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이웃의 아픔을 나누어 보자

최근 한 TV방송국은 사회 최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사립고등학교를 소재로 한 드라마를 방영 중이다. 설정 자체가 암시하듯, 이 드라마는 현대자본주의가 가능하게 만든 부과 권력의 대물림에 기초한 신(新)신분제를 극화(劇化)하고 있다. 비록 이런 학교가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존재하기란 쉽지 않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것을 증명한 예가 바로 최근 우리나라 최상류층 자제들의 국제학교 부정입학 사건들이다. 그래도, 우리사회에 민폐를 끼치지 않는 한, 이러한 귀족학교의 존재는 그들만의 리그로 치부하며 어느 정도 무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정반대 편에 있는 (사회적으로) 버려진 아이들의 존재는 결코 간과할 수가 없다. 아픔딛고 일서는 새 가정들에 격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이 받은 상처들은 고스란히 우리사회 전체의 고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버려진 아이들이 참고 견뎌내야 하는 모진 시련들, 특히 그들의 비인도적, 비윤리적, 반인권적인 성장환경은 우리사회의 위선과 부정을 드러내는 바로미터(barometer)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최근 발생한 울주 8세여아 폭행치사사건과 서울 8세 남아 폭행치사사건 등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두 사건들은 공통적으로 이혼의 아픔, 새 가정에 대한 어린 자녀의 부적응, 의붓어머니의 히스테리와 잔인한 폭행, 친아버지의 무관심이라는 비극적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OECD 국가들 중 최고의 이혼률을 기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돌싱들의 재결합을 위한 TV 미팅 프로그램이 상당한 인기를 끌만큼, 가정들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이 공개적인 사회현상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공공연한 사회현상일지라도, 가정의 와해와 재구성은 가족구성원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문제가 결코 아니다. 특히 관계된 자녀들이 미성년일 경우, 그들이 받는 고통과 충격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새 가정 구성을 위해서는 부모의 (재)교육과 자녀를 위한 전문적인 상담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새 가정들의 부담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사회적 지원은 매우 미미한 상태이다. 특히 전문가들의 도움을 스스로 찾을 확률이 낮은 사회계층의 경우, 국가나 공공 전문기관들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이 매우 절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사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좀더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고민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소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의붓 부모들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의 편견이다. 특히 의붓어머니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고착화되어 있다. 그래서 동서양의 전래동화들에 등장하는 의붓어머니들은 십중팔구 악의 화신(化身)들이다. 물론 의붓 부모들 중에는 사악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친부모들 중에도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함께 울고 웃을 어깨와 가슴이 필요 반면 의붓 부모들 중에는 양(養)자녀들에게 친부모들보다 더 눈물겨운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붓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붓 부모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좀처럼 깨지지 않고 있으며, 이에 따라 많은 새 가정들이 불필요한 심리적 부담과 고통을 짊어지고 있다. 특히 앞서 언급한 종류의 사건들이 터질 때 마다, 의붓 부모들이 짊어져야 할 심리적 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지금 새 가정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현금이나 바우처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을 이웃, 그들이 기대어 울 어깨와 가슴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제 과거의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서려는 새 가정들에게 격려의 손길을 내밀어 보자. 그들에게 웃음을 되찾아 주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행복해지는 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김학중 꿈의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저 새벽처럼 그렇게 깨어 있으라!

