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2. 성남 현대어린이책미술관

빌딩 숲에서 만난 어린이미술관은 산속의 옹달샘처럼 반갑다. ‘책’을 테마로 한 어린이미술관은 어떻게 꾸며졌을까? 성남시 판교에 소재한 현대어린이책미술관 MOKA(관장 노정민)는 2015년 8월에 문을 열었다. 이름에서 짐작되듯 책을 주제로 그림책 관련 전시, 테마 교육, 열린서재 등을 통해 아이들에게 타인과 사회를 이해하는 힘을 길러주는 특별한 미술관이다. 연면적 2천736㎡ 규모의 2개의 전시실과 3개의 교육실, 미디어룸, 아틀리에, MOKA 카페 등으로 구성됐다. 앉아서 쉬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징검다리 형식의 멋진 계단을 오르면 나타나는 열린서재는 미술관의 자랑이다. 81가지의 키워드로 그림책을 분류한 열린서재 옆으로 늘어선 40여개의 거대한 기둥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의 통로를 걸어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다. 종이접기 형식의 교육실과 책꽂이 나무 아래 독서 공간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곳이다. 건축가 김찬중씨가 설계한 이 건물은 개관 당시 세계 3대 디자인상의 하나인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인테리어 아키텍처 분야의 ‘뮤지엄 스페이스’ 본상을 수상했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다양한 세대가 함께 어울리고 소통할 수 있도록 설계한 열린 공간이 돋보인다. ■ 그림책에 담긴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 보다 뛰어난 그림책 작가의 작업 과정을 관람객에게 입체적으로 온전히 보여 주는 것이 현대어린이책미술관의 장기다. 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한국의 그림책과 원화작품을 주제별로 분류해 보여줬고,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 작가의 그림책을 소개했다. 그림책 속의 그림들이 온라인 플랫폼, 애니메이션, 현대미술 등 여러 방식으로 표현, 창작되고 있는 예술의 유형도 소개하고 미국의 대표 그림책의 70년 역사를 정리하고 칼데콧상 수상 작가의 작품들을 탐구했다. 신진작가 육성을 위해 신진작가들의 다양한 작품과 작업과정을 소개하고, 전시 기간 동안 관람객 투표를 통해 2명의 작가를 선정해 작가의 작품에 독립 출판도 지원했다. ‘아티스트 인 북스’ 전시는 그림책을 통해 위대한 아티스트들을 다시 만나보는 전시로, 유명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재해석한 글과 그림, 그들의 일생과 작품세계 및 창작기법 등을 탐구한 것이다. 현재 포스트모던 그림책의 대표 작가 ‘존 클라센 & 맥 바넷’전이 열리고 있다. 데뷔 초기부터 주목을 받아 칼데콧상, 케이트 그린어웨이상, 보스턴글로브 혼북상을 수상한 두 작가의 첫 작품부터 발간 예정인 신작까지 살펴볼 수 있는 아이디어 스케치, 친필원고, 원화, 연계 프로젝트들이 최초로 선보인다.  전시실1에서는 존 클라센이 쓰고 그린 그림책의 작품과 맥 바넷이 글을 쓴 그림책의 작품이, 전시실2에서는 두 작가가 협업해 만든 그림책과 관련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관람객이 드로잉, 글쓰기, 만들기, 연극놀이, 극장놀이를 통해 작가들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 주인공 역할을 경험해 볼 수 있다. 작가의 시선에서 글과 그림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이 전시의 매력이다.  ‘키드 스파이’는 존 클라센의 모자 시리즈에 연결된 프로그램이다. 키드 스파이가 돼 단서를 찾고 미션을 풀어가는 놀이인데, 낮선 공간, 처음 보는 물건, 전시실 속 작품들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감상하며 단서를 추리해 지령을 완수하는 프로그램이다. ‘모자를 보았어’는 친구와 함께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을 재미있게 경험하는 인성놀이 프로그램이다. 모자는 하나, 사람은 두 명, 게다가 머리에 맞지 않는 큰 모자, 아이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까? 취학 전의 어린이와 가족이 참여할 수 있는 일일 프로그램이다. 9월 초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한 권의 그림책에 담긴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어린이 눈높이 프로그램 ‘창의력 쑥쑥’ 현대어린이책미술관이 어린이 교육과 관련된 프로그램 개발과 전파에 쏟는 수고와 정성은 각별하다.  “‘리틀 라이터스!(Little Writers!)’는 문학적 문해력을 다루는 미술관 시그니처 교육입니다. 다양한 이야기의 발상 과정을 경험하고 문학적 요소를 이해해 ‘나의 생각이 담긴 그림책’을 창작하는 문학 탐구 프로그램이지요. 현직 글 작가와 만나 작업 환경에 대해 들어보고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 그림책을 완성하며, 그림책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 요소를 파악합니다. 어린이들이 작가와 함께 읽고-쓰고-표현하고-비평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낸 그림책이 100권이 넘어요.”  미술관 관계자의 말을 들으니 자연스럽게 교육 현장에 참석해 보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난다. “참여자들의 반응이 좋아 올해는 중고등학생 대상의 프로그램도 운영합니다. 논픽션-‘역사’는 2019년 볼로냐 라가치상 수상작인 ‘에베레스트’의 작가 안젤라 상마 프랜시스와 함께하지요. 논픽션 그림책에 대해 탐구하고 자료를 편집,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쳐 그림책 제작 과정의 전반을 경험하며 나만의 책을 입힌 논픽션그림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리틀 아티스트!(Little Aritist!)’는 예술적 요소(시각적 문해력)를 다루는 교육입니다. 현직 예술가와 함께 소통하며 다채로운 실험과 탐구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선사하지요. 예술가가 작품을 창작할 때 거치는 사고의 과정을 경험하는 예술창작 프로그램인데, 지금까지 회화, 디자인, 건축 등 8명의 작가와 함께한 어린이가 2천700명이나 됩니다. 2016년부터 19년까지 4년에 걸쳐 ‘리틀 아티스트’ 교육에 참여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교육의 효과를 연구한 결과, 프로그램에 참여한 어린이들은 이해와 창의, 태도에서 역량이 증진됐음이 확인됐어요. 예술을 통한 교육으로 자기이해, 자기표현, 건강한 자아성장을 이루는 선순환적 구조를 갖추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 세계시민으로 성장하는 꿈의 사다리 ‘그림책과 떠나는 세계여행’이라는 스토리를 가지고 각 나라의 문화와 예술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문화 탐구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까지 18개 나라의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영하고 있는데 태국, 인도, 폴란드, 헝가리, 파푸아뉴기니, 멕시코, 아랍에미리트, 스페인, 보츠와나, 뉴질랜드, 체코 등 6개 대륙을 모두 잇는 것입니다. 유네스코 공식 프로젝트 ‘MOKA 세계시민교육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운영하고 있는 ‘MOKA와의 세계여행 Little Aritist!’은 어린이들이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세를 갖추고 미래세대의 주인으로서 책임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교육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예술을 만나며 지속가능 발전목표와 환경을 주제로 한 다양한 교육이 운영되고 있답니다.”  버스에 MOKA ‘움직이는 미술관’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문화예술 시설에 대한 접근성이 낮은 시골의 학교를 찾아가 어린이들에게 미술관의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사회 공헌 프로그램으로 현대백화점 사회복지재단의 후원을 받아 진행됐어요. 움직이는 미술관은 유네스코의 대표적인 교육의제인 ‘세계시민교육’을 어린이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꾸며졌어요. 2019년의 경우, 여러 부족이 어우러져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나라 인도를 주제로 선정해, 문화다양성과 세계문제를 탐구할 수 있는 3가지 전시 교육 콘텐츠를 선보였지요.”  미술관에서 개발한 그림책과 활동지 키트를 문화적으로 소외된 전국 곳곳에 전달해 수업을 비롯한 학교의 다양한 활동에 활용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미술관을 나서며 미술관을 기획할 때부터 참여했다는 최원옥 책임학예사의 바람을 들어본다.  “그림책은 어린이들이 태어나 가장 처음 접하는 ‘예술’이자, 풍요로운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문학’이며, 다양한 세상과 만나는 ‘경험’을 선사합니다. 그 속에서 읽고, 쓰고, 표현하며 문학적 상상력과 예술적 감수성을 키우고, 어린이 스스로 자신의 삶과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기 바랍니다.” 교육 등록은 홈페이지에서 신청할 수 있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장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1. 용인 ‘경기도어린이박물관’

무지개 빛깔의 일곱 기둥과 꽃밭 같은 건물 외벽 디자인은 어린이들의 재주와 개성을 나타내는 듯하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네”. ‘앞으로’를 비롯한 정겨운 동요 노랫말을 한 글자씩 새긴 알록달록한 타일이 벽면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동요를 시각화한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의 유리벽화를 보면서 100년 전 우리 겨레의 암흑기였던 식민지 시대에 어린이날 제정을 주도한 색동회를 떠올린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린들은 희망이다. 2011년 9월에 개관한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은 어린이들의 꿈과 호기심, 상상력을 키우는 놀이터이자 배움터로 경기도박물관, 백남준아트센터와 이웃하고 있다. ■ 상상력과 모험심이 ‘쑥쑥’ 어린이들이 전시물을 보고 만지고 이용하면서 배우며 알아가도록 고안된 시설답게 공간의 배치와 구성이 안전하고 재미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넉넉한 공간을 자랑하는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은 어린이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전시물이 가득하다. 유치원생들이 친구의 손을 잡고 박물관에 입장하고 있다. 대기하고 있던 박물관 직원들이 아이들을 안내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1층 로비에 들어서면 맞은편 벽면에 파이프 오르간과 꽹과리가 이어져 있고 9m 높이의 꼭대기에 파란 구름과 새가 한 마리 앉아있다. 소리를 듣고 눈으로는 움직임을 따라가면서 소통할 수 있는 김동원 작가의 ‘앙상블’이란 키네틱 아트다. 최문석 작가의 ‘돌고래와 환상의 바다여행’은 아이들과 직접 교감한다. 휴대전화를 꺼내 허공에 매달린 번호로 전화를 걸자 파란 돌고래 네 마리가 환상의 바다를 헤엄치기 시작한다. 아이 둘이 기다란 망이 주렁주렁 매달린 숲을 헤치며 앞으로 나간다. 최성임 작가의 ‘끝없는 나무’란 작품도 아이들의 놀이터다. 작가가 아이들과 함께 만든 작품을 살펴보니 음료수 페트병이 중요한 재료로 쓰였다. 버려지는 쓰레기도 상상력을 발휘하면 재미있는 예술작품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어린이박물관에 전시된 모든 작품들은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말을 걸고 손을 내민다. ■ 너와 나, 우리 모두 주인공이 돼 놀자 빨간 119 소방차를 타고 소방관 아저씨들이 어떻게 불을 끄는지를 배운다. 아이들은 소방관이 돼 차를 몰아 불이 난 곳으로 달려간다. 젖소와 말, 닭과 병아리, 토끼와 양이 살고 있는 동물농장에서 아이들이 토끼에게 당근을 주고, 다람쥐에게 도토리를 준다. 반달곰 발자국을 따라가면 DMZ가 나타난다. DMZ는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지만 희귀한 동식물들을 만날 수 있는 생태계의 보고다. 반달곰이 들판을 어슬렁거리고 냇가에는 반딧불이가 날고 있다. 금강초롱과 두루미와 고라니 형상의 태블릿 가이드가 안내를 맡아준다. 태블릿으로 반달가슴곰을 찍으면 반달가슴곰에 대한 정보가 화면에 나타난다. 퀴즈를 푸는 활동을 통해 회색의 삭막한 들판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면 생동감이 넘치는 공간으로 변화한다. ‘자연놀이터’는 48개월 미만의 영유아들을 위한 감각놀이 공간이다. ‘작은 생태전’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자연은 어떻게 변하는지 알려준다. 텃밭에 채소도 심고, 사과도 따며 사계절의 변화를 느껴본다. 동물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땅속엔 어떤 생물들이 살고 있을까? 알 속에 들어가 병아리 돼보기, 동물농장에서 강아지와 말 돌보기, 연잎 위에서 자연의 소리 듣기, 다람쥐가 되어 통나무를 오르고 내려가기, 땅속 두더지가 돼 두더지집짓기를 하다보면 자연의 따뜻함과 편안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 놀면서 배우는 생태와 환경, 그리고 이웃 2층 상설전시실에 마련된 ‘바람의 나라’는 어른들에게도 재미있는 공간이다. 바람의 나라에서는 ‘아기 바람’과 ‘어린이 바람’이 친구가 돼 신나게 논다. ‘어른 바람’과 ‘어르신바람’을 통해 보이지 않지만 늘 우리 곁에 있는 바람의 소중함을 배운다. 바람이 어떻게 이용될까? 바람이 지나가며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모습, 바람을 타고 춤추는 천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다. 아이 하나가 새의 등에 엎드려 망원경을 보고 있다. 아이의 눈에 비친 경기도의 산과 들판의 풍경이 궁금하다. 씨앗을 먼 곳으로 여행시키고, 식물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바람을 직접 만들어 볼 수도 있다. ‘물의 나라’는 태백산 상류에서 발원해 서해로 흘러드는 22m 크기의 한강 물 테이블이다. 물의 흐름과 힘, 댐과 수력발전의 원리 등을 체험하고 한강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배우며 서해안 갯벌의 생물을 관찰할 수도 있다. 아이들의 마음을 엿보려면 2층 ‘도전 어린이 건축가’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살피면 된다. 증강현실(AR)과 다양한 체험을 통해 어린이 건축가가 돼 볼 수 있다. 못을 사용하지 않는 결구법을 체험하고, 서양의 아치 구조물을 쌓아본다. 건축가의 인터뷰를 담은 AR 영상으로 건축의 구조와 재료를 배운다. 미래의 집은 어떻게 변할까?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로 건축물을 직접 짓고 전시실 벽면으로 송출해 다 함께 마을을 만들어 본다. 자신의 상상력을 펼치는 아이들의 표정이 밝다. ‘우리 몸은 어떻게?’는 우리 몸의 장기를 살펴보는 흥미진진한 과학교실이다. 눈, 귀, 코와 손 등 신체 각 기관이 하나씩 자리를 잡고 있다. 온 몸에 피를 보내는 심장이 커다란 나무처럼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붉고 푸른 혈관이 나뭇가지처럼 천장으로 뻗어 올라갔다. 피가 나가는 동맥은 붉은색, 피가 심장으로 들어오는 정맥은 푸른색이다. 열 명 남짓한 아이들이 음식을 씹는 어금니와 혀 위에 앉아 놀고 있다. 나의 손은 어떻게 물건을 잡을까? 뼈만 있는 새끼와 약지손가락이 있는 커다란 손바닥 신기한 듯 쳐다보는 아이의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거대한 눈 모형에 들어가 시각원리를 이해하고, 우리의 귀가 소리를 어떻게 뇌로 전달하는지 체험한다. 3층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전시장은 박물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얼굴이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다문화가정이 살고 있는 경기도의 특성을 전시로 녹여낸 것입니다. 경기도에 살고 있는 중국, 베트남, 일본, 인도네시아 어린이 가정을 1년여간 방문해 그들의 일상생활을 그대로 전시장으로 옮겼습니다. 관람객들은 다양한 도구와 멀티미디어를 이용해 각국의 요리와 전통악기, 의상 등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지요.” 박물관 곳곳에 어린이들이 예술가와 함께 만든 작품이 전시돼 있다. ■ 소통과 참여로 만들어 가는 ‘어린이 세상’ 스마트폰이 아이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시대이지만 어린이들은 여전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야기 속으로 풍덩’은 이런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채고 마련한 것이다. 5월에는 ‘사랑에 빠진 개구리’를 6월에는 ‘배고픈 달팽이와 너무 먼 채소밭’을 공연한다. 공연을 관람한 후 개구리 손 인형 만들기와 달팽이 손 인형 만들기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 진행한다. ‘21세기 잭과 콩나무’를 오르고 내려오기는 가장 인기가 많은 놀이터다. 14m에 달하는 콩나무를 직접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에 키가 120㎝가 넘는 어린이들이 체험을 할 수 있다. 박물관의 모든 프로그램은 예약제로 진행되기 때문에 쾌적한 환경에서 전시물과 체험을 즐길 수 있다. “소통과 참여가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의 핵심 키워드입니다. 박물관은 개관 때부터 어린이자문단을 둬 어린이들과 함께 박물관을 만들어 가고 있지요. 어린이들의 순수한 꿈과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펼칠 수 있는 역동성이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의 자랑입니다.” 정기 자문회의를 통해 의견을 제시하고, 워크숍을 열어 어린이 눈높이에 맞는 전시물 제작과 공간구성을 논의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어린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열린 정책은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이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비결이다. 김준영 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센터장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0. 과천 아해박물관

