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한 달 사이에 바쁘게 두 번의 새해를 맞이하고 보내드렸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과거를 떨쳐버리고 싶은 듯이 얼른 맞이하고 보내드렸다. 그럼에도, 지난 세월에 기웃거리며 미련을 두는 이유가 뭘까? 에드워드 카에 의하면 역사란 잃어버린 조각이 많은 대규모의 그림 퍼즐이고, 현재의 눈을 통해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봄으로 성립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무슨 말일까?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심지어 알지 못하는 미래까지도 예상하면서 퍼즐을 짜 맞출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 그런 현재가 과거에 비추어 얼마나 당당하겠으며, 미래는 얼마나 희망적이겠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역사는 한 마디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연결된 선 위에서 곡예하는 서커스와 같다 할 수 있겠다. 지난 한 해 우리 사회는 정치 경제적으로 지독한 양극화를 겪으며 절뚝거렸다. 해방정국의 좌우대립을 능가하는 극단적인 정치적 대결과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들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시급 상승은 대다수 국민의 빈정을 상하게 하고 정치의 불신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어 일 년 내내 불안이 떠나지 않았다. 또한, 국정감사 내내 존경하는 ○○○의원님이라고 추켜 놓고 존경은커녕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괴수들처럼 으르릉거리며 대결하던 비인격적인 모습들이 부끄러웠고, 최소한의 인격도 존중할 줄 모르는 정치모리배들이 극단을 주장하면서 들끓는 거리를 나다니기가 무서울 정도였었다. 그런데 염치도 없는지 그런 그들이 조직을 재구성한답시고 헤쳐 모이고, 개혁과 혁신을 부르짖으며 호들갑 떠는 게 불안한 미래를 예고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인간만사새옹지마라고 했다. 세상사 모든 일이 좋은 듯하면서도 괴롭고, 괴로운 듯하면서도 좋아질 수 있으며, 불행한 일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행복한 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세월에 기웃거리더라도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안전하기 때문이겠다. 예수께서 과거의 영화에 집착하며 살던 유대인의 기득권 세력인 바리새인들의 금식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셨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듯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포도주와 부대를 다 보전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마태복음 9:14-17). 바쁜 듯 보내드린 해가 민망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세월에 염치없이 집착하기보다 극복하는 지혜가 필요하겠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전할 수 있듯이 더 나은 한 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염치를 알고 스스로 참신한 사람이 되어 사회 구석구석에 누룩이 되고 자양분이 되어야 하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기독교가 오늘날 젠더 이데올로기에 민감한 이유

21세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라고 부른다. 현대후기사회는 모든 것을 해체하는 주의(ism)와 중심적인 사고에서 탈피하고 다원화 되는 특징성향을 강력하게 갖고 있다. 기존의 모든 것을 다시 정의하고자 하는 성향 속에서 모든 가치관들은 큰 혼란을 겪고 있기도 하다. 20세기를 전쟁의 세기로 정의하고 온 인류는 평화를 기원했지만, 그 기대가 깨지는 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데올로기의 냉전체제로 인류를 떨게 했던 마르크시즘(Marxism)과학적 사회주의는 인류와 이별을 고하는 듯하였으나 오히려 오늘날 새로운 가면을 쓰고 인류의 역사에 더 큰 위협을 가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속 인류의 삶 속에 가장 두려운 화두는 생로병사가 되었다. 무병장수 인류의 희망은 유전자 조작을 통한 최첨단 기술의 개발과 발을 맞추어 인체의 신체를 조작함으로 불로장생(不老長生)이라는 21세기 진시황제의 시도로 표출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기업이 구글(Google)이며 미래학자들임을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류의 영성은 의미 없는 하나의 정신적 사조로 버려지는 것이다. 이 시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각 종교 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는 않은 문제일 것이다. 기독교는 왜 젠더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예민한 것일까? 그것은 영적인 문제로 답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 문제에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역사학교수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사피엔스, 호모데우스라는 책을 통해 사람이 신이 되고자 하는 논리를 이미 전개했다. 문제는 이 젠더의 문제가 결국 급진적 페미니즘의 성(性)적인 문제로 연결되고 그 연결고리는 버틀러의 책 젠더 크러블에서 섹스가 젠더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젠더가 섹스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고백의 질서를 다 무너뜨리는 말과도 같다. 기독교가 동성연애를 금하는 것은 동성 간의 성교의 방법적 행위의 문제와 더불어 창조적인 하나님 신앙을 강조해온 창조신앙의 중심을 쾌락으로만 퇴보시켜서 자녀를 출산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저들의 문제는 가정의 파괴를 가져온다. 결국, 결혼의 대상이 영혼 없는 짐승과 결혼이 되고 그리고 쾌락의 문제가 가정의 개념을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동성연애자들의 비판을 위한 푸념이 아니다. 이 화두는 한 사회를 지나 인류의 문제로 등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가정은 이 땅에서 천국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모델이 되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공식적인 기관 두 곳을 만드셨는데 그것이 가정과 교회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영혼의 쉼이 있는 곳, 그리고 공감과 나눔이 있으며 헌신적 이타적 사랑이 있는 곳, 그리고 자녀가 창조적으로 만들어지는 새 창조의 공간이 있는 곳이 바로 성경적인 가정이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그 어느 기관에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하나님의 가정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독교 국가들이 가정을 소홀히 여겨온 실수가 오늘날 이런 영혼의 가치가 물질에 흡수되는 시대를 만들었으며 국가가 가정을 대체하려는 공동(共同)의 잘못된 개념이 결국 창조주의 완전한 가정에 대한 계획을 망가뜨려 버린 것이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 속에서 아름다운 가정이 만들어지고 그리고 그 가정의 울타리 속에서 자녀가 생명을 얻는 그 근본적인 가정이 우리 안에 만들어져야 한다. 그 가정이 바로 창조의 질서를 만드신 하나님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할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대한민국을 꿈꾸어 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 이슬람 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새해를 세간에 그림으로 그리면서

2020년 새해가 시작되고 10여 일의 시간이 지나갔다. 한해가 흘러갔다는 아쉬움과 내일의 희망을 꿈꾸면서 내면을 성찰하는 시간도 얼마가 흘러갔다는 의미이리라. 얼마 전의 언론의 기사에서 서울은 쉬지 않고 달려가는 역동적인 도시라는 기사 일부를 보면서 한국 국민은 여전히 부지런하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생태를 지닌 존재임을 다시 느껴보았던 순간이었다. 오늘도 사찰의 일주문을 넘어서 바라보면 승가와 재가의 경계가 존재하고 있더라도 사람들이 분주하게 활동하는 시장의 역동성을 바라보게 된다. 사찰의 위치가 도심 속에 자리 잡은 탓인지 산사의 근엄함과 고요함보다는 인간의 세상을 지금의 시선에서 바라볼 기회를 준다.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는 다양한 군상의 모습과 현상들을 체험한다는 것이 수행과 대중교화라는 영역에서 교묘하게 교차하는 느낌이다. 중생계에 존재하는 나는 현재의 위치에서 삶의 흔적을 업이라는 소재로 광대한 세계에 개략적으로 그려가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 그림의 가운데에는 착하게 그려져서 대중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고, 또한 악한 처신으로 지탄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며, 무의미한 상태로 치부되어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스스로 걸어왔던 길은 다른 존재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삶의 모습이 전체적으로 기록되고 미래의 종자가 되어 다른 모습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행위의 가운데에 자리 잡은 것으로 가장 중요한 하나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사랑이 없다면 물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을 것이나, 지나친 자기 사랑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며칠 전에도 지구촌에 국가 간의 갈등으로 인한 비행기의 피격으로 무고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표면적인 이유로 정치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있으나, 인간의 본성에서 살펴본다면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쳐서 집단적인 사회문제로 발전되고 정치공학적으로 가공되어 일어난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물질적인 문화와 정신적인 문화를 조화롭게 발전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으나, 지금까지도 두 영역에는 합일될 것 같으면서도 부조화가 나타난다. 지금도 지구촌이라는 언어의 유희 속에서도 서로 이익과 가치의 우선을 내세우며 갈등하고 있고, 화합과 양보보다는 힘의 논리가 앞서는 현실이다. 요즘에 오랜 세월을 덮어두었던 역대 조사들의 글을 다시 읽어보면서 인간미를 가장 중요시하였던 인간중심의 사상임을 다시금 확인하였다. 부처님께서 인도에 출현하신 것은 2천500년 전이었고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큰 스승들께서는 인간중심의 사유를 강조하고 계신다. 이러한 사유는 단순히 불교의 가르침만이 아니고 여러 종교에서도 인간중심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 과연 부처의 성품을 간직한 우리는 마음의 근원에서 복잡하고 역동적인 현대를 살아간다는 핑계로 현실을 얼마나 외면하고 있는가! 2020은 같은 숫자로 반복되고 있는 한 해이다. 이러한 숫자가 같다는 것에 너와 나라는 수식으로 대입하여 생각한다면 어떠할까? 너와 내가 같다는 의미로 통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올해는 다른 해보다도 더욱 화합할 수 있고 타협하고 양보할 수 있는 일 년이라는 숫자라고 인식한다면 지나친 자기도취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너와 나를 분별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라고 가르치신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은 같은 부처의 성품을 가진 존재이므로 이러한 사유를 버리지 말고 화합하라는 뜻이고, 너와 내가 다르게 존재하되 다르지 않다는 사유가 필요한 때이다. 우리는 하나의 세상에서 공존하는 공동의 업을 지닌 공동체이므로, 광대한 세계 속에 선하고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세간에 담으면서 2020년에 그려갔으면 한다. 세영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또 한 살에 감사를 품다