용주사 도량이 10월 단풍으로 그윽하다. 용주사에서는 새벽마다 아침 예불 후에 108배 정진을 하고 있다. 사중의 스님들이 대웅전에 모여 참회와 감사와 발원의 내용으로 108배를 하는 것이다. 비감스럽고 진중한 분위기이며 고결하고 아름다운 수행자들의 모습이다. 부처님께 심신을 다 바쳐 머리와 팔과 발이 땅에 닿도록 지극한 마음으로 절을 올린다. 서양에서는 악수하고 포옹하는 방식 등 여러 가지 인사법이 있지만 우리 불교 수행자들은 만나면 서로에게 맞절하는 것을 인사법으로 하고 있다. 인사법 중에서 가장 크고 상대에 대한 최고의 예우를 갖추는 것이며 서로의 불성을 존중하여 절을 하는 것이다. 108배 안에는 참으로 진실하고 고귀하며 아름다운 수행의 공덕이 들어 있다고 하겠다. 108배를 마치고 나는 전강대종사의 사리탑으로 향한다. 전강대종사는 약관 23세에 확철대오(確哲大悟)하여 여러 선지식으로부터 인가를 받았고 77대 조사가 되셨다. 제방선원의 조실을 역임하고 용주사 중앙선원과 인천 용화선원을 개설하셨다. 전강선사는 아마도 전생에서도 투철하게 정진하셨기에 이른 나이에 깨달음을 얻으셨을 것이다. 항상 새벽마다 후학들을 위해 법문하셨는데 법문시간에 조는 사람이 있으면 크게 호통을 치셨다. 졸지 않고 정신을 맑고 분명하게 하여 법문에 집중하라고 하셨다. 전강대종사의 수행가풍은 인천 용화선원에 주석하시는 송담 대선사께서 이어가고 있다. 매일 새벽 전강스님 사리탑을 참배하며 깨어있는 마음으로 정진을 해가기를 다짐한다.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대왕도 평생 위민정신으로 깨어 있었다. 백성 모두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개혁하고 연구하였다. 우리나라가 생존하고 발전하려면 항상 우리의 민족혼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매일의 시작인 이 새벽처럼 그렇게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수행자들도 그렇고 사회의 지도자들도 그렇고 모든 국민들도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나는 경기도와 정조후예들이 정조대왕의 미래를 위한 열린 마음, 창조정신, 융합정신을 되살리고 계승하기 위해 창의적 과학교육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산 정약용과 실학 사상가들의 과학적지식의 응용으로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이 축조되었다. 정조대왕의 꿈의 신도시이자 미래도시인 화성은 참으로 미학적으로도 아름답다. 예술성까지 겸비한 문화유산이다. 나는 경기도와 수원화성오산 등 정조문화 권역도시들이 특히 한국 제일의 수학철학도시가 되기를 오래전부터 기원해 왔다. 수학을 대학입시 등의 학업성취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보다 더 근본적으로 21세기에 수학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수학의 철학은 무엇이고 왜 해야 하는지를 먼저 교육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학생시절부터 엄마, 아빠와 함께 수학철학교육을 받게 하여 스스로가 수학 세계에 뛰어들어 큰 과학적 인물이 되도록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벌써 중국은 국가 전략적으로 과학 중시 정책을 펼쳐오고 있지 않은가?. 경기도와 정조문화전역 지자체들은 특히 21세기 정조의 후예들을 육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한국에서도 세계에서 인정받는 인문학과 과학철학을 겸비한 뛰어난 인재 들이 많이 나타나게 해야 할 것 아닌가! 나는 이런 생각들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유아에서 초중고에 이르기까지 수학철학의 이야기가 꽃피는 그런 경기도, 그런 정조의 도시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발원한다. 나는 내일 새벽에도 보다 더 큰 참회와, 보다 더 큰 감사와, 보다 더 큰 발원을 위하여 용주사 법당에서 대중스님들과 함께 지극한 마음으로 108배를 올릴 것이다. 스스로가 저 새벽처럼 깨어 있기 위하여!, 우리 민족의 무한 발전과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올해 12월31일에는 용주사에서 지자체와 협의해 정조대왕 제야의 종 타종식을 계획 중이다. 나라발전과 모든 계층의 화합과 상생, 효가 살아 있는 그런 문화 복지국가 발전을 위하는 뜻으로 큰 희망과 화합의 장을 대화합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정조의 뜻과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로 장엄하게 개최할 예정으로 있다. 인해 스님 용주사 문화특보