1989년 전 세계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제정한 ‘유엔아동권리협약’ 31조는 ‘놀이’를 아이들의 권리로 선언한다. ‘모든 어린이는 충분히 쉬고 놀면서 자신의 나이에 맞는 놀이와 예술, 문화 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렇다. 놀이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직업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다. ■ 아름다운 숲에서 다 같이 놀자 아해박물관(관장 문미옥)은 한국 전통놀이의 역사와 문화를 두루 살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즐거운 놀이터이자 창조적 배움터이다. 안해가 아내로 바뀐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해’는 어린이의 옛말이다. 아해박물관은 옛날 아이들은 어디에서 무얼 하며 어떻게 놀았는지를 친절하게 알려주고, 박물관과 이어진 숲에서 옛날 아이들처럼 즐겁게 놀도록 놀이판을 벌여준다. 과천시 주암동 아담한 동산에 안겨 있는 아해박물관에도 싱싱한 초록빛이 가득하다. 박물관에서는 현재 2023년 ‘박물관 길 위의 인문학’이 진행되고 있다. ‘자연과 함께 오래 오래 논다는 것’이라는 프로그램의 시간표에서도 전통놀이의 재미가 느껴진다.  1차시는 ‘도토리팽이, 나무에서 떨어져 팽그르 돌다’ 2차시는 ‘연, 바람에 기대어 날다’ 3차시는 ‘염색-풀, 나무, 흙으로 물들다’이다. 도토리팽이, 가오리연, 손수건 천연염색 체험키트를 제공하며 모든 프로그램은 무료로 진행되는데, 1~3차시까지 중복해서 신청할 수 있다. 단체로 신청하면 차량지원도 가능하다니 관심이 있으면 전화로 문의하면 되겠다. 박물관은 지난 3월부터 11월까지 ‘문화가 있는 날’ 프로그램 ‘우리 동네 전통 놀이터 -다 같이 놀자’를 박물관 옆 아해숲에서 진행하고 있는데, 게줄다리기는 5·7·9·11월 홀수 달에, 비석치기는 4·6·8·10월 짝수 달에 운영한다. 누구나 사전예약으로 신청할 수 있는데 선착순으로 마감한다. 조상들의 슬기를 엿보고 체험할 수 있는 전통 놀잇감 유물들을 전시한 박물관은 어떻게 설립됐을까. 서울여대 아동학과 교수인 아해박물관 설립자 문미옥 관장은 아동교육의 선진 이론을 배우기 위해 국제행사에 참여하면서 한국의 전통놀이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전통놀이가 아동교육에 매우 소중한 자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의 아동학자들에게 자랑하고 내세울 만한 놀이감을 보여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그는 이때부터 열성적으로 전통 놀이감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88올림픽이 열린 1988년부터 수집한 전통 놀이감은 교수연구실을 채우고 집안에도 넘쳐났다.  전통놀이가 창의성과 과학성, 예술성을 기르는 높은 수준의 공부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열망이 가득한 그는 부친이 물려준 대지에 어린이전통놀이체험박물관을 건립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놀이의 즐거움과 낭만을 돌려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해박물관의 고민은 어른들의 무지와 욕심으로 아이들에게서 빼앗은 놀이의 재미와 즐거움을 선사하는 일에 집중돼 있다. 아이들이 재미있는 놀이를 통해 꿈을 찾고 가꾸는 놀이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이런 노력으로 창의체험 프로그램 부분에서 전국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 놀이로 세대와 세대를 잇다 서광일 학예사의 안내로 1층 상설전시실을 둘러본다. ‘천인천자문’은 어떤 책일까? 한 권의 책에 담긴 정성이 놀랍다. “아이가 돌을 맞을 때 선물한 책입니다. 아버지나 조부가 글을 아는 이웃을 찾아다니면서 천자문의 1천 글자를 한 사람에게 한자 씩 1천 사람에게 받은 글씨를 모아서 만든 책이지요. 1년 365일 안에 책을 완성해야 하니 하루에 세 집을 돌아다녀야 했겠지요?”  자세히 보니 천자문 글자마다 오른편에 작은 글씨로 글씨를 쓴 사람의 자필 서명이 있다. 한글로 훈을 단 것도 책의 가치를 더해준다. 직사각형의 방패연이 여러 점 걸려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전선에 우리 군사들만 알아보도록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문양을 단 연을 날려 명령을 전달했던 사연을 들려준다. 놀이감으로만 알았던 연에도 이런 사연이 담겨 있다니 놀랍다. 연을 날릴 때 사용했던 여러 가지의 얼레도 여러 종류가 전시돼 있다.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방패연 옆에 모형 비행기와 우주선을 배치한 것도 재미있다. 손자손녀와 손잡고 박물관을 관람하는 중년이라면 팽이와 썰매를 전시한 곳에 서면 마음이 절로 즐거워진다. 손주에게 자신의 유년 시절의 추억을 들려주며 팽이를 만드는 방법, 잘 돌리는 기술을 설명하다보면 세대 간의 소통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한겨울 꽁꽁 언 시냇가에 친구들과 어울려 썰매를 타고 팽이를 돌렸던 시절을 떠올리며 행복한 미소 지을 것이다. 전시된 팽이가 여러 종류다. 말팽이, 장구팽이, 숫자팽이, 허리들어간 줄팽이, 줄팽이, 88올림픽팽이도 있다. 사금파리팽이와 돌멩이팽이도 있으니 돌릴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지고 놀았다. 명절이면 빠지지 않는 윷놀이도 빼놓을 수 없다.  흔히 보는 일반윷을 비롯해 엄청 커다란 큰윷과 장작윷, 자그마한 종지에 담아 노는 종지윷, 밤 윷, 콩 윷, 팥 윷까지 온갖 윷을 보면 우리 민족이 얼마나 놀이를 즐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팽이만큼이나 썰매의 종류도 다양하다. 양반다리 썰매, 서서타는 썰매, 막대손잡이썰매, 외발썰매, 방향전환썰매, 스케이트 날썰매, 철판날썰매, 눈썰매를 타고 동심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산과 들에 자라는 칡넝쿨을 감아 만든 칡공으로도 축구를 할 수 있을까? 아해박물관 숲에도 칡이 많아 칡 줄기로 칡공, 칡굴렁쇠를 만들어 놀이에 활용하고 있다. 88올림픽 개막식 때 한국의 놀이를 상징하는 놀이로 세계에 소개된 굴렁쇠도 있다. 경기장을 가로지르며 달려갔던 굴렁쇠 소년을 떠올려 본다. 우주소년 아톰을 그린 아톰딱지, 새아씨 종이인형, 판박이 인형옷입히기, 여자아이들도 즐겨 놀았던 구슬치기, 여름날 더위까지 식혀주던 물총도 빛이 바랬지만 유년 시절로 안내하는 유물이다.  전시실 끝에 근대 놀이와 관련된 유물들 전시되어 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1937년에 펴낸 잡지 ‘어린이’가 있다. ‘아이를 한울님 같이 생각하라’고 가르친 해월 최시형 선생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은 방정환은 정순철(해월의 외손자) 등과 색동회를 조직해 어린이날을 제정한다. 어린이를 존중하는 정신의 뿌리가 동학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2층은 산마루교실은 체험학습장이다. 통유리를 통해 동산의 나무들이 훤히 보이는 곳에서 아이들은 나무를 잘라 다듬어 팽이를 만들고 칡을 엮어 공을 만든다. 숲에는 상설전시실보다 더 큰 ‘한라백두 놀이마당’과 ‘콩쥐네 집’에도 선조들의 지혜와 땀이 밴 소중한 유물들이 가득하다. ■ 지켜내야 할 아해숲 즐거운 놀이가 벌어지는 ‘아해숲’은 아해박물관 전시실에서 관람한 내용이 펼쳐지는 아해체험숲이다. 아해숲에서 아이들은 감자나 고구마를 구워먹고, 칡을 말아 공을 만들고 숲에서 주운 알밤으로 윷놀이를 벌인다. 아해숲은 사시사철 잔치가 벌어지는 흥겨운 놀이마당이다. 숲에 난 길을 따라 걸으며 대자연의 신비를 가슴에 품는다. 동무들과 소나무길, 밤나무길, 상수리길, 왕벚나무 꼬부랑길, 살금슬금 길을 걸으며 우람한 참나무와 작은 풀꽃을 만나는 시간도 즐겁다. 황토길, 낙엽길, 나무다리길, 굽은 길에서 만나는 곤충과 꿩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깨친다. 숲속 곳곳에 놓인 놀잇감 유물은 전통놀이를 벌이는 작은 마당이다. 그런데 머잖아 이 아름다운 숲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박물관 주변이 주택단지로 지정되면서 박물관 숲까지 개발지역에 포함되어 이 계획을 철회하도록 재판했으나 1차 패소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 도시의 품격은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같은 문화시설이 말해준다. 숲이 사라지면 박물관은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아해숲에 우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관계 당국의 결단을 촉구한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장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9. 고양어린이박물관

오월의 숲은 뛰어노는 어린이들처럼 활기차다. 둥근 지붕선이 멋진 건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햇볕 가림막이 있는 원형 의자를 한 그루 나무로 배치했다. 노랑, 연두, 초록의 늘씬한 나무들이 무리지어 있는 숲을 형상화한 고양어린이박물관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12가지 무지개 색상으로 채색돼 있다. 어울림의 세상을 다양한 색깔로 표현한 것이다. 경기북부 지역의 어린이와 가족들을 위해 고양특례시 덕양구 화중동에 마련된 고양어린이박물관(관장 조현영)은 2016년 6월에 문을 열었다. ‘체험학습형 문화공간’임을 내세우는 고양어린이박물관의 주제는 ‘꿈과 미래를 만나는 여행’이다. 여행의 목적은 어린이들이 “무궁무진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키우도록 돕고 응원하는 것이다. ■ 세상의 모든 것을 만나는 곳 박물관 로비에 나무 모양의 조각 작품이 설치돼 있다. 벽면을 장식한 것은 아이들의 그림이다. 엄마 얼굴, 꽃과 나무, 물고기와 아기 공룡이 관람객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즐거운 나뭇잎 벽화’ 앞에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 선생님을 따라 이동하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흥겹다. 아이들에게 안전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 놀이를 통해 안전습관을 배울 수 있는 ‘안전을 약속해’라는 생활안전체험 공간도 눈에 띈다. 박물관 중앙에 설치된 ‘아이그루’는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숲 속 거대한 나무를 모티브로 한 신체활동 체험물로 나무를 오르며 도전정신과 모험심을 기르며 성취감을 느껴보는 곳이다. 탐험을 하다 친구와 가는 길이 겹치거나 마주치면서 양보와 배려, 질서를 자연스럽게 배운다. 안전한 양말과 미끄럽지 않은 운동화와 안전모가 준비되어 있어 안전하게 체험활동을 할 수 있다. “색다른 주제와 발전된 기술을 새롭게 만나보는 전시”가 열리는 기획전시실에는 현재 고양시의 장항습지를 디지털 숲과 AR체험으로 만날 수 있는 ‘원더풀 랜드’가 전시 중이다.  장항습지는 우리나라에서 24번째 람사르습지로 등록된 곳이다. ‘원더풀 랜드’ 앱을 다운 받으면 도시에서 발견된 장항습지 야생동물을 구조하여 디지털 숲으로 돌려보내줄 수 있음을 알려준다. 푸른 이끼로 둘러싸인 동굴을 지나면 온갖 동물들이 살고 있는 장항습지를 디지털로 구현한 신비한 현장이 나타난다. ■ 호기심을 키우고 차이와 어울림을 배운다 2층에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는 전시관이 이어진다. 꽃의 생태와 문화적 의미를 배울 수 있는 ‘꽃향기 마을’을 비롯해서 인종, 성별, 종교, 장애 등 다름을 배울 수 있는 ‘함께 사는 세상’이 있다. ‘함께 사는 세상’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체험하며 이해해 보는 재미있는 공간이다.  현재 소개하는 나라는 스웨덴이다. 스웨덴에는 어떤 친구가 살고 있을까? 동화와 영화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삐삐’가 바로 스웨덴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삐삐의 옷방, 삐삐의 주방, 삐삐의 거실에서 벽에 걸려 있는 옷을 입어보고 사진을 찍어보면서 머나먼 나라 스웨덴 사람들의 문화를 알아가도록 꾸며져 있는 것이 재미있다. 옷과 가구, 좋아하는 무늬 등 스웨덴의 문화와 예술을 경험하며 차이와 다름을 배워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우주와 지구 환경의 중요성을 놀이를 통해 알아보는 ‘안녕 지구!’, 각종 실험 기구를 통해 물의 성질과 원리를 배우는 ‘물빛마을’이 이어진다. ‘물빛마을’은 물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공간이다. 물이 없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물빛마을에서 물의 힘을 체험하며 물 에너지에 대해 이해하고, 물의 흐름을 바꾸며 이리저리 바뀌는 물의 이동 모습을 살펴보며 물을 새롭게 이해한다. 물을 통한 다양한 놀이로 물의 성질과 원리를 발견하고 물의 소중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36개월 미만의 유아와 부모들을 위한 휴식과 놀이의 공간 ‘아기산책’은 영유아들의 감각을 기반으로 공간에 대한 이해와 시각, 촉각, 청각 등 감각 발달을 지원하는 체험 공간이다. 엄마와 함께 소형, 대형 쿠션을 옮기고, 아빠와 함께 소리가 나는 물체를 만져보는 유아들의 몸짓이 사랑스럽다. 스펀지 매트 위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뛰는방, 소리가 나는 물체를 흔들며 소리를 탐색하는 기둥방, U자방, 까꿍 끈방, 아늑한 방, 검은방, 동굴방 등 재미있는 공간이 이어진다. ■ 어린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직접 꾸미는 박물관 3층은 애니메이션의 제작과정을 직접 체험해보고 이해할 수 있는 ‘애니팩토리’를 비롯해 과거와 현재, 미래가 어우러진 도시 ‘고양시’를 직접 만들어보고 체험해 볼 수 있는 ‘건축놀이터’, ‘꽃’을 주제로 풍부한 상상력과 예술적 감각을 키워볼 수 있는 ‘아트갤러리’를 만날 수 있다. 간단히 식사나 음료를 즐길 수 있는 카페테리아, 텃밭과 테라스가 펼쳐진 야외정원이 있는 옥상까지 있어 가족들과 휴식을 즐기기에 좋다. 고양어린이박물관은 어린이교육 전문가들의 학술자문을 통해 다양한 테마별 주제로 풍성하게 꾸며졌다.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자신감을 키우며, 문제해결 능력을 높이고 그들 스스로 고유한 잠재 능력을 발휘하도록 돕는다. 박물관 관계자는 “어린이의 잠재력에는 한계가 없다”고 강조한다. “어린이의 그 큰 가능성처럼 고양어린이박물관은 더 앞선 생각과 새로운 도전으로 큰 그림을 그려가고 있습니다. 고양어린이박물관은 그 무궁무진한 상상을 현실로 펼치는 최고의 공간과 최고의 시간을 선물합니다.” 다양한 테마로 구성된 12개의 기획전시실과 상설전시실 및 체험물을 통해 어린이 가족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경험을 선사한다. 어린이박물관은 어린이가 주도적으로 보고 느끼고 만들어가는 체험 교육을 중시한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호기심과 상상력을 키워간다. 대상별(유아·초등·가족·성인) 교육, 시즌 교육, 전시 연계 교육 등 늘 찾고 싶은 가족 복합문화공간이다. 축제, 온·오프라인 연계 이벤트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펼치고 있다. 어린이날과 크리스마스 등 계절별 축제, 뮤지엄라운지 프로그램, 메이커스페이스, 박물관 크리에이터 가족 ‘와글팸’ 등 유연한 운영이 특징이다. 배려와 공존을 생각하며 누구나 누리는 장벽 없는 박물관, 안전하고 편안한 박물관을 추구하며 만들어왔다. 올해 말까지 이어지는 ‘나나아스트로 고양: 별 여행’은 우주 고양이 나나아스트로와 함께 떠나는 고양별(Goyang Planet) 여행이다. 함께 지내던 반려동물이 우리 곁에서 사라진다면 어떨까? 작가는 반려 고양이 ‘나나’가 떠난 후 이별의 슬픔을 예술을 통해 풀어냈다. 작가의 상상 속에서 재탄생한 ‘나나아스트로’와 함께 광활한 우주 속을 탐험한다. ‘나나아스트로’의 첫 번째 여행지는 고양별이다. 꽃과 식물은 어떻게 자라나는 걸까? ‘꽃향기마을’은 꽃을 심어보고, 피어나는 꽃을 관찰하고, 다양한 꽃의 씨앗을 탐색하며 꽃과 식물의 특징에 대해 알아보는 프로그램이다. 꽃과 함께하는 일상의 즐거움을 경험하고 자연과 더욱 친해질 수 있다. ■ 아이들이 행복해야 모두가 행복해진다 박물관 곳곳에 고양시의 특성을 반영한 디자인과 시설들을 배치하여 자연스럽게 꽃박람회가 열리고 호수공원이 유명한 도시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준다. 고양어린이박물관은 어린이날을 맞아 5일부터 6일까지 열리는 ‘2023년 들썩들썩 놀자 페스티벌’은 ‘맘껏 펼침’을 주제로 어린이들이 무엇이든 마음껏 펼칠 만한 놀이와 체험의 장을 어린이박물관 실내와 야외광장에서 진행한다. 다양한 체험·공연이 펼쳐질 어린이날 축제 야외 체험 행사는 예약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행사장은 ‘놀이를 펼쳐봐’ 공연과 퀴즈 같은 이벤트로 어린이들의 상상을 실현하는 ‘상상을 펼쳐봐’와 ‘생각을 펼쳐봐’ 야외광장에서 가족들과 소풍을 즐길 ‘마음을 펼쳐봐’ 구역으로 구성된다. 고양어린이박물관은 아이들의 빛나는 눈빛과 해맑은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김준영 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8. 부천로보파크

