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지금 최선을 다하면 늘 첫날

2018년 새해가 밝았다. 모두 새해를 맞이하는 인사를 나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해 인사는 전화가 필수 수단이었다. 서로 목소리를 주고 받아야 하는 전화는 어느 정도 친분이 없으면 걸기 힘들다. 오래전 통화를 했거나 최근 소식까지 알 정도로 각별하지 않으면 자칫 실수할 수도 있다. 무슨 인사를 할까 이리저리 한참 생각하고 걸어야 한다. 그래서 전화 인사는 정성과 예의가 묻어난다. 전화는 윗사람이 먼저 걸지 않는다. 반드시 아랫사람이 먼저 묻는 것이 전화 인사법이다. 인사받는 사람이 흐뭇해진다. 전화가 흔하지 않을 때는 직접 가서 인사를 올렸다. ‘아주’ 특별한 사이가 아니면 먼 길을 버스 타고 가지 못한다. 어쩌면 하루 정도 자고 와야 할지도 모른다. 거리가 멀기 때문에 자주 가지 못한다. 그래서 더 반갑다. 어릴 적 산 모퉁이를, 혹은 언덕을 넘어 그림자만 얼핏 보이는 순간부터 혹시 우리 집을 찾아온 친척인가 싶어 눈을 찡그리며 바라보던 기억이 나이 든 분들은 모두 갖고 있을 것이다. 그 친척은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만큼 외지인 방문이 드문 시절이었다. 함께 가슴 두근거리며 보던 아이들도 멀리서 온 손님을 따라가며 부러워했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 이야기다. 따져보니 불과 40년 전이다. 며칠 전의 새해 인사는 전화로, 혹은 걸어서 찾던 시절과는 참 많이 다르다. 새해 전날부터 ‘카톡’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서울 경기는 물론 지방과 해외에서도 온다. 친밀한 분도 있고 자주 못 만나 궁금했던 분도 있고, 누구 신가 고개가 갸웃해지는 분도 있다. 반가워서 답장했더니 답례가 없다. 전화번호에 등록된 사람에게 일괄 인사를 보내는 기능이 있어서라고 한다.어느 인사법이 꼭 좋다고 할 수는 없다. 모두 교통 통신이라는 문명의 수단이 만든 인간 관계이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요즘 인사법이 싫다고 과거가 좋았다고 할 수는 없다. 보고 싶은 사람 자주 쉽게 볼 수 있다면 오히려 감사하게 여길 일이다. 불교 입장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지나간 일에 마음 두고 있으면 본인만 괴로울 뿐이다.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해서 지금을 망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밥 먹을 때는 열심히 맛있게 먹고, 공부할 때는 온 힘을 다해서 외우고, 놀 때는 만사를 잊고 땀 흘리면 매일 매일이 행복한 나날이니 1년 365일이 기대와 희망에 찬 첫날이 될 것이다.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미래가 불안해도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자기도 모르게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새해 첫날이 좋은 까닭은 지난날을 반성하고 마음속에 새로운 약속을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은 지난 잘못 허물을 참회하고 단절하는 것이다. 지난 한 해가 불만족스럽다 해도 잊고 새해를 맞아 새롭게 각오를 다지고 반성하면 된다.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 이르길 “허물을 고쳐서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진다”고 했다. 과거 허물을 자책하지 말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각오를 다지고 실천하면 한 해를 웃음으로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밝게 웃고 행복한 나날이 되도록 부처님 전에 기도 올린다.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한다. 나무 관세음보살. 일면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삶과 종교] 왜 크리스마스를 축하해야 할까요?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마음이 부산한데 우리를 들뜨게 하는 크리스마스가 연말에 있어서 저는 좋습니다. 어느 날 수백만 마리의 개미 떼가 산을 향해 오르고 있었습니다. 신기한 장면을 목격한 산사람은 그 개미들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개미들은 절벽 끝에 도달해서 모두 깊은 계곡 흐르는 물에 빠져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산 밑으로 내려가서 죽음의 계곡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끝없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개미 떼에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리로 가면 안 돼, 그 길의 끝은 천 길 낭떠러지야 돌아서라고. 죽음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라고 외쳤지만 개미들은 열심히 심지어는 경쟁적으로 그 산길로 올라갔습니다. 이 산사람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개미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 사실을 알려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내가 개미가 되어야 그들과 소통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영원한 죽음의 길을 향해 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성탄절을 더욱 의미 있게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육신’(Incarnation)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성육신은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 개미들에게 산사람이 그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알려주기 위해 자신이 개미가 되어야만 소통이 가능해지고 그들을 구출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영원한 죽음의 종말을 피할 수 없는 인간들을 구출하기 위해 스스로 신의 자리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성육신은 하나님의 결단이요 창조주의 지혜인 것입니다. 2017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성탄트리 점등식 축하 메시지를 전하면서 “미국은 전통적으로 우리의 구세주요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며 백악관 뜰에 성탄트리를 세우고 있다”고 선언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2천여 년 전에 세상에 찾아오신 예수님, 그 분은 아기의 모습으로 그리고 마구간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요즈음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이런 곳에서 아기를 출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에게는 동일한 가치의 존재로 보이셨기에 우리 모두를 위해 이 땅에 찾아오시고 자신이 죗값을 지불하는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기뻐하며 축하해야 할 진정한 이유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가복음 2장 14절 이세봉 목사·한국소년보호협회 사무총장

[삶과 종교] 자선냄비의 사회사

찬바람이 불어대는 12월의 거리에 어김없이 빨간색의 자선냄비가 등장하였다. 딸랑거리는 은은한 종소리는 마치 세모의 전령이 되어 한 해를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과 사회의 한 구석에서 어쩔 수 없이 웅크린 이웃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듯하다. 자선냄비는 이웃을 위한 선한 목적을 가지고 1891년 1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항구에서 시작되었다. 허리케인으로 인해 이민선 한 척이 파선되어 난민이 생겼지만 그 당시 미국은 지나친 철도확장과 투자로 인한 경제공황이 일어나기 직전이어서 그들을 구제할 경제적인 여력이 없었다. 그럴 때 갑작스럽게 생긴 난민들과 파업과 파산으로 생겨난 실업자 빈민들을 안타까이 여기던 구세군 사관 조셉 맥피(Joseph McFee)는 1천명을 위한 크리스마스 만찬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이전 선원 시절에 영국의 리버풀 항구에서 눈여겨보았던 구제방법대로 오클랜드 항구에 ‘심슨 포트’(Simpson’s pot)라는 선박에서 사용하는 큰 냄비를 내 건 후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이 냄비를 채우십시오!”라고 외치기 시작하여 모금하여 그 계획을 이룰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구세군의 창립자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는 전 세계의 구세군이 12월의 자선냄비를 통해 불우한 이웃을 구호하는 사회봉사를 할 수 있도록 지시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선냄비도 비슷한 환경에서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일찍이 없었던 경제적 호황을 누리며 세계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던 미국은 1929년 후반이 되면서 공업, 농업 등 전반적인 부분에서 과잉생산과 공급으로 인한 재고의 적재로 치솟던 주가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미국은 다시 한 번 경제공황에 늪에 빠졌고 세계 경제를 대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세계의 정세 속에서 식민 지배를 받던 우리나라 조선의 상황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수출시장이 줄어들면서 불황에 휩싸인 일제는 식민지 수탈을 통해서 그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1920년대 일본의 자본이 조선에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도록 ‘회사령’과 ‘관세’를 철폐하여 취약한 조선의 공업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또한 1927년의 발표한 ‘신은행령’으로 조선인 소유의 은행을 강제로 합병 예속하면서 산업 전반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였다. 이와 더불어 1918년 일본에서 일어났던 ‘쌀 폭동’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펼친 산미증산 계획은 농민들을 수탈하여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도시로 이주하여 도시 노동자가 되었지만, 산업 전반의 침체로 인해 곤궁한 삶을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통계에 의하면 1926년 총인구의 11%인 215만명이었던 조선의 세궁민(細窮民)이, 1931년에는 25%인 520만명으로 급증하였고, 걸인의 수도 1만명에서 16만명으로 급증하면서 겨울철 동사자가 속출하였다고 한다. 거기다가 1928년 가뭄과 흉년, 그리고 뒤늦게 쏟아부었던 폭우로 인한 홍수 피해는 조선의 상황을 최악으로 이끌었다. 1928년 12월15일에 시작된 우리나라의 최초의 자선냄비는 이와 같은 열악한 식민지 사회의 환경에 응답한 결단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자선냄비는 한국 전쟁과 IMF를 겪으면서도 99년간 봉사의 종소리를 꾸준히 울리며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을 섬기고 있다. 그런데 올 들어 부쩍 모방한 ‘짝퉁’ 유사 자선냄비들이 등장하여 사회를 혼란스럽게 해 근심이다. 동기가 선하여 목적대로 그 선함을 이루어간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만,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 펼치기를 원하는 자선냄비의 고유한 섬김의 사역과 봉사의 마음이 상실될 것 같아 염려스러울 뿐이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설마 난리가 나랴?