[삶과 종교]사랑의 콩깍지

가톨릭교회에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인연을 맺는 결혼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해 교회법으로 명문화했다. 특별히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인연을 사람의 손으로 풀수 없다는 불가해소성(不可解消性)을 강조하며 이혼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단지 부부의 합의로 이루어진 결혼이 합의를 무시하고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가 발생이 되면 교회법원에 무효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신의를 지키지 않은 혼인자체를 무효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인을 하기 전에 더 깊이 생각하고 객관적인 결정으로 후회되지 않는 결혼을 할 수 있도록 마련된 제도적 장치인 것이다. 그러나 신앙을 바탕으로 하느님께서 맺어주는 인연이라고 할지라도 갈수록 성격차이와 인간적인 갈등으로 결혼생활을 지속하지 못하고 사회적 이혼으로 교회를 떠나는 신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가톨릭 신자들은 혼인전 의무적으로 혼인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전국통계 1만3천여쌍 정도가 교육을 받고 결혼을 하게 된다. 혼인교육에는 2박3일로 이루어지는 약혼자 주말 교육과 일일 교육으로 이루어지는 KANA 혼인강좌가 있는데 교육을 받으러 오는 청춘 남녀를 보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모두가 사랑으로 들떠 있고 눈빛은 서로에게 고정돼 있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누군가 자신의 파트너를 훔쳐갈까 싶어 손을 꼭 잡고 팔짱을 끼며 오로지 상대방을 위한 배려와 사랑으로 에너지가 넘쳐난다. 어쩌면 그렇게도 모두가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이런 젊은이들에게 배우자 될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적으라고 하면 모두가 장점만 가득 적어 놓고 단점을 별로 쓰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단점도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결혼한 지 10년 이상 된 부부들에게 각각 남편과 아내의 장단점을 써보라고 하면 모두가 단점만 잔뜩 적어 놓고 장점은 하나같이 없음이라고 써 놓는다. 오랜 결혼 생활 속에 이젠 장점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모든 것이 단점 투성이요, 허점만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서로를 위한 희생과 배려는 사라지고 욕심과 이기심만 가득해 부부간에 찬바람만 분다는 것이다. 도대체 부부는 왜 그럴까? 결혼 전 서로의 눈에 씌워졌던 사랑의 콩깍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존 그레이(John Gray)라는 미국 심리학 박사는 화성에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을 통해 남녀가 각기 다른 행성에서 왔다는 전제하에 갈등이 시작되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남자가 왜 연인과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필요로 하는지, 여자는 왜 변덕이 심한 것처럼 보이는지 등, 남녀의 근본적인 차이를 설명하는데 남자와 여자는 정말 다르다. 서로가 근본적으로 다른 행성에서 떠나와 결혼을 통해 지구라는 공동체의 가정을 형성하게 되는데 환경도 다르고 남자와 여자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과 철학, 생긴 모양, 생각하는 뇌의 구조, 같은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알아듣지 못해서 답답해하는 아내와, 말뜻을 못 알아듣는 피곤한 남편이 함께 살아간다는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남녀의 다름의 갈등은 태초부터 시작되었고 그 갈등의 역사는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러기에 남녀가 만나 부부로 산다는 것은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하나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부부가 된다는 것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 되어야 하며 서로를 이해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화성과 금성에서 온 두 남녀가 지구에서 함께 살려면 자신의 과거를 버리고 지구에 적응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송영오 신부.천주교 수원교구 가정사목연구소 소장

[삶과 종교] 우리는 왜 자신을 파괴하는가?

최근 우리 사회 전체를 경악시킨 두 흉악범죄 사건, 즉 하남 여고생 살인사건과 인천 모자 살인사건의 범인들은 모두 도박에 중독돼 수천만 원대의 빚을 진 사람들이었다. 즉, 도박중독에 빠져 자신들의 인생을 스스로 망가뜨린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결코 유익하지 않은 대상이나 행동에 중독되는가? 물론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들은 많다. 그런데, 그 중에서 눈 여겨볼 만한 견해는 자기파괴적 행동이 당사자에게는 나름대로 매력적이라는 심리학자들의 주장이다. 미국의 저명한 방송인 데니스 홀리(Dennis Wholey)는 반복의 심리학(Psychology of Repetition Compulsion)에서 자기파괴적 행동에 대하여 이렇게 주장한다. 대개 이것은 친밀함과 관계가 있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조정한다는 느낌과 함께 자신이 아주 강하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줍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그래서 자기파괴적 행동에는 약점보다 장점이 더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이 견해는 미국 예일대학교의 심리학자 폴 블룸(Paul Bloom)이 우리는 왜 빠져드는가(How Pleasure Works)?에서 주장하는 쾌락의 심리학과도 연결시킬 수 있다. 그는 쾌락은 인간 행동의 강력한 동기다라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사물의 본질(essence)을 장악했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희열이다. 이 두 가지 견해를 종합하면, 자기파괴적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되찾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쾌감을 느낀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즉, 각종 중독이나 자기학대(자살 포함) 같은 자기파괴적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즉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 다닌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첫걸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배타적 이기주의와는 다른 개념이다. 자신의 삶을 정말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131kg의 초고도 비만상태에서 1년 만에 무려 76kg을 감량하는 과정이 케이블 TV로 공개되며 유명해진 한 20대 여성이 지난 9월 22일에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직접적인 사인(死因)은 영양실조인데, 사망 당시 이 여성은 위의 크기를 강제로 줄이는 위 밴드 수술까지 한 상태였다. 그 결과 사망하기 얼마 전부터, 그녀에게는 구토와 실신이 부쩍 잦아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그녀는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무리한 다이어트를 했을까? 아마도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덧 다른 사람들의 시선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적 용서의 가치는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특정대상에 대하여 증오와 분노를 품고 있으면, 우리는 사실상 그 대상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즉, 상대방 때문에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통제할 수가 없게 된다. 내 삶의 주도권 되찾는 첫걸음 그래서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의 러스킨 박사는 용서(Forgive for Good)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의 영향을 받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 사람에게 우리의 감정을 지배할 권한을 주어버리는 셈이라고 설명하면서, 용서는 바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용서는 단순히 기독교의 추상적 가치가 아니라, 우리에게 참 자유와 성장을 가져다 주는 매우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선택이며,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이다. 이제 우리의 삶에서 미움을 털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푸른 가을하늘을 채워보자. 김학중 꿈의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정조의 산, 그리고 아름다운 실학의 봉우리들