■ 입구 들어서면 반갑게 맞아주는 ‘로피’ 로보파크 1층 입구에 들어서면 안내로봇 ‘로피’가 인사한다. 로봇 가이드 로피의 역할이 사람 못지않다. 아이들은 진짜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로피에게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한다. 로봇박물관 로보파크에서 관람객이 가져야할 필수 덕목은 ‘호기심과 용기’다. 전시물 앞에 설치된 버튼을 눌러 로봇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다. ‘소개’ 버튼을 누르면 “안녕?” 하며 인사를 하고, 감정을 표현한다. 아이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버튼을 하나씩 누를 때마다 반응하는 로봇의 변신이 재미있다. 4D 영상관에서 로봇이 주인공인 영화 ‘스파키’와 ‘볼츠와 블립’을 관람하고 관절을 이용해 사다리를 오르는 ‘레더보이’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더욱 흥미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바퀴 달린 자동차가 인조인간으로 변신하는 ‘변신로봇’을 비롯해 ‘마술로봇’이나 음악을 연주하는 ‘몬스터밴드’는 로봇의 역할과 가능성을 흥미롭게 전달해 준다. 로봇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 분야에도 깊숙이 진출해 있다. 청소용 로봇, 극한 작업용 로봇, 학습용 로봇, 완구용 로봇 등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는 로봇의 존재를 거듭 확인하게 된다. 우리 눈에 익숙한 휴머노이드 ‘휴보’와 세계 최초의 네트워크 기반 인간형 로봇인 마루·아라를 가까이서 마주하는 것도 즐겁다. ■ 미래 꿈나무들에 꿈과 희망을 전해주는 로봇 로보파크는 아이가 전시물을 직접 작동해 볼 수 있는 체험형 박물관이다. 로보파크는 매년 아티스트 로봇전시와 로봇체험전 같은 기획전을 열고 다양한 로봇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대부분의 전시물을 어린이가 직접 작동시켜 볼 수 있기 때문에 관람객들의 호응도 매우 높다. 로보파크의 자랑은 다양한 전시 연계 교육을 운영하고 있다. 장난감을 만들고 금속 프레임을 이용해 꼬마 로봇을 제작하며 기계의 원리를 배우고 투석기를 제작하여 미니대회를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로봇 아카데미’는 로봇 과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최고 수준의 교육 과정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화가처럼 그림을 그리고, 축구 경기를 하고 불평 없이 청소를 하는 로봇은 어떤 역사를 가졌을까? ‘로봇’이라는 단어는 노동을 의미하는 체코어 ‘로보타’에서 나왔다. 로봇은 혼자서도 척척 움직이며 스스로 작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기계이다. 로봇은 점점 사람과 닮아가고 있다. KAIST가 만든 국내 최초 휴머노이드 ‘휴보’를 비롯해 학습용 로봇, 댄스로봇, 영어회화용 로봇 등 다양한 지능형 로봇은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로보파크는 그동안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로봇에 대한 꿈을 키워주고 과학에 대한 체험과 교육을 통해 우리나라 최고의 로봇관련 전시 및 교육, 체험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관람객의 초상화를 즉석에서 그려내는 화가 로봇,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댄스 로봇, 응접을 담당하는 서비스 로봇까지. 직접 체험은 물론 로봇을 만들어볼 수 있는 아이들을 위한 로봇교육과정도 마련하고 있다. 체험실은 학습용 로봇을 조립하는 유치원생들로 가득 찬다고 한다. 부천 로보파크 전시관 2층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로봇 스포츠센터에서는 로봇이 발로 뛰고 장애물을 넘고 미로를 찾아가는 ‘로봇스포츠’가 펼쳐진다. ‘로봇 K-1’으로 불리는 로봇 격투기 대회도 바로 이 로봇 스포츠센터에서 열린다. 로보파크가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로봇 스포츠 대회를 개최했기 때문이다. 국내 최초로 지능형로봇 전문 과학관으로 개관해 크게 주목을 받았던 로보파크는 개관부터 현재까지 꾸준하게 청소년을 대상으로 로봇교육을 진행해왔다. 교육로봇 특별전을 열어 공학에 뜻을 둔 학생들의 호기심과 지적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기획전시실이 있는 로보파크 3층에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로봇 제작에 몰두하는 아이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기획전시실은 유아부터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체험프로그램은 물론 산업현장의 전문 인력들에게 로봇활용 직무능력 교육과 로봇교재 및 교육 콘텐츠를 홍보하는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지역 내의 관련 기업과 기관이 참여하는 ‘휴머노이드 코딩교육’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연계 체험교육을 통해 전시 관람은 물론 로봇활용 교육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하는 사실도 빠트릴 수 없다. ■ 인간·로봇이 어울린 세상을 상상하는 놀이터 부천 로보파크는 우리 일상에 들어와 있거나 장래에 들어올 첨단 로봇과의 관계가 어때야할 지를 생각하도록 이끈다. 산업 전 분야에 적용되고 있는 인공지능은 물론 로봇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머잖은 날에 실행될 자율주행자동차에도 로봇에게 맡겨야 할 역할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로봇 사이에 효과적으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인간과 동행할 휴먼 로봇의 발전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미래를 상상한다. 로보파크는 사람처럼 환경을 이해하고 사람처럼 생각하고 결정해서 사람처럼 행동하는 로봇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로봇이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맞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로봇 산업의 최종 목표는 사람과 같은 로봇을 만드는 것이다. 인공지능을 연구 개발하면서 사람처럼 생각하는 로봇 인공지능 개발을 목표하고 있다. 로봇은 인간의 동료이자 친구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거실 바닥을 청소하고, 자신들과 놀아주는 친숙한 존재이다. 챗GPT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이 거리를 활보하는 시대가 오면 세상은 좀 더 살만해질까. 전시관에서 만난 아이들의 맑은 눈빛을 떠올리며 ‘인간과 공존하는 따뜻한 감성을 지닌’ 휴먼로봇의 출현을 기다린다. 부천산업진흥원은 로보파크를 통해 4차 산업혁명시대를 이끌어 나갈 로봇 과학인력 양성에 많은 정성을 쏟고 있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로보파크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로봇교육을 실시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로봇전문 교육기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연간 1만1천여명의 교육생을 배출해왔으며, 2009년에 창단돼 50명으로 구성된 로봇스포츠 클럽 ‘로파스’를 운영하는 것도 로보파크의 자랑이다. ‘로보파크의 친구들’이란 뜻의 로파스 팀은 각 분야의 로봇 교육 기초 단계를 거친 친구들 중에서 선발되며 구동형 로봇반과 휴머노이드 로봇반으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다. 부천시의 미래산업팀과 부천산업진흥원의 로봇융합팀이 서로 협력한다는 사실과 테크노파크에 로봇기업과 연구기관이 입주해있다는 사실은 로보파크가 내세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자랑이다. 로보파크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단기 체험학습 프로그램은 아이들에게 재미를 주면서 창의력과 로봇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준다. 아이들의 지적 호기심과 창조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로보파크의 전시물과 체험프로그램은 매년 새롭게 채워지며 개발되고 있다. 아이를 동반한 학부모들이나 유치원, 초중등학교에서 로보파크를 즐겨 찾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7. 과천 한국카메라박물관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에 손톱만 한 카메라가 무려 다섯 개가 있다. 카메라가 휴대폰에 장착되면서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우리의 일상에 자리 잡은 카메라는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진화했을까. 앞으로 카메라는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까.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과천 한국카메라박물관을 찾았다. ■ 200년에 걸친 카메라의 발달사 지하철 4호선 대공원역 4번 출구 바로 앞에 한국카메라박물관(관장 김종세)이 있다. 2000년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개관했던 것을 2007년 현 위치에 건물을 신축해 이전한 것이다. 박물관은 카메라를 연상하도록 만들어졌다. 외관은 렌즈의 단면으로 디자인하고 건물 상부는 조리개 모양과 후드가 조화를 이룬다. 한국카메라박물관은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려는 인간의 꿈과 집념의 역사를 보여준다. 카메라는 짧은 시간에 극적인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왔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는 독일제 ‘콘탁스’와 ‘라이카’의 시대였다. 그러나 1959년 ‘일본광학’에서 카메라 역사의 기념비적 모델이 된 ‘니콘 F’를 출시하면서 카메라 시장은 독일에서 일본으로 넘어간다. 이후 기술의 발전을 거듭하여 디지털카메라를 탄생시킨다. 스마트폰의 출현으로 한국은 카메라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카메라의 극적인 변천사를 실물로 확인하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다. 층별로 3개 전시실이 있다. 1층 1전시실은 카메라와 렌즈, 부속 기자재들을 테마와 이야기를 담아 주제별로 기획 전시하는 공간이다. 2층에 위치한 상설전시실은 카메라가 최초로 등장한 1839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단위로 카메라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시대별로 카메라를 전시해 놓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도 유물이 전시되어 있을 정도로 다양한 유물로 가득하다. 지하는 교육과 전시가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우리 박물관에는 카메라와 렌즈가 각각 7천여점, 옛날 유리 원판 필름과 각종 부속품, 기자재까지 소장품은 모두 2만5천점에 이릅니다. 100년이 넘은 카메라를 많이 소장하고 있지요. 사립박물관으로는 우리 박물관이 세계 최고라 자신합니다.” 김 관장의 소개말에 긍지와 자부심이 묻어난다. 카메라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상설전시실에서 카메라의 시조인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와 마주한다. 라틴어로 ‘어두운 방’을 뜻하는 카메라 옵스큐라는 어두운 방 한쪽 벽에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빛이 들어와 반대쪽 벽에 구멍 밖 풍경을 거꾸로 나타내는 원리를 이용해 제작한 것이다. 최초의 카메라 옵스큐라는 1839년에 프랑스에서 제작한 것이지만, 전시된 유물은 1890년 무렵 독일에서 교육용으로 제작한 것이란다. 카메라 루시다 역시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유물이다. 1826년 무렵 카메라가 세상에 등장했으니 대략 200년의 세월이 흘렀다. 100년의 세월 동안 변신을 거듭하면서 휴대용 카메라와 스냅사진이 등장한다. 플라스틱 롤필름을 발명하면서 사진기는 휴대하기 좋도록 작고 가벼워진다. 디지털카메라의 발명은 카메라 역사의 최대 혁명이다. 카메라의 필수품이던 필름이 사라진 것이다. 디지털카메라가 휴대폰에 장착되면서 또 한 번의 혁명이 이루어진다. ■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다 콘탁스Ⅱ 라이플은 특별한 생김새만큼이나 얽힌 사연도 풍성하다. 관람객들이 전체를 살펴볼 수 있도록 둥근 유리관에 전시했다. “총의 개머리판 위에 장착된 카메라를 방아쇠를 당겨 셔터가 동작되도록 만들었지요. 히틀러 나치 정부의 주문으로 단 4대가 제작되었으나 한 대는 사라져 현재 3대 만 남았는데, 실물을 볼 수 있는 곳은 오직 우리 박물관에서만 가능합니다.” 제작한 해가 1936년이다. 베를린올림픽 동영상 촬영 때 쓰였던 카메라를 어떻게 구했을까. “20년 전쯤 독일 컬렉터에게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절대로 되팔지 않겠다’라는 각서를 쓰고 소장한 귀중한 물건입니다. 결승점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손기정 선수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같이 전시되어 이 특별한 카메라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가장 애착이 가는 소장품은 무엇일까?  “목재로 만든 1907년 모델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샀는데 크리스티 경매에 나왔던 물건보다 더 깨끗하고 상태가 좋았습니다.” 카메라의 원조인 카메라 옵스큐라, 카메라 루시다부터 최초의 은판 사진술 카메라인 1839년 모델, 최신 디지털카메라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카메라들이 마주하면서 “인간의 눈”에 다가가려는 기술 발전의 종착점을 상상한다. 라이카, 니콘, 펜탁스 등 세계 카메라 제조사에도 없는 초기 모델까지 살펴볼 수 있음에 감탄하며 설립자의 이력을 살펴본다. ■ 카메라를 향한 한 사람의 열정과 헌신 한국카메라박물관은 설립자 김종세 관장의 헌신과 열정의 산물이다. 젊은 날 광고와 디자인 계통의 일을 하면서 카메라에 빠져 카메라 수집에 열을 올렸다는 김 관장은 1976년에 구입한 ‘아사히 펜탁스 K2’와 인연을 맺으면서 카메라의 매력에 빠져든다. 아사히 펜탁스 K2하고 독일제 자이스 이콘에서 생산한 콘타플렉스를 비교하면서 카메라 렌즈를 모으기 시작한 그는 박물관 설립을 마음먹은 1993년부터는 돈이 생기면 카메라를 사서 렌즈를 테스트하고,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으면 카메라를 구입한다. 물론 카메라 발전사에 기여했거나 희소성이 있는 것들이다. 영국에서 희소성이 있고 상태가 좋은 카메라들을 많이 만난다. 소련이 붕괴한 직후 러시아와 동유럽의 길거리에서 명품들을 많이 산다. 1997년 IMF 때 일본 사람들이 와서 좋은 카메라를 싹 다 걷어가는 것을 보고 일본으로 나가려는 카메라를 모두 사 들인다. 물건 양이 많아서 나중에는 돈 빌려 가면서 구매한다. 1998년부터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카메라를 구입하기 위해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을 드나든다. 카메라를 수집하기 위해 다닌 나라가 120여개국이나 된다고 하니 그가 이제까지 쏟은 시간과 비용이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필요에 의해 카메라를 교환하는 일은 있었지만, 팔아서 돈을 만든 일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의 이런 투철한 자세가 우리나라 최초로 카메라 전문박물관을 개관할 수 있었던 힘이다. 지하에 있는 제3전시실은 사진 전시, 스튜디오, 암실 등 다목적기능을 가진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청춘카메라’ 교육과 같은 문화강좌, 카메라를 직접 만들어 자신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만들어 보는 체험, 카메라의 원리, 사용법, 촬영방법들을 간단하게 배운 뒤 촬영한 필름을 암실에서 직접 현상, 인화작업을 해보는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다. “시민들의 호응이 아주 좋아 놀라고 있습니다. 사진을 잘 찍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은 가장 즐겁고 보람된 일이죠.” 카메라의 원리가 궁금해 하는 관람객들을 위해 박물관은 카메라 옵스큐라, 바늘구멍 카메라 만들기 체험을 통해 카메라의 원리를 전달한다. 박물관에서 제작한 바늘구멍 카메라는 2천300여년 전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 노트에 기록되어 있던 원리를 이용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 한국카메라박물관을 살려야 한다 매년 특별전을 열고 있는 한국카메라박물관은 그동안 라이카 카메라 특별전, 펜탁스 카메라 특별전, 옛날 카메라로 찍은 사진전, 입체카메라 특별전, 군용카메라 특별전, Rolleiflex & 세계 이안반사식 카메라 특별전시회를 열었다. 현재 ‘120년 역사, 세계 접이식 소형 카메라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지하 전시실에는 현재 김종세 작가의 다랑이논을 주제로 한 사진전 ‘가방제전/묘족 이천년의 혼’이 열리고 있다. 과천 한국카메라박물관은 세계가 인정하는 명소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 박물관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공공주택특별법에 따라 박물관 전체 토지가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박물관을 허물고 주택을 건설한다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누가 내렸을까. 국가는 당연히 박물관을 보호해야 한다.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13조 2항에 ‘국가나 지자체 장이 지원 육성해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은가. 권산 한국병학연구소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6. 남양주 우석헌자연사박물관

호기심 가득한 어린이나 일상이 지루하고 시시해진 어른이 찾아봐도 좋을 매력적인 공간이 있다. 지구 역사와 생명의 신비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곳이다. 화석으로 남은 과거의 생명체와 광물, 암석을 통해 46억 년의 나이를 가진 지구의 역사와 다양한 생명체의 신비를 풀어주는 우석헌자연사박물관(관장 한국희)은 남양주시 진접읍 금강로 1095에 있다. ■ 어여쁜 돌의 집, 우석헌 ‘우석헌’이란 이름은 설립자 김정우의 아호인 ‘우석(愚石)’에서 유래한 것인데, ‘어여쁜 돌의 집’이라는 뜻이다. 다양하고 희귀한 진본의 화석과 광물을 전시하고 있는 우석헌자연사박물관은 2003년에 개관하여 올해 20주년이 되었다. “화석과 광물은 광활한 우주공간 속에 한 점으로 존재하는 우리 지구를 생생하게 이해하는데 중요한 통로가 됩니다. 우석헌자연사박물관은 세계에 흩어져 있는 화석, 광물, 암석 산지를 직접 탐방하여 최고의 가치와 학술적 의미를 가진 표본과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습니다. 우석헌은 관람객 여러분들에 의해서 완성될 것이며, 함께 하는 기관과 사람들로 인해 빛이 날 것이라 믿습니다.” 한국희 관장의 말처럼 우석헌자연사박물관은 지역 및 관람객과의 소통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한다. 관람객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였고 최근 유튜브를 통해 재미있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 생명의 신비와 자연의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곳 박물관은 모두 8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생명의 신비, 1억년의 지배자, 바다-생명의 요람, 포유류의 승리, 순환하는 암석, 제2의 석기시대, 광물의 세계, 야외 기획전시실이 그것이다. 30여 년간 체계적으로 수집된 공룡, 광물, 암석 등 지질관련 자연사 표본을 2층과 3층, 별관(디스커버리센터)로 구성된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 자유 이동식 전시대, 4면 관찰식 전시대 등 3세대 전시 기법을 도입하여 재미있게 구성했다. 입체적으로 설계한 상설전시실의 붉은 바탕색은 관람객의 시선을 유물에 집중하도록 도와준다. 생명체는 언제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신주경 학예연구사의 해설에 귀를 기울이며 시간 여행을 시작한다. 신비로운 역사를 간직한 화석(化石) 앞에서 발을 멈추고 대화를 나눈다. 맨 처음 만나는 화석은 지구상에 가장 먼저 출현한 생명체들의 모습을 간직한 화석이다. “고생물의 유해나 흔적이 남아 있는 화석을 살펴보면 생물체의 구조나 생활환경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37억년 무렵의 화석 스트로마톨라이트(Stromatolite)가 가장 먼저 만나는 화석인데, 모양이 마치 영지버섯 같다. 척추를 가진 물고기화석과 마주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생명체의 모양과 빛깔이 아름다워진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연꽃처럼 보이는 화석은 또 무엇일까? “바다나리 화석인데, 바다나리는 사실 식물이 아니라 동물입니다.” 물론 지금도 산호처럼 동물과 식물의 특성을 가진 생명체들이 존재하고 있다. 쥐라기를 대표하는 동물은 역시 공룡이다. 공룡 시대 바다에 살던 파충류로 어룡이라고도 하는 이크티오사우루스(Ichthyosaurus)의 화석이 완벽하다. 바다 깊은 곳에서도 앞을 볼 수 있는 크고 발달한 눈을 가진 이크티오사우루스의 지느러미에 아직 발가락뼈가 남아 있다. 본래 육지에서 살다가 바다로 내려온 증거다. “이 동물은 돌고래를 많이 닮았습니다. 전혀 다른 생물이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진화하는 것을 ‘수렴진화’라고 하지요.” ■ 작은 광석 하나에 우주의 역사가 담겨 있다 백악기에는 식물들도 크게 번성한다. 온전한 형태의 나뭇잎 화석들이 시선을 끈다. 공룡 화석이 다양하다. 유치원생들도 수십 종의 이름을 외울 정도로 공룡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공룡의 똥 화석과 공룡의 몸에 들어있었던 ‘위석’은 음식물을 갈아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매머드의 이빨을 정면과 측면에서 관찰하도록 설계한 유리관이 이채롭다. 이제는 신비로운 광물들이 나타난다. 공작석 (Malachite), 방해석 (Calcite), 황철석 (Pyrite), 금강석 (Diamond), 청금석 (Lazulite), 운석 (Meteorite) 등 광물의 종류도 여러 가지다. 금강석과 운석을 뺀 나머지는 처음 알게 된 이름이다. 생명체를 존재하게 한 방해석(Calcite)이 궁금하다. “흐물흐물한 연체동물들은 딱딱한 껍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많아요. 공룡 시대의 암모나이트를 비롯해 조개나 다슬기, 달팽이와 껍질들의 재료가 바로 방해석이지요. 방해석은 칼슘과 탄산이 만나서 만들어진 광물입니다. 이 방해석은 연체동물의 집은 물론 인간의 집을 짓는데 사용되는 시멘트를 만드는 원료입니다.” 청금석(Lazulite)은 또 어떤 광물일까? “파랑색보다 더 깊은 군청색은 ‘울트라마린’이라고도 합니다. 청금석으로 만든 물감을 군청색이라 불렀지요. 파랑색 물감이 귀했던 옛날 유럽에서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 더 비쌌다고 해요. 청금석을 잘 살펴보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한 금색의 황철석이 보입니다.” 스밀로돈(Smilodon)은 메머드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거대한 고양잇과 동물이다. 매우 강한 힘이 있어 이빨로 먹잇감의 숨통을 끊었다고 한다. 커다란 이빨은 짝에게 구애하는데도 사용되었다. 이런 동물이 지구에서 사라졌다! 강하다고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메갈로돈(Megalodon)은 지구에 존재했던 가장 거대한 상어로 사람을 한 입에 삼킬 수 있다. 이 거대한 생물의 화석은 매우 희귀하다. 물렁물렁한 상어 뼈는 화석으로 남기 어렵지만 딱딱한 이빨은 화석으로 남았다. 수백개의 이빨을 가진 메갈로돈보다 4천만년이나 먼저 지구에 등장한 귀상어는 여전히 살아있지만 메갈로돈은 오래 전에 사라졌다. 강하다고해서 오래 살아남고 먼저 나타났다고 해서 먼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게 바로 진화다. ■ 살아갈 지구의 건강한 회복 길잡이 분화석(Coprolite)은 짐승의 똥도 화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똥화석은 귀해요. 딱딱한 뼈보다 화석으로 남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지요. 과학자들은 똥화석을 통해 공룡이 무엇을 먹었는지, 위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예상합니다. 육식공룡의 똥화석은 길쭉한 반면, 초식공룡의 똥화석은 찌그러진 축구공처럼 생겼지요.” 중생대를 대표하는 공룡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초식공룡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갑옷이나 뿔 혹은 커다란 몸집을 만들었고, 육식공룡은 날카로운 발톱과 더 빨리 달리기 위한 신체를 만들었다. 그런데 초록색이나 갈색이라고 믿었던 공룡이 화려한 색을 가지고 있거나 깃털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공룡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다양한 모습을 상상해볼 것을 권한다. 공룡에 대한 편견처럼 겉모습과 소문으로만 듣던 다른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도 틀릴 수 있으니 편견을 거두고 자신을 돌아보자고 권유하고 있다. 박물관에서는 상설 체험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화석발굴체험은 매우 인기가 많다. 수정 모래액자 만들기를 비롯해 화석 레플리카 만들기, 보석 유리병 목걸이 만들기, 암모나이트 지우개 만들기, 나만의 별자리액자 만들기도 부모와 아이가 함께 하기 좋은 체험 프로그램이다. 점점 병들어가는 지구, 멸종해 가는 생명체들을 지켜보면서 건강한 지구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석헌자연사박물관은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지구의 건강한 회복을 고민하고 있다. 남양주시에는 문화유산이 풍부하다. 우석헌자연사박물관은 남양주시의 주변 환경과 관계 기관들과 긴밀하게 연계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시민들에게 문화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근처에 둘러볼만한 곳으로 모란미술관과 광릉 국립수목원이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로움을 느끼기에 좋은 계절이다. 우석헌자연사박물관은 이런 바람을 한꺼번에 충족시켜줄 훌륭한 교실이자 놀이터이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5. 고양 ‘포마자동차디자인미술관’