감사하며 살라고 말만 해왔지 살아오면서 많은 시간 저는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 고맙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답사는 예상 외로 짧았다. 40년간의 현직 사목 생활을 마무리 짓는 퇴임 미사이니만큼 신부님을 기억하는 이들이 모여 그간의 노고에 감사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한 길 사목자로 살아오면서 남기고 싶은 말도 많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을 것이므로 어록까지는 아니더라도 내심 가슴에 새길 만한 무게 있는 말씀 한마디쯤 기대하고 있었다. 그 긴 사목 생활을 해오셨으니 어쩌면 그 긴 삶 중에 있을 법한 극적인 이야기나 기적에 가까운 감동 실화들이 무딘 가슴들을 뻥뻥 뚫어줄 것을 고대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다가 그런 상상을 다 했을까. 생각해보면 인생의 끝자락을 향해 갈수록 짧아져야 할 것들이 있다. 그중에 무엇보다도 짧아져야 할 것이 있다면 단연 입의 말이다. 긴말을 한다는 것은 내가 상대에게 그만큼 말을 많이 한다는 의미일 것이고 짧게 말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의 말을 듣는다는 의미에 가까우니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짧게 말하고 잘 들어주는 사람을 더 가까이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아마도 이 말은 노파심에서 나오는 말 즉 남의 일에 지나치게 염려하는 마음을 줄이되 너그러움과 푸근함, 관조하는 마음과 넓은 포용력의 지갑을 열라는 뜻은 아닐까 싶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그만큼 누군가의 덕분으로 살아온 시간은 많았을 것이므로 나이 들수록 겸허하게 그저 감사하고 뭐라도 베풀면서 산다면 이보다 아름다운 나이 듦은 또 없을 것이다. 훗날 나의 깊은 주름살에서는 아름다운 비움과 내려놓음이, 그저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함이 묻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프랑스 여배우 시몬 시뇨레는 어느 사진작가가 사진을 찍으려 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봐요, 내 얼굴의 주름살 좀 잘 나오게 해줘요. 나 이거 만드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우. 그녀의 말에서처럼 자신의 주름살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으려면 삶에 대한 그만큼의 철저한 관리가 또한 필요할 것이다. 주름살을 통해 풍겨나는 아름다움은 결코 성형수술이나 지방 제거 수술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인생의 값진 대가이다. 지난 일 년, 나에게 허락된 그 많은 시간을 정말 바쁘게 살았는데 내 삶은 몇 뼘의 성장을 더하며 깊어졌을까? 새해를 시작하며 세운, 내 삶의 성장을 위한 다짐과 목표는 몇 년째 버킷 리스트(bucket list)에서 지워지지 않고 재활용을 당하고 있다. 사랑만 해도 모자란다는 시간에 나는 얼마나 많이 부정이 아닌 긍정을, 불평이 아닌 감사를, 미움이 아닌 용서를, 다툼이 아닌 화해를, 그리고 무관심이 아닌 사랑을 선택하며 살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성에 차지는 않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열심히 잘 살아줘서 고맙다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험한 세상살이 그래도 치열하게 살아내느라 정말 고생 많았다고 용기와 위로와 힘이 되는 말을 해주고 싶다. 또 새해를 맞았다. 사느라 어쩔 수 없이 쌓아진 내 맘속의 사금파리들은 다 내려놓고 이제 새 마음가짐과 목표로 다시금 새 출발을 해보자. 누군가의 덕분으로 살았음을 감사하며 새해 또 한 번의 파이팅을 힘차게 외쳐보자. 갈수록 늘어나는 주름살이 부끄럽지 않도록. 김창해 천주교 수원교구 사회복음화국장 신부

[삶과 종교] 경자년, 아름다운 경자자를 생각하며

경자년(庚子年) 하얀 쥐띠해의 초이틀이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저마다 올해의 다짐을 새롭게 할 것이다. 나도 매년 새해 오늘이면 올해의 새로운 다짐을 하곤 한다. 또 학교 신년하례식에 참석해 인사와 덕담을 교직원 선생님들과 교수님들께 드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 독자 여러분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경자년과 관련된 이야기를 생각하면, 나는 경자자(庚子字)라는 구리활자가 생각난다. 경자년에는 이 구리활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여러 말로,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나라였고, 고려시대나 통일신라시대는 불교의 나라였으며, 더 고대에는 하느님 아들인 환웅과 곰인 웅녀의 아들인 단군의 나라였다고 할 수 있다. 또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표기법인 이두를 집대성한 것이나, 세종의 한글 창제 덕에 문자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또 전 세계 고인돌의 3분의 2가량이 동이 문화 지역에 분포하고 있어서 고인돌의 나라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13세기경 고려시대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해 쓰기 시작했다. 경자자는 1420년(세종2년) 경자년에 만든 활자라 붙여진 이름이다. 이 구리활자는 우리나라(조선)에서 두 번째 만들어진 구리활자다. 첫 번째 만들어진 구리활자는 1403년(태종3년) 계미년에 만들어진 계미자(癸未字)다. 또 1434년(세종16년) 갑인년(甲寅年)에는 세 번째 구리활자인 갑인자(甲寅字)가 주조되었다. 계미자는 10만 자고, 계미자는 20만 자나 된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납을 사용했지만, 조선대에는 고려대의 납보다 강한 구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밀(蜜)로 활자를 고정하던 것을 식자판(植字版)을 조립하는 방법으로 개선해 고려시대보다 두 배 정도의 인쇄 효율이 올랐다고 한다. 변계량(卞季良, 1369-1430) 같은 이는 그의 갑인자발(甲寅字跋)에 인쇄되지 않은 책이 없고,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표현할 정도로 가히 혁명적 시대였다. 당시 하루에 만드는 활자 주조 수량은 당시 유럽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수량보다 약 10배 정도 더 많은 3천500자였다고 한다. 경자자는 조선 최초의 구리활자인 계미자의 단점을 보완하여 만든 두 번째 구리활자로, 계미자를 보완하여 개주(改鑄)하라는 세종의 명(命)에 따라 1420년(세종2년) 경자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경자자는 계미자보다 모양이 작고, 더 가지런하다. 계미자의 활자 모양은 끝이 송곳처럼 뾰족했는데, 경자자는 네모 반듯한 입방체로 바뀌었다. 글자는 성품의 표상이다. 태종대의 계미자가 크고 날카롭고 거칠었다면, 세종대의 경자자는 보다 작고 부드럽고 반듯했다. 주조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인쇄도중 계미자보다 활자동요를 낮추어 인쇄 능률도 높였다. 인쇄방식도 밀납을 판에 녹여서 글자를 배열하던 방식을 개량해, 글자 모양에 알맞게 인판을 만들고 죽목(竹木)으로 각 활자의 공간을 메우는 방법을 새롭게 활용했다. 비용은 절감됐고, 인쇄량과 인쇄 효과도 더욱 올라갔다. 경자년에 우리 모두 지난 일을 개선하며, 능률도 높아지되, 마음도 더욱 반듯하고 차분하고 부드러워져 행복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행복해도 될까요?