한반도 전쟁 임박설을 실증하는 현장과도 같이, 최신예 무기들이 대목장을 이루며 집결, 전시되고, 실전 같은 대규모 군사훈련이 반복되자, 세계인들과 많은 국민들이, 특히 우리 종교인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애타는 기도를 매일 바치면서도, 전쟁이 나지 않기를 바라고 믿는 마음으로, “설마, 정말 전쟁이 날까?” 하는 생각이 어느덧 ‘신념’처럼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전쟁은 통치권자들의 결정이나 정치인들의 합의로 군인들이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그 지역 백성들의 죄악이 천지간에 차고 넘치면 하늘도 말리지 못하고 막지 못하여, 인간들이 자청하는 천벌이다. 악하고 독한 사람들이 이렇듯 많으니, 어떻게 난리가 아니 나랴? 결국 전쟁발발을 정치외교 문제로 보다는, 타락한 국민 다수의 윤리 문제로 본다. 성탄절만이라도 남북한 우리 민족 모두에게 하느님의 참 평화가 내리기를 기도하자. 2천년 전 첫 성탄절 때, 베들레헴 주막집 마구간 말구유에 하느님의 아들이 아기 예수님으로 성탄하시던 날 밤,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부르는 노래가 하늘과 땅 사이에 울려 퍼졌는데, 그 의미와 교훈은 善과 平和의 메아리였다. “존경과 영광과 찬미는 천상에 계신 하느님께 드려야 하리로다! 지상에서는 마음이 착한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도다!” 평화는 칼과 돈이 있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마음이 겸손하고 선량한 사람들의 것이다. 또한 존경과 영광과 찬미는 왕이나 황제 같은 사람들에게 드릴 것이 아니라, 천상에서 진리와 사랑과 정의로 우리를 평화로이 보살피시는 하느님께 드려야 하리라. 그러나 핵폭탄과 장거리 미사일, 특히, UN과 미국과 북한이 싸움판 앞에 나와서 으르렁거리는 폭언을 들으면서, 실제로 일어나는 전쟁은 결코 대한민국만의 南北전쟁일 수가 없고, 南北韓과 美中日, 5개국만의 전쟁도 아닐뿐더러, 제3차 세계대전의 시작이 될 수밖에 없다는 예감이 든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전쟁이, 세계 인류 문명을 초토화시키는 그 피해규모와 결과 때문에, 1950년 6월 25일 사변과는 상반되는 현실과 결과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더욱이 1세기 전, 청일(淸日)전쟁이나, 일로(日露)전쟁 때, 朝鮮의 입장보다 더 난처한 처지가 지금이 아닐까? 하지만, 이번 전쟁은 유물론 공산주의 사상과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최종 결전장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남북통일을 위하여 남한의 공산화를 주장하는 시도와 선전 자체가 천만 부당한 것이다. 남북통일과 남한의 共産化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아기 예수님이 성탄하신 마구간과 말구유가 없는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는 없다. 우리 각자를 기다리는 우리 자신이 성탄할 마구간 말구유로 내려가 보자. 거기에는 인류의 대량 살상무기가 보이지 않는 평화가 있다. 성탄하는 인생, 성탄하는 가정, 성탄하는 사회는 불화와 충돌과 전쟁이 멀리 사라지고 평화가 깃들어 있다. 사회 모든 분야 어디에서나, 우리는 성탄할 특은을 받은 자들이다. 올라가는 용기도 필요하고, 돌아가는 지혜도 도움이 되겠지만, 내려가는 겸손은 꼭 있어야 한다. 가정에서의 善과 평화는 母女의 관계며(Bonum et Pax), 사회 어디에서나 진실과 정의는 父子의 관계다(Veritas et Justitia). 인간사회 안에서 정의와 평화의 최저선(Ad minimum)을 법학에서는 ‘正義’라고 하며, 최상의 무한선(Ad maximum)을 신학에서는 ‘愛德’이라고 한다. 그래서 善은 평화의 어머니요, 진실은 정의의 아버지다.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생명나눔의 백사마을 후원

일면스님 갑자기 추위가 밀려든 지난 4일 서울 중계본동을 찾아 겨울나기 용품을 전달했다. 이곳은 행정구역으로 중계본동 104번지 일대인데 사람들은 번지를 본 따 ‘백사마을’이라고 부른다. 서울에 남은 마지막 ‘달동네’다. 불암산 정상이 가깝게 보일 정도로 산 위까지 들어찬 슬레이트 지붕의 마을은 1970년대 드라마 세트장을 옮겨온 듯하다. 숨이 턱까지 찰 정도로 가파른 길을 따라 줄지어 선 집 주인들은 전부 노인이다. 서울의 달동네들이 대개 그렇듯 이곳도 1960년대 고향을 등지고 야반도주하듯 서울로 밀려온 이방인들이 겨우 찾은 타향의 쉼터였을 것이다. 고향에서 함께 밤기차를 타고 왔을 수도, 어느 공장에선가 만났을 수도 있을 청춘남녀는 꿈을 안고 열심히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을 것이다. 자신처럼 만들지 않겠다고 아이 교육에 모든 것을 바치고 틈틈이 고향 부모님에게 용돈도 보냈을, 거창하게 말하면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을 일으킨 역군들이라고 칭송받아 마땅한 어른들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불 한 채, 라면 한 박스를 받기 위해 줄서야 하는 병들고 지친 노인이다. 뚝 떨어진 기온에다 불암산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에 참석자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박원순 서울시장 부인 강난희 여사, 인기 아이돌 수지 어머니이자 생명나눔실천본부 후원회장 정현숙님, 그리고 가수 장미화, 개그맨 엄용수, 지역 정치인, 자원봉사자 등 100여 명이 백사마을을 돌며 준비한 이불과 라면박스를 전달했다. 생명나눔실천본부가 해마다 연말 백사마을을 돌며 난방용품을 전달하는 행사는 십 년이 넘었다. 올해로 백사마을 행사는 끝내고 내년에는 다른 곳을 찾을 계획이다. 우리가 떠나도 지금껏 그러했던 것처럼 많은 단체와 사람들이 후원하고 정부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사람들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을 찾아간다. 공식 행사를 서둘러 끝내고 물품을 전달했다. 올해도 많은 분들이 찾아왔다. 다들 걷기는 물론 몸 가누기가 힘겨워 보인다. 접이식 카트를 끌고 왔는데 물품 두 개를 올리자 밀지를 못한다. 자원봉사자들 도움을 받아 겨우 움직였다. 그래도 직접 오는 분들은 그나마 건강한 편이다. 아예 집 밖을 나서지 못하는 분들도 많다. 그런 분들에게는 직접 찾아 건네야 한다. 자원봉사자들과 어느 집에 들어가 이불과 라면을 건네는데 영정사진이 놓여있다. 94세 노모가 어제 돌아가셨다며 칠순의 아들이 눈물짓는다. 동장님이 명단에 올린 분은 아들이 아니라 그 노모인데 전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돈이 없는 아들은 집에서 장례를 모시려 했다고 한다. 주변 도움을 받아 당일 상을 치르고 정신을 차리기 전에 우리 일행을 맞은 것이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나는 본능적으로 합장을 하고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간절히 염원하며 독송하면 돌아가신 영가(靈駕)가 좋은 곳으로 다시 태어난다. 남은 자들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고 위로받는다. 종교가, 수행자인 내가 세상과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크고 귀한 선물이다. 칠순의 아들도, 자원봉사자와 후원자들도 운다. 고향을 떠나올 때나 수 십년이 지난 지금이나 여전히 춥고 힘겨운 백사마을 주민들을 내년부터 공식 후원은 하지 않아도 나의 관심과 발길은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일면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삶과 종교] 다행일기를 써봅니다