“다가올 미래에 먹고 살아야할 창의력의 양식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디자인이라 믿는다. 디자인이 나라를 살찌게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싶어 미술관을 세웠다.” ‘디자인국부론’을 굳게 믿고 이를 실재로 입증한 사람이 설립한 특별한 미술관이 경기도에 있다. 고양시 덕양구 향동에 위치한 포마자동차디자인미술관(관장 박종서)은 대한민국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자동차디자인미술관으로 2016년에 1종 미술관으로 등록됐다. 포마(FOMA, Form Of Motors and Arts)의 설립자 박종서 관장은 한국 1세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한국 자동차 디자인의 산증인이다. 미술관 입구부터 마당과 로비도 자동차와 관련된 작은 전시장이다. ■ 자연에서 찾아낸 미학 자동차디자인미술관 로비에 곤충표본이 전시된 까닭이 궁금하다. 비치한 돋보기로 자세히 살펴보니 풍뎅이의 몸통이 자동차를 닮았다. 그렇다. 독일의 명차 폭스바겐도 딱정벌레를 모델로 디자인했다. 그런데 ‘갑옷’은 자동차’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자동차의 금속 가공기술은 중세시대 갑옷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을 들으니 더욱 호기심이 발동한다. 벽 위에 수시로 색깔이 변하는 카멜레온 모형이 있다. 신비로운 자연의 색상에 감탄하며 지하에 마련된 주 전시실로 향한다. 널따란 주 전시실은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공간 구성과 바닥에서 천정으로 이어진 전시물의 배치가 인상적이다. “전시실은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어떻게 자동차 디자인으로 연결되는지 그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자연의 비례, 황금분할은 자연이 이미 이루어 놓은 조화이지요.” 멕시코 연안에 사는 앵무조개를 반으로 잘라 크게 확대하여 3D로 출력한 조형물이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1.618이라는 비례를 실현하고 있는 자연물이다. “이러한 자연의 질서를 알았을 때 훌륭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지요.” ■ 카멜레온과 딱정벌레 자동차디자인이란 무엇일까? 어느 인터뷰에서 같은 질문을 받은 박 관장은 이렇게 대답한다. “생명이 없는 물건이나 기계에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이야깃거리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 디자인 철학이다.” 천장에 매달린 특이한 조형물이 또 있다. 호랑가시나무 잎과 가오리 모형이다. 이처럼 전시물의 상당 부분이 자연이다. 박 관장이 디자인한 ‘티뷰론’은 돌고래의 선을 착안해 탄생한 것이다. 훌륭한 디자인이란 자연에서 비롯돼야 한다고 믿고 있는 박 관장은 자연의 색깔, 형태, 냄새, 촉감을 느끼고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곤충표본이 왜 전시실 입구에 놓여 있었는지 분명히 알겠다. 박 관장은 아반떼와 티뷰론, 싼타페, HCD-1 콘셉트카를 디자인할 때도 곤충의 선과 색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가장 아름답고 기능적인 디자인은 자연의 미와 정서적으로 부합할 때 나온다.” 설계도를 철사를 이용해 입체적으로 만든 자동차 모형, 자동차 차체를 제작하는 전통 장인들의 작업장 ‘카로체리아’도 전시돼 있다. 유럽에서 아직도 옛날 방식으로 자동차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전시된 페라리는 1930년대의 모델이지만, 시속 335㎞를 달렸다고 한다. 당시 독일의 바우하우스 조형론의 주 이론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이다. 페라리 모델에서 장식은 물론 불필요한 것을 하나도 찾을 수 없다. 1992년 디트로이트 모터쇼에 선보인 우리나라 최초의 컨셉카가 눈에 들어온다. 박 관장이 돌고래를 모티브로 디자인한 작품이다. 현대 소나타BIW 모델은 디자이너가 추구하는 조형적 요소와 엔지니어가 설계하는 기계적 요소가 어떻게 만나는지 확인시켜 준다. 첨단의 디자인과 성능을 보여주는 페라리 곁에 대장장이가 사용하던 망치가 전시돼 있다. 망치로 두드려 만드는 과정을 상상해본다. 스마트폰이 일상으로 굳어진 첨단의 디지털시대에 쇠망치를 바라볼 어린 관람객들의 시선이 궁금하다. ■ 디자인은 이야기를 입히는 일 기술 바탕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디자이너로서 어떻게 경쟁력 갖춰 세계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었을까? 미술관에 전시된 자동차 모형들은 새로운 마케팅을 개척한 일등공신들이다. 싼타페, 봉고, 쏘나타, 포터, 아반떼, 스쿠퍼, 티뷰론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박종서 관장의 손을 거친 것이다. “자동차 디자인은 혼자가 아니라 팀이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능한 디자이너가 더욱 요구되고 있습니다.” 미래의 디자이너들이 연구하는 공방의 풍경이 궁금하다. 마침 공방에서는 십여 명의 청년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펄떡이는 심장처럼 열기가 가득한 공방은 미래의 자동차디자이너들이 탄생하는 현장이다. “디자인은 결코 한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 낼 수 없어요. 창의적 생각에 대한 철저한 나눔의 과정입니다. 시대적 가치의 결정체인 디자인은 홀로 화폭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는 순수예술의 고민과는 차별되지요. 디자인은 다양한 생각과 물리적 과정을 통해 원석과 같은 첫 생각은 여러 차례의 갈고 닦음을 통해 비로소 그 빛을 드러냅니다. 디자이너의 고뇌가 담긴 과정들엔 많은 이야기들이 담기게 됩니다. 창의의 세계에 남겨진 이야기, 빛나는 결과물을 낳기 위한 과정의 이야기를 관람객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포마자동차디자인미술관은 국내보다 외국에서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외국의 경우에도 자동차의 수집하는 박물관은 있지만 디자인을 속속들이 파헤쳐 보여주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미술관은 없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청소년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고 있다. 박 관장은 입시 위주의 교육 현실에 지친 청소년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가슴 아파한다. “우리 아이들이 이곳에 와서 자동차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풍부한 영감을 얻어가길 바랍니다.” 박 관장은 영국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s)에서 수학한 최초의 한국인이다. 수석으로 학업을 마치고 35년간 현대기아 자동차연구소 수석 부사장으로서 대한민국 자동차 디자인 분야의 초석을 마련한다. 퇴사 후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장, 대한민국산업디자인 협회장, 대한민국 브랜드 학회장을 역임하며 디자인부국론을 전파해왔다. ■ 미래 디자이너들 꿈이 영그는 곳 미래의 디자이너를 꿈꾸는 초 중 고교생을 위한 ‘포마 아카데미 주니어’나 진로체험 프로그램 ‘나는 디자이너다’는 향후 디자이너로의 진로를 희망하는 미래의 디자이너를 위한 체험 프로그램이다. ‘포마아카데미’는 창의적 직업, 진로를 희망하는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1년 동안 함께 꿈을 꾸고 함께 꿈을 만드는 체계적인 과정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친구와 협력하며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입시미술을 목표로 하거나 일회성 스펙 쌓기를 지양한다. 본인 스스로 강한 열정과 참가의지를 지닌 청소년만 참가 가능하단다. 포마자동차디자인미술관이 현재 포니정재단과 함께 진행하고 있는 ‘포니정 디자인 아카데미’도 주목된다. 포니 자동차 탄생 50주년(2025년)을 앞두고 미래 시대에 걸맞은 디자인 혁신 인재 양성을 위한 프로젝트다. 현재 대학부 12명, 고교부 7명이 아카데미 인재로 교육을 받고 있다. 공예, 예술, 디자인 부문에 관심과 열정을 지닌 청소년과 청년이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데, 지원자가 제출해야 하는 과제부터 신선하다. 나의 가장 뛰어난 재능이나 재주 세 가지를 소개하기. 지금까지 살면서 자기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실행함으로써 타인에게 도움을 주었던 활동을 통해 스스로 배우고 느낀 것이나 변화된 것을 설명하기.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자연, 현상, 사물은 무엇인지 설명하기.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혁신가, 디자이너들 중 한 사람을 선정하고 만일 그 사람에게 질문을 한다면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 질문을 작성해 보기 등이다. 신록이 꽃보다 아름다운 4월, 포마자동차디자인미술관에서 디자인 부국을 향한 위대한 실험이 계속되고 있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4. 광주 ‘영은미술관’

광주시 쌍령동에 위치한 영은미술관은 동시대 근현대 작품을 연구,소장, 전시하는 현대미술관이자 창 작스튜디오에서 작가와 대중, 기획자가 소통할 수 있는 복합문화시설이다. 영은미술관 전경. 윤원규기자 활짝 핀 살구꽃과 벚꽃이 눈부시다. 광주시 청석로 300에 자리 잡은 영은미술관(관장 박선주)에 생명의 기운이 약동하고 있다. 1992년 한국예술문화의 창작활동 지원을 목적으로 설립한 대유문화재단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2000년 11월에 개관한 영은미술관의 설립이념과 추구하는 지향점은 분명하다. “영은미술관은 동시대 현대미술 작품을 연구, 소장, 전시하는 현대미술관이며 또한 국내에서 처음으로 창작 스튜디오를 겸비한 복합문화시설입니다. 우리 미술관은 기존의 미술관 형태를 과감히 변화시켜 미술관 자체가 살아있는 창작의 현장이면서 작가와 작가, 작가와 평론가와 기획자, 대중이 살아있는 미술과 함께 만나는 장입니다. 종합미술문화단지의 성격을 지향하는 영은미술관은 조형예술, 공연예술 등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예술을 수용하고 창작, 연구, 전시, 교육 등의 복합적 기능을 수행하여 참여계층을 개방하고 문화를 선도해 나가고 있습니다.” 박선주 관장의 소개말에서도 봄기운이 느껴진다. ■ 아버지의 사랑과 생명의 기운이 약동하는 미술관 영은미술관 설립배경에는 고(故) 이준영(1917~2007) 대유문화재단 이사장의 문화예술에 대한 의지와 먼저 떠난 아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숨어있다. 그는 회고록에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내 이름 이준영의 마지막 글자인 ‘영’자와 큰아들 상은(고(故) 이상은 회장, 1940~1992)이 이름의 마지막 글자인 ‘은’자를 따서 영은미술관이라고 지은 것이다. 이 사업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 진흥 발전에 기여하고 세계미술 속에 한국미술의 위상을 높이고 싶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영은미술관은 터도 넓고 공간도 넉넉하다. 33만7천607㎡(10만2천126평)의 널따란 부지에 미술관동과 레지던시 작가들을 위한 스튜디오와 연구동이 자리 잡고 있다. 지하1층~지상3층의 미술관동은 3개 전시장과 세미나실, 자료실, 강의실 및 평면스튜디오를 두루 갖추고 있다. 미술관과 스튜디오 시설로 구분되어 두 기능이 상호 분리되고 호환될 수 있도록 설계된 독특한 구조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이다. 영은미술관의 모태인 대유문화재단이 1992년부터 한국 근현대미술의 경향과 스타일을 대변하는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매년 구입하고 기증을 받아 현재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500여 점에 이른다. “회화, 조각, 설치, 공예, 사진, 디자인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 김창열의 「회귀」를 비롯해 도흥록의 「Drawing_05-I」, 강영길의 「GODOT」, 강형구의 「Maria Callas」, 방혜자 「빛의 눈」, 이우환의 「From the Line」, 박서보의 「묘법 52-73」 등을 비롯해 영은창작스튜디오를 거쳐 간 역대 작가들의 기증 작품 역시 주요한 소장품입니다.” ■ 조각과 회화로 표현한 생명의 기운·우주의 기운 영은미술관 특별기획전 ‘한국의 네오모더니스트 김영원 기(氣) 오스모시스 조각과 회화전’은 6월18일까지 이어진다. 특별전이 열리는 제1전시장은 130평에 전시실로 기둥이 없고 벽면 높이가 7m나 되어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공간 연출이 가능한 공간이다. 특별전을 기획한 정효정 학예연구사의 해설에 귀를 기울인다. “김영원 작가는 1994년 22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영상을 통한 기조각과 퍼포먼스를 처음 발표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무렵부터 현재까지 꾸준하게 작업하고 있는 작가의 기공명상을 통한 예술작업은 영은미술관 특별기획전을 통해 ‘기(氣) 예술art’이라는 장르와 이를 해석할 수 있는 미학이론을 함께 제시하는 전시입니다. 전시한 169점의 회화작품과 23점의 조각은 거의 대부분이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이지요.” 사실 ‘기(氣)’라고 하는 것은 존재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 그 실체를 알기 어렵고, 이를 미술 작품에 적용한 미학이론은 아직 없다. “이번 전시는 세계 미술계에 김영원 작가의 기 예술을 이론으로 정립한 ‘기(氣)오스모시스’라는 새로운 미학을 화두로 던지는 것입니다. 우주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기로 구현한 작가의 예술작품 공간 속에서 기오스모시스를 느끼고 체감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삼투, 스며들기로 풀이되는 ‘오스모시스(Osmosis)’와 ‘기’의 결합을 머리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작가의 예술세계를 가까이에서 탐색하고 깊이 분석한 평론가 홍가이의 해설을 살펴본다. “동양에서는 우주의 모든 것이 기의 모임과 흩어짐이라고 하니 ...김영원의 기공명상 예술행위를 기오스모시스를 통한 예술행위로 간주하면 좀 더 현대적 감각과 용어로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기의 흐름을 표현한 회화와 조각 작품을 감상하며 전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니 한쪽에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창작 과정과 작품 세계를 해설하는 김 작가의 인터뷰를 들으니 궁금증이 하나둘 풀린다. 조각 기둥에 새겨진 꿈틀대는 형상은 손가락으로 후벼 파낸 것이다. 기공체조를 하며 작품에 몰두하는 작가의 몸짓에 생기가 감돈다. ■ 시대를 증언하고 해석하는 예술가의 상상력 제4전시장과 제2전시장에서는 영은 창작스튜디오 12기 입주작가 정영한 개인전 ‘발견된 신화’와 진민욱 개인전 ‘펼쳐지고 깊어지는’이 4월23일까지 열린다. 실험적인 전시공간인 지하의 제4전시장부터 안내한다. 중앙대 미술학부 교수 정영한 작가의 작품이 어쩐지 친숙하다.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쇼셜미디어, 잡지, 등 대중매체에서 떠도는 이미지 혹은 관습으로 자리 잡은 신화적 이미지를 차용하고 재구성하여 작품의 모티브로 활용했기 때문이죠.” 팝아트의 거장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나 파블로 피카소의 ‘황소’를 등장시켜 관객들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작가의 상상력이 재미있다. 전시실 안쪽에서 만나는 브릴로박스는 또 무엇일까. “일반적인 팝아트의 차용기법과는 맥락을 달리하여 박스 안에 작품을 숨겨둠으로써 ‘해석의 절단’을 맞이한 미술사의 이면을 지적하고 작품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고민이 담긴 작업 노트를 살펴본다.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이란 시대와 이미지에 대한 거대 담론을 탐구한 끝에서야 발견한 어떠한 커다란 상자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참신한 메시지와 이미지를 꺼내 보여주는 것과 같다. ...나의 작업은 나의 꿈, 누군가의 즐거움, 그렇게 우리 모두의 삶에 감각적 질문을 던지는 ‘그림’이 될 것이다.” 2층 제2전시장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젊은 한국화가 진민욱의 개인전 ‘펼쳐지고 깊어지는’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사물을 세밀히 관찰하여 비단으로 된 화폭에 옮긴 것이다. 활짝 핀 매화, 수선화, 가을에야 볼 수 있는 석류가 있다. 새와 애벌레와 나비도 있다. 얼핏 보면 정물화인데, 사계절의 풍경이 담겨 있다. 사각의 고정된 틀을 부수고 윗부분이 산모양이거나 병풍처럼 포개진 화폭에 펼쳐놓은 풍경이 재미있다. “보시는 것처럼 여러 시점에서 그려진 자연 속 오브제들이 긴밀하게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진민욱 작가의 또 다른 영감의 원천은 ‘산책’이다. 산속의 나뭇잎이나 길가에 놓인 화분, 말라 비틀어진 나뭇가지에 이르기까지 곳곳을 걸으며 발견하는 일상의 자연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을 관람객에게 전달하고 있다. 새로운 형식을 편안하게 전달하는 작가의 재주가 놀랍다. ■ 새봄 나들이 유혹하는 미술관 국내외 작가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영은창작스튜디오’는 오래전부터 주목을 받았다.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창작기능을 활성화하는 공간답게 작가와 연구자가 생활하면서 작업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평면작업실과 입체작업실, 생활공간은 물론 해외미술계와 교류할 수 있는 자료정보센터와 도예공방과 유리공방까지 갖추고 있다. 작가들에게 최적의 창작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때때로 이곳을 개방하여 지역 주민들이 창작체험과 미술문화 교육을 받는 곳으로 쓰고 있다. 화사한 꽃들과 연둣빛 새싹이 눈부신 영은미술관에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하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민중들의 함성이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던 1919년 3월 하순, 김포에서도 만세운동의 뜨거운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3월22일 월곶면과 검단면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3월29일까지 8일간 동안 양촌, 고촌, 하성 등지에서 약 15회에 걸쳐 이어졌다. 만세운동에 참가했던 1만4천여명의 주민들 가운데서 120여명이 일제의 총검에 부상을 당했고, 200여명이 체포됐다. 미주지역에서 발행한 ‘신한민보’는 3월23일 김포 지역의 만세시위운동에 대해 ‘1만여명의 대관중’이라 표현하고 있다. 참여 인원으로 따지면 경기도내에서 두 번째이다. 그럼에도 김포지역의 만세운동은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김포시민들의 노력과 열망으로 2013년, 김포시 양촌읍 양곡2로 30번길 46에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 독립만세의 불길, 33세 여성이 불을 지피다 김포에서 이처럼 대규모의 만세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무엇일까.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1914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는데, 이때 김포, 통진, 양천군을 김포군으로 통합하고 경찰서와 주재소를 집중 설치한다. 양동면에 일본인이 농림회사를 설립한 1914년 5월부터 김포지역에도 일본 자본과 일본인들의 진출이 본격화된다. 농토를 잠식한 일본인 지주들 아래에서 높은 소작료를 내야했던 조선인 소작농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1919년 3월22일 오후 2시, 군하리 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들 사이로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진다. 이날의 만세운동 중심에는 이살눔(1886~1948, 본명 이경덕) 애국지사가 있다. 33세의 나이로 이화학당에 다니던 늦깎이 학생 이살눔은 독립선언서 수십 장을 옷 속에 감춘 채 월곶면에 돌아와 마을의 유지인 성태영, 박용희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이살눔은 군하리 장터에 모인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통진향교와 면사무소, 주재소 등으로 돌아다니며 만세를 불렀다. 장터를 누비며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한 그녀의 뜨거운 외침은 김포 만세운동에 불을 지폈다. 이살눔은 ‘김포의 잔다르크, 김포의 유관순’이라 불린다. 3월 22일 군하리 장터 시위에 참여했던 최우석(1892~1942)은 28일 당인표의 집에서 동지들과 다음 계획을 논의한다. 3월29일 11시 무렵 읍내 향교에 4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들자 최우석은 이들을 지휘하여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12시 무렵에는 월곶면 조강리와 갈산리 마을 주민 수백 명이 갈산리에 모여 태극기를 들고 임용우, 윤영규 등이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갈산리 만세운동을 주도한 명덕학교 교사 임용우(1884~1919)는 체포를 피해 학교가 있는 부천군 덕적면에 돌아가 다시 만세운동을 벌인다. 4월9일 덕적도 진리 바닷가에서 열린 명덕학교 운동회에서 학생과 학부형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이때 체포된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 1919년 3월23일 오라니장터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오라니장은 김포에서 가장 큰 장이었습니다. 일제의 임시토지조사국 조사에 따르면, 오라니장의 규모는 김포읍장과 군하리장을 합친 것의 두 배쯤이 되었다고 해요. 오라니장은 1770년에 펴낸 ‘동국문헌비고’에 장소와 개시일이 기록되어 있을 만큼 유명한 장입니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니 왜 이곳에 독립운동기념관이 세워졌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1919년 3월23일에 벌인 오라니장터에서의 만세운동은 두 조직에 의해 각각 전개되었다. 오후 2시에 벌인 만세운동은 박충서 박승각 박승만 안성환 등이 주도하였고, 오후 4시에 시작된 만세운동은 정인섭, 임철모 등이 주도한 것이다. 같은 날 2시간을 사이로 두 개의 조직이 만세운동을 벌였던 것은 물론 일제의 감시와 방해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박충서(1898~1934)는 어떤 청년이었을까? 양촌면 누산리 출신인 박충서의 신상을 기록한 감시카드에 부착된 흑백사진을 보며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수재들이 즐비한 경성제1고등보통학교(경기고)에 다녔으니 박충서는 집안과 이웃의 기대와 신망을 받았던 똑똑하고 반듯한 청년이었을 것이다. 만세운동의 현장에서 체포된 박충서는 경찰서에 끌려가 흠씬 두드려 맞으며 만세운동의 준비부터 진행과정을 빠짐없이 진술한 후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사진사 앞에 간신히 앉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박충서의 모습은 의젓하고 당당하다. ‘불령선인’을 철저히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해 상반신 정면과 측면을 촬영한 사진을 나란히 붙였다. 이름을 쓴 커다란 흰 천을 단 상의는 모진 고문을 당해 살이 터지고 시퍼렇게 멍이 든 몸을 가려주었을 것이다. 박충서는 자신이 작성한 격문 수십 통을 외가 친척인 오인환, 정억만 등을 통해 양촌면 주민들에게 배포하도록 한다. 3월23일 오후 2시, 박충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오라리장터에서 태극기를 펼쳐들고 군중을 향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주도한다. 얼마 후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현장에서 박충서를 비롯한 6명을 시위주동자로 체포한다. 박충서는 징역 2년, 박승각 박승만 정억만은 징역 1년, 안성환 전태순 오인환은 징역 8월을 선고받는다. 한편, 오후 4시의 만세운동은 정인섭 임철모 등이 주도한다. 23일 전날에 만들었던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장터로 향한 정인섭(1986~1944)은 군중들이 모인 장터에서 태극기를 펼쳐들고 시위대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했고, 임철모(1883~1919)는 태극기를 휘두르며 시위대를 이끌었다. 군중을 이끌고 감시와 탄압, 수탈의 말단 기관인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향하던 이들은 연락을 받고 출동한 용산 헌병대에게 태극기를 빼앗기고 체포된다. 정인섭은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았고, 임철모는 징역 8월을 선고 받고 옥중에서도 수인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모진 고문을 받고 5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3월 24일부터 25일까지 이어진 고촌면의 만세운동은 산곡리 출신의 김정의(1899~1963)가 주도한다. 중동학교 학생 김정의는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를 피해 고향에 돌아와 김정국, 윤재영, 이흥돌 등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며 만세운동을 결의한다. 3월 24일 인근 주민들과 신곡리 뒷산에 모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눠주고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다음날에도 김남산, 이흥돌 등과 함께 태극기를 장대에 높이 달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3·1독립정신’ 김포를 빛낸 독립운동가들의 얼굴과 행적을 새긴 동판이 이어진다. 그들 중에서 안경을 낀 여성 한 분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로 김포에 만세운동의 불길을 지핀 독립운동가 이살눔 선생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한다. 세상을 떠난 지 44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오라니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임철모 선생은 체포된 그해 옥중에서 순국하지만, 72년이 지난 1991년에야 애국장에 서훈된다. 동판에 새겨진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생전에 제대로 보상과 대접을 받지 못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공적이 명백하게 확인되지만 일제가 남긴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포상에서 빠진 분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은 양촌청소년문화의집(김포시청소년육성재단 대표이사 심상연)과 한 공간에 둥지를 틀어 지역 청소년들이 자연스럽게 김포시의 빛나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배우고 있다. 현재 기념관에서는 ‘신문이 그려낸 김포’라는 주제로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특별전을 기획한 김민주 학예연구사의 안내를 받아 누렇게 변색된 오래된 신문 속에서 김포의 숨겨진 역사를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나라 안팎이 소란하고 어지러운 삼월이다. 104년 전 겨레를 하나로 뭉치게 했던 3·1정신의 숭고한 뜻을 되새겨야 할 때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 수원박물관

