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흰빛 가득찬 그곳엔 죽음이.. ’하얀 밤’

공포영화를 즐기는 계절이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15일 간판을 내걸 ‘하얀 방’(제작 유시네마)의 극장가 방문은 확실히 굼떠 보인다. 지난 여름 휴대전화를 매개로 한 ‘폰’에 이어 인터넷을 따라 연쇄살인 사건이 펼쳐지는 ‘피어닷컴’이 이미 차례로 관객을 훑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하얀 방’은 불륜과 임신이 사건의 모티브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안병기 감독의 ‘폰과 유사하고 살인의 망령이 인터넷 사이트를 숙주로 삼고 있다는 설정은 윌리엄 말론 감독의 ‘피어닷컴’과 닮았다. 속옷을 입은 채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던 여인이 갑자기 누군가의 습격을 받고 배가 임신부처럼 부풀어 오른 뒤 숨을 거둔다. 이어 못으로 철판에 새긴 듯한 글씨체의 타이틀 자막이 흐르며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방송국 다큐멘터리 PD인 한수진(이은주)은 사이버수사대의 엘리트 형사 최진석(정준호)의 일과를 밀착취재하면서 이상한 연쇄 살인사건에 접하게 된다. 피살자는 외상이나 타살 흔적이 없을 뿐 아니라 임신 경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모두 임신한 상태로 숨진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인터넷의 마리산부인과 홈페이지에 접속했다는 것. 피살자의 지인은 “자기가 죽는 모습을 인터텟에서 봤다고 말하며 곧 죽을 거라고 했어요”라고 증언한다. 한편 수진도 같은 방송국 앵커 정이석(계성용)과 연인 사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곤경에 빠질 즈음 우연히 문제의 사이트에 접속하게 된다. 빛으로 가득찬 하얀 방을 본 그는 죽음의 공포에 정면으로 맞닥뜨리기 위해 첫 희생자가 발생한 오피스텔 1308호에 입주한다. ‘Org’‘Over Me’‘눈물’‘아쿠아 레퀴엠’‘정화되는 밤’등 실험성 짙은 단편영화로 주목을 받아온 임창재 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새로운 기법과 파격적인 영상을 유감없이 선보인다. 소리만으로 관객들의 머리털을 쭈뼛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장면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솜씨는 일품이다. 그러나 상업영화 데뷔무대라는 것을 너무 의식한 탓인지 등장인물의 관계설정이나 살인의 모티브가 지나치게 상투적이다. 더욱이 서사구조의 짜임새가 허술한 것은 장편영화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여겨진다. 관객들은 종료 자막이 올라오는 순간에도 범인의 정체와 살인의 의도를 눈치채기 어렵다. 아무리 머리 속에서 필름을 되돌려보아도 연쇄살인을 하나의 연결고리로 엮을 만한 단서가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엘리트 형사라는 진석이 사건의 핵심에 다가가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는 모습도 어설프게만 보인다.