가까운 교우의 자녀가 모 대학의 의과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예정보다 하루 일찍 발표한 소식을 서둘러 전하던 그분은 너무 행복하다면서, 자기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지 조심스럽게 묻기도 하였다. 2020학년도 대학입학 수능을 치른 49만 552명의 응시생 중에서 135명인 0.026%만 뽑히는 곳이어서 더 그러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그 소식을 듣고 하루가 지나서 스카이라고 불리는 나머지 학교의 합격 소식까지 전해왔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더 클지 짐작하고 남겠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이것은 굳이 법률에 명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이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로크(John Locke)와 루소(Jean Jaques Rousseau) 같은 서양의 사상가들은 이것을 천부인권(天賦人權)이라고 표현했다.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사람에게 하늘로부터 주어진 특권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은 얼마나 될까? 그것도 조작된 행복이 아니라 자기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은 과연 얼마나 될까? 최소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물론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만약 그렇게 얻어지는 행복이라면 얼마든지 그 기쁨을 누리며 나누어도 되지 않을까? 예수님은 여덟 가지 종류의 행복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누릴 행복, 애통하는 사람이 누릴 행복, 온유한 사람이 누릴 행복, 의로운 사람이 누릴 행복,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누릴 행복,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누릴 행복, 평화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이 누릴 행복이다(마태복음 5:3-9). 사도 바울은 여기에 한 가지 행복을 더 덧붙였다.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누릴 행복이다(사도행전 20:36). 행복이라고 다 같은 행복이 아니라는 말이다. 행복을 누릴 때는 반드시 적합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그리고 이것은 사는 형편이 넉넉하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누리는 행복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1인당 국민소득 3천 달러에 불과한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부탄의 국민이 누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행복지수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인생이 성적순이 아니듯이 행복도 성적순은 아니겠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수고하고 노력했다면 거기에 어울리는 행복을 얼마든지 누려도 되지 않을까? 자선냄비 종소리와 함께 시작된 2019년의 12월이 저물어가고 있다. 일 년 내내 경제가 불황이라고 내몰아대던 성숙하지 못한 정치적 권모술수,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무조건 종북 빨갱이, 원조 빨갱이로 몰아대는 이합집산(離合集散)의 이기적인 혼란 중에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의젓이 제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한 대부분의 국민이 있었기에 다음해를 기대할 수 있게 되어서 행복하다. 그리고 2019년 남은 날들도 행복할 수 있도록 일분일초를 아끼며 최선을 다해야겠다. 바빠서 살피지 못한 가족도 살피고, 여유 없어 돌아보지 못한 이웃도 돌아보고, 시간 없어 만나지 못했던 친구도 만나서 사랑한다 고백하고, 수고했다 격려하고, 보고 싶었다 손잡아 안아주고 격려하고 다독거리며 후회하지 않을 최선의 행복을 누려야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바뀌어야 살아남는다지만

최근 경제적인 이슈들을 살펴보면 빅데이터 블록체인기술 AI로봇 욜로 있어빌리티 덕 후등의 낯선 단어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단어에 우리가 얼마나 빨리 익숙해지느냐가 사회생활에 성공하느냐를 판가름하는 것처럼 보인다. 젊은이들은 여러 방면에서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 가면서 새로운 신조어를 만들고 대한민국을 변화시켜 가고 있다. 반대로 그 단어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도태되는 현상을 낳고 있다. 국제적 정치의 불안감은 우리나라에도 별반 다르지 않고 전 세계는 좌ㆍ우의 대결이 더 치열해 지고 있다. 한국사회도 좌. 우의 갈등은 더욱 무섭게 갈라져 가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지금 극심한 갈등대결의 고통을 겪고 있다. 개신교 안에도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이슈로 광야교회가 생겼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해내고 있다. 세대의 갈등으로부터 시작하여 계급의 갈등과 지역의 갈등과 그리고 정치적 갈등까지 우리 사회는 격한 갈등의 날들로 연말을 맞이했다. 모든 고등종교는 윤리적이며 상식 위에 세워진다. 그렇다면, 그 상식이란 기준은 무엇일까? 표현의 표출된 겉모습일까? 아니면 표현의 내면의 내용이 되어야 할까? 21세기를 바꾸어 가는 새로운 혁신 중에 한 분야가 바로 로봇이 우리 인간들의 삶 속에 깊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로봇과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 을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로봇이란 기계는 인간들이 할 수 없는 대량생산과 견고한 첨단의 일들과 위험스런 일들을 훨씬 더 많이 그리고 잘해 낼 수 있다. 그렇다고 그 기능이 뛰어난 로봇이 인간보다 위대하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로봇처럼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로봇처럼 바뀌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 시대에 모든 것이 바뀌어야 살아남는다고 말하지만, 인간은 절대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사람은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의 말씀일 것이다. 고등종교의 출발이 윤리적이며 상식적이어야 한다면 모든 책임감 있는 종교지도자들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람이 마귀가 아니고 나와 종교가 다르다고 나와 다른 종교인들이 귀신이 될 수 없듯이 사회의 변화에 늦거나 그 변화를 거부한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그 사람의 존귀함을 놓쳐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주의에 빠지지 않는 것임을 신앙인들은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떼어 버릴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세상은 아무리 빨리 변해가고 모든 것을 바꾸어야 살아남는다는 요란한 구호가 세상을 덮어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이 어둠이 벗어지고 진정한 새벽이 오는 것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는 새벽 태양의 빛으로 분명히 보일 때 참 새벽은 오는 것이다. 사람들의 가슴에서 뛰는 심장박동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 우리는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해 주고 끌어안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은 사랑으로 변해가야 하고 따스해져 간다고 믿는다. 진정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신조어가 아니고 바로 뜨겁게 뛰는 심장으로 사람을 사랑하려는 내 마음이 되어야 한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 이슬람 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원칙을 넘어서는 화합의 삶