104년 전 3월, 온 겨레가 한마음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그날의 함성은 세계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의 의식까지 변화시켰다. 폭력에 굴종하던 식민지 백성에서 독립을 갈망하는 자유민으로 거듭난 것이다. 3·1운동은 남성중심의 제도와 여성을 차별하는 문화에 갇혀있던 우리의 여성들이 역사의 주인으로 나선 운동이기도 하다. 백성들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하고 외세의 간섭에 맞서 싸웠던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 엄청난 변화가 사회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성들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았다. 1919년 ‘기미년 만세운동’은 한국 여성들이 비로소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위대한 사건이다. ■ 나라를 찾기 위해 떨쳐 일어선 여성들 만세운동이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확산되고 두 달 넘게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만세운동의 현장을 기록한 사진을 통해서도 수많은 여성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 3·1운동 당시 여성들의 활약을 살펴보기 위해 수원특례시 영통구 이의동에 위치한 수원박물관(관장 황종서)을 찾았다. 경기도는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지역이다. 화성의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안성3·1운동기념관,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은 이를 말해준다. 독립된 기념관은 아니지만 수원박물관은 3·1운동에 관한 관련 유물이 풍부하고 연구도 활발한 박물관이다. 수원박물관은 지난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수원여성의 독립운동’이라는 특별전을 열었다. 박물관에서 만나는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수원 기생 만세운동의 주역 김향화와 구국의 선봉에 나선 학생 이선경은 민족대표 48인의 한 분인 김세환 선생, 신흥무관학교 분교 양성중학교의 교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한 임면수 선생과 함께 수원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다. ■ 수원 기생들, 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 한지에 가는 세로로 33줄로 쓴 1천350자 분량의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특히 주목되는 유물이다. 이름에 나타나듯이 조선 여성들의 독립선언문이기 때문이다. 김인종을 비롯한 8명의 여성 이름이 적혀진 이 선언서는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 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동포, 동포시여 대한독립만세”라는 호소로 끝을 맺는데, 작성일자가 단기 4252년(1919) 2월이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미 여성들이 독립선언의 대열에 동참한 증거물이다. 수원은 정조의 개혁정신과 효심이 깃든 화성을 품고 있는 수원은 예향(藝鄕)이기도 하다. 수원예기조합이 존재했던 사실을 통해 수원의 경제적 풍요와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수원에는 기생 신분으로 일제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불렀던 의기(義妓) 김향화가 있다. “본디 경성 성장으로, 화류간의 꽃이 되어, 삼오 청춘 지냈구나, 가자가자 구경 가자, 수원산천 구경 가자, 수원이라 하는 곳도, 풍류기관 설립하여, 기생조합 이름 쫓네, 일로부터 김행화도, 그 곳 꽃이 되었세라, 검무 승무 정재춤과,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치기, 막힐 것이 바이없고, 갸름한 듯 그 얼굴에, 죽은깨가 운치 있고, 탁성이듯 그 목청은, 애원성이 구슬프며, 맵시동동 중등 키요, 성질 순화 귀엽더라.” 기생 김향화의 얼굴이 단아하게 느껴진다. 왜장을 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한 논개를 ‘의기’로 부르듯이 김향화의 이름 앞에도 자연스럽게 ‘의기’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알려져 있듯이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된 1910년부터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10년은 일제는 일본도를 차고 말을 탄 헌병을 앞세운 무단정치로 일관했다. 만세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광분하던 때에 일경들의 가득한 수원경찰서 앞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여성이 기생 김향화이다. 한복을 입고 앉아 있는 김향화의 얼굴이 단아하다. 화성 행궁에서 가까운 남수리에 살았던 김향화는 1919년 3월 29일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김향화가 수감되었던 서대문형무소 여성 옥사 8호 감방에는 개성 일대에서 3·1운동을 이끌었던 권애라, 이윤희, 신관빈, 파주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임명애, 그리고 천안의 유관순이 함께 수감되어 있었다. 김향화는 함께 투옥된 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부르며 옥살이의 고달픔을 달래주었다. 1920년 3월1일 8호 감방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은 1주년을 맞아 옥중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안타깝게도 김향화가 출옥한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그의 후손도 확인되지 않아 수원박물관에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하여 2009년에 비로소 대통령표창을 받고 독립운동가로 인정됐다. ■ “석방이 되도 독립을 위해 싸우겠소!”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데 열정을 쏟은 이동근 학예연구사는 수원의 유관순, 이선경을 알리는 일에도 열심이다. “수원에도 19살의 나이에 대한독립을 꿈꾸다 순국한 열사가 있습니다. 이선경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이름입니다. 이선경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갖은 고초를 치르다 순국했습니다.” 이선경의 활약도 유관순 못지않았다. 만세운동을 다른 지역으로 확산시키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후 비밀조직운동을 벌이며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지원해 주는 간호사가 되려고 준비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아 마침내 19세의 나이에 목숨을 잃은 여성투사 이선경이다. 이선경은 박선태 등 선배들과 더불어 비밀문서를 치마 속이나 가슴에 숨겨 대전, 청주, 안성 등지로 여러 차례에 걸쳐 전달한다. 만세운동의 행동대로 활약했던 이선경은 1920년 6월 임순남, 최문순과 함께 비밀조직인 구국민단에 참여한다. 구국민단은 ‘첫째, 한일합방에 반대하여 조선을 일본제국 통치하에서 이탈케 하여 독립국가를 조직할 것 둘째,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되어 있는 사람의 유족을 구조할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1920년 7월까지 매주 금요일마다 수원 읍내에 있는 삼일학교(현 매향여고)에서 만나 독립신문의 배포 등을 논의한다. 이선경을 비롯한 세 명의 여학생은 이때 상해 임시정부 적십자회에 들어가 간호원이 되어 후일 독립전쟁을 벌일 때 역할을 다하기로 결의한다. 삼엄한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활동하던 1920년 8월 이선경은 박선태, 이득수, 임순남 등과 함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지만 “석방이 되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소.”라고 당차게 주장한다. 1921년 4월, 박선태와 이득수는 징역 2년을 언도 받고, 이선경을 비롯한 여학생은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언도 받았다. 구류 8개월 만에 석방되었으나 이선경은 일제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석방된 지 9일 만에 열아홉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하였다. 이선경은 수원박물관의 노력으로 2012년 3월 건국훈장 애국장이 서훈되었다. ■ 독립운동가들이 못다 이룬 꿈을 꾸자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운동에 참여한 인원이 204만6천938명이다. 이 가운데 사망자가 7천508명, 부상자 1만5천849명, 수감자가 4만6천306명이나 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국내외에서의 독립운동으로 서훈을 받은 분들은 겨우 1만8천명이다. 이중에서 여성은 400명이 되지 않는다. 김향화, 정부와 관계기관이 좀 더 적극 나서서 독립운동에 헌신했음에도 평가를 받지 못하는 숨겨진 유공자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104년 전 3월, 횃불이 오르고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던 팔달산과 방화수류정, 화성행궁을 둘러보며 다시 김향화와 이선경을 비롯한 수원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수원에서 처음 만세를 부른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김향화가 동료들과 만세를 부른 화성행궁 앞에도 3·1운동을 알리는 작은 기념물이라도 세우면 좋을 것 같다. 독립운동가들의 피로 광복을 맞이했으나 여전히 분단된 현실에 놓여있다. 독립운동가들이 못다 이룬 미완의 꿈은 통일된 조국이다. 꽃샘추위가 매섭지만 봄이 달려오고 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 양평 ‘몽양기념관’

“...한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조선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1919년 11월27일 몽양 여운형은 도쿄 제국호텔에 모인 일본의 수뇌부와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열변을 토했다. 3·1만세운동에 충격을 받은 일본 정부가 파리강화회의에 제출된 독립청원서를 보낸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을 회유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일본 정부가 여운형을 일본에 초청했을 때 많은 동지들이 말렸으나 몽양의 생각은 달랐다. “범의 굴에 가야 범을 잡을 게 아닌가. 설사 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대도 조선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천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네.” 적의 심장부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당당하게 밝힌 몽양의 연설은 일본 정가를 혼란에 빠트렸다. 결국 이 일을 기획한 내각이 책임을 지고 총사퇴한다. ■ 3·1운동의 기원을 찾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이라는 헌법 전문에서 보듯 3·1운동은 대한민국을 탄생시켰다. 그렇다면 3·1운동은 과연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양평군 양서면에 자리 잡은 몽양기념관(관장 김덕현)은 양평군이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몽양 여운형(1886~1947)의 생가 터에 선생의 삶과 정신을 알리고자 2011년 11월27일 개관한 군립기념관이다. 경의중앙선을 타고 양수역을 지나면 신원역이다. 역 광장에 몽양 여운형의 친필 ‘혈농어수(血濃於水: 피는 물보다 진하다)’가 새겨져 있다. 몽양기념관으로 향하는 ‘양평 물소리길’가에 ‘묘골애오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묘골은 몽양이 태어난 마을 이름이고 애오와는 ‘사랑하는 나의 집’이란 뜻이다. 몽양의 국제적 교류를 조각과 지도로 보여주는 공원을 지나 몽양의 말을 바위에 새긴 ‘어록길’이 끝나는 지점에 기념관이 있다. “몽양기념관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터에 세운 것입니다. 선생의 호 ‘몽양’은 어머니가 임신하면서 태양을 보았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지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몽양 선생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개혁가, 혁명가의 기상을 타고 났다고 기대를 모았지요. 몽양은 신분제 타파의 계몽개혁가이자 신학문 신문명의 선도자였어요. 그리고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 세계를 다니며 독립운동을 조직하고 세계적 지도자와 교류한 외교가이자 혁명가, 정치가였습니다.” 김덕현 관장의 소개처럼 몽양은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매력적인 인물이다. 상설전시관은 몽양이 일생동안 얼마나 정력적으로 활동했는지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강지현 학예팀장의 안내로 전시관을 들어선다. 자연광이 들어오는 환한 공간이다. ‘거침없는 웅변가’와 ‘한국 체육의 초석을 놓은 스포츠맨’을 비롯해 ‘자주 통일국가를 설계한 민족주의자’까지 13개의 천에 몽양의 활동을 알리는 글과 사진을 새겨져 있어 몽양의 풍모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적의 심장부 도쿄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외친 몽양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은 어땠을까? 1886년 양평군 신원면 묘골에서 태어난 여운형이 16세까지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며 동학을 수학한다. 묘골 고향집을 배경으로 서 있는 흑백사진 속 몽양의 얼굴이 편안하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인내천 사상은 청년 여운형이 실천한 노비해방과 평등사상의 기초가 된다. 수운 최제우의 말씀을 한글로 기록한 ‘용담유사’는 몽양 사상의 배경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이처럼 상설전시관에는 몽양 여운형의 생애와 활동을 알려주는 유물과 자료들이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총탄이 꿰뚫은 피 묻은 양복과 셔츠가 관람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1947년 7월19일 권총테러로 피격될 당시에 입고 있었던 상의 3점(혈의)은 국가등록문화재 제608호로 등록된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인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장에서 사용되었던 만장 5점도 전시되어 있는데, 몽양이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에게 존경 받았는지를 알려주는 유물이다. 만장은 장례가 끝나면 불에 태워버리는 것이 상례였지만, 몽양의 유족들은 이런 물건들까지 고이 간직했다. 아우 여운홍을 비롯한 가족들의 지극한 정성이 몽양의 정신을 더욱 빛나게 한다. ■ 신한청년당과 몽양 1918년 8월, 상하이에서 여운형이 장덕수, 김철, 선우혁, 조용은, 한진교 등의 동지들과 조직한 신한청년당이 만세운동으로 연결되는 근거는 무엇일까? 미국이 특사 크레인이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파리평화회담에 대하여 미국의 입장을 밝히는 자리를 참석한 여운형과 그의 동지들은 “전후의 식민지 처리는 피압박민족의 의사와 민족자결의 원칙을 존중하여 처리한다”는 미국의 입장을 듣고 이 기회를 활용하기로 결의한다. 11월28일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의 이름으로 ‘한국독립에 관한 진정서’ 2통을 작성하여 미국 대통령 윌슨과 파리평화회의 의장에게 전달해 줄 것을 크레인에게 의뢰한 문서를 살펴보며 그날의 열정을 확인한다. 1월 베이징에 있던 김규식을 상하이로 불러 신한청년단 대표 겸 한국민족대표로 파리평화회의에 파견하였다.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했던 김규식과 여운형의 아우 여운홍의 모습을 당시에 촬영한 한 장의 사진을 통해 확인한다. 국내로 선우혁(평양), 김철(경성), 김순애(부산, 대구)가 파견되고, 장덕수와 조용은(조소앙)은 일본으로, 여운형은 만주와 러시아로 출발한 사실을 그림으로 전달하여 이해를 돕는다. 3·1운동에 앞서 재일본조선유학생학우회가 중심이 되어 일본 도쿄에서 발표된 ‘2·8독립선언문’을 살펴본다. 신한청년당의 활약상을 잘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신한청년당의 동지들이 각지로 흩어져 동포들에게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보여주는 집단행동을 역설하고 조직한 것이다. 이처럼 기미년 만세운동이 벌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 신한청년당이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에 여운형이 있다. 광복 직후에 이루어진 첫 여론조사에서 여운형은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와 ‘생존 인물 중 최고의 혁명가’에서 최고의 득표를 얻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에야 몽양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마침내 국가가 몽양의 진면목을 보증한 것이다. ■ 대한민국의 미래를 묻다 상설전시관은 몽양의 삶을 시대와 주제에 따라 전시하고 있어 시간을 두고 둘러보면 몽양의 위대한 생애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몽양기념관 마당에 광동학교 터라 새겨진 비석이 있다. 청년 여운형은 1907년 클라크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고향에 예배당을 겸한 광동학교를 세워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장로는 당시 광동학교에서 여운형에게 애국사상을 배운 학생 중 한 명이다. 전시관 위쪽에는 몽양의 생가를 정성스럽게 복원해 놓았다. 방 안에서 면도하는 몽양의 밀랍인형에서 좌우합작,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진력하던 시절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생가는 시대와 공간을 넘어선 몽양 여운형 선생의 포용적이고 낙천적이며 열정적이었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다. 몽양기념관에서는 매년 5월25일 몽양탄신일을 기념한 특별기획전시와 11월27일 개관일을 기념한 몽양학술심포지엄, 기획전시를 개최하고 있다. “곧 문을 열게 될 ‘몽양교육자료관’은 작은도서관과 교육실, 강당을 문화복합공간으로 지역민들의 문화 사랑방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기념관 관계자는 지난 2월에 문을 연 디지털플랫폼 ‘몽양여운형아카이브’는 최초의 독립운동 인물 아카이브란 사실과 국가등록문화재 제608호인 ‘혈의’에 이어 장례용품 만장 117점을 국가등록문화재 등록 신청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곧 개관할 몽양기념관에서 몽양역사예술교실과 명사초청강연, 융합문화예술프로그램, 뮤지컬 공연과 영화 상연 등 다양한 사업이 펼쳐질 것이다. 갈등과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대한민국의 산적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몽양이 씩씩하게 걸어갔던 길에 그 해답이 들어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40. 동두천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