새영화/레드 드래곤

‘양들의 침묵’에서 앤터니 홉킨스의 섬뜩한 미소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6일 개봉될 ‘레드 드래곤(Red Dragon)’을 놓칠 수 없다. ‘레드 드래곤’은 토머스 해리스 원작소설로 따지면 ‘양들의 침묵’과 ‘한니발’의 연작중 제1부에 해당하는 작품.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던 유능한 FBI 요원 윌 그레이엄(에드워드 노튼)은 시체마다 요리에 애용되는 부위가 사라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범인이 인육을 먹는 정신병자라고 추정한다. 그는 범인의 심리상태에 대한 조언을 듣기 위해 심리학자 한니발 렉터 박사의 집에 들렀다가 범인의 정체를 눈치챈다. 그 순간 한니발의 공격을 받아 중태에 빠지지만 그를 체포하는 데 성공한다. 그로부터 7년 뒤, 또다시 잔혹한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 수사가 미궁에 빠지자 FBI는 가족과 평안한 나날을 보내던 윌에게 복귀를 권유한다. 윌은 범행 현장과 시체의 상태 등을 살펴보고 우발적인 살인은 아닐 것으로 단정한 뒤 수감중인 한니발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때부터 한니발을 이용해 범인을 찾아내려는 윌과 범인을 원격 조정해 윌을 제거하려는 한니발의 치열한 두뇌 게임이 시작된다. 범인 프랜시스 돌하이드(랠프 파인스)는 한니발을 숭배하며 절대적인 세계로 도달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다중인격자. 수사망이 점점 좁혀져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범인은 최후의 선택을 감행한다. 모든 상황이 종료됐다고 여기는 순간 마지막 반전이 관객의 뒤통수를 친다. 라스트신에서는 교도관이 “수사관치고는 너무나 젊고 예쁜 FBI 요원이 당신을 만나보고 싶다는데…”라며 한니발에게 말을 건넨다. 바로 ‘양들의 침묵’의 시작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91년 ‘양들의 침묵’과 2001년 ‘한니발’에 출연했던 앤터니 홉킨스가 1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분장만으로는 눈가의 주름이나 늘어진 살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등골이 오싹해지는 눈빛과 상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는 여전하다. ‘러시아워’ 시리즈의 브렛 래트너 감독이 무리인 줄 알면서도 출연을 강권했던 사정을 이해할 만하다. ‘레드 드래곤’은 ‘한니발’이 자극의 강도를 높여 ‘양들의 침묵’을 뛰어 넘으려고 한것과 달리 치밀한 시나리오와 연기력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양들의 침묵’이 처음 던진 충격파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짜임새는 결코 뒤지지 않고 배우의 연기력으로만 따지면 오히려 윗길이다.

인터뷰-새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신하균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순진한 북한군 병사, ‘킬러들의 수다’의 길눈이 어두워 업종전환한 킬러, ‘간첩 리철진’의 단순무식한 고등학생, ‘복수는 나의 것’의 지독하게 불행한 청각장애인, ‘묻지마 패밀리’의 동네 양아치 등등. 98년에 영화에 데뷔한 28살 배우 신하균의 영화 이력을 살펴보면 평범했던 적을 찾아보기가 정말 힘든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에 그가 출연을 결심한 것도 바로 ‘캐릭터가 독특해서’. 사실 ‘지구를 지켜라’의 병구는 지금까지 맡은 배역 중 가장 개성이 강한 편이다. 영화 속에서 병구는 세상의 모든 악과 슬픔을 외계인의 지구파괴 음모에 의한 것으로 믿고 물파스, 때밀이수건 등의 무기로 이들을 물리칠 계획을 짜는 독특하기로 치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캐릭터다. 독특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은 그가 피우는 담배가 그다지 인기를 끌고 있지 않은 도라지라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이유를 묻자 “글쎄요…어떻게 하다 보니…”라며 특유의 사람 기분 좋게 만드는 미소를 보인다. 신하균은 인터뷰 내내 계속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좋은 미소를 띠었다.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말에도 “말을 잘 못하니까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것이죠”라며 다시 웃는 얼굴을 보여준다. 신하균이 올해 출연한 영화는 ‘복수는 나의 것’, ‘서프라이즈’에 ‘지구를 지켜라’까지 모두 세 편. 여기에 오는 11월 중순 크랭크인하는 영화 ‘화성에 간 사나이’에 출연할 예정이며 12월에는 장진 연출의 ‘웰컴 투 동막골’로 연극무대에도 선다. “너무 바빠서 여자친구 배두나와 데이트할 시간도 없지 않느냐”는 질문에 “어쩔수 없죠. 그냥 전화 많이 해요”라고 담담하게 대답하면서도 그는 최근 기자시사회를 연 배두나 주연의 영화 ‘굳세어라 금순아’의 반응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래도 출연 작품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한창 일할 나이인데요…”라며 입을 열었다. “일이라고 생각지 않으니까 그냥 생활이 된 것 같아요. 바쁜것은 괜찮지만 그것보다는 영화 속 인물로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해요.” 서울예대 방송연예과 93학번인 신하균은 고등학교 때 다른 동기들처럼 연극반 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연기학원에 다니면서 대학입시를 준비한 경험도 없다. 대학을 고르면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니 연기였고 그래서 시험을 쳤더니 덜컥 붙어버린 것이 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 “그래도 연기가 고통스럽고 힘들 때가 많아요. 하면 할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연기할 때는 예민해져서 밤에 잠도 못 잘 정도인데요…” 신하균의 연기력이나 촬영장에서 보여주는 진지한 모습은 이미 다른 영화를 통해서 널리 알려진 사실. 하지만 부산 해운대 종합촬영소에서 만난 신하균은 ‘예민해서 밤잠을 못 자는’ 사람치고는 살이 쪄 있었다. “몸무게가 좀 불은 것 같다”고 말을 건네자 신하균은 “찌웠어요. 설정이죠”라며다시 한번 미소를 지어보였다. “술 때문인가? 감독님하고 밤마다 술을 마시거든요. 하루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새영화>어느날 그녀에게 생긴일