벌써 초가을에 접어들었다. 산책하고 운동하기에 좋은 계절이 되었다. 효심의 본찰인 용주사에도 많은 분들이 가족과 함께 참배하러 오고 있다. 나에게는 매일같이 오르는 보배로운 마음의 산이 있다. 바로 정조라는 산이고 실학 사상가들이라는 봉우리다. 억울한 백성이 없게 하리라는 꿈이 무한히 깃든 정조라는 마음의 산이다. 그 산에는 뛰어난 봉우리들이 또한 많다. 아! 우리 반계의 봉우리며 성호, 다산의 봉우리다. 그리고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위민, 개혁, 예술, 융합, 효심의 봉우리들이다. 나는 매일매일 새벽 아침에 조용히 나무 밑 의자에 앉아 정조의 산으로 마음의 산행을 하고 있다. 많은 봉우리 중에 반계 유형원의 봉우리를 최근에는 가장 즐겨 찾는다. 오를 때마다 큰 감동과 희망을 얻기 때문이다. 반계(1622~1673)는 젊은 시절 여러 가지 정치적 사정으로 전북 부안 우만동으로 내려가서 반계 서당을 짓고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경기도에 잠든 정조와 삼대 실학가들 백성의 삶을 깊이 살펴봤고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방향과 방안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31세부터 49세까지 여지지를 비롯한 이기총론 등의 내용을 묶은 것이 필생의 역작인 반계수록이라는 저술이다. 반계는 19년의 세월을 바쳐 개혁사상과 이상 국가 건설을 구상했다. 농사를 짓는 백성들에게 땅을 균등하게 분배하고 양반상민 구분 없이 균등하게 세금을 부과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다. 어떤 인연인지 나도 20여 년 전에 부안 월명암 사성선원에서 열심히 참선 정진하고 있었다. 여름 한 철 공부가 끝나고 해제가 다가올 무렵 시간을 내어 부안의 여러 명소를 둘러봤고 반계의 서당을 찾아봤었다. 저 멀리 앞에 있는 산 아래 중턱쯤에 스스로의 뜻으로 집 하나가 서 있었다. 바로 반계 서당이었다. 그때에도 나는 마음 깊이 반계의 앞선 외로운 뜻을 접했었다. 반계는 특히 수원화성의 건설을 최초로 구상했다. 팔달산 들판에 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아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했다. 이후 10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정조는 이렇게 말한다. 반계수록을 읽고 나니 나에게 있어서 반계는 아침저녁으로 만난 사람과 같다. 반계는 조선 중후기에 경기도가 낳은 큰 인물이며 시대를 앞선 실학 사상가들의 비조였다. 나는 지금 선방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묵연히 사유해 본다. 나도 십수 년 동안 전국의 선원에서 참선 정진하며 부처님의 불성 평등의 가르침을 체득해가며 나의 참 주인공을 찾아 정진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남김없이 해탈의 생명이 되기를 기원하고 또 발원했다. 나와 반계의 마음은 무엇으로 하나라고 할 것인가? 나와 반계의 마음은 무엇으로 다르다고 할 것인가? 뜨거운 정열로 모인 성호 학파의 사상가들, 부민 강국을 위해 평생의 노력을 기울인 다산의 꿈과 외침이 가득한 이 정조의 산에 이제는 많은 이들이 함께 산책했으면 좋겠다. 대립과 분열 넘어 함께 사유의 산책을 각계각층의 대립과 분열을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문화복지 르네상스를 이루기 위해 반계의 봉우리를 오르는 이 사유의 산책을 우리 모두 함께 해가자. 기이하게도 정조와 삼대 실학사상가들이 지금 우리 경기도에 꼭 이루어야 할 꿈을 안고 잠들어 있다. 정조는 화성에, 반계는 용인에, 성호는 안산에, 다산은 남양주에. 우리 정조의 후예들은 이제, 찬란했던 18세기의 큰 위인들의 꿈을 이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우리 경기도가 나라발전을 위한 크고 앞선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우리 정조의 후예들이 모두 다 스스로 귀하고 훌륭한 이들이 되기를 기원한다. 인해 스님 용주사 문화특보