어린이들의 밝고 환한 얼굴은 쳐다만 봐도 즐겁다. 천국은 어린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가득한 곳이 아닐까. 동두천시 소요산 자락에 자리 잡은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관장 김종길)은 우리나라의 희망인 어린이들이 꿈을 찾고 재능을 키우는 놀이터이자 배움터다. 어린이박물관을 품은 소요산은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와 그의 아내이자 설총의 어머니인 요석공주의 전설이 깃든 아름다운 산으로 사계절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2016년 5월에 개관한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은 동두천시가 운영하다가 2019년에 경기도에 이관, 새롭게 개편하여 재개관한 2020년부터 경기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도립박물관이다.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은 의정부, 양주, 포천, 연천, 파주는 물론 서울 북부와 강원도에서도 찾을 정도로 인기 많다. ■ 어린이의 꿈과 상상을 키우는 자연 놀이 숲 상설전시관의 주제가 ‘숲에서 꿈꾸는 어린이’다. 자연 속에서 어린이들이 몸으로 체험하면서 꿈을 키우도록 설계한 상설전시관은 과거의 숲, 현재의 숲, 미래의 숲으로 이어진다. 1층에 공룡존·클라이머존·영유아존이 있다. 공룡존의 주제는 꼬마 브라키오와 함께하는 과거의 공룡 숲 탐험이다. 안전 헬멧을 쓰고 지도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긴 목과 꼬리를 가진 초식 공룡 브라키오 노래를 따라 부르며 숲의 입구에 도착한다. 언덕을 오르고 기다란 동굴을 통과하는 모험이 시작된다. 브라키오의 몸속으로 들어가 커다란 위에서 소화를 돕고, 공룡 똥 속 작은 씨앗이 자란 커다란 나무에 올라 브라키오와 이야기한다. 둥글게 깎은 편백 나뭇조각을 모래처럼 깔아놓은 바닥에 앉아 장난감 삽으로 바닥을 파자 공룡 화석이 나온다. 공룡의 친구가 되어 재미있게 놀다 보면 쉼 없이 되풀이되는 생명의 신비로움과 소중함을 절로 깨닫게 된다. ‘바다 놀이터’는 36개월 미만 영유아들의 공간이다. 보호자도 함께 들어가 아이들과 함께 해변, 얕은 바다, 깊은 바다로 이어지는 전시 공간에서 미디어 바다 체험, 몽돌 쌓기, 범고래 모습, 암초 터널, 해초 붙이기, 물렁 바닷속 땅, 대왕문어 다리 당겨보기, 바다생물의 소리 듣기 등 오감으로 전시를 체험하며 바닷속 풍경과 다양한 바다생물을 만난다. 가상의 바닷가 해변의 생물들이 관람객을 피해 움직이는 ‘미디어 바다’가 신기하다. 놀이기구 곳곳에 적용된 첨단의 과학기술이 어린이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한다. ■ 북부의 별, 아이들의 가슴에 품은 우주 2층에는 숲생태·계곡물·오감숲·교육존이 연결돼 있다. 숲생태존의 주제는 ‘깊은 숲 지혜의 나무를 찾아서-커다란 개미굴과 함께 있는 현재의 숲 탐험’이다. 숲속 놀이터에서 타는 미끄럼틀은 신난다. 미끄럼틀 아래 있는 개미집 속으로 떠나는 탐험은 더욱 즐겁다. 거미줄 모양이 그려진 ‘스파이더맨 방방이’에서 뛰놀고 새와 다람쥐 같은 숲속 친구들을 만난다. 계곡물존은 졸졸 흐르는 계곡물에서 놀면서 만나는 과학과 비밀의 연못 공간이다. 숲생태존에서 시작된 물길이 흘러서 계곡물이 되고, 계곡물은 커다란 비밀 연못을 만든다. 공을 굴려 솟아오르는 분수에 올리면 공이 날아가고, 손잡이를 힘차게 돌리면 물 소용돌이가 만들어진다. 연잎을 밟자 물고기들이 몰려나온다. 꿀벌집 미로를 통과하는 오감숲존은 박물관의 오감 캐릭터(킁킁이, 더듬이, 냠냠이, 쫑긋이, 궁금이)들과 함께 숲속의 감각을 일깨우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다섯 가지 감각 ‘오감이’는 숲을 풍요롭게 만든다. 오감이들이 숨어 버린 비밀의 숲의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 숲의 속삭이는 이야기 소리에 귀 기울인다. 어두워진 숲에서 야행성 생물들의 특별한 능력을 알아보고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살펴본다. 미디어실에서 새와 곤충들이 어울려 사는 생생하고 활기찬 숲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숲속 계곡을 따라 내려오며 물고기들과 놀면서 숲은 수많은 생명을 품은 우리의 소중한 친구임을 배운다. 숲과 계곡물, 오감숲을 지나 자연을 주제로 한 미디어 교육실인 ‘교육존’으로 이동하다 보면 어느덧 어린이들은 자연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이제 3층에 조성된 옥상정원을 탐방할 차례다. 옥상정원을 거닐며 박물관 마당과 이어진 소요산 자락을 굽어보면 자연이 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 어린이가 주인공... 함께 만들어나가는 박물관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 구성원들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도민과 어린이들이 박물관의 ‘자연 놀이 숲’을 체험하고 꿈을 키울 수 있을까 궁리한다. “우리 박물관은 어린이들의 꿈, 그 아름다운 작은 꿈들이 모여서 만들어 내는 희망찬 미래를 생각하며 그것을 상징하는 별의 모양으로 설계했어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어린이박물관은 땅에 박힌 별입니다. 소요산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자리 잡은 별들의 상상 놀이터인 어린이박물관은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박물관입니다” 박물관 관계자의 소개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건물의 바깥을 반짝이는 별들과 은하수를 펼친 듯한 율동성 있는 입면으로 계획한 것도 관람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바깥 공간과 1층과 2층의 상설전시 공간, 그리고 옥상정원으로 이어지는 동선은 숲속을 흐르는 시냇물처럼 부드럽고 유연하다. LED조명을 활용한 야간 경관이 무척 아름다운데,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우주로까지 키우면 좋겠다는 바람이 담겨 있다고 한다. “지적 호기심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박물관, 지역과 특화된 가족 친화 박물관, 지역 사회와 지구 환경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 박물관의 운영 목표입니다” 어린이박물관은 어린 관람객들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던진다.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을 스스로 찾아가도록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북부어린이박물관은 2022년 봄부터 1기 자문단을 운영하고 있다. 김종길 관장이 부임하면서 꾸린 박물관 자문단은 무슨 일을 할까? “박물관에 관심과 열정을 가진 어린이와 가족을 선발하여 자문단을 꾸렸지요. 1기 자문단은 12명의 어린이와 12명의 가족 보호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의 기획부터 운영에 이르기까지 박물관 전 과정에 도움을 주는 전문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수행하지요.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박물관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꿈과 상상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도록 입체적으로 설계한 어린이박물관의 구조만큼이나 자문단의 구성과 운영 방식이 신선하다. ■ 아이들을 위한 학교 밖 미래학교 박물관 누리집에서 전시를 살짝 체험해 볼 수 있다. ‘웃음-빛’은 어린이날 선포 100주년을 맞이해 지난 3월에 실행한 ‘2022 웃는 내 얼굴 그리기’ 공모전 수상작을 전시한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어린이의 ‘코로나 우울’을 극복하기 위해 웃음을 통한 소통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연 공모전이다. 12가지 동물 중에서 마음에 드는 동물 캐릭터를 선택하여 마우스를 클릭하면 캐릭터가 클릭한 곳으로 걸어서 이동한다. 마우스를 움직여 공간 전체를 둘러보며 어린이 작품 45점을 감상할 수 있다. 본인 캐릭터와 닉네임을 설정해 다른 이용자들을 만나 채팅으로 소통하며 전시를 즐길 수도 있다. 11월부터 2023년 1월 말까지 자원 순환과 탄소 저감을 주제로 한 전시 ‘LETS GO! 깐따삐야 : 지구별 대모험’을 진행한다. 어린이들이 집과 학교, 동네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자원 활용법을 알려준다. 박물관은 어린이들에게 환경에 관한 관심과 바른 태도를 길러주기 위해 ‘오감이 환경 동화’ 시리즈를 발간했다. 어린이박물관 캐릭터 ‘오감이’가 안내자 역할을 하며 어린이들의 눈높이에서 환경문제를 쉽게 전달한다. 김종길 관장에게 박물관의 비전을 들어본다.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은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 밖 미래학교입니다.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적 예술적 자산은 그대로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 콘텐츠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 어린이박물관은 미래학교로서의 ‘박물관교육학’을 새로 정립하고자 합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9. 광주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은 광주시 퇴촌면 가새골에 자리를 잡고 있다. ‘성노예’로도 불리는 ‘위안부’ 관련 세계 최초의 박물관이다. 1998년 8월에 개관한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관장 선경석)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보금자리인 ‘나눔의 집’ 부설이다. 역사관을 관람하기 전 마당에서 할머니들에게 인사를 드린다.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나신 열다섯 분 할머니들의 흉상이다.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른 정복수 할머니를 비롯해 모두가 저고리를 입고 있다. 할머니들의 흉상 뒤로 소녀상이 서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소녀상은 의자에 앉은 모습이지만, 최초의 소녀상은 이처럼 서 있는 상이지요. 이 소녀상은 김순덕 할머니가 그린 ‘못다 핀 꽃’을 바탕으로 윤영석 작가가 형상화한 것입니다” 오정임 학예연구사의 설명을 들으며 소녀상과 흉상을 다시 살피며 기원한다. 이승에서 못다 핀 꽃들이지만 저승에서는 활짝 꽃 피우기를! ■ 광주에 세계 최초로 위안부 박물관을 세우다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아내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까, 역사관 입구가 좁다. 1991년 8월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증언하기 전까지 위안부의 존재는 역사의 저편에 밀려나 있었다. “여기 이곳, 잊을 수 없는 역사가 있습니다. ...여기 이곳 결코 쉽게는 아물지 않을 역사가 있습니다” 대동주택 곽정환 회장의 희사로 할머니들의 안식처 나눔의 집과 역사관이 이곳에 마련됐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역사관으로 들어선다. 제1전시관은 ‘역사의 장’이다. ‘일본군 위안부란 무엇인가?’, ‘시대 상황과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성립’, ‘어떤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관련 활동연혁’으로 구분해 위안부의 실상을 알려준다. 기다란 원통의 이름은 ‘타임터널’이다. 안을 들여다보니 할머니가 피해를 증언하는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다. 이름처럼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통로인 것이다. 오래 전에 완료되어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위안부의 역사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제2전시관 ‘기록의 장’에는 태평양전쟁 당시의 사진자료와 기록을 비롯한 몇 가지 특별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 낡은 약병과 시험관, 벌겋게 녹슨 총검과 휘어진 군도, 군인들이 위안부에게 돈 대신 줬던 군표 같은 유물들이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하고 있다. ‘1970년대 오키나와에서 밝혀진 위안부 피해자 배봉기’라는 패널이 주목된다. 충남 예산 출신의 배봉기 할머니(1914~1991)는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가장 먼저 증언한 분이다. 광복이 돼도 귀국하지 못하고 오키나와에 머물고 있던 그는 미군이 점령했던 오키나와를 일본에게 반환될 때 강제출국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성노예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1975년 지역신문에 이러한 사실이 보도되었으나 당시 조총련 관계자가 할머니를 보살폈기 때문에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 세계의 시민들과 연대해 진실을 밝히다 제3전시관 ‘체험의 장’은 전장에서 위안부의 생활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공간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현한 위안소 입구에 이용시간과 요금표가 붙어있다. 나무 침대와 세숫대야를 놓는 받침대가 놓여 있는 위안소 안은 몹시 좁고 삭막하다. 끌려간 소녀들은 이처럼 숨 막히는 공간에서 하루에 수십 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제4전시관 ‘고발의 장’에서 마주한 ‘끌려간 피해 여성들’과 ‘세계 각지의 피해 여성들’이란 패널은 중국, 필리핀, 타이완과 네덜란드 여성들까지 성노예로 동원했던 사실을 알려준다. 위안부 여성이 불룩한 배를 잡고 서 있는 흑백사진이 있다. 임신한 그 여성은 해방 후 북한에 살았던 박영심이다. “북한에서도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지원하고 있습니다. 북한도 일본을 상대로 위안부 문제를 꾸준하게 제기하고 있지요” 후원자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진 동판에서 유명인의 이름을 여럿 발견한다. 역사관 관계자가 들려주는 사연이 훈훈하다. “학생들이 가장 많이 후원했더군요. 학생들이 물건을 만들고 팔아 성금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어린 학생들이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 그림과 유품으로 전하는 이야기들 할머니들의 사진과 유품이 전시된 공간에 들어선다. 한쪽에는 영상을 볼 수 있는 기기가 줄지어 있다. “할머니들이 남기신 유품과 사진, 영상은 잊힌 역사가 아닌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역사입니다. 올바른 역사와 인권과 평화를 구현하고자 했던 피해자들의 평생의 염원을 담은 기록물이지요. 할머니들이 생존했을 때 기록한 영상도 볼 수 있습니다” 고인이 되신 할머니들이 생전에 활동한 순간을 기록한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한 맺힌 삶을 삶다’라는 글귀가 없어도 이 분들의 고단한 생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할머니들의 사진과 유품에는 숱한 사연들이 깃들어있다. 평생 절약하며 모은 돈을 가난한 학생에게 장학금으로 지급하고 이웃에게 기부한 김군자 할머니(1926~2017)의 유언이 묵직하다. “내 장례식비 500만원 빼고 다 필요한 사람에게 쓰소” 일본군에게 잡혀가는 처녀의 슬픔을 표현한 ‘끌려감’과 ‘못다 핀 꽃’ 같은 그림으로 성노예의 실상을 고발했던 김순덕 할머니(1921~2004)의 치마저고리와 하얀 버선은 수요집회를 알려주는 유품이다. 17세에 인천에 일하러 가다가 납치되어 중국 하이난 섬에서 6년 간 일본군 성노예로 피해를 입은 김옥주 할머니(1923~2000)는 자신과 같은 전쟁 희생자인 ‘라이 따이한’을 위해 써 달라며 2천만 원을 기부한다. 평생 힘들게 살았지만 모은 돈을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전달하고, 캄보디아에 우물을 만들어 기증했던 김화선 할머니(1928~2012)의 소망은 무엇일까? “나도 결혼해서 여자로 행복하게 살고 싶어” 친구들과 하동에 놀러갔다가 중국으로 끌려가 10년 간 성노예로 피해를 당했던 전남 광양 출신의 문명금 할머니(1917~2000)는 정부의 생계지원금 등 전 재산 4천3백만 원을 베트남 전쟁희생자를 위한 기금으로 기부해 ‘사죄와 평화 기념관 건립을 초석을 다졌다. 광주 나눔의 집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의 개관을 시작으로 부산, 서울, 대구에도 역사관이 설립되고 일본의 도쿄, 중국의 난징과 상하이, 대만의 타이페이 등에 일본군 위안부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한국에서 시작한 ‘수요집회’는 세계 각지로 번져나갔다. 오사카, 고베, 교토 등 일본의 여러 도시에서도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다. 소녀상도 미국과 독일에도 세워졌다. 위안부 문제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가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하는 까닭이다. ■ 대지의 여인처럼 굳세고 당당하게 자신들이 당한 아픔과 슬픔, 그리고 소망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할머니들의 그림은 강한 호소력이 있다. 2층 추모 공간에는 국내외 피해자 명단 250분과 150분의 사진과 피해자 할머니들의 핸드 프린팅과 풋 프린팅을 전시하고 있다.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던 영화 ‘귀향, 소녀들의 이야기’의 소품도 볼 수 있다. 제2역사관 뒤편 마당에 일제의 만행을 기억하고,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의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추모비에는 할머님들의 한이 담긴 생전에 강조하셨던 문구들이 새겨져 있다. 임옥상 작가의 조각 ‘대지의 여인’은 한국 여성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은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로 남겨 두어야한다”고 당부하셨던 김학순 할머니의 당부를 실천해왔다. 그러나 최근 나눔의 집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로 역사관은 한동안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잘못을 속히 바로 잡아야 한다. 역사관이 전쟁과 여성, 인권과 평화,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우뚝 서도록 마음을 모아야 한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8. 광주 ‘경기도자박물관’

평일인데도 곤지암도자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광주 곤지암도자공원은 ‘문화와 역사’, ‘놀이와 체험’, ‘자연과 예술’로 구성돼 한나절 즐겁게 보내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곤지암도자공원은 ‘문턱 없는 길’ 즉 보행도움을 받지 않고 장애인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도 자랑이다. 공원 중앙에 윗부분만 보면 청자 차병의 뚜껑 같은데 전체를 보면 챙이 넓은 모자 같은 독특한 모양의 흰색 건물이 경기도자박물관이다. 경기도자박물관(관장 강명호)은 한국도자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전문박물관이다. 박물관 주변에 전통작가공방과 전시장, 왕실 도자 판매관, 도자 체험교실, 곤지암열린마당 같은 여러 시설이 가마 모양의 돔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경기도자박물관을 개관할 때부터 일하고 있는 강명호 관장의 안내를 받으며 박물관 탐방에 나선다. “경기도자박물관은 도자기 축제를 위한 전시용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이라 전시 공간이 아주 넉넉합니다” 경기도자박물관은 건축가 김석철이 설계하고,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프레스코 1세대 작가 진영선이 협업한 작품이라고 한다. 현재 1층에는 ‘흑자: 익숙하고도 낯선, 오(烏)’라는 흥미로운 기획전 열리고 있다. 청자와 백자, 분청사기라는 이름은 알지만 흑자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검은 도자기는 이미 백자가 유행할 때부터 만들어졌으나 아주 소수에 그쳤기에 일반인들이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흑자는 흑자만의 특별한 매력을 가진 도자기이다. 흑자를 알리는 이번 기획전은 분명 기대 이상의 즐거움과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 ■ 아름다운 도자기로 배우는 우리 역사 경기도자박물관이 광주에 위치한 까닭은 무엇일까? “경기도 광주는 면적의 약 80%가 산지여서 도자기를 굽는데 필요한 땔감이 풍부한데다가 한강을 따라 서울과 가까워 1467년 조선왕조의 왕실그릇제작소인 사옹원 분원이 설치됐습니다. 광주는 조선시대 500년간 왕실용 도자기를 생산했던 고장이지요” 강 관장이 지은 ‘청소년을 위한 경기도자 이야기’를 보면, 도자기를 “흙으로 모양을 만들고 불에 구워서 새로운 성질의 물건으로 만든 것”이라 소개하고 있다. 광주는 흙과 물과 나무, 도공까지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고장이었다. 1층 도자문화실은 도자의 개념과 역사, 제작기법 등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공간이다. 다양한 전시물을 비롯해 영상과 모형으로 도자기를 쉽게 알려준다. 현미경도 설치하여 도자기의 표면과 속까지 살필 수 있도록 꼼꼼하게 배려한 점도 돋보인다. 그릇처럼 원형으로 이루어진 도자문화실을 차분히 둘러보면 도자기는 과학기술의 집적임을 확인하게 된다. 1250도에서 1300도의 고온에 구워야하는 백자는 16세기까지 명나라와 조선만이 간직한 첨단의 기술이었다. 도자기에 대한 기초 지식을 가져야 전시 유물과 제대로, 새롭게 만날 수 있다. 계단으로 2층으로 이동하다가 천장을 올려다보니 벽화가 나타난다. 한국 프레스코 1세대 작가 진영선 교수의 작품이다. 도자기를 빚는 도공의 손이 마치 천지를 창조하는 신의 손처럼 거룩하게 느껴진다. 상설전시실은 한국 도자기의 멋과 아름다움이 가득한 공간이다. “이것은 찻잔으로 짐작되는 ‘백자양각 연판문 잔’입니다. 고려청자의 탄생과 발전은 한국 차 문화와 깊이 관련되어 있지요.” 한국에서 차 문화가 가장 발전한 시대가 고려라는 오래된 사실을 부끄럽게도 이제야 깨닫는다. 고려시대에도 백자가 존재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도자기와 차의 만남은 행복한 결과를 낳았다. 청아한 빛깔을 창조한 고려청자에서 선비들의 정신을 담은 조선백자로 넘어가는 과정에 나타난 분청사기도 매우 아름답다. 시원시원한 문양과 따스한 질감을 가진 분청사기에서 한국인의 멋과 여유를 발견한다. ■ 경기도 광주, 조선백자의 고장이 되다 “1467년, 조선 조정이 광주에 국영백자가마인 사옹원 분원을 설치하면서 광주는 조선 백자의 고장으로 명성을 얻게 됩니다” 맑고 깨끗한 빛깔과 단아한 모양의 ‘백자 음각大명 접시’는 초보자의 눈에도 명품으로 보인다. 그 옆에 놓인 백자의 이름은 ‘백자음각 현(玄)명발’이다. “광주 관요에서 제작된 양질의 백자 굽 안에 ‘천자문’의 순서대로 ‘천, 지, 현, 황’을 음각으로 새긴 것입니다” 역시 ‘분원’에서 만들어낸 백자답게 모양과 빛깔이 빼어나다. 도자기기 표면에 그려진 그림에도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다. 강 관장은 ‘백자철화 매죽문 편병’을 주목한다. 자세히 보니 깨진 것을 이어 붙인 자국이 선명하다. 그럼에도 이 유물을 특히 주목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이 편병은 특별한 사연을 담고 있지요. 같은 작품이 두 점 더 있습니다.” 온전한 작품 두 점이 있기 때문에 이 유물에 담긴 이야기와 가치가 살아난 것이란다. 유물을 소개하는 글을 보니 제작년도를 ‘1640~1648년’이라 표기한 것이 눈에 띈다. “광주의 관요는 대략 10년마다 자리를 이동했습니다. 10년이면 주변의 땔나무가 떨어져 옮길 수밖에 없었지요. 분원 도자기에는 간지가 적혀 있어 년도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푸른 빛깔을 내는 철화는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아주 비싼 재료였다. 수입품이었기에 고급 제품에만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도자기에 철화로 그려진 그림이 예사 솜씨가 아니다. 도화서 화원을 분원에 파견하여 그림을 그리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달항아리도 조선인의 여유로운 마음을 닮았다. 완벽한 원형보다 약간 균형이 어그러진 것이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용은 왕을 상징하는 상상의 짐승이다. 백자에 그려진 용의 발가락 개수가 다섯인지 넷인지를 살펴본다. 다섯은 황제, 넷은 왕이 사용한다는 규정 때문이다. 왕만이 사용했던 용 그림도 세월이 흘러 조선후기가 되면 민간에서도 사용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백자를 비교하며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문화도 왕실에서 양반을 거쳐 평민 속으로 스며들었던 것이다. 음식을 담는 작은 백자접시 뒷면에 단정한 한글 서체로 씌어 있다. 조선의 도공들도 한글을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도자기에 새겨진 길상문도 사연을 알고 보면 더욱 재미있다. “목숨 수(壽)자와 십장생과 복숭아는 무병장수를, 포도와 석류와 물고기는 다산과 풍요를, 모란과 박쥐는 부귀와 다복을, 잉어와 매미와 두꺼비와 매난국죽 사군자는 학업과 출세를, 용과 호랑이와 수탉은 벽사의 의미를 담은 것입니다.” 전통가구와 함께 백자의 모습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상이 그려진다. 고려전기부터 조선후기까지 도편 1,110여점을 연대기적으로 전시하는 공간도 있다. 경기도의 도자의 역사와 특질을 속살까지 보여주는 특별한 공간이다. 도자와 조각이 어우러진 ‘예술의 숲’ 경기도자박물관은 개관 이후 현재까지 기획전과 특별전을 꾸준하게 열어 한국도자의 아름다움과 품격을 세상에 알려왔다. ‘다향다색-차문화 속 청자 이야기’(2020), ‘코발트 블루 : 조선후기 문방풍경’(2021), ‘복, 간절한 염원의 장식’전(2013), ‘가마터 발굴, 그 10년의 여정’(2014), 경기 정도 600년 기념 특별기획전 ‘백자, 달을 품다’展(2014), ‘빗살무늬-6,000년 경기도자의 첫걸음’展(2015), ‘광주백자: 발굴로 다시 쓰는 분원이야기’(2017), ‘옛 가마터 답사기행’(2016), ‘남북도자 하나되어’(2019), ‘백자에 담긴 삶과 죽음’(2019), ‘근대도자, 산업과 예술의 길에 서다’(2020)도 주목되는 기획전이다. 경기도자박물관은 66만7천91㎡의 드넓은 부지에 자리 잡고 있다. 박물관도 좋지만 야외전시실도 훌륭하다. 찬바람이 부는 한겨울이 왔다. 들려오는 소식도 답답하고 우울한 것들뿐이다. 이러한 때 천년의 세월을 견뎌온 도자기를 앞에 두고 예술을 논하고, 느티나무가 우뚝 서 있는 ‘이야기마당’을 거쳐 130여 점의 조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숲속오솔길’(스페인조각공원)을 걸으며 인생을 논하는 여유를 가져야 하리라.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7. 이천시립박물관

