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에는 ‘문학을 더 가깝게 삶을 더 빛나게’, 2층은 ‘9살 내가 사는 마을’, 마지막 3층은 ‘책이 없는 방은 영혼이 없는 육체’라는 글을 엘리베이터 출입문에 새긴 곳이 있다. 경기 양평군 서종면에 자리한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촌장 김종회)은 2009년 6월 개관한 문학관이다. 16년이 지난 2025년 현재 소나기마을은 연간 10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는 국내 최고의 문학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황순원의 작품과 생애를 되돌아보다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 신록이 눈부시다. 연두와 초록의 숲에 드문드문 보이는 붉고 흰 꽃들이 봄날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푸른 잔디로 뒤덮인 널따란 마당에는 원두막과 수숫대를 엮어 만든 움집이 여러 채 서 있다. 시간마다 소나기가 내리는 광장의 봄 풍경이 평화롭다. 수숫단 움집처럼 디자인한 문학관의 공간 배치가 산뜻하다. 작가 황순원이 토해낸 빛나는 문장들이 직사각형의 투명한 아크릴판에 새겨져 주렁주렁 달려 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일까, 소나기 그친 하늘을 뚫고 나온 햇살일까. 보랏빛 천장이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원통형 조형물에 새긴 ‘황순원 연대기’를 통해 작가 황순원(1915~2000년)의 작품 활동과 생애를 더듬어본다. 중등학교 교사로 3·1운동 당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시내에 배포하다가 1년6개월간 투옥된 적이 있는 아버지를 무척 존경했던 황순원은 16세에 ‘나의 꿈’이란 시로 문단에 등단해 시와 소설을 평생 꾸준하게 썼던 빼어난 작가이자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친 훌륭한 교육자였다. 작가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황순원문학상’ 역대 수상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 작품을 최초에 실은 정기간행물도 살펴본다.
제1전시실 ‘작가와의 만남’은 만년필과 친필 원고, 앉은뱅이책상과 저고리 등 생활유품을 전시해 작가의 소박한 일상과 정갈한 성품을 보여준다. 제2전시실의 주제는 ‘작품 속으로’다. ‘별’과 ‘독 짓는 늙은이’를 비롯한 단편소설과 ‘카인의 후예’와 ‘나무들 비탈에 서다’ 같은 장편소설은 독자의 사랑을 받아 널리 읽힌 작품들이다. 제2전시실에서 박물관의 자랑인 ‘실감콘텐츠 영상체험관’을 체험한다.
“소나기마을은 문화관광체육부에서 시행하는 ‘2020년 공립박물관·미술관 실감콘텐츠 제작 및 활용사업’에 선정되고 2021년 ‘스마트 공립박물관·미술관 구축 지원사업’에 연속으로 선정됐지요.” 황순원문학촌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유료 관람객이 찾는 박물관으로 성장한 비결은 첨단의 디지털 기술을 적극 활용해 전시 방식과 내용을 새롭게 구축했기 때문이다. 소년과 소녀가 처음 만난 징검다리가 반갑다. 디지털 플로어를 걸어가며 징검다리를 밟자 돌 주변 개울물이 파문을 일으킨다. 디지털 꽃밭에서 꽃봉오리를 손가락으로 툭 치자 순식간에 꽃이 활짝 핀다. 동그라미들이 물방울처럼 바닥에 가득하다. 초록빛과 보랏빛 빗방울들이 바닥에 파문을 일으킨다. 소나기를 피한 원두막과 수숫단, 들꽃과 소나기가 내리는 하늘이 펼쳐진다. 어느덧 소설의 주인공처럼 들판을 달리고 수숫단에 파고들어 비를 피하고 소녀를 등에 업고 시냇물을 건넌다. 소설의 인상적 장면을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내는 디지털 기술이 신선하다.
■ 문학과 스마트 영상이 어우러진 공간
“황순원 선생님은 평생 시 104편, 단편 104편, 중편 1편과 장편 7편을 남겼습니다.” 함윤미 학예연구사의 안내로 ‘문학교실’을 둘러본다. ‘공부 안 해도 되는’ 교실답게 탁 트인 창밖으로 푸른 숲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수숫단 강당’은 매주 목요일마다 문학과 예술의 열기로 가득 채워지는 소통의 공간이다.