[삶과 종교] 식구(食口)들이여! 밥 좀 먹읍시다

국어사전에서 가정(家庭)이란 부부를 중심으로 자녀들이 함께 모여 의(衣), 식(食), 주(住)를 해결하는 운명공동체요, 생활공동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가족(家族)이란 한솥밥을 먹는 식구(食口)들로 식탁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지붕 아래 살면서 함께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며 울고 웃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곳이 바로 삶의 현장(現場)인 가정인 것이다. 이렇게 가정은 한집에서 함께 머물며 서로에게 용기와 사랑을 주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모임으로 이 사회를 만들어가는 기본 세포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가정의 모습이 이상하게 변하고 있다. 한 가족이면서도 형제간의 끈끈한 정(情)은 사라지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서로가 위로해 주는 안식처가 아니라 단지 필요에 따라 모였다 헤어지는 사랑방 손님들처럼 되어 버렸다. 가족들이면서도 언제 함께 밥을 먹었는지 손을 꼽을 수가 없고 서로가 바쁜 일과속에서 언제 집에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알지를 못한다. 마치 하숙집에 기거(寄居)하는 사람들처럼 조용히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소리 없이 썰물처럼 사라져 버린다. 가정이란 하루 종일 피곤했던 심신(心身)을 편히 하고 가족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내일을 위해 에너지를 재충전해야 하는 사랑의 둥지여야 하는데 갈수록 가족들 서로가 만날 여유도 없고 대화할 시간도 사라져 점점 모르는 사람들처럼 정(情)이 메말라가고 있다. 집안은 어려운데도 가정형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한 몸 편하자고 집밖으로 뛰쳐나가 친구들과 생활하는 청소년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성격차이, 대화부족으로 자녀들과의 갈등을 겪는 가정들이 생각보다 많다. 가정의 본질이 무너지고 점점 기능위주로 변해가는 오늘날, 가정을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우리사회가 곧 무너지고 말 것이다. 점점 삭막해 지는 세상 안에서 그래도 가족만의 살길을 찾기 위해서는 가족관계와 가정의 본질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우선 첫째,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 앉아 밥부터 먹어야 한다. 음식 끝에 정분난다라는 옛말이 있듯이 밥을 같이 먹다보면 없던 정(情)도 생겨나고 특히 한국의 문화는 함께 찌개를 퍼먹는 식탁의 문화가 가족 간에 더욱 인간미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밥을 함께 먹지 않는다면 식구가 될 수 없다. 모름지기 가족이라면 밥을 같이 먹는 기본적인 관계여야 한다. 둘째, 잠을 함께 자야 가족인 것이다. 공부도 좋고 직장도 좋지만 가족들이 한지붕아래 모여들지 못한다면 가족공동체로서 의미가 없는 것이다. 부부간의 문제가 있다하여 각방을 쓰면 더 큰 문제를 초래하듯이 가족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함께 기숙(寄宿)하는 것을 포기한다면 가족을 포기하는 것이다. 오늘날 가정의 위기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시스템이 무너지면서 시작된 것이다. 가족들이 같이 잠자고 함께 밥을 먹는 기본적인 가정의 시스템이 복원돼야 우리 사회가 건강해 질 수 있는 것이다.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은 어렵고 힘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밥 먹고 잠자는 문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의 가정을 스위트 홈(Sweet Home)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나누고 마음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 필요하다. 집을 생각하면 따듯한 어머니가 생각나고 밖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었더라도 집에만 돌아가면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고 모두가 내편이 될 수 있는 응원군인 가족은 우리가 살아가는 존재의 근원인 것이다. 가족들이여! 어서 집으로 돌아가 사랑이 듬뿍 담긴 구수한 된장찌개에 온가족이 함께 빠져 봅시다. /송영오 신부, 천주교 수원교구 가정사목연구소 소장