시애틀 지역방송의 리포터이며 완벽한 몸매에 매력적인 금발머리, 메이저리그 야구스타인 남자친구까지 뭐 하나 부족한 것 없는 듯 보이는 레이니(안젤리나 졸리)는 소위 잘 나가는 여자. 어느날 길거리의 예언자를 취재하러간 그녀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듣는다. 바로 그녀가 다음주 목요일에 죽을 운명이라는 것.처음에는 무심코 흘려들었지만 그날 저녁 예언자가 말한 대로 19:13으로 야구경기가 끝나자 점점 불안해지던 레이니는 다음날 아침 우박이 내리고 샌프란시스코에 지진이 나는 것까지 예언자의 말이 현실로 나타나자 혼란스러워 한다.이제 남은 시간은 7일. 예언자의 말은 오직 성공을 향해 바쁘게 달려온 그녀에게 새로운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가족과 아버지, 어린 시절의 추억, 그리고 진정한 사랑.레이니는 콘택트렌즈도 빼고 화장도 안 한 채로 술독에 빠져서 록음악을 듣는 등 백수생활의 진가를 만끽하며 동시에 자신이 카메라맨 피트(에드워드 번즈)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발견하는 레이니. 그러는 사이 운명의 목요일은 점점 다가오는데11일 개봉하는 영화 어느날 그녀에게 생긴 일은 옆으로 긴 눈, 글씨를 써넣을 수 있을 만큼 큰 쌍꺼풀, 시원하게 벌어진 입에 까진 입술 등 전형적인 서구형미인 안젤리나 졸리의 매력이 듬뿍 들어있는 영화다.툼 레이더의 여전사, 처음 만나는 자유의 반항아에서 이번 영화에서 마릴린 먼로 스타일의 금발머리로 변신하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안젤리나 졸리는 비교적 무난히 변신에 성공한 모습이다.비교적 가벼운 내용에 적당한 긴장감, 그리고 매력적인 여배우의 색다른 모습은 가볍게 영화 한편 보고싶어하는 관객들을 충분한 만족을 줄 만 하지만 싱겁게 예측가능한 결말은 이 영화의 단점이다.

<새영화>'배틀 로얄'

