 88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도 일본에서 개최됐다. 안중근 거사가 있은 뒤 정확히 100년 후인 2009년 경성. 광화문 사거리에는 조선총독부가 자리잡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상이 서 있다. 사람들은 모두 일본말을 쓴다. 일본 연방 수사국의 조선계 형사 사카모토 마사유키(장동건)와 그와 절친한 일본인 동료 쇼지로(나카무라 도루)가 주인공. 이들은 거물급 인사 이노우에가 주최하는 유물 전시장에 침투한 지하독립운동단체 ‘후레이센진(不逞鮮人)’의 테러를 진압한다. 후레이센진은 소탕됐지만 사카모토는 이들의 테러가 이노우에 재단과 관련이 있음을 알고 수사에 착수한다. 이 와중 사카모토의 집에 괴한이 침입해 그의 상사를 사카모토로 오인,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야기는 새 국면으로 접어든다. 절친했던 동료 쇼지로가 갑자기 등을 돌리고, 수사국이 자신을 살인범으로 몰아가자 사카모토는 사건의 배후에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현란한 액션은 ‘쉬리’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지만 가상 역사에 사실감을 실어주는 소품들과 미래의 분위기를 풍기는 첨단 시설은 무늬만 ‘SF’가 아님을 보여준다. 초반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의 거사를 재현한 장면도 명장면으로 꼽을 만하다. 그렇다고 볼거리에만 치중하지 않는다. 단순한 ‘SF액션’답지 않게 감정선을 자극하는 너무 많은 요소들이 곳곳에 깔려 있다. 두 형사와의 우정, 반군 소속의 여전사 오혜린과 사카모토와의 사랑, 후레이센진에 매수돼 동료의 총에 맞아 숨진 사카모토 아버지에 대한 애증까지 등장인물 간의 복잡한 감정들이 비장한 분위기의 배경 음악에 맞춰 쉴새없이 표출된다. 장동건이 일본어로 연기했고 ‘젠엑스캅’ ‘동경공략’으로 얼굴을 알린 일본인 배우 나카무라 도루가 호흡을 맞췄다. 이시명 감독의 데뷔작.
군대와 교도소는 일반인의 범접을 허용치 않는데다가 독특하고 엄격한 규율을 지니고 있어 매력적인 영화 소재로 꼽힌다. 25일 개봉될 ‘라스트 캐슬(The Last Castle)’(감독 로드 루리)은 이 둘을 합쳐놓은 군교도소를 무대로 삼고 있다. 1898년 문을 열어 1992년 폐쇄될 때까지 ‘죽음의 성’으로 불렸던 악명높은 미 테네시 주 교도소를 극중의 트루먼 군교도소로 꾸몄다. 이야기는 어윈 중장(로버트 레드포드)이 대통령의 철수명령에 불복했다는 죄목으로 10년 형을 선고받고 트루먼 군교도소에 수감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설적인 무용담의 주인공이 호송돼오자 감옥 전체가 술렁거린다. 재소자들에게 성주로 군림해오던 교도소장 윈터 대령(제임스 갠돌피니)은 실전경험이 없다는 콤플렉스에 빠져 강한 질투심을 드러내고, 재소자들은 자존심 강한 어윈 장군이 10주 안에 자살하는 것에 내기를 걸며 그의 수감생활을 흥미롭게 지켜본다. 재소자들이 하나둘씩 어윈의 카리스마에 감화돼가자 윈터의 포악함은 극에 달해 한 재소자가 머리에 고무탄을 맞아 숨지는 일이 벌어진다. 트루먼 교도소에는 쿠데타의 기운이 점차 무르익고 자연스레 어윈에게 지휘봉이 넘겨진다. 맨주먹의 재소자들이 과연 물대포 탱크와 헬리콥터로 무장한 감시병을 이겨낼 수 있을까.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관객들을 눈과 귀를 붙잡는다. 로버트 레드포드와 제임스 갠돌피니의 숨막히는 신경전이 흥미를 자아내고 마지막 전투장면도 긴박감과 비장미를 뿜어낸다. 그러나 ‘두사부일체’의 주인공 계두식(정준호)처럼 “조용히 복역하다가 출감해 손녀들과 여생을 보내겠다”고 말하던 어윈이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반란’에 앞장선다는 설정은 너무나 판에 박은 듯하고, 감시병마저 어윈의 인품에 감복해 윈터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상황은 억지스럽다. 미국적 애국심을 강조하는 듯한 분위기도 다소 눈에 거슬린다.