12월에 이르렀어도 온난화의 영향인지 젊었을 때에 만났던 겨울의 매서운 바람은 느낄 수 없으나, 차가운 날씨에 따스함을 찾게 되면서 바쁜 일상 속에서 묻어두었던 일상의 문제들을 하나씩 기억에서 꺼내어 되돌아보게 된다. 이 세간에서의 삶은 윤회의 연속이라고 하였던가! 매번 새롭게 다짐하며 더 발전된 사유와 처신을 되새기면서도 현실에 부딪혀서 우리들의 일상을 관찰하면 아쉬움이 남을 때도 많다.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는 하나하나의 세계가 중첩된 세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많은 부류의 중생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삶의 향기를 그려내면서 자신에 알맞은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세간의 구성은 중생계를 이루고 되고 이 가운데에 변하지 않는 진리가 존재하게 되는데 불교에서는 이것을 법이라고 이름한다. 인생에 긍정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거나, 부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문제는 태어나고 늙으며 병들고 죽는 삶의 일련의 과정이다. 불교에서는 죽음은 또 다른 한 인생의 시작이고, 지금의 삶의 터전과 자취를 떠나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고통 외에도 세 가지의 고통을 더 말하고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고, 원수와 만나는 것이며,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소유에 대한 욕망을 충족하려고 인류는 얼마나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감내하였는가? 현재에도 지구촌의 여러 지역에서는 자신과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갈등과 충돌이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고, 인간으로서는 인정받기 어려운 광기를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간과 우리를 고통스럽게 압박하는 현실은 모두 우리들의 마음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현대의 인간들은 신(神)의 범주라는 생명을 과학을 통하여 조작하는 단계까지 접근하고 있고, 물질을 바탕으로 삼는 현상계에서는 이와 같은 과학의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사람의 향기가 그리워서 산문을 나서 팔달문 앞에 펼쳐진 대로를 걷노라면 활력과 희망찬 모습으로 밝게 걷는 사람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고, 대체로 무엇인가에 쫓긴다는 느낌이 뇌리를 스치며, 인간의 향기는 사라지고 어느 순간에 멈추어진 딱딱한 현실에 마주하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강조되는 언어로 신뢰를 바탕으로 삼는 법과 원칙에 따른 사회질서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법과 원칙은 누구를 위한 것이고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가? 인간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상식을 갖춘 대중에게 기준이 맞추어져야 하고, 집행되어야 한다. 즉 대중의 지지와 화합의 바탕 위에 특정한 집단의 이기주의를 타파해야 하는 당위성을 지닌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양극화에 의한 갈등이 증폭되고 집단이기주의가 활성화가 이루어졌어도 화합과 양보라는 언어는 잊힌 것이 오래라는 씁쓸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나만의 아집인가를 되돌아본다. 올해도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을 바라보면서 내일은 우리가 화합하는 모습이 더욱 가깝게 다가올 것이라고, 내일은 서로 양보하면서 갈등보다는 타협을 먼저 생각한다고, 내일은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것에 앞서서 인간이 지닌 향기의 꽃을 피운다고, 내일은 매 순간에 서로 사랑하면서 자비의 열매를 맺어 인간세상에서 극락과 같은 세계를 이룰 것이라고 사유하면서 내일의 희망을 기대하여 본다. 세영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꼭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 무릎이 아파 찜질팩 하나를 인터넷을 통해 샀다. 기다리던 물품이 도착하면 왠지 마음이 설레고 즐겁다. 찜질팩에는 손바닥 반 정도 크기의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는데 꼭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습관처럼 주의사항을 떼어버리고 서둘러 제품을 사용하는 내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당장의 편리와 욕구를 위해 나는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얼마나 많은 주의사항을 보지도 않고 내버린 걸까. 주의사항의 사전적인 의미는 마음에 새겨 두고 조심하는 것, 일종의 경고 사항이다. 경고는 안전하고 올바른 사용을 위해 제품의 기능은 물론이고 제품의 고장이나 부작용의 원인 그리고 그에 따른 응급 조치사항도 포함한다. 그러니 제품 사용 시 사고나 위험 등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항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자신을 위해 발령되는 수만 가지 위험주의보를 얼마나 쉽게 건너뛰며 살고 있는가.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영화 클릭은 우리 삶에서 무엇을 우선순위로 여기며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인생역전을 노리며 열심히 승진의 꿈을 키우는 건축가 마이클은 일과 가정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고 애쓴다. 어느 날, 주인공은 한 번의 클릭으로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는 만능 리모컨을 사려고 마트로 향하고 마트 한구석에서 정체불명의 남자로부터 리모컨 하나를 얻게 된다. 놀랍게도 시간여행까지 가능한 이 리모컨에는 사용법이 따로 없다. 다만, 반환이 안 되고 자주 누른 버튼의 패턴은 리모컨 스스로 자동모드로 전환된다는 점이 특이했다. 쌓인 업무로 인해 귀찮아진 가족들과의 저녁식사는 빨리감기 버튼으로 건너뛰고 업무를 이유로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며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은 빨리감기로 건너뛸 수 있으니 이만한 편리가 또 있을까. 달콤한 승진의 순간도 하루빨리 만끽하고 싶은 마음에 빨리감기를 눌러 시간을 건너뛴다. 하지만, 승진의 기쁨도 잠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승진과 함께 흘러가 버린 1년이라는 시간과 멀어져 버린 가족들이었다. 이미 아내와는 이혼절차를 밟는 중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가 돼서야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다. 영화는 어떻게 보면 우리 삶에서 무엇이 중한가?에 대해 묻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의 마이클처럼 우리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아등바등 살아간다. 하지만, 그 속에도 분명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다. 끊이지 않는 일과 성공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에 어쩌면 우리는 살아있음만으로 넉넉히 복되고 감사하다는 사실을 놓치고 사는지 모를 일이다. 삶이 매 순간 우리에게 던지는 위험주의보를 꼼꼼히 살피며 살아야 할 이유이다. 모든 순간이 다시없는 순간이기에 더욱. 김창해 천주교 수원교구 사회복음화국장 신부

[삶과 종교] 이 해를 떠나보내며, ‘큰 눈’을 기다린다

한 해가 또 저물고 있다. 11월부터 12월에는 각종 송년회가 있다. 어느 해인들 그렇지 않은 해가 없었겠지만, 지난 한 해엔 참 크고 작은 많은 일이 많았다. 생각해야 할 크고 작은 일들이 많을 때, 마음이 떨리게 마련이다. 마음이 떨리고 지혜를 구해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마다 지혜를 구하는 방법이 다를 것이다. 나는 최근의 좋은 책들과 오래된 고전들을 읽으며 지혜를 구한다. 그 가운데 장자(莊子, 기원전 369?-286)와 원효(元曉, 617-686) 이야기에 나오는 지혜를 소개하고자 한다.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은 여러 현상을 가지런히 볼 수 있게 해줘서 좋다. 보통 우리는 유한한 관점, 즉 늘 자기관점에서 바라보기 마련이다. 그것들이 사회적 통념이라 하더라도 각자의 한계를 가진 관념일 수밖에 없다. 상대적인 옳고 그름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이 있는 곳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 바로 생명이 있게 마련이다. 가능한 곳에 바로 불가능이 있고, 곧 불가능한 곳에 바로 가능이 있게 마련이다. 그 무엇 때문에 옳기도 하고 또 그르기도 하며, 그 무엇 때문에 그르기도 하고 또 옳기도 한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변화하고, 변화의 과정에서 여러 국면을 가지게 마련이다. 동일한 사물이라 하더라도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고, 달라진 국면마다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장자의 해법은 좀 더 고차적인 입장에 서라는 것이다. 그래야, 무궁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한을 초월한 고차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물에 대한 여러 가지 면을 더 많이 보고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효는 부처님이 열반하신 이후 생겨난 많은 불경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하나의 소리가 중생의 인연과 상황에 따라 여러 소리로 분화되어 이해된 것으로 이해한다. 중생들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상황에 따라 부처님께서 가르침의 내용을 다양하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인데, 그 많은 불경이 생겨나고 그 많은 가르침이 생겨난 까닭을 이렇게 이해한다. 글을 모르고 농사만 짓는 사람들에게는 볏단을 가지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글을 읽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에게는 글에 나온 내용을 가지고 예를 들어 설명했기 때문에 다양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한다. 또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 수준과 인연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하고 이론들을 정립하다 보니, 많은 이론이 생겨난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것은 시절인연(時節因緣)에 따른 이해라고 볼 수 있다. 다양한 이론들과 주장들은 그 시절인연에 따른 그 나름대로 다 일리(一理)가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다양한 주장들이 그 일리만을 강조하고 고집하면 다툼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 어느 시대보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인권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도 다양한 주장들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장들이 모두 존중받으려면, 각각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고집은 한계에서 나온다. 고집을 거두기 위해서는 한계를 뛰어넘어, 큰 눈이 열려야 한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나무들은 잎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잎을 떨구고 있다. 그것은 잎에서 볼 때는 죽음이지만, 나무 자체로 볼 때는 삶이다. 봄이 오면 이 나무들은 잎을 다시 돋우고 키울 것이다. 겨울에 나무가 잎을 떨구고 있다고 해서 죽은 것이 아니다. 그것도 삶이다. 가을, 겨울, 봄, 여름에 맞는 나무의 삶이 있는 것이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광해의 탄식