“지난달 17일 오후 2시, 이곳에서 차인표 작가가 지역주민과 문인을 비롯한 200여명의 청중을 대상으로 자신의 문학정신과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수숫단 강당과 달리 ‘운명적 사랑전’이 열리는 전시실은 분위기가 한결 차분하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중 사랑을 주제로 한 세 작품 ‘송아지’(1961년)와 ‘잃어버린 사람들’(1955년), 그리고 ‘기러기’(1942년)를 한 공간에서 영상으로 만난다.
관람객들의 눈높이에 맞춘 디지털 전시여서 사전 지식이 없어도 작품에 집중할 수 있다. 줄거리를 보여주는 소설의 문장과 움직이는 그림이 어우러진 영상은 관람객의 시선을 이내 사로잡는다. 얼음이 깨져 소년과 송아지가 물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마지막 장면이 못내 안타깝다. “소년과 송아지는 구조됩니까.” 함 학예사는 빙긋 웃으며 도리어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선생님이 상상해 보세요.”
■ 놀이와 체험으로 즐기는 문학
2025 박물관미술관 지원사업으로 12월까지 진행하는 ‘이야기 숨바꼭질’은 나만의 ‘소나기’ 에코백을 꾸미는 프로그램이다. 소년이 소녀를 업고 있는 바탕 그림에 색을 칠하는 방식이니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 인기가 많다. ‘달력 만들기’는 소설 ‘소나기’의 주요 장면들로 구성된 12장의 그림들로 나만의 유일한 달력을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와 함께 문학관을 찾은 가족에게 사랑받는 만들기 중심의 ‘징검다리 체험프로그램’과 청소년이 직접 문화기획자가 돼 보는 ‘인문학 크리에이터 층층대’도 운영된다. 관람객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소원지 쓰기, 소나기 퀴즈, 손편지 쓰기 등 ‘자율 체험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이처럼 다양하고 흥미로운 체험 중심의 프로그램들이 마을을 문화 명소가 되게 하는 힘입니다.”
3월부터는 매주 목요일 ‘2025 소나기마을 문학교실’을 열고 있다. 황순원 탄생 11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문학교실은 한국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재능기부 형식으로 12월까지 흥미로운 강연이 이어진다. 정호승·신달자·김기택 시인, 김홍신·이순원·이승우 소설가, 차인표·배종옥 배우, 황선미 동화작가 등 유명 인사들이 마을을 찾아 강의를 진행하는 ‘2025 소나기마을 문학교실’에 대한 양평 주민과 관람객들의 관심이 뜨겁다.
■ 지역주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소나기마을
“매년 가을에 열리는 황순원문학제는 백일장과 그림 그리기 대회로 출발해 16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황순원문학상 시상, 문학세미나, 문화공연, 나의 첫사랑 이야기 공모전, 디카시 공모전을 더하며 풍성한 문학 축제의 장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문화예술계의 마당발이기도 한 김종회 촌장의 열정이 대단하다. 전국 100여 문학관이 소속돼 있는 ㈔한국문학관협회장이기도 한 김 촌장은 황순원 선생의 사랑을 받은 제자로 20여년 전 경희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소나기마을을 발의하고 그 건립과 운영을 이끌어온 산증인이다. 김 촌장은 매달 대중 문학강연 ‘문학마실’을 4천명이 넘는 구독자들에게 배달할 정도로 부지런하다.
소나기마을에 상주하면서 동화작가로 등단한 함윤미 학예연구사가 흥미로운 사연을 들려준다. “소나기마을의 임직원은 모두 양평지역 주민이며 서종면에 살고 있습니다. 직장이 지역사회인 셈이지요.” 수도권과 양평지역의 자원봉사단 40여명이 마음을 모아 문학관을 지켜가는 것이나 지역주민을 위해 매년 다섯 차례의 ‘첫사랑 콘서트’와 ‘수숫단 음악회’를 열고 있는 모습도 보기 좋다. 황동규문학관 병설을 통한 세계 최초의 ‘부자(父子) 문학관’과 세계문학의 ‘첫사랑 테마산책로’를 만들려는 계획도 머지않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문학관 옆 언덕에 있는 황순원·양정길 부부의 묘소를 찾아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1953년 발표해 1960년부터 2025년 현재까지 교과서에 실리고 있는 ‘소나기’는 3대가 한 주제로 어울리게 하는 ‘국민소설’이다. 작가 부부가 잠들어 있는 언덕에 봄볕이 가득하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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