청소년 범죄가 증가하고 세대간의 갈등이 증폭되자 일본은 매년 중학교 한 학급을 선정해 무인도에서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싸우도록 하는 ‘BR(Battle Royale)법’을 제정한다. 3일이 지날 때까지 최후의 승자가 가려지지 않으면 전원 몰살시키며 제한구역에 들어가거나 탈출을 시도하는 것도허용되지 않는다. 5일 개봉 예정인 일본영화 ‘배틀 로얄’은 충격적인 진짜 서바이벌 게임의 현장으로 관객들을 안내한다. 올해의 BR 대상학급으로 뽑힌 42명의 급우들은 수학여행 버스에서 마취가스를 마시고 납치돼 무인도 폐교의 교실로 옮겨진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 목에는 모두 목걸이가 채워져 있고 집총한 군인들이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이는 가운데 3일간의 살육전을 지휘할 기타노 선생이 BR의 규칙을 설명한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교실이 술렁거린 것도 잠시. 떠들던 학생이 기타노 선생의 칼에 맞아 쓰러진 데 이어 BR을 거부하던 학생마저 목걸이가 폭발해 숨지자 모두 체념한 채 차례로 무기와 비상식량을 받아들고 밖으로 빠져나간다. 친구를 죽일 수 없어 주저하던 학생들은 죽이지 않으면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닫고 하나씩 살인광이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자살이라는 어두운 기억을 안고 있는 슈야는 자신을 연모하는 노리코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이 영화는 신인작가 다카미 고순이 99년에 펴낸 소설을 액션영화의 거장 후카사쿠 긴지 감독이 스크린에 옮겨놓은 것. 청소년을 향한 기성세대의 불신을 통렬히 꾸짖는 동시에 무한경쟁을 부추기며 적자생존을 강요하는 사회 시스템에도 비수를 던진다. 그러나 극단적 설정과 폭력의 과잉은 공감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남녀간의 사랑 감정을 남발한 것도 극 전개의 밀도를 떨어뜨리는 느낌이다. 비현실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실명으로 출연한 감독 겸 배우 기타노의 연기는 매우 실감난다. 일본에서도 뜨거운 논란을 빚은 ‘배틀 로얄’은 2000년 12월 ‘15세 이하 관람불가’ 등급으로 개봉됐다가 흥행 정상에 오른 뒤 이듬해 4월 8분 가량을 추가해 재편집한 디렉터스 컷으로 재개봉됐다.

<새영화>'집으로…'

한국영화인들이 이제는 청춘남녀를 내세우지 않고도 승부를 겨뤄볼 만큼 배짱이 생긴 것일까. 관객들은 아이들의 천진한 눈망울로 심금을 울리는 이란영화를 더이상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집으로…’는 배경이나 등장인물만 보면 한국영화의 본류에서 한참 비켜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데뷔작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심은하와 이성재를 앞세워 평단의 호평과 함께 관객 몰이에도 성공했던 이정향 감독의 두번째 선택으로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상식의 덧칠을 벗겨내면 이 영화야말로 한국영화의 다양한 흐름에 방점을 찍은 것이며 이정향다운 절묘한 선택임을 알 수 있다. 영화의 무대는 충북 영동의 두메 산골. 하루 서너차례 드나드는 시외버스만 아니라면 절해고도나 다름없는 오지이다. 이곳의 다 쓰러져가는 너와집에서 77살 노파와 7살 꼬마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주인공 상우는 엄마 손에 이끌려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타고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외할머니 댁으로 향한다. 형편이 어려워진 엄마가 잠시 친정에 아들을 맡기려는 것이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없이 한방을 쓰게 된 외조모와 외손자는 도회지와 산촌의 거리나 70년의 나이 차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격차를 지니고 있다. 할머니는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먹고 싶다는 손자에게 닭 백숙을 내오고, 상우는 전자오락기의 전지를 사기 위해 할머니의 은비녀를 훔쳐낸다. 도저히 버릇이 고쳐질 것 같지 않던 못된 상우도 전자오락기와 함께 포장된 낡은 지폐를 발견하고는 마음을 고쳐먹기 시작한다. 한없는 할머니의 사랑에 조금씩 젖어들어 기특한 아이로 변해나가는 것이다. 노인과 아이만으로, 그것도 비전문배우들을 동원해 시골에서 상업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몇해 전만해도 엄두를 내지 못하던 일이다. 한국영화 힘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이자 관객의 선택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다. 이정향 감독은 이제 두번째 영화를 만든 신인이고 아직 30대 후반에 불과한 청춘이지만 영화에서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나 장이머우와 같은 거장의 냄새가 풍겨난다. 훈육 없이 사랑으로 외손자를 가르치는 할머니처럼 뻔한 교훈을 감동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비법을 체득한 것이다. 평생 단 한번도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김을분 할머니의 무공해 연기와 마을 주민들의 천연덕스런 표정도 볼 만하다.