이세봉 추수감사절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 의해서 지키게 되었습니다. 경건한 삶을 추구하던 청교도 102명은 영국에서의 박해를 피해 1620년 메이플라워호에 올라 60여일의 항해 끝에 같은 해 11월 20일 신대륙 플리머스 항에 상륙했습니다. 그 해 겨울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생존자들은 이듬해 가을 곡식을 수확 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을 초대해 추수한 곡식과 채소, 과일 등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음식을 나눠 먹었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1789년 헌법 제정을 축하하며 그해 11월 26일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선포했으나 3대 대통령 제퍼슨은 추수감사절이 영국의 관습이라는 이유로 폐지하였습니다. 추수감사절이 다시 지켜진 것은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의 조기 종결과 국민의 단결을 위해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감사일로 공표했으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9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로 변경하였습니다. 요즘 세상에 없어진 것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감사’입니다.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고,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니고, 감사는 표현 할 때까지 감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없는 것을 세면서 불평하지 말고 있는 것을 세면서 감사하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은 행복한 일이 계속 되어야 감사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행복은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에 달려 있다.(Happiness depends on “Happenings”)고 합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누구나 행복해 하고 감사 합니다. 그러나 좋은 일이 생기지 않으면 감사한 마음도 생기지 않고 기쁨도 사라집니다. 진정한 감사는 내가 기쁨을 유지 하는 삶을 살 때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이 외적 조건에 의해 좌우 된다면 기쁨은 외적 조건의 변화에도 빼앗길 수 없는 가슴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것입니다. 감사도 불평도 습관입니다. “눈꺼풀은 일 년에 550만 번 깜박이고 심장은 일 년에 320만 리터를 뿜어냅니다. 발은 일생 지구를 세 바퀴 돈다고 합니다. 평생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한마디 불평이 없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저는 청소년들과 오랫동안 사역을 해 오고 있습니다. 이 젊은이들이 감사를 할 줄 알게 될 때 사람이 되고 자기 앞가림을 하게 됩니다.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로새서 3장 15절)” 이 시대는 어른들도 감사를 하기보다 원망과 불평을 습관적으로 늘어놓는데 어떻게 해야 젊은 친구들을 감사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할까 고민하다가 다행일기를 쓰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제목을 찾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00라서 다행이다’ ‘나는 00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나는 비록 00지만 00이 아니라서 다행이다.’등의 일기를 매일 쓰게 하려는 이유는 평소에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도 다행으로 느껴지고 그러다 보면 다행이 감사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연말에는 다행일기를 예쁘게 만들어 제가 사역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선물하려고 합니다. 열심히 다행일기를 기록하다 보면 다행일기 기록하는 가운데 감사가 개발되고 습관이 되어 감사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이세봉 목사한국소년보호협회 사무총장

[삶과 종교] 무릎의 사회학

강종권 프로 스포츠의 나라 미국에서 2017년 프로야구(MLB) 시즌을 마무리 해나갈 즈음에 열리기 시작한 미식축구(NFL) 구장에서 희한한 모습이 목격되었다. 경기 시작 행사 도중 국가가 연주될 때 일부 선수들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대통령의 인종차별 발언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다. 그리고 이 행위에 대하여 대통령으로서는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저급한 표현으로 비난하자 일부 프로야구 선수와 더 많은 미식축구 선수들이 무릎 꿇고 일파만파(一波萬波)하면서 조심스럽게 ‘무릎의 사회학’이라는 용어가 회자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무릎 꿇는 행위는 절대 강자에 대한 복종이나, 약자에 대하여 굴욕을 요구하는 표시로 이해한다. 신하가 임금에게 무릎을 꿇는 일과 땅콩 회항 사건이나 백화점의 고급 고객이 승무원이나 종업원을 무릎 꿇린 일들이 대표적인 한 예이다. 그러니 절대 강자, 그것도 세계적 강자라고 자처하는 미국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무릎 꿇는 것은 사회학적으로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에서 ‘무릎의 사회학’을 거론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오래전에 서독의 수상을 지냈던 빌리그란트(1969~1974)는 복종과 굴욕과 저항의 표시가 아니라 화해의 무릎을 꿇음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적이 있었다. 자국과 해외의 불편한 여론 중에 폴란드를 공식방문 중이었던 1970년 12월 7일 바르샤바 유대인 희생자 기념비 앞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게 차가운 겨울비가 추슬추슬 내리던 대리석 바닥에 1분 40초 동안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독일에 의한 2차 세계대전의 최대 피해국의 하나였던 폴란드, 그것도 독일에 의해 최대의 희생을 치렀던 유대인 희생자 기념비 앞에서 무릎 꿇었던 그의 행위는 독일의 극우세력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는 했지만 동서냉전의 시대에 화해의 이정표를 던짐으로 새로운 세계사적 사회변동의 시발점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무릎이 이루어낸 쾌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무릎 꿇는 행위가 꼭 부정적인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어 청혼을 하거나, 어린아이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는 어른들의 ‘무릎 꿇음’에는 지울 수 없는 사랑과 배려의 아름다움도 배여 있다. 기독교 신앙에서 무릎 꿇는 행위는 신을 경외하고 경배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 행위는 신의 뜻을 세워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고 신과 사람, 사람과 사람, 교회와 교회, 교회와 세상 사이를 화해하겠다는 평화의 표시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신 앞에 무릎 꿇은 사람을 어떤 이유로도 비난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진심으로 무릎 꿇은 사람은 신의 이름으로 화해와 평화, 사랑과 배려를 선포하고 베푸는 대리인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빨강과 파랑이 서슬 퍼런 날을 세우고 있다. 남과 북이 대립하고 여당과 야당이 정쟁하고, 태극기와 촛불이 양분하여 조금도 양보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 누가 먼저 굴종의 무릎을 꿇어 주기를 기대하기 전에 내가 먼저 화해의 무릎을 꿇어 준다면,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무릎을 꿇기라도 한다면, 우리 사회가 한층 더 성숙한 미래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정치적 역할이나 사회적 과제가 하늘로부터 위임받은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권리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부끄럽지 않은 겸손의 무릎을 꿇어 줌으로 사람 살 만한 더 행복한 우리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균형과 질서 안에서 묵상하며 살자