[삶과 종교] 마지막 한 수까지 집중해보자

온라인 역할놀이게임(Role-Playing Game)을 즐기는 요즘 청소년들은 잘 모를 수 있지만, 바둑이나 장기를 즐기던 세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오목(五目)이라는 게임을 해보았다. 이것은 바둑판에 바둑돌을 놓아 5개를 먼저 나란히 놓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이 오목의 묘미 중에 하나는, 때로는 실제 오목게임을 하는 사람들조차 자신들의 한 수가 최종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도적으로 바둑돌을 잇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얼떨결에 바둑돌 5개를 이을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오목이 요행으로 이길 수 있는 게임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목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끝까지 유지해야만 얼떨결에 주어진 기회라도 붙잡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잠시라도 집중력을 잃게 되면 자신에게 주어진 결정적인 기회들을 허무하게 날릴 수밖에 없다. 나는 인생도 오목게임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잠시라도 집중력을 잃게 된다면 최근 한 인물이 야구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벤처업계의 신화인 허민(37)씨다. 1995년에 서울대 응용화학과에 입학한 그는 2001년에 네오플이라는 게임업체를 설립했다. 그리고 곧 캔디바라는 게임을 만들어 짭짤한 수익을 올렸지만, 이후에 출시한 게임들이 모조리 실패하면서 수십억 원의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하지만 그는 2005년에 던전앤파이터라는 게임을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마침내 2008년에 네오플을 3천800억원에 넥슨에 매각하는 데에 성공했다. 30대 초반에 3천억 원대의 자산가가 된 것이다. 그 이후 그는 대규모로 부동산에 투자를 하더니 갑자기 미국 버클리 음대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귀국했고, 2010년부터 한 벤처기업의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드디어 그가 경영에 복귀하는 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2011년에 국내 최초의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를 창단했고 마침내 지난 8월 29일에는 미국 마이너리그의 락랜드 볼더스(Rockland Boulders)에 투수로서 정식입단했다. 얼핏 보기에는 허 씨의 인생이 오목이 될 것 같지 않지만, 그는 의외의 각도에서 오목을 즐기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야구를 좋아했던 그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야구부에 가입했다. 네오플을 경영하던 시절에는 밤샘작업을 한 후에도 자신이 응원하는 프로야구팀의 경기만 열리면 장소를 불문하고 뛰어갔다. 그가 던전앤파이터로 큰 성공을 거두기 직전에 개발한 게임도 신야구였고, 버클리 음대 유학시절에도 사실 그는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너클볼 투수 필 니크로에게 약 1억원을 수업료로 지급하면서까지 너클볼을 배웠다. 고양 원더스를 창단한 이후에는 2년간 김성근 감독을 수시로 찾아가 투수훈련을 받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올해 초부터 미국 프로야구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결국 그 꿈을 이루었다. 물론 그의 투구실력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그리 좋지 않다. 나름 너클볼 좀 던진다는 수준이다. 그리고 이번 시즌에 허 씨가 실제로 뛸 수 있는 경기는 1경기 정도 밖에 안 남았고, 따라서 받는 보수도 15만 원 정도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 기회, 허무하게 날리게 돼 그러므로 과연 그가 이 기회를 더 이어갈지, 아니면 한낱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날릴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팬들은 그가 제레미 린(Jeremy Lin)처럼 민새너티(Min-Sanity) 열풍을 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여러분의 인생 오목게임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우리 모두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정성껏 한 수, 한 수를 두어보자. 김학중 꿈의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염려하는 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큰 일이 없으면 아주 하찮고 작은 일을 가지고 걱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큰 일이 벌어지면 그런 하찮고 작은 걱정들은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걱정을 하고, 성적이 떨어졌다고 걱정하고, 아이들이 거짓말을 한다며 걱정을 합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덜컥 병이 나서 누우면 지금까지 하던 걱정거리들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공부 못해도 좋다, 그까짓 5등 하다가 10등으로 밀리면 어떠냐, 앞으로는 거짓말해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근심 걱정에 싸여 있던 마음이 순간적으로 너그러워집니다. 또 집집마다 보면 형제들이 별 것도 아닌 문제들로 서로 다투고 따지고 아옹다옹하며 살아갑니다. 그것도 큰 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덜컥 병이 나서 입원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 동안의 일은 싹 사라져 버립니다. 큰일이 생기면 그렇게 쉽게 너그러워질 것을 아주 시시한 문제들을 가지고 아옹다옹하며 얼굴을 펴지 못하고 살아간 것입니다. 우리가 크게 걱정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들은 실제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일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문제에 치일 때마다 인생 전체 바라봐야 어느 비행사가 이런 일을 경험했답니다. 두 시간 가량 비행을 한 후 그는 기체에서 나는 소음을 들었으며 곧 이 소음이 쥐가 무엇을 갉아 먹는 소리임을 알았습니다. 그의 비행기가 착륙하고 있는 사이에 쥐가 기체내로 들어 와서 그의 비행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쥐의 날카로운 이빨이 정밀한 기체를 얼마나 갉아 먹을지 몰라 그는 몹시 두려운 생각에 잠겼습니다. 처음에는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떠나온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데도 두 시간이 소요되고 앞으로 착륙할 지점에 도착하는 데도 두 시간이 소요되는 그런 위치에서 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는 쥐는 설치 동물이기에 높은 곳에서 적응력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이 사실을 상기한 비행사는 비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천 피트 상공으로, 또 1천 피트 상공으로, 이런 식으로 상공을 비상해 고공 2만피트 높이로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쥐가 갉아 먹는 소리가 멈추었습니다. 두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그가 다음 착륙지에 안전하게 착륙했을 때 기체의 구멍에 쥐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문제 속에서 치일 때마다 우리는 문제를 벗어나 우리 인생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문제는 언제까지 계속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반드시 끝납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얼마나 시간이 걸리느냐의 문제일 뿐 반드시 지나갑니다. 염려한다고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걱정하는 대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지금 나에게 맡겨진 일들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합니다. 윌리엄 오슬로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사람이며, 미국에 있는 유명한 존 홉킨스 의과대학을 설립했습니다. 그가 풋내기 의대생이었을 때, 앞날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이러한 어두움에서 끌어낸 것은 우연히 읽게 된 토머스 칼라일의 글 한 토막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 대신 지금에 최선 다해야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먼 곳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똑똑하게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 수 없는 내일을 염려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오늘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그는 그때부터 바로 오늘 해야 할 일들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가 훗날 예일 대학에서 연설을 하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미래는 오늘뿐이다. 미래 안에 내일이란 없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날은 바로 오늘이지 내일이 아니다. 오늘 하루 염려하는 편을 선택하지 말고 나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편을 선택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김병삼 분당 만나교회 담임목사