<새영화>위대한 비상

‘알바트로스’는 철새 중 덩치가 가장 크다. 날개가 무려 3.6m에 이른다. 태어나 9개월이 지나면 둥지를 떠나 8년이 지나야 다시 육지로 돌아온다. ‘로얄 펭귄’은 날 수는 없지만 수심 수백 미터까지 잠수할 수 있다.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는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만 에너지를 80%나 절약하는 효과가 있다. 29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위대한 비상’은 전세계 27종에 이르는 철새들에 대한 영상 보고서다. 극지대의 빙하에서 아프리카 모래 사막에 이르기까지 철새들의 여행을 쫓아가면서 그들의 생존을 위한 고군분투를 담았다. 5년 전 곤충의 세계에 카메라를 들이댔던 ‘마이크로 코스모스’의 쟈크 페랭 감독의 솜씨다. 주인공은 흰 기러기, 백조, 황새, 앵무새, 흰 펠리컨 등 수천 마리의 새들. 철새들에게 총을 쏘아대는 인간은 이들의 여정을 방해하는 엑스트라일 뿐이다. 눈보라 속에서 발레를 하는 듯한 군무를 펼치는 일본 두루미, 그랜드캐년의 협곡에서 다이빙 실력을 자랑한 흰꼬리수리, 물 위를 경주하듯 가로지르는 물새 등 해학적인 장면이 미소짓게 한다. 날개가 부러져 사막에서 게들의 먹이가 되거나 덩치가 큰 새에게 잡혀먹히는 작은 새 등 치열한 약육강식의 현장도 목격할 수 있다. 서부·북부 유럽이나 중앙아프리카, 인도네시아, 북극과 남극 일대 등 새들의 비상과 함께 펼쳐지는 지구의 자연 풍광을 보는 즐거움 또한 크다. 조류학자, 생물학자, 비행기 조종사 등 각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제작진이 세계 각지에서 모은 1천여 개의 알을 최적의 온도와 습도가 갖춰진 인큐베이터에서 길러 주연으로 기용했다. 촬영에는 헬리콥터, 행글라이더, 열기구, 특수 제작된 경비행기 등 ‘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총동원됐다.

<새영화>복수는 나의 것

‘착한 유괴’라는 단어의 조합이 가능할까.가난한 사람이 부잣집 아이를 납치해 몸값을 받아낸 뒤 멀쩡하게 돌려보내는 게 부(富) 혹은 자본의 분배 방식 중 하나라고 보는 발상은 어떨까. 박찬욱 감독의 신작 ‘복수는 나의 것’은 ‘착한 유괴’라는 극중 표현만큼이나 낯선 영화다. 각각 사적인 이유로 핏빛 복수극을 펼치는 개인들을 통해 인생과 세상의 부조리를 꼬집는 이 영화는 표현 방식이 독특하다. 한국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하드 보일드’ 장르를 표방해, 설명과 대사는 가능한 한 아꼈다. 일말의 동정이나 연민이 끼어들 구석도 없이 영상은 잔혹하면서도 무미건조하게 탈색했다.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청각장애인 류(신하균)는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누나와 단둘이 산다. 신장을 이식해야만 살 수 있는 누나를 위해 장기 밀매단을 찾아간 그는 퇴직금 1천만원과 제 신장마저 빼앗긴채 버려진다. 이때 누나에게 적합한 신장을 찾았으니 일주일 내로 수술비를 가져오라는 병원의 통보가 날아든다. 유일한 피붙이인 누나를 살리기 위해 이 가난한 장애인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류의 여자 친구이자 극렬 운동권 학생인 영미(배두나)는 부잣집 아이를 유괴하자고 제안한다. “이 세상에는 ‘착한 유괴’도 있다”면서. 두 남녀가 중소기업 사장인 동진(송강호)의 딸을 납치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류가 몸값을 챙겨들고 기뻐할 동안 동생의 범죄 사실을 알게된 누나는 손목을 그어 자살하고, 유괴한 아이 역시 뜻하지 않게 강물에 빠져 죽고 만다. 아내도 떠나고 하나뿐인 딸마저 잃은 동진은 유괴범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고, 누나를 잃은 류도 장기 밀매단을 응징하면서 복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복수는…’은 ‘오싹’하고 소름이 돋게 하는 영화다. 잔혹한 장면을 드러내놓고 보여주진 않지만 상상의 여지를 남겨 공포감을 극대화 시킨다. 류가 장기밀매범들의 심장을 꺼내 소금에 찍어 먹기까지 했다는 사실은 피로 물든 도마와 칼, 소금이 스크린에 나타나면서 암시되고, 윙윙거리는 전기톱소리로 시체의 사지가 잘려나가는 것을 짐작케 할 정도다. 동진은 영미를 전기고문해서 살해하고 류를 자신의 딸이 빠져죽은 강속으로 끌고 들어가 발목의 아킬레스건을 잘라 익사시킨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복수의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이렇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비극이라니. 예기치못한 사건 하나가 많은 이들의 삶을 통째 비틀 수 있다니 인생은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가. 심각해야 할 상황에서 코믹한 대사를 삽입하고, 의도적으로 내러티브를 건너뛰거나 자장면 배달을 나왔다 시체가 돼 나가는 중국집 배달부의 운명처럼 뚜렷한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는 죽음을 집어넣은 것도 이런 맥락과 닿아있는 듯 보인다. 순진무구했던 청각장애인이, 자상했던 아버지가 극악무도한 복수의 화신으로 변하기까지 표면적으로는 개인적 원한을 앞세웠지만 한꺼풀만 벗겨보면 그들의 분노는 결국 우리 사회의 모순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새영화>생활의 발견