만물은 자체 존재 유지와 성장에 필수적인 최소한의 ‘힘’을 지니고 있다. 힘이 없으면 사라지고 만다. 작게는 미생물의 세포나 분자, 원자에 이르기까지, 크게는 우주 천체의 수억만개 별들도, 질서 안에서 자전과 공전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은하계나 외부 은하계의 항성들과 행성들, 그 공간과 다양한 궤도들까지도, 엄청난 힘에 의해서 존재하고 유지되며, 엄정한 천체 질서 안에서 무한대로 확대, 팽창, 공동 발전하고 있다. 자동차를 움직이는데도 수십마력의 동력이 필요한데, 지구와 태양계와 은하계의 수많은 별들과 광대무변한 우주 천체가 질서를 지키며 움직이게 하는 힘은 도대체 어떤 힘이며,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 것인가? 천문학이나 우주물리학, 생물학 등 관계 분야의 전문학자들도 그 힘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으나, 제대로 분명하게 알 수는 없어서 흔히 ‘미지의 힘(dark energy)’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우주와 천체들의 운행은 미지의 힘에 의한 신비다. 이러한 미지의 힘은 인류의 정신세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모든 힘 자체는 그 존재양식이 동적(動的)이며, 그 결과가 변화무쌍(變化無雙)하므로 우리는 운동으로 계속 변하고 있는 힘으로 살고 있으나 아직도 그 힘을 사용하고 있을 뿐, 잘 알지는 못하며 잘 다스리며 조절하지도 못하므로, 개인의 죽음이나 국가 간의 전쟁이나 멸망 같은 불의의 결과에도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광대무변한 우주공간에서 보면, 지구라는 동네는 별로 크지 않은 작은 별에 불과하지만 이 지구상에 태어난 인간들이 세운 각 나라를 통치하는 집단이나 독재자들 중에는 자기들에게 주어진 힘, 즉 권력과 무력으로 마치 큰 바다의 태풍처럼 인간세계와 자연계까지도 무시하고 파괴하는 동시에, 자신들도 그 태풍과 함께 사라지기가 일쑤다. 일찍이 장자(莊子)가 표현한, 동해 원풍(苑風)의 짧은 일생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태풍과 파도는 심할수록 새 파도에 의하여 급히 사라지듯, 인간역사에서 권력이나 무력의 태풍이나 쓰나미같은 정변이나 세계대전도 그 힘이 질서와 균형을 상실할 때 발생하는 변화현상이므로, 결코 영구불변은 아니다. 혹자가 ‘폭풍전야’라고 하는 오늘의 한반도 정세 속에서 급변하는 힘이 질서 안에서 균형과 조화를 잡아야 할텐데! 사실 말 잘하는 이들 대부분은 닥치는 힘들을 무대책 상태에서 쓰려고만 할 뿐, 그 여러 힘들을 다스리거나 조절하지 못하여, 태풍에 휩쓸려 돌풍과 함께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게 된다. 유럽에 적지 않던 큰 민족들이 지구상에서 아주 사라졌듯이. 1차대전과 2차대전, 뒤이어 계속된 동남아 전란과 중동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지금, 핵무기가 거론되는 천하대란이 바로 코앞에 다가오는 소리가 위협적이다. 더구나 이번 지각변동은 향후 10여년 안에 마무리되기는 어렵게 보인다. 더욱이 무임승차의 특혜만을 즐기며 반기려는, 매우 정직하지 못한 민족들에게 더 이상의 공짜 횡재는 없을 것이다. 개인도, 가문도, 나라도, 단체도, 종교도, 정도를 걷는 정의의 용사들만이, 모든 힘이 질서 안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을텐데! 사람들은 일시적이며 상대적인 자기 존재와 지위에 주어진 ‘힘’, 그 이상으로 없는 힘까지 쓰고자, 체력이나, 재력이나, 권력을 남용하고, 악용하며, 차용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국가조직과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와해시키며, 국가 간에는 전쟁까지 불사하게 만들고 있다. 우주 천체들이 자기 궤도를 준수하듯, 우리가 돈벌이를 위해서라도 체력은 70%만 쓰고 재력은 50%만 쓰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도 권력은 30%만 쓰되, 그나마 조심하며 여유를 두고 써야만 개인과 가정과 사회가 모두 질서 안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진선미(眞善美)가 만발하는 국가사회를 여유있게 이룩하여 나갈 것이다.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호국의 길

필자가 이사장으로 있는 생명나눔실천본부는 중양절에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떠난 의인들을 위한 생명나눔천도재를 한다. 홀수 날이 겹치면 길일이라고 해서 중요한 날로 삼았는데 그 중 봄의 삼월삼짇날과 가을의 9월9일 중양절(重陽節)이 지금까지 세시풍속으로 남아있다. 중양절에 제사 지내는 풍습을 살려 23년 전부터 장기를 기증하여 남을 살리고 떠났거나 나라에 헌신한 순직 군인 경찰 소방관 분들의 위패를 모시고 천도한다. 천도(薦度)는 생전 지은 업을 소멸하여 좋은 곳에 나기를 기원하는 불교 의식이다. 지난 10월28일이 중양절이었는데 올해는 특별한 분 10위(位)를 대웅전에 모셨다. 박인기 김봉교 전희택 김동원 홍명집 이장관 조영달 한효준 박금천 강원기 김만석. 이분들은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개전 초기 남양주 불암산에서 북한군을 맞아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육사 1기생이다. 임관 한 달 여를 앞둔 생도 신분으로 후퇴하지 않고 불암산을 은신처 삼아 북한군 보급대와 무기고를 공격하고 아군 포로와 민간인 구출 작전을 펼치다 전사했다. 상부로부터 후퇴 명령이 떨어져 철수할 수도 있었지만 이들은 자발적으로 적진에 남아 영웅적인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필자가 있는 불암산과 산 내 암자인 석천암스님들이 은신처와 먹을 것을 제공하며 이들을 도와 그 인연이 남다르다. 필자가 1970년대 초반 불암사에 부임할 당시까지 기둥 곳곳에 탄환 자국이 남아있어 치열했던 전투를 실감했던 기억이 있다. 생도들의 모교인 육군사관학교는 이들의 영웅적 전투와 조국애, 애민 정신을 담은 표지판을 세워 불암산과 사찰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호국정신을 일깨우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기억이 희미해지고 호국이라는 말이 시대에 뒤떨어진 골동품 취급을 받으면서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도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나라에서도 이들을 특별히 추모하고 기린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전 세계가 관련된 전쟁이었으니 전사(戰史)에 남을 전투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니 평범한 산을 은신처 삼아 고작 20여 명이 벌였던 유격대를 기억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더 합리적인 결말인지 모르겠다. 필자 역시 잊고 있다가 불현듯 이들 영가를 천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50여 년 전 주지스님으로부터 들었던 내용이 기억 저 너머 숨어 있다가 나온 듯 그야말로 갑작스런 깨달음이었다. 재학 중인 후배 생도 몇 명이 천도재에 동참해 기뻤다. 1기 선배들처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는 다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육사는 불암사 지척에 있어 훈련하느라 산을 찾는 생도들과 가끔 만난다. 필자는 불교 군종교구 초대 교구장을 역임해 군에 대해 더 각별한 마음을 갖고 있다. 육사 1기생 10위를 천도하는 인연을 맺게 돼 빚을 갚은 것처럼 홀가분하면서 한편으로 영광이다. 천도재는 해마다 계속할 것이며 유격대원들의 숨겨진 영웅담도 더 발굴할 계획이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자유는 누군가 희생 덕분이다. 전황을 바꾸는 결정적 전투도, 기록으로 남는 공식 전투도 아닌 20여 명에 불과한 유격대원들의 소규모 전투였지만 이들의 희생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고 우리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만끽하고 있다. 그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고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이 사랑이고 호국이다. 뭇 생명을 천도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삶과 종교]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며

올해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든지 5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요즘은 교회에서 잊힌 사건으로 되어 있지만 한국교계 현실을 보면 오늘따라 생각이 나고 그리운 사람이 바로 마틴 루터입니다. 그의 개혁정신이, 투철한 하나님중심 정신이 새삼 그리워집니다. 루터가 살던 시대에 교황 레오 10세(1513~1521)는 꼭대기 돔 높이만 43m 되는 성 베드로 성당 공사비 때문에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면죄부를 파는 일행이 비텐베르크에 왔을 때 마틴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을 95개 조항으로 작성하여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 벽에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다음의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오직 믿음(Sola Fide) 2.오직 성경(Sola Scriptura) 3.오직 은혜(Sola Gratia) 4.오직 하나님의 영광(Sola Deo Gloria) 지금까지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하여 피상적인 지식에 머물러 있었던 필자는 95개 조항 전문을 모두 읽어 보았습니다. 루터의 반박문은 크게 여덟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4조 신자의 삶이 회개의 삶이라고 명시, 5-7조는 죄 용서에 대한 교황의 권한이 없음을 지적, 8-29조는 교황이 사죄할 수 있는 범위는 연옥에 있는 죽은 자들에게 미칠 수 없다는 점을 밝힘, 30-55조는 면죄부를 통한 고해 행위의 무용함과 사랑의 실천을 언급, 56-68조는 카톨릭 교회의 ‘보물이론’을 비판, 69-80조는 면죄부 설교의 부작용을 지적, 81-91조는 면죄부에 대한 평신도들의 비판적인 질문을 담았고, 92-95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고난을 통해 참된 평화를 누릴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면죄부 없이도 죄와 벌로부터 완전한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신자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루터가 들려주는 메시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개혁의 본질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장 17절)”는 것이며 이 진리는 개인의 부흥과 교회의 회복에 원동력이 됩니다. ‘이신칭의’의 교리는 복음을 제일 잘 설명해 주며, 복음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시기 때문에 내 안에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인도하심대로 살아가면 주위의 사람들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5만개가 넘는 한국교회, 일천만 신자들은 오늘 어떤 평가를 받으며, 이 시대를 향해서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스스로 평가를 해 봅시다. 누군가 오늘날의 크리스천들과 개신교 교단들을 향하여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신앙생활을 지적하며, 교계의 개혁을 요구하는 반박문을 게시하고 싶은 제2의 루터 같은 사람의 기도가 어딘가에서 드려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헤아려 보고 나 자신의 신앙부터 겸손히 점검해 보며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세봉 목사·한국소년보호협회 사무총장