[삶과종교] 인간은 자유를 향해 진화하고 있는 존재

우선 불교의 용어인 해탈이란 단어를 사용하게 됨을 불자 분들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해탈이란 불교에서 인간이 속세적인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상태로 이해하다 보니 우리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이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로 늘 생각해왔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요한 8장 32절 참조) 먼저 진리를 깨우치도록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는 중에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요한 19장 37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진리란 개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겐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행위 안에서 터득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여러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만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추구하는 자유라는 개념과 현세적인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는 많은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 사랑의 기술이란 책을 써서 세계인에게 공감대를 형성했던 유태계 미국의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현대인들은 정치 경제 종교적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또 다른 장벽들 즉 고독과 무력감이 자신을 휩싸기 시작함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독과 무력감인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사랑과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일을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해 나갈 때 삶의 의미 자유를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현대 정보산업이 자유로운 행복의 세계를 향한 여러 방법을 개척하고 있지만 개체인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에 완전히 갇혀 지내다 보니 예기치 않은 답답함과 절망이 우리를 휘감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출구 없는 장 안에 갇힌 신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와 해탈의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음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의 왜 도덕인가?에서 인간 사회가 아무리 약육강식의 환경이라 하더라도 도덕이 중요시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시대와 환경에 따라 좀 변질이 되더라도 그 가치는 엄연히 존재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지만 결국 도덕이라는 틀 안에서 자유를 찾아야 함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구원(자유)을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말씀하십니다.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 진리가 거기에 있음을 보는데 바로 이것이 사랑과 용서 그리고 평등한 사회의 구현입니다. 불란서의 고생물학자요 진화론을 그리스도 종교차원에서 예리하게 제시한 떼이야르 드 샤르댕(Teihard de Chardin) 신부는 예수님을 우리 인간의 진화의 최종 목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 오메가 점이라고 합니다. 즉 세상의 모든 존재가 결국 예수님께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엔 예수님과 합일하기 위해서는 진화의 기본 에너지인 사랑이 전제됨을 강력하게 제시합니다. 사랑과 용서ㆍ평등한 사회가 해답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의 모습입니다. 불교에서도 해탈의 경지를 무아의 경지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합일하기 위해서는 기본에너지인 사랑을 전제로 하는데 그 구성요소는 바로 용서와 평등한 사회구조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부지불식간에 예수님을 향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최재용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소와 사자의 사랑이야기