홍상수 감독이 신작 ‘생활의 발견’이 22일 개봉된다.그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오 수정’까지 평범한 남녀의 모습을 통해 일상의 단면과 삶의 위악을 가감없이 그려내 주목받았던 감독. 홍감독은 이제 일상성에 관한한 도가 튼 듯 보인다. 예의 이번에도 가식을 걷어낸 연애담을 들고 나왔다. 줄거리랄 것도 없다. 한 남자가 6박7일 동안 여행하면서 성격이 상반된 두 여자를 만나 겪게되는 소소한 에피소드를 채워넣었다. 시나리오처럼 각 이야기마다 소제목도 붙었다. #경수가 영화사에 가서 감독과 말다툼을 하다 #경수가 기차 안에서 선영을 만나다 등등. 경수(김상경 분)는 연극계에서는 제법 알려진 배우. 모처럼 영화에 출연했다가 흥행에 실패하고 차기작 캐스팅까지 무산되자 영화사로부터 러닝개런티를 뺏다시피 받아들고는 춘천에 사는 아는 선배를 찾아간다. 그 곳에서 선배 소개로 만난 여자가 명숙(예지원 분). 무용학원 강사인 그녀는 처음 만난 술자리에서 “어색한 거 없애게 뽀뽀나 할까요”라며 적극 호감을 보인다. 관계가 급진전해 하룻밤을 같이 보낸 두 사람. 뒤늦게 명숙과 선배가 ‘심상치않은’ 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경수는 찜찜한 마음을 뒤로 하고 기차에 몸을 싣는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 선영(추상미)이 갑자기 아는 체를 한다. 그가 출연한 연극과 영화까지 다 봤다는 여자의 말에 마음이 동한 경수는 무작정 그녀를 따라 경주에 내린다. 알고 보니 그녀는 유부녀. 선영의 다가설 듯 말 듯한 태도에 마음이 더욱 달아오른 경수는 그녀 집까지 쫓아가고 둘은 결국 ‘선’을 넘고 만다. 관객과 거리감을 좁히려는 의도였을까. ‘생활의 발견’은 감독의 전작들보다 훨씬 가볍고 코믹해졌다. 웃음은 주로 뜬금없는 대사와 생뚱맞은 상황에서 나온다. 주인공들이 툭툭 내뱉는 대사들은 언뜻 아무런 의미가 없어보이는데도 마치 계산된 것처럼 적재적소에서 튀어나와 폭소를 자아낸다. 극 전반에는 ‘모방’의 코드가 들어있다. 춘천 공지천에서 떠다니던 오리배가 경주에서도 슬쩍 비춰진다. 경수가 선배한테 들었던 “인간이 되긴 어렵더라도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말을 마치 제 생각인양 남한테 똑같이 내뱉는다. 경수와 명숙사이에서 오간 대화가 경수와 선영 사이에서 다시 한번 오고 가는 식이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동어반복적인 표현을 곳곳에 심어놨다. 포장과 환상을 걷어낸 삶은 결국 ‘거기서 거기’라는 뜻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