영화 ‘대부3’ ‘언터처블’로 유명한 앤디 가르시아는 쿠바 출신의 배우.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은 뒤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할리우드에서 배우로서 성공했지만 고향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달랐다. 그런 그가 고향 ‘하바나’로 돌아왔다. 쿠바 출신의 유명 재즈 뮤지션 아투로 산도발의 삶을 그린 ‘리빙 하바나’에서 아투로 역을 맡아 혼신의 연기를 펼친 것. 쿠바 혁명기에 자유로운 음악 세계를 갈구하며 미국에 망명을 요청한 아투로가 미대사에게 망명 경위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반추한다는 게 주된 내용. ‘혁명가 체 게바라의 나라’ 쿠바는 전통적으로 스포츠와 함께 ‘음악’ 강국으로 꼽힌다. 70∼80대 백전노장들로 구성된 쿠바의 세계적인 재즈밴드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은 독일 빔 벤더스 감독이 이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더욱 유명하다. ‘리빙 하바나’의 모델인 아트로 산도발(Arturo Sandoval)은 지난 82∼84년 쿠바의 최고 연주자로 선정됐고, 그래미상을 3번이나 받은 천재적인 재즈 트럼펫터. 쿠바 정부의 혜택 아래 정통 음악 교육을 받은 그는 선천적인 자유주의자였다. 매혹적인 여성 마리아넬라에게 첫 눈에 반해 결혼하지만 정부가 자신의 음악 세계를 통제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자신의 음악적 재능은 “정부가 준게 아니라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항변한다. 결국 그는 쿠바를 방문한 ‘비밥 재즈의 거장’ 디지 길레스피의 도움으로 가족과 함께 목숨을 건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중간 중간 장면이 툭툭 끊어지는 아쉬움이 있지만 하바나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펼쳐지는 ‘재즈의 향연’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훨씬 크다. 혁명을 열렬히 지지하던 마리아넬라와 자유주의자 아투로. 서로 상반된 사고방식을 지닌 두 사람이 사랑을 통해 이를 극복해내는 과정도 제법 감동적이다. 쿠바정부에 쫓긴 채 아투로가 미국 망명길에 오르기까지 긴장감도 팽팽하다. 무엇보다 이번 배역을 위해 크게 몸을 불리는 열정을 보여줬던 앤디 가르시아의 연기는 단연 돋보인다. 그는 실제 아투로가 된 듯 실감나는 연주 연기를 펼쳤다.