[삶과 종교] 배움이 상식이 되는 사회

얼마 전 경찰 대학교 학생 두 명이 우연히 목격한 납치 사건에 휘말려 좌충우돌하면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영화를 한 편 보았다. 범인을 제압하는 호신술과 수사 방법들이 학교에서 배운 대로 먹혀들어갈 때마다 쾌재를 불러대는 그들에게 학교는 ‘쓸데없는 것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는 확신과 신념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현실의 학칙은 배운 대로 행했던 그들의 모든 행동을 ‘폭행 범죄’와 ‘불명예 선례’로 규정하여 징계함으로 교훈의 하나였던 ‘정의(正義)’가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는 영화였다. 공자(孔子, BC 551~479)는 논어 첫머리에서 “배우고 그것을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하였고, 1천700여 년 후의 주자(朱子, 1130~1200)는 이것을 “이미 배우고 또 그것을 계속 익힌다면 배운 것이 익숙해져서 마음 가운데 희열이 된다(旣學而又時時習之 則所學者熱而中心喜悅)”라고 주석하였다. 배움의 기쁨을 회화(誨化)하는 극치의 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해마다 10월에 발표되는 노벨상 수상자 이름을 들을 때마다 어렵지 않게 연상하는 단어가 ‘유대인’이다. 세계 인구의 0.25%인 1천400여만 명에 불과한 유대인의 역대 노벨상 수상자는 전체 수상자의 30%인 184명으로 압도적이다. 2017년 올해도 단체상이 결정된 평화상 외 11명의 수상자 중에 어김없이 3.6%가 넘는 3명이 수상의 영예를 얻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200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던 산타바바라 캘리포니아대학의 석좌 교수인 데이비드 그로스(David Jonathan Gross)는 “교육을 중시하고 학자를 존경하는 오랜 유대 전통이 노벨상 수상자를 다수 배출하는 배경이 된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유대인이 노벨상을 압도적으로 수상할 수 있었던 근본적 원인은 교육의 중시와 학자를 존경하는 전통적 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교육의 질적 중요성을 대변하는 말일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은 하루 일상인 “집에 앉아 있을 때에나 길을 갈 때에나 누워 있을 때에나 일어날 때”(신명기 6:7)를 통해 가르치고 생활화하는 쉐마 교육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 그들에게 ‘쉐마(the Shema)’란 야훼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 말씀을 듣고 배운 대로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율법의 근원이자 신앙의 대상인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일 뿐만 아니라, 그 고백을 기초로 배우고 익혀 야훼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게 하는 삶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쉐마 교육은 유대인들이 유대전쟁 중인 AD 70년 티투스(Titus)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후 2천여 년간 세계 각처를 떠돌면서도 지켜온 정신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정신을 잃지 않고 지켜온 것이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이유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물론 토론을 중시하는 ‘하브루타(Havruta)’ 교육 방법의 독특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다지만, 이 역시도 배운 것을 실천하게 하는 쉐마 정신을 빼놓고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배움이 배움으로 끝나는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사회 각 부분에서 교육무용론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백년지계교육(百年之計敎育)에 대한 경고로 여겨진다. 사회적 신뢰와 보편적 생활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배운 대로 행하는 것이 정당하게 인정받는 상식적인 사회가 그립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진리와 진실도 다수결로 결정하려고 하나

진리와 진실이 없으면 정의가 있을 수 없으며, 정의도 자유가 없는 곳에는 있을 수가 없으니 진리도, 진실도, 자유가 없는 곳에는 있을 수가 없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1+1=2)는 수학적인 진리는 전세계 수학자들이 모여서 다수결로 결정한 것이 아니고, 또 앞으로도 새로운 수학인들이 다시 모여서 다수결로 변경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오히려 세계 전 인류가 배우고 깨달아 따르며 활용해야만 하는, 영구불변의 진리다. 결국 모든 진리는 인간들이 발견하고 깨닫고 활용하며 따라야 하는 것일 뿐, 새로이 창조하고 변경하거나 꾸미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17년 다음에는 2018년이 온다는 시간적 진리 역시, 전세계 모든 시계 제작인들과 우주 천체 물리학자들이 모여서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새로이 또 다수결로 변경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리학이나 물리학이나 천문학에 있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비물리학적인 이성과 정신세계의 형이상학, 즉 철학윤리학정치학법률학신학 등의 종교적 영역에서도, 자유를 존재가능조건으로 삼는 진리와 정의는 다수결과 무관하게 그 자체가 영구불변적이다. 그런데 오늘의 세계는 민주주의 다수결 만능의 전성시대라고 할 만하다. 특히 정치계에 있어 다수결 원칙은 성경이나 불경이나 유교의 사서삼경 이상으로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존중하고 앞에 내세우며 천하의 진리인 듯, 다수결 원칙을 ‘최고의 天命(천명)’처럼, 때로는 다수결을 만들어가며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다수결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은 너무나 잘 모르고 있으니, 다수인들의 자유롭고 바른 양심과 건전한 상식 수준이 함량미달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절대적인 조건, 즉 ‘다수결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에 대하여 너무나 모르고 있고 확인하지 않으며, 무시하고 또 소홀히 여기고 있다. 마치 언론 보도의 자유와 권리에는 사실을 사실대로 정직하고 공정하게, 공익을 위하여 보도해야만 하는 의무와 책임이 절대적인 전제 조건으로 있음과 같다. 그래서 비일비재한 소수의 폭력이나, 독재자 1인의 비민주적 폭력도 매우 두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민주적이라고 내세우는 다수결 주창자들 다수의 폭력은 소수의 폭력이나 1인 독재자의 폭력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최근 우리는 다수의 폭력이 소수의 폭력보다 비할 수 없이 더 끔찍하다는 사실을, 중국의 이른바 ‘문화혁명’을 통하여 모를 수가 없게 되었고, 특히 지난 세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17년을 전후한 북유럽 각국에서도 그 비극을 세계 인류가 너무나 뼈저리게 직시하여 왔다.그러므로 정의와 진리의 절대조건이 되는, 자유가 없는 사람들의 말과 글과 행동에는 진리와 진실이 있기 어렵고, 특히 정의가 살아있을 수 없으니, 정의가 없는 권력이나 권한 행사는 폭력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교황 베네딕도 16세 교서). 지금 우리는 이번에도 ‘휴전선의 이동으로 끝나게 되기 쉬운’, 새로운 전쟁의 전주곡이 요란하게 매일같이 울려 퍼지는 현장에서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다. 남북한만의 전쟁이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미중공만의 전쟁도 아니며, 더욱이 가공할 핵무기 사용의 제3차 세계대전의 출발과 동시에 종결이 될 수도 있다는, 인류 자멸의 비참한 대재앙급 천하대란의 전쟁이 임박한 듯, 많은 국민들이 참으로 불안해하며 착잡한 예감을 누를 수가 없는 모습이다. 이러한 전쟁은 인류의 고귀한 자유와 정의와 진리와 진실을 무시하고 짓밟아 버리는 비인간화 민족 집단들의 다수결을 빙자한 소수와 1인 독재자들의 오만한 폭력행위다. 따라서 비양심과 몰상식의 극소수 인간들이 외치는 원앙 소리만을 따라가도록, 광란의 집단들이 부르짖는 함성으로, 인류자멸의 대흉사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우리 모두 자유를 위한 순교자들이 되고, 정의를 위한 용사들이 되어, 진리와 진실을 지키고 아끼고 가꾸어 나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야 하겠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5천여만 명의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으나, 국민들이 너무 적지 않은가?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인간이 인간으로 대접 받으려면