가을 사관회 차 제주에 갔다가 박물관에서 광해(光海) 제주에 유배 오다는 주제의 기획전시물을 볼 기회가 있었다. 조선의 뛰어난 개혁 군주의 한 명으로 꼽히는 분,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역사적 재평가가 요구되는 묘호(墓號)를 받지 못한 조선의 열다섯 번째 임금, 개혁에 몰입한 우리 시대의 그리움이 깊어 영화로,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친근감 있게 우리에게 다가서 계신 분이기에 낯설지 않은 만남이었다. 선왕으로부터 견제 받다가 겨우 낙점된 화려하지 않은 왕으로서의 등극, 전쟁과 지독한 당파싸움으로 어수선한 나라의 안정을 위한 몸부림, 토지 생산성의 회복과 세수를 줄이기 위한 대동법을 통한 경제개혁, 명ㆍ청 교체기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 있는 중립을 내세웠던 실리외교, 왜란으로 단절된 일본과의 국교 재개, 조선 의학의 정수를 담은 동의보감(東醫寶鑑) 편찬의 완성, 전란으로 소실된 지방 외사고(外史庫)의 재건, 소실된 궁궐 재건 등이 왕으로의 15년 그의 대표적인 이력이었다. 물론 궁궐 재건 등으로 이반된 민심이 반정의 빌미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오늘날 재평가가 요구되는 것은 그의 이력으로 미루어 볼 때 과(過)보다 실(實)이 더 많았기 때문 아닐까?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강화 교동도와 태안과 다시 강화로 15년을 이배하다가 환갑에서 서너 해를 더한 나이에 도착한 유배지가 제주라는 것을 들어서 알았을 때 그의 입에서 어째서 여기에! 왜 어째서!라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어쩌면 자신이 왜 절해고도(絶海孤島) 이곳에 버려져야 하는지에 대한 상실감이 가장 컸을 것으로 보인다. 탄식(歎息)이란 한숨 섞인 소리이다. 자신의 마음이나 감정을 담아서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내뱉는 소리이고, 예상 밖의 일을 만났을 때 터져 나오는 하소연의 소리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칭찬은커녕 비난당하고 그 평가가 사정없이 깎여버릴 때 누군들 절망하며 탄식하지 않을까? 그래서 인생은 탄식의 연속이고 후회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의 욥도 그런 보편적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온전하고 정직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칭찬받았던 그가 사탄의 고발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피부병에 시달리며 아내의 저주까지 받았을 때 이레 동안 침묵하다가 자신이 태어난 것을 저주하면서 탄식하였다(욥기 3장). 그리고 위로한다고 찾아왔던 친구들이 너의 죄 때문이라며 비난할 때도 자신은 사람들과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탄식하기도 하였다(욥기 30장). 그러니 탄식이란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삶의 탄식을 최소화하려면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 정도는 있어야 하겠다. 100세 인생을 준비기인 0~25세, 전반기인 26~50세, 후반기인 51~70세, 마무리기인 76~100세 4기로 구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렇게 비교해 볼 때 11월은 1년 인생의 마무리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한 해의 마무리기인 지금 나중에 후회하는 탄식을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참된 감사의 열매가 있는 계절을 기대하며

옛날 한 어부가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태풍이 몰아쳐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과 사나운 풍랑으로 덮여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 그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집에 있던 어부의 아내는 노심초사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을 걱정하던 아내가 잠시 밖에 나간 사이에 그때 혼자 집에 있던 아이가 촛불을 넘어뜨려 집안에 화재가 발생했다. 놀란 아내는 불이 난 집안에서 아이를 겨우 건져내어 집 밖으로 나왔다. 이튿날 아침, 남편이 탄 배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이마에 땀을 닦으며 말했다. 어젯밤 풍랑 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해 죽게 되었을 때 갑자기 육지에서 불빛을 보았다. 그 불빛을 보고 겨우 방향을 잡아서 육지로 향할 수 있었노라고 말했다. 집이 불에 탔지만, 그것으로 남편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눈앞에 현상만 보고 우리는 너무 쉽게 낙심하지만, 우리의 그 낙심이 오히려 감사의 경우가 될 때가 잦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17장에는 나병환자 열 명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환자들은 인생에서 감사할 수 없는 조건들이었다. 나병이란 당시에 저주받은 삶의 대표적인 병이었다. 당시에 나병환자들은 무리를 지어 다녔고 그들은 곧 사회의 골치 아픈 대상자들이며 반사회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병을 고침 받았다. 그런데 열 명이 고침을 받았지만 아홉 명은 자신의 갈 길을 같고 병 나은 환자 한 사람만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구원을 얻었다. 나머지 아홉 명은 육체의 병만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영혼구원은 받지 못했다. 그들에겐 참 감사가 없었던 것이다. 참된 감사는 그 감사의 기회를 주신 분을 기억하는 것이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랍비에게 가서 불평했다. 선생님! 삶이 너무 힘듭니다. 방 하나에 우리는 아홉 명이나 살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염소를 방 안에 들여놓고 일주일 동안 함께 지내게. 그 사람이 의아해하자 랍비가 명령했다. 내가 말한 대로 하고 일주일 후에 오게. 일주일 후에 그가 전보다 더욱 정신 나간 상태에서 와서 말했다. 선생님!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염소가 너무 지저분합니다. 그때 랍비가 말했다. 이제 집에 가서 그 염소를 내보내고 일주일 후에 다시 오게. 일주일 후에 그가 돌아와 빛난 얼굴로 랍비에게 말했다. 선생님! 삶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매 순간이 즐겁습니다. 염소가 없고 우리 아홉 명만 있으니 정말 행복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감사할 것에 대해 감사하면 반드시 참된 축복이 돌아온다. 감사의 문이 열리면 축복과 행복의 문도 열리지만 감사의 문이 닫히면 모든 문도 닫히는 것이다. 감사를 표현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종교개척자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선한 사람은 있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악인은 없는 것을 생각하고 불평한다. 감사의 계절 11월에 아름다운 단풍의 물결을 보면서 대한민국에 감사의 열매들이 풍성하길 기도해 본다. 이 땅에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고백들이 충만해 지길 소망해 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 이슬람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늦가을의 정취를 일깨우는 고운 빛깔의 단풍이 지역사회를 물들이면서 사뭇 다른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게 한다. 같은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도 각자의 색깔이 다르고 모양도 달라서 인간들과 같이 각자의 개성을 지닌 모습을 보여주어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에 취하게 된다. 이러한 낙엽이 보여주려는 의미는 스스로에게는 내년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안식을 준비하는 것이고, 기나긴 겨울을 준비하는 중생들에게는 동면의 시간을 재촉하는 것이며, 주위에서 경쟁하였던 동료에게는 일정한 휴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식과 지혜를 함께 갖춘 인간은 어떠한 관점에서 낙엽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일까? 단순하게 1년에 한 번씩 일어나는 주기적인 흐름이라는 생각과 자연에 순응하는 자연의 법칙이 작용한다고 인식하며 또는 과학이라는 지식의 창으로 분석하는 과정도 존재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에도 고운 빛깔의 낙엽을 보면서 성내고 분노하는 것을 접고서, 잊고 있었던 주위의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다시 되새기는 때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부처님의 성품을 지니고 있으므로 진리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최고의 목적은 해탈이라고 말하는데 진리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진리를 번역하여 도(道) 또는 법(法)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에는 세상의 이치를 간직하고 있다.라는 의미와 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상통한다는 이치는 무엇이고, 범부인 중생일지라도 상식이라는 범주의 도덕과 가치는 모두가 알고 있다는 뜻인데, 어찌하여 삶을 꾸려가는데 과정에서의 행동은 동떨어지는 괴리는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인가. 그 틈새를 파고드는 미세한 차이는 마음과 지혜를 분리하여 생각하려는 이분법에 있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도 국무위원 한 사람의 문제로 국가 전체가 혼란과 갈등을 심하게 겪었고 지금도 그에 따른 영향은 진행형이다. 물론 현실의 무능한 정치를 빗대어 비판하려는 것이 아닌 국가를 운영하는 상식을 벗어난 듯한 문제의 본질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한국 주변의 정치적인 상황이 그렇게 여유롭고 평화롭지 않고 갈등으로 치닫고 있고, 또한 세계 각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시점에서 국가를 경영하는 책임 있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근원적으로 중생들은 욕망에 얽매여서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는데 장애를 초래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도덕에 집착하는 욕망이 없다면 축생과 다름이 없는 삶이 이어질 것이고, 진리에 대한 사랑을 거둔다면 인간의 세상에는 무질서와 혼란이 세상에 가득할 것이다. 자연계를 살펴보면 하나의 시작이 다른 시작의 연결고리로 이어지는 연기의 세계를 폭넓게 형성하여 가고 있다.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가 부여된 것이고,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도 우리가 질서라는 이치를 관찰할 이치를 지니고 있다. 겨울을 준비하는 축생들이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무심하게 인간처럼 고운 단풍의 정취에 취하여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면 매서운 겨울 추위에 많은 고통을 겪을 것이다. 인간은 지혜를 사랑하였던 노력의 결과로서 미래를 준비할 수 있었던 지식과 역량을 갖추었고 눈이 날리는 겨울철에 축생들에게 먹이를 나눌 수 있는 삶의 여유도 갖출 수 있었다. 인간은 이렇게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고 질서에 순응하는 삶의 방식을 이끌어 오고 있다. 한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현재의 정치와 경제적인 상황은 유쾌한 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더욱 씁쓸한 것은 나와 타인이 더불어 살아가려는 노력보다는 사회의 패러다임이 점차 이적으로 변해가는 현실이다.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자연계의 질서와 인간계의 질서를 다시 한번 뒤돌아보면서 삶의 그림자를 관조하였으면 한다. 세영 수원사 주지 스님