전통의 멋 도자기 : 은은한 색 수려한 선 (재)이천문화재단 이천시립박물관을 품고 있는 설봉산은 이천시민들에게 어머니 가슴처럼 포근하고 넉넉한 산이다. 2002년 개관한 이천시립박물관에는 구석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과 함께 청자·분청·백자 등 도자기 1천200여점이 전시돼 있다. 전시물 중 주류가 도자와 관련된 것은 물론 이천시가 도자 예술인과 관련 전문 인력이 모여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천시는 대한민국 최초로 공예 및 민속예술분야 유네스코 창의도시로 지정됐고(2010), 국내 창의도시 중 최초로 ‘공예 및 민속예술 분야’ 의장도시로 선출됐다(2018). ■ 이천, 쌀과 도자기·충절의 고장 이천의 역사에서 쌀의 영광을 뺄 수 없다. 1997년에 박물관 건설을 계획할 때 명칭이 ‘농업박물관’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02년에 개관한 이천시립박물관은 2013년에 구조를 변경하고, 지난해에 건물을 신축하고 도자문화역사실을 새롭게 꾸며 재개관했다. 역사문화실은 ‘이천’의 지명 유래를 시작으로 고지도를 통해서 본 이천의 변천과 고대 이천인들의 생활과 토기사용, 설봉산성 출토유물을 통한 삼국시대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천지역의 위상을 보여 준다. 백제, 고구려, 신라 땅에 속했던 이천은 고려 초부터 ‘이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동국여지승람’에 왕건이 후백제군과 싸우기 위하여 복하천에 이르렀을 때 홍수가 나서 시내를 건널 수 없을 때 서목이 인도하여 무사히 건너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마침내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글귀에서 글자를 따서 이천이라는 명칭을 하사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같은 책에 왕건이 이천에 군대를 주둔하고 점을 쳤는데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괘를 얻어 이천’이라는 이름을 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천으로 불렸다. 1894년 갑오경장 때도 군이었던 이천이 시로 승격된 것은 1996년이다. 박물관 벽에 ‘수’(帥) 자 깃발이 걸려 있다. 어재연 장군의 지휘권을 나타내는 ‘수자기’는 신미양요 때 미군이 탈취해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던 것을 장기임대방식으로 강화역사박물관에 돌아온 것이다. 전시품은 실물 크기(4.15m x 4.4m)로 복제한 것이다. 현재 박물관 2층에 신미양요를 주제로 당시 전쟁 현장을 촬영한 사진을 전시하는 ‘150주년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1871년 미국이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며 무력으로 침략했을 때 순국한, 어재연(魚在淵)장군과 조선군의 충절을 기리고 신미양요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자리이다. 당시 미 군함에 승선해 전쟁 과정을 지켜보았던 이탈리아 종군사진가 ‘펠리체 베아토’의 사진이다. 이천시 율면에서 태어나 자란 어재연 장군은 프랑스 군대가 침략한 병인양요(1866)와 미군이 침략한 신미양요(1871)에 참전했다. 병인양요 때 어재연은 우선봉장으로 강화도를 수비하였고, 5년 후 신미양요 때는 강화도 진무중군으로 동생 어재순과 6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광성보에서 항전하였다. 미 해병대 전사에 실린 기록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하여 그토록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역사실에서 고려시대 최고의 외교가로 강동6주를 되찾은 ‘장위공 서희’ 장군과 경기도 최초의 의병부대인 ‘이천수창의소’를 지휘한 김하락 선생, 민족운동가 구연영 선생을 만난다. 1895년 을미의병 때 이천의병을 이끌었던 구연영은 기독교를 접한 후 애국계몽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돼 순국했다. 이천은 경기도에서 의병운동이 최초로 벌어진 곳이다. 김하락 선생이 이끈 의병진 ‘이천수수창의소’는 이러한 사실을 알려준다. 3층 산수유 놀이마당이 재미있다. 교육실에서 다양한 체험 및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신축 건물 2층에서 구관으로 이동하는 통로가 있다. ‘ㅁ’자 형의 한옥 건물과 잔디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도자문화역사실’은 이천 도자문화를 입체적으로 알려주는 전시공간이다. 이천 도자의 문화가 얼마나 풍성하고 아름다운지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 유물로 음미하는 이천의 역사와 문화 이천시립박물관은 개관 이후 20년이 지난 현재까지 다양한 기획전과 특별전을 열었다. 삼국시대 토제벼루에서 조선시대 석제벼루까지 다양하게 변화되어 온 벼루를 재조명하고, 전통벼루의 명맥을 잇고 있는 현대 벼루장들의 작품을 소개한 2022년 상반기 기획전 ‘벼루硯_묵향墨香, 마음을 움직이다’를 비롯하여 2022 하반기 기획전 청청전 ‘3분의 2000’이 12월22일부터 2023년 3월까지 열린 예정이다. 그동안 열렸던 전시를 대략 살펴보면 이천시립박물의 고민과 지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전 ‘도자기속의 그림, 그림속의 도자기’(2014)은 1천년 이천 도자문화의 역사를 담은 명품 도자기들이 선을 보이는 자리였다. 이천도자기가 시간을 초월하여 현대예술로서 새롭게 재현되길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도공과 함께하는 도제(徒弟) 연합작품전’(2016)은 이천시립박물관이 경기도 공사립 박물관·미술관 지원사업 기관으로 선정되어 열린 기획전이다. ‘청산에 살어리랏다’전(2017)은 청산을 현실 도피 안식처로 보지 않고 현실 속 인간사에 공존하는 희로애락의 삶을 청산에 빗대어 보기 위해 마련한 전시였다. 기획전 ‘연지곤지’展(2017)은 전통 혼례복과 혼례상, 꽃가마라 불리는 사인교 등을 한자리에 모아 옛 조상들의 혼례문화를 한눈에 살펴보는 자리였다. ‘도자를 그리다’전(2018)은 용, 봉황, 연꽃 문양부터 의미를 알기 어려운 기하학 문양 등 도자의 몸 곳곳에 새겨진 흔적들을 통해 현재의 건강, 행복,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 조상들의 염원을 살펴보는 기회였다. ‘약기, 이천을 치유하다’(2019)는 옛 기구인 복령꼬챙이, 약재를 자르는 협도, 약탕관, 약숟가락, 약저울 등 우리 조상들이 시간과 정성을 들여 약재를 만드는데 쓰였던 기구들을 소개하는 전시였다. ‘쇠뿔에 혼을 담아 맥을 잇다’전(2021)은 경기 제29호 무형문화재 화각장 故 한춘섭과 그의 이수자 한기호의 작품을 선보인 자리였다. 소뿔을 얇고 투명하게 만든 각지 안쪽 면에 문양을 그리고 채색하여 목기물 위에 덧붙여 완성하는 화각은 오직 우리나라만의 전통공예품이다. 기획전 ‘실로 맺은 연’은 실을 통해 이천문화재단과 한 가족이 되어 시민들과 새로운 연을 이어간다는 의미를 담았다. 개관 20주년을 맞아 마련한 특별전 ‘빗장을 열다’(2021)는 시립박물관의 역사를 뒤돌아보고 관객 참여를 통해 박물관이 나아갈 미래를 전망해보는 자리였다. ■ 이천, 세계로 향하는 한국의 도자문화 산실 이천시립박물관은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과의 교류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이천과 자매도시인 세토시에서 ‘한국의 고도자전-이천시립박물관 소장 명품도자전’(2014)을 열어 민속공예부문 유네스코 창의도시 이천의 도자문화를 선보여 큰 호응을 받았다. ‘세토 도자전’(2016)은 일본 세토시 자매결연 10주년과 제30회 이천도자기축제를 기념한 전시였다. 2019년에는 한·중 문화·예술 분야의 교류를 위해 이천시를 방문한 현대 중국의 공예작가 작가 23명의 작품을 이천시립박물관에 기증하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박물관에서 진행하는 화각공예 체험교육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우리나라만의 전통공예인 화각공예 프로그램이다. 시립박물관 잔디마당에서 정기적으로 흥겨운 공연이 펼쳐진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된 ‘이천거북놀이’이다.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놀이로 펼쳐진 이 공연을 통해 가족과 이천의 발전과 안녕을 기원한다. 이천시립박물관을 품고 있는 설봉산과 설봉호수 주변은 문화 시설로 가득하다. 1564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설봉서원을 비롯하여 설봉국제조각공원, 이천시립월전미술관, 도자기공원, 문학공원이 늘어서 있는 여유롭고 넉넉한 공간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6. 남양주 ‘왈츠와 닥터만 커피박물관’

북한강까지 열 걸음이나 될까? 아름다운 강변길 옆에 담쟁이넝쿨이 가득한 유럽풍의 붉은 벽돌건물이 우람하다. 네 개의 붉은 깃발은 아래로 드리워져 있고 한 개의 붉은 깃발은 우뚝 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펄럭이고 있다. ‘왈츠와 닥터만 커피박물관’(관장 박정우)은 2006년에 개관한 대한민국 최초의 커피 전문박물관이다. 건물 못지않게 이름에 담긴 사연도 궁금하다. 박물관은 2층과 3층에 있다. 커피향이 배인 아늑한 전시실은 볶은 커피처럼 따스한 갈색이다. “왈츠와 닥터만 커피박물관은 살아있는 역사이자 문화인 커피를 체험하고 소통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커피 컬렉션 전시는 물론 커피 묘목에서 시음까지 일련의 커피 제조과정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문화체험의 장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또한 생활 속 친근한 기호식품으로 자리 잡은 커피와 관련한 세계 각국의 독특한 역사와 정보를 소개하고 잘못 알려진 커피에 대한 상식과 정보를 바로 잡기 위해 해설이 함께 하는 박물관 투어를 기획하였으며 이를 통해 커피 문화의 다양성을 알리고자 합니다” ■ 유물로 만나는 한국 커피의 역사 2층 상설전시관은 커피의 역사, 커피의 일생, 커피문화, 미디어 자료실로 구성되어 있다. 벽면에 걸린 세계 지도는 커피의 전파경로를 알려주고 있다. 커피나무 사진과 붉게 익은 열매, 열매를 따는 농부의 사진이 걸려 있다. 바닥에도 커피를 볶는 철판, 열매를 빻았던 절구, 주전자 같은 낡은 도구들을 전시하고 있다. 중동사람들이 유럽인 못지않게 커피를 즐겨 마신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전시다. 볶은 커피열매를 분쇄하는 그라인더들의 형태가 참으로 다양하다. 유럽인들이 사용한 손때 묻은 절구가 눈길을 끈다. 동서양에서 한동안 원두를 절구에 넣어 빻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흥미로운 유물이다. 18세기 네덜란드인들이 사용했던 목재 그라인더는 한약방에서 사용했던 약기와 흡사하다. 나라와 시대에 따라 얼마나 다양한 그라인더가 사용되었는지 보여준다. 그라인더는 어느 나라 제품이든 바닥이 모두 넓고 네모져 있다. 프랑스 자동차 회사 ‘푸조’라는 수십 년 커피밀을 생산해 온 기술력을 바탕으로 자동차를 생산해 낸 회사다. 그라인더 하나에 당대 과학기술과 예술적 욕구가 집적되어 있었던 것이다. 커피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은 무엇일까? 부친 박종만 설립자를 이어 올해부터 관장을 맡고 있는 박정우 씨가 들려준다. “1888년 왕실의 초청으로 조선에 머물렀던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1855~1916)이 지은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란 책과 고종황제가 사용한 커피스푼입니다. 로웰의 책에 ‘우리는 조선의 최신 유행품인 커피를 마시기 위해 별장에 다시 올랐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책을 발견하면서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는 기존의 주장은 사라지게 되었지요. 스푼을 보면 손잡이 끝에 조선 이왕가를 상징하는 배꽃문양이 보이지요? 이 유물은 고종의 증손자인 이혜원 선생이 기증한 것입니다” ■ 한국인이 주역인 커피의 신역사 조선인 최초의 커피 관련 기록은 ‘한성순보’ 1884년 2월 17일에 실려 있다. 운수와 유통이 중요함을 역설하는 기사이다. 11년이 지난 1895년에 펴낸 유길준의 ‘서유견문’에도 커피를 소개하는 글이 실려 있다. “서양 사람들의 음식물은 빵 버터 생선 고기류가 주식이고 차와 커피는 우리나라에서 숭늉 마시듯 마신다” 전시실에는 300년 전 아라비아 사막에서 사용하던 커피 추출기도 있다. 이 또한 설립자 박종만 전 관장이 발품 팔아 모은 유물이다. 호텔 흑백사진들도 귀중한 기록이다. 최초의 호텔은 1888년 인천 중앙동에 들어선 대불호텔이다. 서양식 식사가 제공되었으니 커피가 판매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후 서울에도 팔레호텔(1899), 스테이션호텔(1901) 손탁호텔(1902) 등이 차례로 들어섰다. 한국인이 운영한 최초의 다방은 영화감독 이경손(1905~1977)이 1927~8년에 인사동에 문을 연 ‘카카듀’라는 사실도 박 전 관장이 밝혀낸 것이다. 6.25 직후 전주 경원동에 문을 연 삼양다방, 1955년 진해 대천동에 문을 연 흑백다방은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다방으로 지역 문화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현장이다. 왈츠와 닥터만 박물관은 이처럼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다방을 살리는 운동도 펼쳤다. 소설가 헤밍웨이와 이상 등 한국과 서양의 유명인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나폴레옹의 사진에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하루 열 잔 이상의 커피를 마셨다는 나폴레옹은 청년시절 프랑스의 카페 프로코프에서 커피를 즐겨 마셨고 커피 값이 없으면 자신의 군모를 맡기기도 하였다.” “발자크는 엄청난 양의 블랙커피를 마시며 하루 15시간 이상 집필하였고 ‘커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글을 썼다” 한국인은 이봉구, 김환기, 채만식, 박태원, 고종, 유길준, 오상순, 전혜린, 이상까지 아홉이다. “우리나라 모더니즘 문화를 이끈 천재작가 이상은 종로 1가에 ‘제비’ ‘69’등의 다방을 직접 경영하여 초기 우리나라 다방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비롯한 독일문학을 번역하여 소개했던 전혜린은 학림다방과 돌체, 모나리자 다방을 아지트처럼 드나들었다” 한 장의 흑백사진은 관람객을 1970년대로 안내한다. 거피와 관련된 희귀한 유물은 이곳에서 모두 보물이다. 한복을 차려 입은 세 여인이 마루에서 커피는 마시는 모습이다. 한국인의 일상 깊숙이 스며든 커피 문화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진이다. 한국네슬레 여수대리점 선미상사의 다방 재료 요금표도 박물관의 소중한 전시물이다. 세계의 다양한 커피들이 진열되어 있는 진열장 앞에 서면 커피가 얼마나 세계적인 음료인지를 금방 깨닫게 된다. 그렇다. 커피는 원유 다음으로 많이 유통되는 물품이다. 전시실 맨 끝에서 한국 커피의 역사와 다시 만난다. 1920년대부터 1950년대의 누렇게 바랜 신문 스크랩도 한국 커피의 문화사를 생생하게 증언해준다. “남대문정거장에는 1일부터 끽다점을 개설하였다더라” 1909년 11월 3일자 ‘황성신문’은 일본인이 다방을 연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겨울밤에 더욱 좋은 맛 좋은 차 끓이는 법-커피, 홍차, 코코아, 초콜레트차는 이렇게” 1933년 12월 22일자 조선중앙일보의 기사 제목이다. ■ 100년 후를 생각하는 커피박물관 커피박물관은 유물을 전시하고 체험하는 것 못지않게 정성을 쏟는 일이 있다. 바로 한국의 오랜 다방을 지켜내는 일이다. 그리고 한국의 커피를 상품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다. 3층 북한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공간에서 커피나무와 마주한다. 커피를 교육하는 공간인데, 커피나무가 자라는 온실로 연결되어 있다. “커피나무를 강원도 야지에서 재배하여 한국산 커피를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커피사업자는 2022년 5월 현재 8만9668명을 기록하고 있다. 커피점의 숫자가 2022년 현재 인구 575명 당 1개꼴이다. 박물관을 차분히 둘러보면 13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한국이 어떻게 해서 커피공화국으로 성장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커피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시간도 재미있지만, 숙련된 바리스타의 지도를 받으며 손수 콩을 갈고 커피를 내려서 커피를 음미하는 체험시간만 할까. 뜨거운 물을 붓자 종이필터에 쌓인 커피 가루에서 부글부글 거품이 피어오른다. 2006년 3월부터 매주 금요일이면 정통클래식음악회를 열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100석 규모의 홀이지만 3명의 청중만 예약해 연주자 4명보다 적은 수로 음악회가 열린 적도 있었단다. 금요음악회는 곧 700회를 기록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뚝심은 어디서 나왔을까? 인테리어 사업을 하던 설립자 박종만 씨는 1989년 출장차 간 일본에서 ‘왈츠’라는 커피회사를 방문하고 인생행로를 바꾸었다. ‘왈츠와 닥터’란 커피박물관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닥터만’은 한국 최고의 커피 박사가 되겠다는 의지를 담은 닥터에 설립자의 이름 ‘만’을 붙인 것이다. 그런 설립자의 열망과 바람이 대를 이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왈츠와 닥터만 커피박물관은 한국의 커피의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는 역동의 공간이다. 김준영(다사리행복학교)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5. 여주 ‘세종대왕역사문화관’

영릉에도 늦가을의 정취가 가득하다.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효종대왕의 영릉(寧陵) 사이로 난 ‘왕의 숲길’은 언제 걸어도 좋다. 한민족의 문화를 말살하려 광분한 일제도 감히 조선 왕릉은 훼손하지 못했다. 조선 왕릉 42기 중 북한에 소재한 2기를 뺀 40기가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왕릉 중에서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의 영릉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왕릉이다. 세종대왕의 동상을 비롯해 세종시대의 천문과학 기기들이 재현 설치되어 있는 영릉은 교육장으로도 손색이 없다. 경복궁과 광화문, 한글박물관 등 세종과 관련된 공간이 서울에도 많지만 세종대왕을 깊이 만나려면 여주 영릉을 찾아야한다. ■ 기록화로 만나는 세종대왕의 일대기 영릉 입구에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관람객들이 많다. 그러나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공간이다. 아니다. 세종을 제대로 만나려면 반드시 둘러봐야 할 소중한 공간이다. 우리의 눈에 익숙한 세종시대의 기록화를 비롯한 소중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 세종대왕역사문화관에는 3개의 상설전시실과 1개의 기획전시실, 영상실, 카페, 수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상설 전시실은 3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실은 주제가 ‘민족의 성군 세종대왕’이고 제2실의 주제가 ‘북벌의 기상 효종대왕’이다. 1실과 2실 사이에 있는 전시실의 주제는 ‘세계유산 조선왕릉’이다. 전시실 입구에서 처음 만나는 것은 동판에 새긴 ‘훈민정음’ 서문이다.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세종의 말씀을 다시 음미해 본다. 우리가 세종을 존경하는 까닭은 여럿이지만, 무엇보다 그 바탕에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 곧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한 장의 그림이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1418년 9월19일, 경복궁에서 22세의 청년 세종 이도(1397~1450)가 조선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하는 광경을 묘사한 ‘즉위도’(김학수 작)이다. 흥미로운 역사적 장면이 또 펼쳐진다. 이번에는 중년의 세종이 왕세자(문종)와 함께 측위기를 관측하는 신하들과 서 있는 ‘측우기도’(권영우 작)이다. 한국 최고의 발명자로 꼽히는 장영실은 누구일까? “모두 8점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처럼 품격 높은 그림은 앞으로 제작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의 양웅열 학예연구사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전시된 기록화 8점은 영릉을 성역화 하던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이루어진 국가사업이었다. 여러 명의 학자들이 독서하고 토론하는 광경을 그린 ‘집현전 학사도’(장우성 작)와 독서에 열중하는 세종의 청소년기 모습을 담은 ‘왕자 시절의 독서도’는 학문을 좋아한 세종의 모습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무인들이 등장하는 그림이 더 많다. ‘대마도 정벌도’(서세옥 작)와 ‘육진 개척도’(박노수 작), ‘이만주 정벌도’(정완섭 작) 같은 기록화를 통해 세종시대의 찬란한 문화는 활달한 기상과 강력한 국방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림 제목이 ‘지음도’(이유태 작)인 까닭은 무엇일까? “세종이 천재 음악가 박연의 편경 연주를 듣고 바로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던 일화를 알려주는 그림입니다. 음악에도 천부적 재능을 가진 세종은 우리의 전통 음악 아악을 정리하고 ‘정간보’라는 악보를 창안하여 ‘정대업’과 ‘보태평’ 같은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금속활자를 제작하는 ‘주자소도’(정완섭 작)는 출판문화를 꽃 피운 세종의 업적을 알려준다. 우리가 일상에서 지폐로 만나는 세종의 얼굴은 정우성 화백이 그린 세종 표준 영정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같은 서책을 만나 볼 수 있다. 특히 세종실록에 실린 ‘경상도지리지’는 엄청난 크기가 관람객을 놀라게 한다. 터치스크린을 통해 책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혼천의 등 천문 관측기구와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 앙부일구, 물시계 자격루 같은 옛 과학기구의 작동원리를 영상을 통해 확인하는 것도 재미있다. 휴대용 해시계와 세종대왕의 어보도 전시되어 있으니 찾아보자. 세종은 박연과 함께 우리 음악을 정립한 주역이다. 세종과 박연의 음악적 재능과 업적을 알려주는 악기 ‘편경’을 살펴본다. 천재 음악가 박연이 우리나라에서 난 돌로 편경을 새롭게 제작하여 시연할 때, 세종이 소리가 이상하다고 지적한다. 박연은 정말 돌을 덜 갈아 소리가 둔탁했던 사실을 발견하고 감탄한다. 이처럼 세종은 절대음감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세종대왕의 일대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영상은 학부모들도 감상하면 좋은 내용이다. ■ 북벌의 기상 효종대왕과 특별전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머네!’ 효종대왕은 형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1649년에 조선의 제17대 왕으로 즉위하여 재위 10년 동안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복구하는데 온힘을 쏟았다. 효종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북벌을 국가의 목표로 삼았던 군주이다. 효종대왕의 영릉을 섬세하게 묘사한 펜화는 색다른 감동을 준다. 대동법, 북벌, 나선정벌 등 주요업적에 대한 설명이 애니메이션과 패널로 구성돼 있다. “효종의 북벌의지는 송시열의 ‘기해독대’에 잘 나타나는데, 효종은 ‘정예로운 포병 10만명을 길러 기회가 있을 때 오랑캐들을 곧장 공격할 것이며, 이 일은 10년 안에 추진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시관 관계자의 설명처럼 효종은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대동법의 확대, 상평통보의 유통, 농서와 의서 편찬 등으로 나타난다. 제주도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서양식 무기를 제조한 사업도 빼 놓을 수 없다. 조선을 탈출한 하멜이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작성했다는 ‘하멜표류기’에 실린 한 장의 그림이 눈길을 끈다. 하멜 일행이 효종대왕을 알현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약탈해 간 유물 중 2011년에 반환된 외규장각의궤 중 효종대왕의 비인 ‘인선왕후의 국장도감의궤’도 특별한 유물이다. 국장행렬을 입체적으로 구성한 영상을 통해 당시 왕실의 장례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 세종대왕유적관리소는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로 기획전을 열고 있다. ‘성군이 태어나다-세종대왕의 탄생’(2017), ‘세종대왕이 사랑한 학자들’(2018), ‘조선 국왕의 즉위식’(2018), ‘조선시대 한글서체의 아름다움’(2019), ‘영릉에서 제례는 이렇게 지내요’(2019), ‘조선 효종대왕의 문예적 소양’(2019), ‘조선시대 해시계와 앙부일구’(2020), ‘세종대왕의 왕자들’(2020), ‘효종과 하멜 이야기’(2021), 2022년 상반기 기획전시 ‘세종, 우리 옛 땅을 되찾다’가 두 달 동안 진행됐다. ■ 여주 영릉에서 나를 만나는 여행 현재는 열리고 있는 2022년 하반기 기획전의 주제는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머네!’이다. 입구에 ‘재통지심 일모도원’이란 붓글씨와 만난다. 이 글씨에 무슨 사연이 담겨 있을까? “효종은 재위 8년이 되던 해에 영의정을 지낸 백강 이경여(1535~1657)가 올린 상소에 답하면서 ‘진실로 가슴에 심한 한이 서려 있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이다’라는 자신의 심경을 밝히지요.” 효종이 송시열과 만나 국가정책을 논의한 ‘독대설화’는 북벌정책에 관한 내용이 중심이기에 오랫동안 은밀하게 전수된 비밀문서이다. 효종과 함께 심양에 인질로 끌려갔던 김상헌의 문집 ‘청음선생집’, 송시열의 문집인 ‘우암선생집’ 같은 서적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효종 추상존호 옥책’ 같은 희귀한 유물을 만날 수 있다. 제3실은 ‘세계유산 조선왕릉’은 영릉을 참배하기 전에 들러야 하는 공간이다. 왕릉의 공간은 어떻게 구분되었는지, 석물의 명칭은 무엇인지 흥미롭게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공간을 거쳐 영릉을 참배하면 분명 감동이 배가될 것이다.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지만, 영상으로 왕릉을 조성하는 과정을 친절하게 전달하기 때문에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자연 풍광이 수려한 여주에는 문화공간도 풍부하다. 목아박물관, 여주미술관 등 여주에 소재한 예술 공간을 순례하는 여행을 기획해보면 어떨까. 김준영(다사리행복학교)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4. 여주미술관