자비심이 뛰어난 수행자가 있었다. 그의 품 속으로 매에게 쫓긴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자비심 많은 이 수행자는 비둘기를 숨겨주었다. 매가 수행자를 찾아와 비둘기를 내줄 것을 요청했다. 수행자는 거절했다. 그러자 매는 “나는 비둘기를 못 먹으면 죽는데, 비둘기 생명은 소중하고 내 생명은 소중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매는 비둘기만큼의 살코기를 달라고 했다.수행자는 비둘기도 살리고 매도 살리는 방안으로 비둘기 몸무게만큼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 저울에 달았다. 그러나 저울 눈금은 비둘기 쪽으로 기울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양다리 양팔 엉덩이까지 다 베어 올렸다. 여전히 비둘기가 더 무거웠다. 결국 수행자는 일어서서 저울에 올라갔다. 그제서야 저울이 평형을 이루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모은 본생담에 나오는 구절이다. 누구나 생명의 크기는 같고 소중하다는 교훈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수행자는 모든 생명의 가치는 동일하다는 깨달음을 얻고 중생 구제 원력을 세운다. 부처님뿐만 아니라 인간이 모두 같은 대접을 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나섰다. 현인들은 교육을 통해서 변화시키고자 했으며 혁명가는 무력으로 불평등한 세상을 뒤엎으려 했다. 자신의 존엄을 인정받기 위해 수없는 민초들이 싸우다 죽어갔다. 그런데도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는 이유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싸움을 멈추지 않는, 정글의 법칙이 인간사회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과 숲 속 짐승이 살아가는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 성장해서 어른이 되면 짝을 짓고 자식을 낳아, 그가 부모로부터 받았던 것처럼 자식이 성장할 때까지 보살피다 되돌아가는 생명의 순환은 인간이나 짐승이나 같다.자식을 낳아 기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살아야 한다. 사는 길은 오직 하나다. 나는 살고 상대방은 죽이는 것이다. 이는 수십억년 동안 형성된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의 몸속에도 남을 죽여야 내가 사는 자연의 냉엄한 법칙이 뼈와 피 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다. 근육이 머리로 바뀌었을 뿐 강한 자가 살아남는 순리는 인간사회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다. 불교는 이 법칙에 반기를 들었다.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양보와 절제로 평화와 행복을 지킨다는 역행(逆行)의 도를 내걸었다. 불교신자가 지켜야 할 가장 기본 원칙인 오계(五戒)만 보더라도 살고자 몸부림치는 인간의 순리를 거스른다. 다른 생명이나 재산을 빼앗아야 자신이 사는 것이 밀림의 법칙인데 이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것이 불교의 오계다. 아주 간단한 듯 보이지만 오계를 지키기는 하늘을 떠받드는 것만큼 어렵다. 이유는 남을 해쳐서라도 살아야 하는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 평화롭게 사는 것은 누군가 그 욕망을 억누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것이 개인이든 제도든 나 혼자 살면 된다는 밀림의 법칙을 거스르고 인간의 본성과 반대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내가 지금 평화롭게 목숨을 부지하며 살고 있다. 그러므로 나 역시 나와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조차 단지 그가 생명을 지닌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존중하고 대접해야 한다. 수십억년 동안 형성된 본능을 거스르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똑같은 대접을 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더 강한 역추진을 가해야 한다. 한두 명의 현인이나 정치가 무력을 동원한 혁명이 아니라 개인들 모두가 조금씩 힘을 보태야 수십억년에 걸친 불평등과 차별을 없앨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인간으로 대접받는 유일한 길이다.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삶과 종교] 복마전(伏魔殿)

‘복마전’이란 시자안(施子安)의 무협소설 수호지에 나오는 ‘복마지전’(伏魔之殿)에서 따온 ‘마귀의 거처’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북송 인종(仁宗, 1010~1063) 때를 설정하여 쓴 이 소설은 나라에 횡행하는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한 기도를 부탁하기 위해 용호산의 수도사 장진인(張眞人)을 만나러 갔던 사절 홍신(洪信)이 객기를 부리다가 ‘복마지전’에 봉인되어 있던 108 마왕을 풀어줌으로 나라에 전염병보다 더 큰 소동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실낙원을 쓴 밀톤(John Milton)은 그의 글 안에 이 복마전과 흡사한 판데모니움(Pandemonium)이라는 단어를 ‘마귀들의 소굴’ 또는 ‘마법에 걸린 지옥’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는 ‘복마전’을 ‘악한 마귀들이 거처하거나 무리 지어 사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부정부패와 비리의 온상지’, ‘무고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곳’, ‘썩어빠진 사회’ 등 불의한 음모가 끊임없이 행해지는 단체나 무리와 사회를 지칭할 때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는 이런 시대를 가리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세대”(마태복음 11:16-17)라고 했다. 이웃의 아픔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악한 세대라는 말이다. 로마가 식민 지배하던 1세기 전후 팔레스타인의 유대와 갈릴리에 살던 사람들은 로마와 그들을 대신하여 대리 통치하던 헤롯 왕가,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지도자들로부터 3중의 착취를 당하고 살았다. 특히 로마는 그들의 정책에 저항하는 식민지를 테러에 준하는 폭력으로 다스렸는데, 예수 활동의 주 무대였던 갈릴리와 가버나움 같은 곳에서는 로마 군대가 집과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대와 갈릴리의 통치자인 헤롯 가문은 로마를 위해 티베리아스를 그들의 행정 지배를 위해 세포리스를 건축했으며, 도시가 없던 시골 지역에 로마식 왕궁과 원형경기장과 신전들을 지으면서 유대와 갈릴리 사람들의 인적 물적 자원들을 빨아들였다. 거기다 성전 지도자들은 모세 전통과 계약전통에 따른 헌물과 십일조 등의 성전세를 어김없이 거두어들이는 상황에서 유대와 갈릴리 사람들은 고통으로 슬퍼하며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유다와 갈릴리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아픔을 보살피기는커녕 자기들의 배만 불리며 살았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예수는 그 세대를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 치지 않는 세대”라고 본 것이다. 무고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썩어빠진 복마전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런 부정부패와 비리의 온상지와 같은 그 사회를 가리켜 ‘강도의 소굴’(누가복음 19:46)이라고 비난하였고 그런 세대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다. 핵미사일이 머리 위를 쉴 새 없이 날아다니는 와중에 테러에 준하는 강대국의 폭력이 난무해도 힘없는 이 나라는 눈치 보며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와중에도 국민을 소모품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정치권은 촛불 열기의 한 모퉁이 그늘에서 권모와 술수와 음모를 꾸며대기에 바쁘고, 소비자를 호구로만 여기는 대기업의 갑질과 횡포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영화라도 찍듯이 동료를 폭행했던 어린 여중생들의 조직폭력배 같은 행동과 자기보다 더 어린 아이를 유괴 살해했던 여고생의 소식을 들었을 때는 잠시 분노했다가도 이내 남의 일 대하듯 치부해버리는 이 무감각한 세대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마법에 걸린 지옥 같은 복마전이 아닐까? 폭행하고 폭행당하는 세대, 비난하고 비난받는 세대, 테러가 끊이지 않는 복마전 세대에서 나는 과연 안전한가? 그리고 나는 이 세대와 또한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인생성공 단 십 백

이세봉 이번 한가위는 건국 이래 전국민이 열흘의 연휴를 갖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지난해 추석에 해외로 나간 사람은 46만9천명, 올해 추석에는 120만명이 출국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긴 연휴에 여행하는 분들은 즐거운 여행을, 특별한 계획이 없는 분들에게는 독서를 권합니다. 서동파의 글에 ‘讀萬卷書 始痛神(만권의 책을 읽으니 신명과 통하고), 旅行萬里 終分別(만리를 여행하니 분별을 제대로 할 수 있구나)’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한 평생 살다 죽을 때 한 명의 스승과 열 명의 진정한 친구, 그리고 백 권의 좋은 책을 기억할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이라고 합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한국 성인 연평균 독서량은 9.2권이며 세계 73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희랍 사람들은 병원은 육체의 질병을 고치고, 도서관은 마음의 병을 고치는 곳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책이 너무나 많고 불후의 명작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많이 인쇄되고 제일 많이 팔리는 책이 어떤 책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성경(Bible)입니다. 성경은 많이 팔려서 좋은 책이 아니라 그 책이 가져다주는 결과 때문에 좋은 책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고, 불안한 사람에게 평안을, 갈등이 있는 곳에 화해를, 목마름이 있는 사람에게 생수가 됩니다. 학원가에 가보면 ‘저자 직강’이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학생을 모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자가 직접 강의를 한다는 홍보에 그 클래스는 많은 수강생들로 넘치곤 한답니다. 성경은 1천600년에 걸쳐 약 40명의 각기 다른 배경-왕, 의사, 시인, 대제사장, 군인, 농부-의 기록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책이며 원 저자는 성령입니다. 신약성서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씀은 성경의 특성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종이에 검은 잉크로 인쇄된 일반적인 책과는 달라서 사람이 성경을 펴서 읽을 때 그 사람에게 맞는 메시지로 살아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의 저자인 성령께서 사람이 읽는 그 말씀을 깨닫게 도와주시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줍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연초에 성경통독을 결심하고 도전합니다. 그러나 66권, 1189장, 31173절이나 되는 방대한 양을 일 년에 완독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분주한 현대인들에게 성경을 가까이 대하는 방법으로 아침에 잠언 1장, 저녁에 시편 5편을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잠언은 우리에게 처세의 지혜를, 시편은 풍부한 감성을 갖게 해 줍니다. 이번 연휴 동안 좋은 서적들도 많이 읽고 성경도 꺼내 읽으며 마음의 양식이 풍부한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세봉 목사한국소년보호협회 사무총장