[삶과 종교] 세월가면 잊혀질까

잔칫집에서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식들이 있다.그중에 대표적인 음식이 아마도 사라다 곧 과일 샐러드가 아닐까 싶다. 특별한 요리법이 필요하지 않고 재료도 쉽게 구할 수 있어서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과일 샐러드. 특별한 비법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오랫동안 이 과일 샐러드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고 또 서민적인 음식으로 자리매김해 오고 있다. 이처럼 특별한 요리법이 없이도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흉내 낼 수 없는 마요네즈만의 독특한 맛과 특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좋아하는 과일 재료들을 먹기 좋게 썰어 고소 짭조름한 마요네즈를 넣어 버무리기만 하면 새콤달콤 고소달달한 과일 샐러드가 완성되니 말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잔칫집에 가신 날이면 뒷동산에 올라가 마냥 어머니를 기다리곤 했다.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하고 몰고 왔던 흙먼지가 한바탕 지나고 나면 어머니가 조심조심 내리셨다. 그때마다 어머니 손에는 항상 그렇게 꽁꽁 싸맨 짐 보따리가 들려져 있었다. 힘겹게 들고 오신 짐 보따리를 어머니는 마루에 걸터앉아 푸셨는데, 그때마다 동생이랑 필자는 배고픈 강아지들처럼 마냥 보따리를 쳐다보며 군침을 몰아 삼키곤 했다. 한번은 어머니께서 까만 비닐봉지에 하얀색 과일 무침을 내주셨는데 마요네즈에 사과와 밤, 건포도, 땅콩, 감 등을 넣어 비벼 만든 음식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 음식을 어머니께서는 어디서 듣고 오셨는지 사라다라고 부르셨다. 시골 소년에게 짭조름하면서도 새콤달콤 고소달달한 사라다의 맛이란 그야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상의 맛이었다. 그 후로 어머니께서 동네잔치에 가시는 날이면 어김없이 사라다를 챙겨오라는 신신당부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께서 치매로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사라다를 다시는 맛볼 수 없을 것 같아 어렵게 청한 그날에도 어머니는 늘 그랬던 것처럼 큰 양푼에 사라다를 잔뜩 버무려주셨다. 거짓말처럼 그날 그 사라다가 어머니의 마지막 사라다가 되었지만, 때로 삶이 무겁게 느껴질 때나 힘들다고 느껴질 때 양푼에 내주셨던 어머니의 사라다는 필자의 마음 안에 여전히 그립고 먹고 싶은 음식으로 남아있다. 누구나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추억 속의 음식들. 오랜 시간이 흘러갔어도 문득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군침을 돌게 하고 마음 어딘가에 묻어둔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리게도 한다. 불현듯이 옛날 추억 속의 음식이 떠오른다면 그것은 음식을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금의 삶이 조금은 버겁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애타게도 그때 그 시절 그 음식을 해준, 나를 믿어주고 힘이 되어준 사람이 그립고 보고 싶어서일지 모른다. 피곤하고 지칠 때나 삶이 힘겹게 느껴질 때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했던 추억 속의 음식을 한번 맛나게 먹어보는 건 어떨까? 조금은 넉넉한 마음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겨나지 않을까 싶다. 인생의 맛은 참으로 다양하다. 귤처럼 새콤하다가도 단감처럼 달달하다. 사과처럼 달콤하다가도 아무 맛도 없이 그저 시원한 맛에 먹는 오이 같기도 하다. 때로 힘을 줘서 깨물어야 하는 딱딱한 날밤 같을 때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인생의 맛들도 마요네즈와 섞이고 어우러지면 맛좋은 과일 샐러드가 될 수 있겠다 생각하니 문득 삶이 아름다워진다. 김창해 천주교 수원교구 사회복음화국장 신부

[삶과 종교] 단풍이 짙어가는 가을, 화쟁을 생각한다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정치적 갈등 상황에도, 나는 점점 더 짙어져 가는 단풍을 바라보면서 가을이 더욱 깊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 가을에 노랗게 물든 단풍을 가족과 함께 감상하거나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감상하는 것은 인생에서 더할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다. 나는 이런 한국의 정치적 갈등상황 이야기는 자제하는 편이다. 우리는 광화문이든 서초동이든 대한민국의 발전이라는 공통된 목표와 기원을 함께 염원한다는, 큰 의미의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 국민이 넓은 의미에서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에, 극단적인 대처로 가서 서로 악으로 혹은 적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지금의 지지율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렇더라도 나는 철학자로서,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 50년, 더 길게는 1천 년, 2천 년을 생각하고 바라보는 장기적인 안목에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주 오래된 고전을 들어 지혜를 찾아보고자 한다. 1천4백여 년 전 원효(元曉, 617~686)의 말을 빌려서 하면, 화쟁(和諍)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의 「기신론소(起信論疏)」 생멸문(生滅門)에는 한쪽만을 고집하면,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떨어진다고 하였다. 또 그의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 삼사문(三事門)에는 만일 한쪽만을 결정적으로 취하면 두 주장이 모두 그릇되게 되고, 만일 참으로 집착하지 않으면 두 주장이 모두 옳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사고방식을 중도(中道)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중도적 입장이 원효 용어로는 바로 화쟁(和諍)이다. 어느 한 쪽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집착해서 그것만이 옳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상대의 감정과 말에도 귀를 기울이며 이해해보려고 해야 한다. 2천5백여 년 전 노자(老子)의 말을 빌려서 하면, 부쟁(不爭)하라. 그리고 이 싸움은 부득이한 경우고, 어쩔 수 없이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싸우게 된다면 싸움의 도(道)를 지키라고 하고 싶다. 『도덕경(道德經)』 제30장에서 도가 아니면 당장 그치라고 했다. 그리고 싸움에 뛰어난 이는 승부가 나면 그칠 뿐, 그 틈을 타 상대방을 핍박하지 않는다고 했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다. 역사의 교훈은 지금 이기더라도 언제까지나 이기기만 하고 살 수 없는 것이다. 승부가 나면 그뿐이지 그것으로 의기양양하면서 상대를 억누르거나 핍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노자의 도다. 서로 겸손해야 한다. 노자는 우리에게 승부는 마지못해 일시적으로 내는 것이라고 일러준다. 광화문이든 서초동이든 그들이 표면적으로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들이 공통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기 때문에, 크게 그리고 깊게 보면 같은 길을 가는 대한민국의 같은 애국시민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표면적으로 다른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극단적으로 서로 적으로 혹은 악으로 생각하고 공격할 필요가 없으며, 또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정치지도자들도 그렇게 하지 않도록 말씀을 가려서 품위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현재 우리나라의 평화적인 대규모의 민주적인 집회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가 없는 평화로운 민주주의 정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그 결과가 우리의 미래에 양측 모두에게 자랑이 되고 좋은 일이 되길 바란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분위기 조장하는 사회