“노년기에 접어들며 이제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사회적 가치로 환원할 일을 생각했다. 기부나 경제적 후원은 오히려 쉬울지 모른다. 대신 나의 주변에는 미술이 있으니, 따로 할 일이 있을 것 같았다. 말하자면 자본과 재능을 함께 사회에 환원하는 일이다. ...마침 여주 지역에 연고가 있어 미술관 자리를 잡았다. 여주는 깊은 역사적 전통 문화를 가진 지방이지만, 현대화 과정에서 예술은 좀 지체된 듯싶다. ...여기에 여주 미술을 위해 샘 하나를 판 것으로 믿는다” ■ 여주 미술을 위해 샘 하나를 파다 여주미술관(관장 박선영) 설립자 박해룡 명예관장의 작품집 <박해룡 청색시절-삶에 물들이기>에 실린 말이다. “2017년 미술관 건립을 기획하고, 2018년 설계하고, 곧 착공하여, 2019년 개관할 수 있었다. 참으로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얻은 요행이었다” 짧은 글이지만 속도감이 느껴진다. 설립자는 88세의 고령에도 화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현역 작가다. 고려제약(주)의 설립하여 대표이사를 지낸 박 명예관장이 사재를 털어서 건립한 여주미술관은 여주시에 건립된 최초의 사립미술관이다. 여주시 세종로 394-36에 자리 잡은 여주미술관에도 가을이 깊었다. 밤에 내린 비로 떨어진 붉은 단풍잎들이 늦가을 햇볕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야트막한 산허리에 자리를 잡은 미술관은 사방이 툭 열려있다.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길이 둘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했다면 정문 왼편으로 낸 오솔길을 선택하게 된다. 철로 받침목을 징검다리처럼 놓아 만든 계단이 운치를 더해주는 작은 길이다. 정문과 가까운 언덕에 언월도를 비껴든 빼빼 마른 사나이가 우람한 황소를 타고 달리는 조각상이 서 있다. 중국 조각가 지앙 차우의 작품으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새롭게 해석한 재미있는 작품이다. 미술관의 독특한 지붕과 하얀 벽이 산뜻하다. 미술관을 설계한 이는 국민대 건축과 박길용 명예교수로 설립자의 아우다. 그는 “자연 속에 건축물이 들어갈 때 가급적 덩치를 작게 하는 것이 설계자의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하는 자연친화적 건축가다. 그는 자연 속에 자리 잡은 여주미술관의 특징을 이렇게 소개한다. “건물의 형태를 M자 모양의 지붕 2채가 맞붙어 4채가 엮인 것 같은 형태로 만들어 건축물을 잘게 나누어 몸집을 줄였다. 경사지붕을 통해 내부에서 큰 어미 새의 날개와 같은 모습의 천장을 연출시켜 관람객으로 하여금 안락함과 웅장함을 함께 느낄 수 있다” 통으로 이어진 건물 아래에서 공연을 열 수 있도록 조성된 공간을 지나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니 중정이 나타난다. ㄷ자형의 건물이 품은 중정에도 아담한 조각품과 나무들이 서 있다. 잎을 모두 떨군 탓에 수형이 완전히 드러난 화살나무 두 그루가 마주보고 서 있는 풍경이 정겹다. 미술관 주변은 온통 나무들이다. 나무들 사이사이로 곳곳에 조각 작품들이 있다. 카페 ‘돈키호테’에서 차를 마시고 우산을 든 맨발의 소녀상을 지나 단풍잎으로 붉어진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미술관에 가득한 늦가을 정취에 빠져든다. 박소윤 관장의 안내를 받아 최선호 작가의 특별전 ‘저만치 혼자서’를 둘러본다. “11월 14일에 작가를 초대하여 ‘미술관과 문화’라는 전시 기념 특강을 열었습니다. 미술관의 역할이 지역사회에 문화자산이자 사회공헌의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본 강연이었어요” ‘저만치 혼자서’라는 제목이 은근하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1전시실은 아주 널찍하다. 동양화와 서양화를 모두 공부했다는 최 작가의 작품은 검정과 파랑과 하양의 단색과 단순한 구도가 특징이다. 잠시 서 있어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비결은 색일까, 구도일까? “가운데 파란 색은 비로 천연염료 ‘쪽’이에요” 박 관장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쪽의 빛깔이 은근하며 그윽한 조선 여인의 마음을 나타내는 듯하다. 캔버스에 살짝 번진 푸른 빛깔에서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물론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이고 해석될 수 있겠지만, 내 눈엔 그렇다는 뜻이다. ■ 미술관, 즐거움과 행복을 만들다 개관 기념 특별전의 주제는 ‘프랑스 예술가들이 누리는 표현의 환희, 박해룡의 삶에 물들이기’였다. 앙드레 브라질리에, 에르베 로왈리에 등 프랑스를 중심으로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12명의 프랑스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과 박해룡 작가의 작품이 전시됐다. 건강한 리얼리즘과 그림은 사람들과 편안하게 소통되어야 한다는 박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작품들이다. 이어진 하반기 기획전은 ‘HAPPY! 여주 FANTASY’展으로 ‘즐거움과 행복’을 전면에 내세웠다. ‘행복’을 전시 슬로건으로 삼고, ‘판타지’를 소통의 방법론으로 삼아 여주 시민과 관람객들에게 다가선 전시였다. 초청 작가 유정혜, 임정은, 김동현, 작가 수요일 4인이 참여했다. 박선영 관장은 개관 초부터 여주 지역의 학교와 공공기관을 쫓아다니며 여주미술관을 알렸다. 그러나 개관 직후인 2020년 초에 터진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와중에 마련한 기획전이 ‘이른 봄나들이-예술가의 작업실’이다. 어려움에 처한 지역 작가들을 응원하고 연대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기획이었다. 여주를 비롯하여 이천, 양평 광주에서 활동하는 45인의 작가와 박해룡 명예관장이 참여했다.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대표 작가의 작업실 재현과 작업실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한 곳에 모아 관객에게 예술가의 삶이 어떠한 지를 선보이고 각 지역에 어떠한 예술가들이 살고 있는지를 소개했다. 개관 1주년이 되는 2020년 6월에는 국제전을 마련했다. 여주시에 자리 잡은 미술관의 위상과 정체성을 탐구한다는 취지에서 주제를 여주의 역사와 환경을 끌어들인 ‘여주(驪州)-검은 말의 땅’으로 잡았다. 말을 주제로 삼은 이 전시에 19세기 청나라의 말 장식 유물 및 조각상을 비롯해 국내외 15인의 현대 미술가들의 66점(입체 22점, 평면 44점)에 이르는 다양한 조형 작품들이 소개됐다. 당시 전시되었던 작품 몇몇은 지금도 감상할 수 있다. 중국 도자기와 유물을 한데 결합해서 만든 성동훈의 해학미 가득한 기마상과 돈키호테, 붉은 말이 그것이다. 2021년에는 서용선의 ‘만疊산중서용선繪畵’을 열었다. 1951년생의 서 작가는 작업의 양과 일관성, 시도와 대상의 다양성에 있어서 돋보이는 중견 작가다. ‘만첩산중’이라는 제목처럼 100여 점의 회화를 감상하다보면, 산중을 헤매는 경험을 가지게 된다고 하니 흥미롭다. ■ 지역 미술관의 사명을 생각하다 1전시실의 지나 네모꼴의 2전시실은 설립자 박해룡 작가의 작품을 상설로 전시하는 곳이다. 바닥에 붉은 색깔의 도자기로 만든 말들이 질주하고 있다. “벨기에 조각가 아니타 플리레커의 작품인데 세라믹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개관 1주년 때 전시했던 작품이죠” 벽에 걸린 작품에도 대부분 말이 있다. 88세 노년의 박 작가가 왜 말을 사랑하는지 알 것도 같다. 뺨이 발그레한 중년의 여성이 미소 짓는 그림이 눈길을 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설립자 박해룡 작가의 아내이다. 박 관장이 액자를 내려 글자가 쓰여 있는 액자 뒷면을 보여준다. “딱부리, 들창코, 그러나 천사. 그라고 나으 아내. 그라고...2021. 7. 박해룡 웃으며 울면서 그렸다” 지난해에 세상을 떠났다는 아내의 생전 모습을 그리며 눈물짓는 박 작가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어린 시절 화가를 꿈꾸었던 박해룡 작가는 71세가 되는 2005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 그동안 10여 차례의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박 관장에게 여주미술관의 비전을 물었다. “미술관의 공공의 역할을 자주 생각합니다. 여주미술관을 지역 내 문화예술인들이 소통하고 화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일, 지역 내 다문화 가정이나 저소득층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미술 교육도 개관 때부터 꾸준하게 진행하고 있지요. 관람객들이 미술과 편하게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미술관이 즐거운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죠”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3. 의왕향토사료관

청계산·백운산·모락산과 백운호수와 왕송호수를 품고 있는 의왕시는 과천·안양·군포·화성·수원·성남과 이웃하고 있다. 내손동과 학의동, 부곡동에서 고인돌과 민무늬토기편이 발견됐으니 역사가 오랜 도시가 분명하다. 서해안과 가까운 한강유역에 위치해 삼국시대부터 각축을 벌였던 지리적 요충지였다.정조가 화성의 현륭원을 참배할 때 사용하던 사근행궁지에 의왕시청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의왕’이란 이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광주군 의곡면과 왕륜면을 통합하면서 ‘의왕’이란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당시 수원군에 속했던 의왕면은 이후 화성군과 시흥군에 속하기도 합니다. 인구가 급증한 1980년에 읍으로 승격되고, 1989년 1월에 의왕시로 승격됐습니다. 한동안 의왕시(儀旺市)로 썼으나, 역사적 고증을 거쳐 2007년에 ‘의왕시(義王市)’로 한자를 바꾸었지요” 2007년 의왕 향토 사료관 을 개관할 때부터 함께 해 온 서영진 학예연구사의 설명이다. ■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박물관 의왕향토사료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은 총 4천507점인데, 기증유물과 기탁유물이 구입유물이나 기타유물, 국가 귀속유물보다 더 많다. 이러한 유물을 바탕으로 매년 다른 주제로 기획전을 열고 있다. 현재 열리고 있는 ‘이씨 할아버지가 살았던 옛날에는’은 어떤 주제를 가지고 있을까? “‘이씨 할아버지’는 세종대왕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후손으로 내손동 능안마을에 거주하시던 이택 선생님을 말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 선생님이 기증하신 유물이 1천733점이나 됩니다. 이택 선생님의 부친 이기호씨는 의왕면장을 지낸 분으로 의왕의 근현대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를 정말 알뜰하게 모으셨어요” 설명을 듣고 살펴보니 흥미로운 전시물이 여러 점 눈에 띈다. 1955년에 발행한 이기호의 부친 이종협의 ‘경기도도민증’은 4면으로 되어 있다. 이기호씨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사서로 근무했음을 알려주는 신분증명서 발행일은 단기 4280년(1947) 1월 1일이다. 1936년에 작성된 이기호의 경성공립전수학교 성적표도 있다. 이기호씨의 신원진술서와 공무원인사기록카드, 공무원증, 직원주소록까지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 개인의 사소한 물건이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는 한 시대와 한 고장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해주는 유산이 된 것이다. 1991년에 발행한 ‘의왕신문’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찾아봤는데 딱 한 장 밖에 구하지 못했어요.” 불과 30년 전의 신문이지만, 시흥의 과거를 알려주는 더없이 소중한 유산이다. 2007년 개관부터 2022년 현재까지 진행된 소장품전과 기획전을 통해 의왕향토사료관의 소장 자료와 활동 내용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처음으로 기획한 ‘청풍김씨 김준영 기증유물’(2008)과 ‘수성최씨 최봉준 기탁유물(2009)’은 의왕향토사료관이 기증유물을 바탕으로 설립되었음을 보여주는 기획이다. ‘금석문 탁본전(2010)’,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2010)’, ‘옛 문서를 통해 본 선조들의 삶과 문화(2011)’, ‘포일동 출토유물전(2012)’, ‘타임머신 타고 떠나는 보물찾기(2013)’, ‘땅 속 유물 이야기(2014)’, ‘기차타고 알아보는 철도이야기(2015)’, ‘의왕-구석기부터 근현대까지(2016)’, ‘옛날 의왕지역의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었을까?(2017)’, ‘선사시대?! 역사시대?!(2018)’, ‘도룡마을 수성최씨 이야기(2019)’, ‘의왕의 청동기시대(2020)’를 거쳐 현재 ‘이씨 할아버지가 살았던 옛날에는(2021~)’이 진행되고 있다. 주제가 다양하지만 초점이 어린이들에게 맞춰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는 11월25일에 개관 예정된 ‘일석 이희승과 한글’은 어떻게 기획된 것일까? “한글학자 이희승(1897~1989) 선생님이 태어나 자란 곳이 의왕이라는 선생의 증언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 아이들과 학부모가 좋아하는 박물관 초등학생에 초점을 맞춘 교육 프로그램은 2011년의 특별기획전 ‘기증 고문서전’에서 시작된다. 이 기획전은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토지매매문서, 장례 관련 문서, 과거시험 답안지와 합격증, 고신(임용장), 간찰(편지) 등 40여 점을 전시하고 전문가의 설명으로 학생들의 이해를 돕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시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교육프로그램으로 많은 초등학교들이 참여했지요. 학생이 직접 참여하며 즐길 수 있는 체험형 수업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호응이 좋았습니다” 이제까지 진행된 전시 중에서 2015년의 특별기획전 ‘기차타고 알아보는 철도이야기’에 대해 좀 더 알아본다. “철도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근현대 철도유물 42점을 시대적 해설과 함께 새롭게 구성해 선보였지요. 우리 의왕시는 철도박물관과 한국철도기술연구원, 한국교통대학, 한국철도공사 인재개발원 등 철도인프라를 두루 갖춰, 2013년 전국 유일의 철도특구로 지정된 철도특화도시랍니다. 기차의 등장과 발전에 따른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요” 2016년의 특별기획전 ‘의왕-구석기시대부터 근현대까지’전도 주목된다. 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을 통해 의왕 지역의 역사를 돌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 의왕시의 위상을 알아보는 기획이다. 이동 ICD 진입로 개설사업, 포일 2지구 국민임대주택단지 개발사업, 오전동 공동묘지 정비 사업을 하면서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다양한 유물을 출토됐다. 역사교실에는 의왕시내 초등학생들이 사료관에 전시된 구석기 시대부터 근현대까지의 유물을 관람하면서 역사퀴즈를 풀고, 청동기시대 마을 만들기 등을 체험하면서 의왕시의 역사를 이해하도록 이끌었다. 역사를 입체적으로 배우고 즐길 수 있는 기회였다. 2019년에 진행한 주말 교육 프로그램 ‘우리가족 박물관교실’도 참석자들의 큰 호응 속에 진행됐다고 한다. “가족이 함께 향토사료관의 전시해설을 듣고 활동지 풀어보기, 우리가족 유물노트 만들기, 기념 사진촬영을 하며 즐기는 프로그램이었지요” 2022년 5월부터 9월까지 관내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열린 ‘학교로 찾아가는 박물관교실’은 어떻게 진행됐을까? “전문 강사가 신청학교를 찾아가 의왕시의 문화재와 유물에 대한 수업을 다양한 교재와 교구를 활용해 진행합니다. 다음엔 아이들이 향토사료관을 찾아 친절한 해설을 들으며 특별전시를 관람하고 유물 만들기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인데, 총 31회 9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했어요” 지난 여름방학에는 매주 토요일마다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주말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기증유물전시 ‘이씨 할아버지가 살았던 옛날에는’의 해설을 듣고 전시유물인 1991년에 발행한 ‘의왕신문’을 활용한 ‘우리가족 신문 만들기’를 진행하여 함께 참여한 다른 가족들에게 자신의 가족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지요. 코로나19로 외부 활동을 하지 못했던 아이와 학부모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 의왕 역사와 정체성 가득 ‘미래세대 놀이터’ 의왕향토사료관은 조선 철종 때 청풍김씨 김직연이 청나라 북경을 다녀온 뒤에 기록한 저술한 ‘연사록’과 한글본 ‘연행록’ 그리고 ‘독고록(讀古綠)’과 ‘상영도집’을 번역 간행했다. 특히 상영도(觴詠圖) 놀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희귀 시문집인 ‘상영도집’은 2021년에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된 책으로 주목된다. 주요 명승지가 적힌 놀이판을 활용해 가상으로 여행하듯 작성한 시문(詩文)이 80편이 실려 있는 ‘상영도집’은 각 명승지의 역사와 관련 인물 등이 담겨 있는 희귀본이다. 의왕시의 역사와 문화를 살필 수 있는 의왕향토사료관은 의왕시중앙도서관책마루 2층에 위치하고 있다. 관계자의 설명처럼 도서관을 찾는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둘러볼 수 있는 장점가진 사료관이다. 하지만 전시 공간이 부족해 상설전시를 할 수 없는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다. 머잖은 날에 의왕시의 역사와 문화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는 의왕시립박물관이 건립되기를 바란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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