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장한 장년의 사나이가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을 두 팔로 안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사진의 제목이 ‘영감받다’다. 노인을 가리키는 우리말 ‘영감’이 아이디어를 뜻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관람객이 빙긋 웃음을 짓는다. 불에 뒤틀리고 구부러진 30㎝ 자를 전시한 작품의 제목은 ‘자화상’이다. 15㎝ 자 셋을 이은 것에 ‘연장자’라는 제목을 붙인 이 웃기는 작가는 누구일까. 목아박물관 1층 전시실에서 만난 ‘한글 작가 박우택 개인전’을 보면서 우리말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기발한 상상력에 감탄한다. 놀라운 것은 ‘영감받다’에 등장하는 노인이 국가무형유산 제108호 목조각장 기능보유자인 목아 박찬수 선생이며 장년의 사나이가 목아박물관 박우택 관장이라는 사실이다.
■ 나무에 웃음과 감동을 새기다
여주시 강천면 이문안길 21에 자리 잡은 목아박물관은 1993년 개관한 사립 박물관이다. ‘목아’는 죽은 나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뜻을 가진 설립자 박찬수 선생의 호다. 붉은 벽돌로 만든 전시관이 멋스럽다. “서울 혜화동 서울대 문리대 건물이 헐릴 때 나온 벽돌을 재활용한 것입니다.” 본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이다. 나선형의 계단은 불교의 불(佛)·법(法)·승(僧) 삼보를 형상화한 것이다. 전시관 내부는 전통한옥의 창문과 틀을 응용해 불교의 현대화와 융합을 도모하고 있다. 앞에서 잠깐 소개했듯이 목아박물관은 재미있는 박물관이다. 하루 만에 완성했다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작품을 보자. 오월의 꽃밭처럼 환하게 웃음 짓는 커다란 얼굴 주위로 작은 얼굴이 수십 개 조각돼 있다. 생각에 잠긴 얼굴, 놀란 표정, 기다란 수염을 기른 사람, 부릅뜬 눈으로 앞을 응시하는 얼굴도 있다. 조각품의 좌우에 새겨진 ‘마음이 부자인 사람’과 ‘베풀 줄 아는 사람’이란 문장이 관람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당신은 이웃에게 베풀며 살고 있습니까?” 아침에 만나는 이웃에게 미소만 건네도 우리 사회는 훨씬 밝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웅변하는 작품이다.
박찬수 장인은 10년 동안 나무를 연구했다고 한다. 마침내 나무의 숨결을 고스란히 살린 작품으로 일가를 이룬 설립자의 예술혼을 만나기 위해 3층 상설 전시장으로 향한다. 1989년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을 받은 ‘법상(法床)’을 비롯해 목조각장 박찬수 선생의 대표작 150여점이 전시돼 있다. 나뭇결이 살아 있어 더욱 아름다운 반가사유상은 반드시 오래 머물며 위치와 각도를 달리해 감상해야 하는 작품이다. 천진난만한 동자상의 표정과 몸짓에 장인의 마음이 담겨 있는 듯하다. “이 조각 작품은 사포질을 하지 않는 것이지요. 오로지 칼질로 깎아낸 것인데도 동자의 해맑은 얼굴과 어깨선이 부드럽습니다.” 자귀로 나무를 찍어 깎고 다듬은 작품 앞에서 다시 한번 장인의 부드러운 숨결을 느낀다. “자귀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설립자를 제외하고는 달리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박찬수 목조각장의 작품을 살펴보면 문득 작가가 나무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붓으로 그리는 부처님 이야기
목아박물관이 소장한 3점의 보물은 빠뜨릴 수 없는 유물이다. 2층 상설전시실에서 1992년 국가 보물로 지정된 예념미타도량참법(보물 제1144호), 묘법연화경(보물 제1145호), 대방광불화엄경(보물 제1146호)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본다. 긴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은 유물이 전달하는 감동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그림으로 법문을 보여주는 탱화와 주목으로 만든 대형 염주도 아주 귀한 유물이다. 목아박물관을 채우고 있는 유물은 어떻게 수집했을까. “1970년대에 불교 목조각에 입문한 설립자는 불상과 장승부터 모으기 시작합니다. 절집에서 새 부처를 모실 때 이전에 있던 부처를 태우거나 매장하는 것을 보고 절집 사람들을 설득해 낡은 불상을 집으로 모셔 온 것입니다. 이렇게 모신 불상은 통일신라 때 작품부터 최근에 제작된 플라스틱 불상까지 다양하지요. 플라스틱 불상까지 모은 것은 시대에 따른 불상 제작 소재나 기법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흔해 빠진 플라스틱 불상도 세월이 흐르면 한 시대를 증언하는 소중한 유물이 될 수 있다는 박 관장의 지론에 공감하여 고개를 끄덕인다.
