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광해의 탄식

가을 사관회 차 제주에 갔다가 박물관에서 <광해(光海) 제주에 유배 오다>는 주제의 기획전시물을 볼 기회가 있었다. 조선의 뛰어난 개혁 군주의 한 명으로 꼽히는 분,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역사적 재평가가 요구되는 묘호(墓號)를 받지 못한 조선의 열다섯 번째 임금, 개혁에 몰입한 우리 시대의 그리움이 깊어 영화로,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친근감 있게 우리에게 다가서 계신 분이기에 낯설지 않은 만남이었다.

선왕으로부터 견제 받다가 겨우 낙점된 화려하지 않은 왕으로서의 등극, 전쟁과 지독한 당파싸움으로 어수선한 나라의 안정을 위한 몸부림, 토지 생산성의 회복과 세수를 줄이기 위한 대동법을 통한 경제개혁, 명ㆍ청 교체기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 있는 중립을 내세웠던 실리외교, 왜란으로 단절된 일본과의 국교 재개, 조선 의학의 정수를 담은 <동의보감(東醫寶鑑)> 편찬의 완성, 전란으로 소실된 지방 외사고(外史庫)의 재건, 소실된 궁궐 재건 등이 왕으로의 15년 그의 대표적인 이력이었다. 물론 궁궐 재건 등으로 이반된 민심이 반정의 빌미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오늘날 재평가가 요구되는 것은 그의 이력으로 미루어 볼 때 과(過)보다 실(實)이 더 많았기 때문 아닐까?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강화 교동도와 태안과 다시 강화로 15년을 이배하다가 환갑에서 서너 해를 더한 나이에 도착한 유배지가 제주라는 것을 들어서 알았을 때 그의 입에서 “어째서 여기에! 왜 어째서!”라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어쩌면 자신이 왜 절해고도(絶海孤島) 이곳에 버려져야 하는지에 대한 상실감이 가장 컸을 것으로 보인다.

탄식(歎息)이란 한숨 섞인 소리이다. 자신의 마음이나 감정을 담아서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내뱉는 소리이고, 예상 밖의 일을 만났을 때 터져 나오는 하소연의 소리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칭찬은커녕 비난당하고 그 평가가 사정없이 깎여버릴 때 누군들 절망하며 탄식하지 않을까? 그래서 인생은 탄식의 연속이고 후회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의 욥도 그런 보편적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온전하고 정직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칭찬받았던 그가 사탄의 고발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피부병에 시달리며 아내의 저주까지 받았을 때 이레 동안 침묵하다가 자신이 태어난 것을 저주하면서 탄식하였다(욥기 3장). 그리고 위로한다고 찾아왔던 친구들이 “너의 죄 때문”이라며 비난할 때도 자신은 사람들과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탄식하기도 하였다(욥기 30장). 그러니 탄식이란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삶의 탄식을 최소화하려면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 정도는 있어야 하겠다.

100세 인생을 준비기인 0~25세, 전반기인 26~50세, 후반기인 51~70세, 마무리기인 76~100세 4기로 구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렇게 비교해 볼 때 11월은 1년 인생의 마무리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한 해의 마무리기인 지금 나중에 후회하는 탄식을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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