9월에 이어 10월에도 연일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경쟁하듯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덕분에 우리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이상한 부류로 내몰릴 위기에 놓이기도 했었다. 마치 회색지대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개천절 휴일에 아들 잘 둔 덕분에 아내와 함께 생전 처음 개봉 이틀째밖에 되지 않은 수입 영화를 볼 수 있는 횡재를 했다. 개봉 첫날 40만 관객을 넘겼다는 영화 조커는 상영 전부터 매스컴을 통해 세뇌하던 대로 대체로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의 속에서 조커가 어떻게 탄생해 가는지를 보여줬다. 그러면서 영화를 보는 동안 어렵지 않게 조커를 배트맨과 비교할 수도 있었다. 정의의 사도 배트맨과 악의 화신 조커가 아니라 기득권자들의 수호자 배트맨과 기득권을 소유하지 못한 불특정 다수의 대변자 조커였다. 그리고 제작자의 의도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도 없을 만큼 양분된 사회 분위기와 그 분위기를 조장하는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 사회인지도 보였다. 저명한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그의 사회학 개론서 「현대사회학」에서 가족과 또래 관계와 학교, 그리고 대중매체를 사회화를 대행하는 대행자로서 꼽고 있다. 특히 이 대행자 중에서 대중매체는 개인이 획득할 수 없는 막대한 종류의 정보를 조달해주기 때문에 사람들의 태도에 깊은 영향을 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이 책을 저술했던 1989년이 286 컴퓨터를 막 보급하려고 했던 때였음을 고려해 볼 때, 30년이 지난 지금은 인터넷을 통한 지식 정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넘쳐나고 있다. 또한, 이를 활용한 공식 또는 비공식적인 방송들이 얼마나 무분별하게 떠돌아다니는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탓에 기든스가 말했던 자발적 결사체들과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조작된 매체의 영향으로 동원한 결사체들이 소집되어 자신들의 신념과 소신대로 사회화를 대행하려고 서로 위협하면서 사회 분위기를 조장해 나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구약성서 잠언에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잠14:3)고 하였다. 또한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잠14:15)고 했으며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잠14:16)고 하였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그래서 미련하여 판단이 흐리고 어리석은 사람은 온갖 유언비어에 유혹되고 분위기에 휩쓸려 방자하게 자만하다가 매를 자청할 것이고,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은 생각을 신중히 하여 악을 견제할 뿐만 아니라 행동과 언어를 절제하면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조커가 누구 편이고 배트맨이 누구 편인가는 문제가 아니다. 분위기를 조장하려는 사람들이 수많은 조커와 배트맨을 만들어 내고, 그들로 하여금 영웅놀이에 빠져들게 하여 사회를 양분시키고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니 이런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조작된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며 대처하는 슬기와 지혜가 무엇보다도 필요하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내면을 바라보는 시선

부처님께 대중들이 국가 존재의 의미를 질문 드렸을 때의 대답은 간결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스스로 화합해 만든 공동체이다 이와 같은 진리를 설하는 여러 논리의 가운데에서 우선으로 중요하게 사유해야 점은 개개인이 가진 존엄성의 가치에 있다. 부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는 왕을 중심으로 국가의 체계가 조직되고 운영되던 수직적인 문화가 강조됐다. 지금처럼 개인의 권리인권을 강조할 수 있는 배경에는 문화를 창조하고 규칙을 운영하던 주체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사천의 법문의 중심에는 인간이 중시하는 휴머니즘이 기초를 이루고 이러한 사상의 토대 위에 인간을 위한 철학이라는 심오한 가르침을 구성하고 있다. 중요한 논점은 또한 여러 분야의 학문이 인간에게 어떠한 혜택으로 작용하는가를 첫째의 판단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를 더욱 진보시켰고, 보편적이고 평등한 견해를 견지하면서 신흥종교에서 빠르게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인간의 차별을 정당화했던 계급주의 타파를 완성하고자 노력했던 것이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인간을 만물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오만한 사상이 현대사회에서 여러 자연재해와 사회적인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더라도 지금의 세상은 중심은 인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에 알맞은 역량인 포용력과 관대함이 인간이 지나쳐 왔던 역사의 흐름에서 간절히 요구되는 시대이다. 인간만이 우월한 존재가 아닌 모든 생명체는 존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평등주의를 견지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가운데에서 세간(世間)은 세 종류로 이뤄졌다고 말씀 된다. 첫째는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환경인 기세 간이고, 둘째는 중생들이 서로 연결돼 영향을 주는 중생 세간이며, 셋째는 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오음세간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바라보면 서로 가슴에 상처를 남기도록 노력하는 행위를 선동하는 것이 아닌가를 고민하게 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자 존재하는 국가의 권력은 과연 정당하게 집행되고 합리적으로 견제되고 있는가를 되새기게 되는 현실이 씁쓸하다. 올해에는 예년과는 다르게 가을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다수 발생해 국민의 시름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력이 화합해 국가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고, 서로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세력의 과시를 보여주는 듯하다. 나의 존재는 개별적인 생명체라고 인식할 수 있으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여러 경계로 구성된 세계이다. 이 세계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바탕은 자체에 부여된 질서이다. 국가의 질서는 개인의 사유나 특정한 집단의 정치철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서로 의견을 제시하고 합리적인 비판, 타협을 통해 결론이 도출돼야 한다. 나의 견해를 고집하는 현실과 나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았다고 타협을 거부하고 민주적 절차와 의무를 팽개치고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고집하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한 사람은 곧 국가를 이루는 최소한의 구성원이고 국가는 이러한 구성원의 묵시적인 계약에 의지해 정치권력을 이양받아 우주에 내재하는 보편적인 질서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실천이다. 현재의 사회적 현상을 살펴보면서 남을 탓하기에 앞서 나의 내면을 세심히 살피고 인간으로서 근원적으로 지닌 휴머니즘의 가치를 냉철하게 성찰해 봤으면 한다. 세영 스님 수원사 주지

[삶과 종교] 잠시 멈추고 참 가치 돌아보기

이스라엘 민족의 지혜가 담겨 있는 탈무드에 나오는 돌멩이 가격 속 내용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돌멩이를 하나 주며 말했다. 이것을 시장에 갔다가 팔려고 하되 팔지는 마라. 이 말을 들은 제자는 시장 어귀에 깨끗한 하얀 보자기 위에 돌멩이 하나를 올려 두었다. 온종일 돌멩이를 앞에 두고 서 있는 청년을 보고 많은 사람이 비웃으며 지나갔다. 그런데 한 노인이 청년을 불쌍히 여겨 그 돌멩이를 사려고 했다. 내가 5천 원을 줄 테니 이 돌멩이를 나한테 팔고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구려 제자는 팔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노인이 1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래도 청년은 잠자코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들어 가격 흥정을 했다. 오만 원 십만 원 이십만 원 삼십만 원 오십만 원. 오천 원으로 시작된 돌멩이 값이 계속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돌멩이가 엄청난 것인 줄 알고 서로 사려고 안간힘을 썼다. 마지막으로 처음의 그 노인이 비장하게 말했다. 백만 원을 줄 테니 나에게 파시오. 사람들은 입이 딱 벌어져서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이 돌을 팔 수 없습니다. 단지 시세를 알아보러 여기에 나왔을 뿐입니다. 제자가 돌아오자 스승이 그를 보고 말했다. 알겠느냐? 사람들이 가격을 정하고 가치를 정하는 기준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우리의 인생기준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가치는 결정된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루키즘(Lookism) 시대라 한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시대라는 뜻이다. 내가 얼마짜리 옷을 입고 얼마짜리 신발을 신고 얼마짜리 액세서리를 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얼마짜리인가를 결정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기준이라는 것조차도 헛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것은 내가 입은 겉치레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행동으로 삶을 살고 있는가에 달렸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는 성경 말씀에 의하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마 16:26) 라고 한다. 한 사람의 목숨을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가를 볼 수 있다. 한 국가의 출발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한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나라도 사랑하게 된다. 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국가 사랑은 자칫 자신의 야망이나 아집에 불과하다. 상처 주는 행동과 폭력과 과격한 언어들이 서로 마음을 찢고 흥분하게 하고 싸우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부드러운 표현들을 하고도 얼마든지 자신들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 아무리 옳은 말도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면 그 말은 열매가 없다. 그런 말들에 대해서는 귀를 닫아 버리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모든 종교인들과 나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극적인 단어로 사람들을 폭력으로 선동해선 안 된다. 더욱 지금은 나와 다른 주장을 펴는 사람들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우리들의 가치를 높은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 이해와 존중은 신앙의 가장 기본이다. 다시 기본으로 잠시 돌아가서 지금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얻는 방법과 바꾸는 방법은 어떠해야 하는가? 를 돌아보며 참 가치 위에 우리나라의 품격이 담겨가길 기도한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수지지부 FIM 이슬람선교학교장

[삶과 종교] 세월이 가면 알 수 있을까?