[삶과 종교] 지축이 핵으로 동요하더라도 흔들리지 말자

우주만물과 삼라만상은 각기 그 존재 이유와 존재 목적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 않다. 눈은 자기 눈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고 대상물을 보기 위해서며, 귀도 귀 자체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고 ‘소리’라는 대상을 듣기 위해서며, 위장도 위장 자체를 삭이지 않고 음식물을 소화시키기 위해서 있다. 물질 세계에서 물리적으로만 이렇지 않고, 사상과 정신의 세계에서도 윤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자유, 사랑, 정의, 진리, 마음, 평등, 통일 등 모두가 대타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모든 존재는 자신의 출발 근거와 기초도 이유와 목적처럼 자기 안에 있지 않고, 부모나 뿌리나 열매같은 자기 밖의 남에게서 받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의존자들이며 우연유들이다. 따라서 궁극에 가서 논리적으로는 필연유의 자존자 존재가 반드시 불가피하게 있어야만 한다. 이름이야 ‘신’이라고 하든지, ‘무한자’나 ‘무극’이라고 부르든, ‘조물주’라고 하든지…. 그런데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주객이 뒤바뀌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국민을 위한 국가라기보다 국가를 위한 국민으로 봉사 아닌 혹사를 강요 당하는 나라들이 적지 않다. 사실 국법도 국민을 위하여 있는 것인데, 국법을 위하여 국민이 존재하는 듯 강요하는 목소리가 더 우렁찬 나라와 시대도 있다. 생물과 무생물을 포함하여, 만물의 동작과 행위 역시 인간사회의 마을이나 가정처럼 특히, 나라들 간의 끝없는 회의를 거듭하는 국제연합도 들여다보면 모두가 서로 의존적이다. 마치,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도 날개와 깃털이 있어서만이 아니라 공기라는 비상여건이 있기 때문이며, 물고기가 헤엄을 치는 것도 지느러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물이라는 수영가능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물건을 볼 수 있는 것은 물건의 모양과 색채와 우리 눈의 시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눈의 시력이 다른 물건을 볼 수 있게 밝음이라는 가시여건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지력과 정신세계에 있어서도, 하나 더하기 하나 하면 둘(1+1=2)이라는 수학적 논리를 깨닫는 것도, 나아가 자유와 정의와 진리를 깨닫는 것도, 선과 악을 인식하고 식별하는 것도, 지능적 ‘밝음’ 곧, ‘조명(illuminatio)’이라는 가시여건 덕이다. 그러므로 우리 존재 자체와 그 주변에 대한 인식은 최우선의 지식이다. 특히, 국민과 국가를 충분히 의식하지 못한 대기업이나 정권이 사회혁명의 씨를 뿌리는 것도 자기 존재의 천부적 목적 망각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도, 고독은 그래도 극복하기가 쉬우나, 고립은 견디기 더 어려운 것이다. 모두가 서로 의존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최근 어떤 싸움꾼이 너무나 심심하여(?), ‘전쟁을 구걸하는(begging for war)’ 지경이라고, 비꼬듯 공격적 발언을 한 UN의 모 대사의 표현은 목적의식 망각의 소치라 하겠다. 따라서 말하기 쉬운 평화도 합당한 대상이 필요하듯, 전쟁도 걸맞은 상대국이 있어야 한다. 중·소의 후원(?)으로,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양손에 들고 호소하는 북한의 눈에는 비핵화 조치로 맨주먹이 된 남한만이 만만하게 보이겠지만, 미국을 위시한 전 세계열강들은 핵무장에 있어서 북한보다 훨씬 대선배라는 점을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만도 없다. 더구나 핵보유국 공인이 체제유지나 국방이나, 국가 경제발전이나 조국통일에 백해무익하며, 오히려 장애물이 됨을 알아야 한다. 동서독이 핵무기가 있어서 통일하지 않았고, 구소련이 핵무기가 없어서 와해되지 않았으며, 미국이 핵무기 덕택으로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과 중국이 핵무기 개발, 보유에 힘쓰지 않았다면 지금쯤 국민소득이 20만불 이상씩 되어 세계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고 가꾸는데 지금보다 훨씬 더 기여하고 있을 것이며, 저개발국의 기아퇴치로 만민의 존경과 찬미를 받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삶과 종교] 생명 공양

[삶과 종교] 부탄은 행복한 나라인가

8월 초 부탄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그 사실을 알고 부탄 사람들이 정말 행복한지 아닌지 내게 묻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부탄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게다. 하지만 단 한 번, 그것도 가이드의 안내로 불교 성지만 다녀온 내가 부탄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더구나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인 행복을 말이다. 그런데 이방인인 우리가 굳이 다른 나라 사람의 행불행을 판단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가 오히려 궁금하다. 심각한 기아와 폭력, 전쟁을 겪고 있는 나라에 대해도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우리들이 아닌가. 설사 부탄이 행복한 나라라는 이미지를 팔고 있으며 그 이미지가 진실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진실을 보는 눈이 없다면, 그리고 그 진실이 각자에게 다른 의미를 갖는다면 진위를 가릴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오히려 문제가 있다면 부탄을 행복한 나라라고 믿는 우리들의 기대일 테지만, 어차피 이미지가 진실보다 더 현실적인 힘을 발휘하는 시뮬라크르 시대에 장소의 이미지를 소비한다 해서 관광만 문제 삼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사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경제발전이 나라의 번영을 측정하는 유일한 조건이라고 믿던 시절, 행복이라는 다른 조건이 있다고 감히 주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탄은 행복한 나라가 아닌가 한다. 타인의 눈이 아니라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기준에 따라 그들의 삶을 판단했으며 그 기준으로 세계의 모든 국가에 새로운 가치를 심고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면, 현재 부탄의 국민행복지수가 세계 최고가 아니어도 부탄은 분명 우리보다 뛰어난 나라, 배울 것이 있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부탄은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왕정체제이며 현실정치를 담당하는 왕과 함께 종교를 총괄하는 승왕이 존재하는 독특한 나라이다. 민주정치제도와 거리가 있지만 그 나름의 이유와 합리성이 있다. 또한 일처다부제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는데, 거기에도 엄격한 법이 있다. 남편이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하려면 반드시 첫 번째 부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만약 동의를 얻지 못하면 아내에게 전 재산의 60%를 주어야만 한다. 세 번째 부인도 마찬가지다. 첫 번째 부인과 두 번째 부인의 동의를 구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두 부인에게 전 재산의 60%를 주어야 하며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비를 부담해야 한다. 모계제도와 부계제도가 섞여 있는 결혼제도는 히말라야 산악지대 전역의 독특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발생하는 인구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도 했지만 십여 년 전 부탄 여행을 했던 사람의 말을 들어보아도 부탄 역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곳저곳 건물이 올라가고 도시가 점점 확장되고 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바깥 문명이 흘러들어오고 카페와 주점은 밤늦도록 사람들로 붐볐다. 탁상사원을 올라가는 산길 한 모퉁이에 우리나라 산에서 볼 법한 돌멩이를 쌓아올린 탑이 있었다. 물어보니 “산에 가지고 온 것이 없지만 이 자연이 오래도록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돌멩이 하나 올려 만든 탑”이라고 한다. 그저 개인의 소원을 비는 우리네 돌무더기와 얼마나 다른가. 그러니 부탄은 우리와 다른 기준의 행복을 가진 나라가 틀림없다. 명법 스님 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