강우석 감독이 충무로 최고의 실력자로 떠오른 것은 ‘투 캅스’ 시리즈나 ‘마누라 죽이기’의 성공에 힘입은 것이 아니라 탁월한 제작ㆍ투자ㆍ배급능력 덕분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공·사석에서 사장이나 회장, 대표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거부하며 연출에 대한 미련과 애착과 자신감을 감추지 않아왔다. 25일 개봉할 ‘공공(公共)의 적(敵)’은 그가 감독으로서 녹슬지 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검증하는 시험대이자 야심작이다. 주인공은 시쳇말로 ‘꼴통’ 기질을 지닌 다혈질 형사 강철중(설경구)과 명석한 두뇌의 냉혈한 펀드매니저 조규환(이성재). 둘의 팽팽한 힘겨루기가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끌고나간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어느 여름밤, 주택가 골목에서 잠복근무 중이던 철중은 변의를 참지 못하고 전봇대 뒤에서 볼일을 본 뒤 일어서다가 판초를 걸친 사내와 부딪쳐 넘어진다. 화가 치민 철중은 달려가 사내의 뒤통수를 후려치지만 그의 품에서 나온 비수가 눈가를 스치자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인근 주택에서 칼로 난자당한 노부부의 시신이 발견된다. 철중은 노부부의 외아들인 규환을 보고 그가 바로 비오는 날 마주쳤던 사내이자 살인범임을 직감한다. 이때부터 살인의 단서를 찾아내려는 철중과 그를 무력화 시키려는 규환의 본격적인 대결이 불꽃을 튀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두 배우의 연기력. 범죄 덮어씌우기나 마약 강탈 등도 서슴지 않는 악질경찰이 돌연 정의의 화신으로 변모한다는 설정이 다소 생뚱같이 비칠만도 하나 설경구의 사실적인 표정과 말투는 관객의 공감을 자아내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여기에는 이성재의 밉살스런 분위기도 크게 한몫한다. ‘공공의 적’은 모처럼 강우석 감독의 영화를 보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려는 관객도 섭섭지 않게 배려하고 있다. 현실에 대한 풍자와 역설적 상황이 빚어내는 ‘강우석표’ 유머는 확실히 오버액션이나 말 장난을 동원한 억지웃음에 비해 ‘본전 생각’을 나지 않게 만든다. 강신일(엄반장)ㆍ이문식(주류업자)ㆍ성지루(정보원)ㆍ유해진(건달) 등 낯익으면서도 이름 귀에 선 조연들의 감초연기도 빛을 발하며, 탄탄한 짜임새로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게 만드는 솜씨도 상당하다. 그러나 결정적 단서를 추적해내는 추리적 요소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 어차피 관객들이 범인을 모두 아는 상태에서 너무 일찍 사건의 실마리를 노출시켰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어쨌든 강감독에게 엄청난 걸작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유쾌하고 뿌듯한 마음으로극장 문을 나설 수 있다.
11일 개봉할 ‘아프리카’는 펑키 코믹액션쇼를 표방한 영화답게 도발적인 설정에 통쾌한 줄거리를 담고 있다. 주인공들의 반란은 우연히 권총 두 자루를 손에 넣으면서 시작된다. 일이 잘 안풀려 의기소침해 하던 대학생 지원(이요원)과 소현(김민선)은 답답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동해안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빌린 차 안에 권총 두 자루를 발견한다. 이 총은 형사인 김반장(성지루)과 조직폭력배 중간보스 날치(이제락)가 도박판에서 판돈 대신 걸었다가 밤무대 가수 리키(박일준)에게 잃은 것. 소현의 남자 친구는 소현의 환심을 사려고 차를 훔쳤다가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지원과 소현은 서울에 돌아가는 대로 주인을 찾아 돌려주기로 마음먹지만 돌발사태가 이어져 통제불능 상태에 빠진다. 더구나 외모 콤플렉스를 지닌 시골 다방의 영미(조은지)와 자신을 농락한 남자에게 복수를 꿈꿔오던 진아(이영진)가 차례로 합류하면서 사건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한편 김반장과 날치는 이들을 추적하나 번번이 허탕만 친다. 반면에 이들을 흉내낸 모방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사이버공간에서는 ‘네 명의 혁명적인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란 뜻을 지닌 팬클럽 ‘A.F.R.I.K.A(Adoring Four Revolutionary Idolsin Korean Area)’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다. 중견 신승수 감독은 노련한 솜씨로 4명의 여배우들을 조율해 개성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룬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이요원은 ‘고양이를 부탁해’의 혜주보다 훨씬 성숙한 모습으로 팀의 리더 역할을 훌륭히 해냈고 ‘눈물’에서 재능을 선보였던 조은지는 좌충우돌하는 폭소연기로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김민선과 이영진은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에서 보여준 대로 각각 새침데기다운 매력과 중성적인 카리스마를 과시했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썩 괜찮은 페미니즘 영화의 탄생을 기대하던 관객을 다소 실망시킨다. 이른바 ‘조폭 코드’를 드러내는 장면이 끊임없이 등장해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빼앗아가고 통쾌한 감동을 값싼 웃음으로 희화화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