세월이 가면 알게 될 것입니다. 인생에는 성공도 없고 실패도 없다는 것을 오직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길만이 있다는 것을 세월이 가면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부자도 없고 가난도 없다는 것을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빈손이 되어 떠난다는 것을. 김용해 요한님의 시 「세월이 가면」의 일부이다. 세월이 가야 알게 되는 것들이 참 많다. 때로 당연히 알고 있다고 여겨졌던 무수한 것이 막상 냉혹한 현실 앞에선 진정 아는 게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중 죽음에 대한 우리의 앎이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우리 중에 150년 뒤에도 꼿꼿이 살아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우리는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거의 매일같이 목격하며 산다. 모든 죽음이 그렇듯 당장에는 슬프고 안타깝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다. 우리는 다시 일상에 묻히고, 또다시 우리의 죽음을 나와 무관한 영역으로 미뤄두며 살아간다. 그 죽음이 나에게는 당장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생활은 항상 일이 먼저이고, 여전히 많은 일정을 소화해 내는 데에 온 마음과 정신을 쏟는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을 해야 하고 이왕이면 성공해야 하며 조금 더 바란다면 돈이 되는 일에 더 매진해야 한다. 종종 부모님을 찾아뵌다거나 가족들의 기념일을 챙기는 것은 뒷전이다. 그것은 또 때로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의 합리화를 낳는다. 절망스럽게도 우리는 우리 생에 대한 관전 포인트를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뒤늦게 깨닫는다.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알뜰하게 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숨을 몰아쉬는 직전에 가서야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무시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절망 속에서 숨을 거둔다. 죽을 때에 일을 더 하지 못해서 후회하는 사람들은 없다. 또 돈을 더 벌지 못해 후회하거나 더 높은 명예를 얻지 못해 후회하는 사람들도 없다. 하나같이 죽을 때 후회하는 것은 더 넉넉한 마음으로 살지 못해서, 더 사랑하지 못해서, 손 내밀어 용서하지 못해서 후회한다. 필자 역시 막상 아버지와의 이별을 맞이하고 보니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과 과정이 여간 쉽지가 않다. 그러니 내가 아는 것과 현실은 얼마나 먼 거리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 학창시절 한 교수 신부님의 말씀이 그러하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길고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여행이라고. 머리로 아는 것을 가슴으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었을 게다. 나는 머리에서 가슴까지로의 여행길에서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가수 노사연의 노래 바램에는 이런 노랫말이 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도 고단한 주름살만 느는 늙음이 아니라 넉넉한 마음으로 영글어가는 익어감이었으면 좋겠다.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해진 날씨다. 우리 눈엔 그저 고요하게 보이지만 한 뼘 자라려고 1년을 치열하게 살았을 저 수많은 숲의 나무들과 들녘의 곡물들은 계절에 순응하며 이제 그 성장의 속도를 늦추고 열매를 내놓는다. 내려놔야 한다는 것과 때로 멈추어야 할 때를 알면서도 내려놓지도 멈추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내 삶은 진정 앎을 말할 자격이나 있을지 심히 부끄럽다. 이 깊어가는 계절의 길목에 서서 겸허히 나에게 묻는다. 방 안엔 며칠 동안 아무도 없었는데도 뿌연 먼지가 참 곱게도 쌓여 있다. 아무도 없던 방에도 이리 먼지가 쌓이는데 하물며 내 마음속은 그간의 숱한 만남과 일들로 하여 또 얼마나 많은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을까? 한 달 일정표는 벌써 해야 할 일정들로 빼곡하다. 잠시 마음의 창을 열어 환기를 시켜본다. 청명한 하늘만 바라봐도 금세 마음이 살찔 것 같은 이 가을, 조급한 발걸음 찬찬히 늦춰 걸으며 내일이면 후회할 것들과 세월이 가면 알게 될 것들에 대하여 잠시 생각에 잠겨 보는 건 어떨까? 김창해 천주교 수원교구 사회복음화국장 신부

[삶과 종교] 자신을 버려야 자신이 산다

조국 교수가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 것에 대한 국민 여론이 극렬하게 나뉘고 있다. 그리고 후대에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 역시도 나뉘리라 생각한다. 나는 조국 장관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앞으로 그가 장관직을 수행하며 걸어가는 길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7장에 천장지구(天長地久)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땅은 영원히 오래간다는 말이다. 그다음 천지가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을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이 장구한 이유는 자기부터 살겠다고 하지 않기 때문[以其不自生也]이라는 것이다. 신라 최치원(崔致遠)의 격황소서(檄黃巢書)로 한국에 잘 알려진 황소(黃巢, 835-884)의 난(875-884)이 있던 시기로 북송이 중원을 통일할 때(960)까지 거의 80여 년 동안 아비규환의 시대였던 당대(唐代) 말기와 오대(五代)의 대혼란기에 살았던 풍도(馮道, 882-954)라는 이가 있다. 그는 후량(後梁)을 시작으로 다섯 왕조를 거치면서 40여 년 동안 13명의 군주를 섬기면서, 재상을 지낸 기간만 20년이 넘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동아시아 한자문명권에서 극명하게 나뉜다. 유가적 지향 인물들은 그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에 어긋나는 인물이었기에 혹독한 평가를 한다. 『신오대사(新五代史)』에서 송대의 구양수(歐陽修, 1007-1072)는 염치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였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간신의 수괴라고 하였다. 그리고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에서 호삼성(胡三省, 1230-1320)은 지위가 신하로서는 최고위까지 올랐건만 나라가 망해도 죽지 않고 그 군주들을 행인 취급한 위인이라고 비난했다. 반면에 어떤 이는 그를 절박한 시대에 역사적 소명을 충실히 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송대(宋代)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은 자신을 굽히면서까지 사람들을 평안히 해준 인물로 평가하며, 부처님이나 보살과 같은 격이라고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라의 걸왕을 섬기다 나중에 은나라의 탕왕을 섬긴 이윤에 그를 비유하기도 하였다. 명대의 이지(李贄, 1527-1602)는 풍도가 간신, 변절자라는 치욕스런 평가를 희생적으로 감수한 것이라 보았고, 그가 이런 희생을 감수한 까닭이 도탄에 빠진 무고한 백성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현대의 남회근(南懷瑾, 1928-2012) 역시 풍도를 노자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현명한 인물로 평가한다. 나는 여기서 누구의 평가가 더 옳고 그른지를 논하지 않겠다. 다만, 그의 평소 성품과 생활태도, 그리고 그의 업적은 무엇이고, 왜 역사적 평가가 갈리는지를 생각해보고 싶다. 그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거친 음식과 남루한 옷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주경야독을 하며 낮에는 일을 열심히 하고 밤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였고, 높은 관리가 되어서도 수행원과 한솥밥을 먹으며 검소하였고 소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정치적 수완이 남다르고, 윗사람이나 아랫사람 누구에게나 칭송을 들을 정도로 대인관계가 원만하였다고 한다.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손꼽히고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최초로 구경(九經)을 목판으로 판각하고 인쇄해 간행했다는 것이다. 남회근이나 이지, 왕안석의 풍도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인 이유는 자신의 사사로움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조국 장관이 자신의 사사로움을 취하지 않고, 국민과 국가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장관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그가 그 자리를 떠났을 때, 자신을 비난하고 비판했던 이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장관이 되길 바란다. 김원명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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