[삶과 종교] 살림살이를 잘하는 살림꾼

한 임금이 왕자를 결혼시키기 위해 왕자비를 간택하였다. 그때 왕은 무엇보다도 지혜가 있는 규수를 왕자비로 맞아들이고 싶어서 시험을 치르기로 하고 왕자비 후보들을 한데 불러 모아 놓고 쌀을 한 말씩 주면서 “이 쌀 한 말을 가지고 일 년간 먹고살다가 한날에 모이도록!” 명을 내렸다. 물론 각자에게 이행여부를 살피는 수행원들을 붙여서 철저히 감독을 하게 하고 보고토록 했다. 쌀 한 말씩 받은 규수들은 각자 나름대로 한 말의 쌀을 가지고 일 년을 먹고살기 위해 절약하고 절약하며 견디어 내었다. 일 년 후가 되어 약속한 날에 임금님 앞에 모인 규수들은 거의 뼈 가죽만 남은 채로 몰골이 상했을 뿐 아니라 아예 들 것에 실려 오는 규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한 규수는 일 년 전보다 더 건강하고 활짝 핀 얼굴로 임금님 앞에 덕 광주리를 이고 나타난 것이 아닌가? “모두 한 말의 쌀을 가지고 일 년을 견디느라 이렇게 여위었거늘 그대는 어떻게 일 년 전보다 더 살이 찌고 건강해졌는가? 그리고 이 떡은 또 무슨 떡인가?”라고 임금님이 물었다. 이 규수는 대답하는 말 “임금님 저는 본래 가난한 집에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물려오는 가난으로 한 번도 흰 쌀밥을 배불리 먹어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일 년 전에 임금님께서 한 말의 쌀을 하사하실 때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던지 그 쌀을 가지고 부모님께 흰 쌀밥을 지어서 배부르게 드시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는 날 즉시 절반을 덜어서 흰 쌀밥을 지어 부모님과 동생들을 배부르게 먹게 하였습니다.그리고 그 다음날 동생들에게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게 하고 남은 절반을 가지고는 떡을 만들어서 그 다음날부터 시장에 나가 이고 다니면서 떡 장사를 했습니다. 이 거리 저 거리로 다니면서 ‘떡 사세요, 떡 사세요. 임금님 쌀로 만든 꿀떡 사세요!’하면서 떡 장사를 했는데 뜻밖에도 호응이 좋아서 떡이 잘 팔렸습니다. 나중에는 여기저기 주문이 많이 들어와서 온 식구가 떡 장사에 매달려도 손이 모자랄 지경이 되었습니다.떡 장사해서 남은 이익으로 또 쌀을 사서 떡을 식구들이 밥을 해 먹고 또 떡을 만들어 팔고, 그렇게 하는 일 년 동안에 집안 형편도 좋아지고 식구들도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임금님 뵈옵기로 약속한 날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빈손 들고 오기 부끄러워 이렇게 떡을 만들어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지혜인가? 흔히 한 집안에 새 며느리가 들어오면 ‘살림꾼’ 들어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 살림꾼은 살림살이를 잘해서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는 좋은 살림꾼이 되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살림살이를 잘못해서 집안을 어렵게 만드는 살림꾼이 있다. 살림꾼은 살림살이를 잘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살림꾼인가? ‘살림살이’라는 말은 ‘살다’라는 자동사와 ‘살리다’라는 타동사가 합해진 말이라고 한다. ‘살리다-살다’ 다시 말하면 ‘남을 살리면 나도 산다’ 라는 의미이다. 살리는 지혜가 있는 살림꾼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살림살이의 종교이다. 우리 주님은 살리셨다. 그리고 주님은 사셨다. 주님은 참으로 살림살이를 잘하시는 좋은 살림꾼이셨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리고자 하는 자에게 복을 주셔서 실리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세상은 남을 밟으면 내가 높아질 줄 안다. 남을 죽이면 내가 사는 줄 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남을 살리면 내가 산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살림살이를 잘하는 좋은 살림꾼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좋은 살림꾼이었다. 야곱을 보자. 외삼촌의 집을 부자로 만드니 자신도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고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나의 나라에 종으로 팔려간 자리에서 살림살이를 잘하니 민족을 살리는 사람으로 쓰임 받게 되었다. 주님에게서 살림살이의 지혜를 배우자. 그리고 좋은 살림꾼이 되어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에 살림살이의 역사가 있게 하자. 주님! 좋은 살림꾼으로 살게 하소서! 반종원 수원침례교회 목사

[삶과 종교] 창조주의 명령, 쉬어라!

흔히들 “바쁜 게 좋은 것”이란다. 일터가 없고 일감이 없어 아우성치는 마당에 일할 수 있고, 게다가 바쁘기까지 하면 얼마나 좋으냐고.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성장하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는 사회 아니던가. 생산성, 성장, 효율 같은 말들이 우리 삶을 사로잡고, 그것이 ‘시대정신’으로 추앙받는 세상에서 바쁜 것이야말로 애국이고 효도랄 만도 하다. 이런 판국에 ‘쉼’을 말하는 것은 왠지 생게망게하다. 일이 없어 난리인데, 쉰다는 것은 곧 낙오이며 ‘잉여’일진대 어찌 마음 놓고 ‘쉼’을 이야기하겠는가. 요즘 같은 세상에 “푹 쉬어라”고 부추긴다면 저주이거나 악담 혹은 망언일 테다. 그런데 성서는 바로 그 ‘악담’과 ‘망언’을 스스럼없이 전한다. 성서를 잘 모르는 이들도 한번쯤은 접했을 대목이다.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안식일 계명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휴식’을 명령하신 게다. 몸소 휴일을 제정하시고, 수고로운 노동을 통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들에게 이날만큼은 ‘푹 쉬라’고 말씀하셨다. 창조주께서도 이렛날에는 쉬셨는데, 하물며 피조물이랴. 종들도, 나그네도, 심지어 집짐승까지도 쉬어야 한다고 명토 박아 두었으니 달리 빠져나갈 도리가 없다. 요샛말로 유급휴가를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 하고, 실제로 누려야 한다. 또한 구약성서 신명기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때”를 기억하라고, 파라오를 정점으로 하는 숨 막히는 위계질서와 가혹한 노동이 얼마나 힘겨웠느냐고, 그러니 그때를 떠올리며 자신도 쉬고 이웃도 쉬게 하라고 다독인다. 사회가 책임지고 ‘쉼’을 보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듯 성서는 고된 노동과 억눌림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살아라며 곳곳에서 ‘쉼’을 이야기한다. ‘쉼’은 일을 더 많이, 더 잘하기 위한 ‘재충전’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거룩한’ 종교행위이며 창조주께서 주신 권리라고 말이다. 오늘 우리 또한 ‘쉼’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생명이긴 매한가지인데, 온갖 제도와 여건 탓에 마음 놓고 쉬지 못하는 것이 또한 우리네 현실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임금 노동자의 연차휴가 부여 일수는 평균 15.1일, 사용일수는 평균 7.9일로 휴가 사용률이 52.3%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의 평균 휴가 일수가 20.6일, 휴가 사용률이 70% 이상인 것과 비교할 때 한참 낮은 수준이다. 이제야말로 쉼이 필요할 때다. ‘아직 모자라다’며 미친 듯이 질주하도록 독려하는 맘몬의 채찍질을 뿌리치고 잠깐이라도 여태껏 해오던 일, 이제껏 살아온 방식을 그치고 자기와 주변을 둘러보는 ‘거룩한’ 여유를 되찾을 때다. 이 여름, 하루쯤이라도 인공조명이 발산하는 빛이라곤 한 점도 없는, 그래서 반딧불과 별빛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 내가 살고 있는 산골마을 봉화 같은 곳에서 그저 자기를, 존재하는 모든 것의 ‘있음’을 오롯이 느껴보면 어떨까. 박규환 숭실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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