■ 저승의 끝, 지옥과 극락을 보다
2023 목아박물관 기획전 ‘열두 동물을 만나다’가 열리고 있는 1층 제1전시실에 들어선다. 박찬수 기능보유자가 조각한 쥐와 소와 호랑이를 비롯한 열두 마리 동물이 반겨준다. 자신이 태어난 해를 기억하게 만드는 ‘띠’에 관람객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관람객도 ‘십이지로 보는 나의 성격’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물론 아이들도 전시장을 둘러보면 자연스럽게 ‘띠동갑’이란 말의 뜻을 깨치게 된다.
지하 1층에 마련된 제1전시실에서 흥미로운 전시가 열리고 있다. ‘홀로 지옥’은 경기도와 여주시의 지원으로 마련된 ‘2024 목아박물관 기획전’이다. “상설전 ‘망자의 길, 산 자의 길’과 연계, 확장해 ‘홀로 지옥’이 기획됐지요. 저승에 간 망자가 시왕의 심판을 받고 난 후 지옥에서 다양한 벌을 받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시장을 나설 때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물음을 누구나 하게 만들었으니 성공한 기획이다. 볼거리와 생각거리를 잘 배합해 관람의 흥미와 집중력을 높인 점도 돋보인다. 염라대왕과 저승사자, 죄인의 역할을 체험할 수도 있게 구성한 것도 재미있다. 활활 타오르는 지옥불을 배경으로 찍은 기념사진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
제2전시실의 ‘망자의 길, 산 자의 길’은 죽음과 장례라는 주제로 우리 전통문화 속의 사후 세계관을 입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염라대왕을 비롯한 명부 시왕과 살아생전의 행위를 빠짐없이 보여주는 ‘업경대’와 ‘극락지옥도’가 전시돼 있다. 요즘은 보기 드문 ‘꽃상여’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재미있게 전시했다고 해도 죽음은 두렵고 무서운 주제다. 전시실을 나서며 관람객에게 들려준 박 관장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지하 전시장에서 계단을 오르면 빛이 환한 1층이 나오니 관람객은 부활을 체험하는 셈입니다.”
■ 조각품이 당신에게 건네는 나직한 목소리
야외 공원에서 만난 석조 미륵삼존불은 현대적인 조형미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저녁놀이 질 저녁 무렵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여주에 세종대왕의 영릉이 있다. 목아박물관에는 한문 대신 초등학생도 뜻을 새길 수 있는 한글 현판을 설치했다. 일주문은 ‘맞이문’으로, 대웅전은 ‘큰 말씀의 집’이라 쓴 한글 현판이 걸려 있다. 세종대왕도 ‘큰임금 세종’으로 불러야 한다며 한글 사랑을 강조한다. ‘큰 말씀의 집’은 박찬수 선생이 조각한 500여개의 목조 나한상을 모신 법당이다. 네 기둥에 달린 한글 주련의 글귀를 가만히 소리 내어 읽는 어린 관람객의 표정이 밝다. “마음이 부자인 사람”, “베풀 줄 아는 사람”, “가정이 행복한 사람”, “언행일치하는 사람”.
소나무가 운치를 더하는 야외 조각공원은 아무 때나 산책하기에 좋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놀이 지는 시간에 거닐어 보면 아주 좋습니다.” 소나무보다 키가 더 큰 ‘석조 미륵삼존대불’과 ‘금동비로자나불’, ‘석조 백의관음’과 ‘자모관음상’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관람객을 굽어본다. 박물관에서 만난 예수상과 성모상은 더욱 각별한 느낌이다. 조용히 묵상할 수 있는 ‘하늘교회’도 있다. 수령 500년 넘은 나무로 만든 천연 테이블이 있는 카페에 앉아 뜨거운 물에 홀짝 꽃을 피우는 매화차를 마시며 내면을 울리는 나직한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따뜻한 말 한마디, 웃음만 줄 수 있어도 당신은 부자입니다.” 죽은 나무에 숨결을 불어넣은 조각품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목아박물관은 낙엽이 진 겨울철에 찾으면 더욱 좋은 박물관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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