옛날에 소와 사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너무나 사랑해서 결혼해 살게 되었습니다. 둘은 항상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소는 사자를 위해 날마다 제일 맛있는 풀을 사자에게 대접했습니다. 사자는 싫었지만 사랑하는 소를 위해 참고 먹었습니다. 사자도 매일 소를 위해 가장 연하고 맛있는 살코기를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고기를 먹지 못하는 소도 괴로웠지만 참고 먹었습니다. 하지만 참을성에는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둘은 마주앉아 서로에 대한 고층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결국 소와 사자는 크게 다투고 끝내 서로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알고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한 말은 난 당신에게 최선을 다 했어라고 하였습니다. 소는 소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자기가 최선을 다해 상대방에게 대하고 사자는 사자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자기 자신의 눈으로만 보고 자기의 생각만으로 모든 것을 행한다면 아마 무인도에 있는 자기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상대방 못보는 최선이 최악의 결과 초래 말하자면 소는 소의 세상만 살고 있는 것이고, 사자는 사자의 세상만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 상대방을 보지 못하는 최선! 그 최선은 최선일수록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죠. 부처님 말씀 중에서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라는 생각 집착에 사로잡히면 모든 망상과 허상만 자기 주위에 있을 뿐! 자기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듯이 나는 지금도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어쩌면 그것도 나 위주로 생각하고 상대방을 보지 못하는 최악의 최선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시고 남에게 다가가고 배려한다면 보다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동업중생, 상대 배려하고 살면 아름다운 삶 상대방이 잘못해서보다는 내가 잘못했어! 상대방이 자기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닐까보다는 내가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배려한다면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는 사랑하는 사자를 위해 살코기를 준비해 주었을 것이고, 사자는 사랑하는 소를 위해 맛있는 풀을 준비해 주었을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업중생(同業衆生)이라 합니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살아간다면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무더운 긴 여름입니다. 더위를 이겨내시는 지혜를 발휘하시어 불자님들의 가정에 항상 웃음꽃이 활짝 피는 나날이 되기를 발원합니다. 성행 청계사 주지

[삶과 종교] 진정 사랑해야 할 사람

요즘 한국 사회는 외모 지상주의가 대세인 것 같습니다. 외모가 연애나 결혼 같은 사생활은 물론, 취업이나 승진 같은 사회생활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믿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외모를 가꾸는데에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외모 지상주의로 인해 한국 사회는 성형과 다이어트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 버렸고, 심지어 청소년 성형도 늘어나는 추세로 성형외과 손님 가운데 청소년 비율이 15%에 이른다고 합니다. 미국의 갤럽 조사에 따르면 자신의 외모에 만족하는 사람은 남자 28%, 여자 13%에 불과하며, 바꿀 수 있다면 자신의 외모를 바꾸겠냐는 질문에 남자의 94% 여자의 99%가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미국의 갤럽 조사지만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예측을 하게 됩니다. 성 어거스틴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대한 파도와 굽이치는 강물과 저 광활한 우주의 태양과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는 감탄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감탄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놀라워야 할 것들이 많이 있지만 먼저 내 존재가 얼마나 신기한 작품인지 감탄해야 합니다. 외모 지상주의로 청소년 성형 급증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에 자신의 형상을 따라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드셨다고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을 만드신 후에 기뻐하며 감탄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소중한 존재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나를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흑인 지도자인 말콤 엑스는 어렸을 때부터 백인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미워하면서도 자신이 백인처럼 되고 싶었기에 피부를 희게 하는 크림을 바르고 머리를 염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비참해 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백인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흑인으로서의 삶을 살기로 작정하고 멋진 말을 남깁니다. Black is beautiful 진정한 회복과 부흥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을 사랑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나 자신을 더욱 아끼고 기다려주고 믿어주어야 합니다.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소설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동안 바라보곤 한다. 말을 쉬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쉬려는 것도 아니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위한 배려였다. 그리고 영혼이 왔다 싶으면 그제서야 다시 달리기를 시작한다 우리는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고, 탁월해지기 위해서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어 사용하며 살아가야 하는 시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 받기를 원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원하고, 더 성공하기 위해서 목표를 향해 저마다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달려가는데 정작 내 능력은 내가 원하는 목표를 따라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조급해 하면서 자신에게 화를 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원망하며 자책하며 살아갑니다. 무한경쟁시대, 진정한 힐링은 자기愛 그러나 정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인내해 주고 기다려 주고 참아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존재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여러분은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렇게 여러분을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진정한 회복은 나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할 때에 일어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김병삼 분당만나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클래식 음악과 정신건강

제가 살고 있는 마을 어귀에 느닷없이 큰 플래카드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참 착잡했습니다. 내용은 우리 자녀들의 잘못된 인성 더 이상 방치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습니다. 절실합니다. 가르쳐야 합니다. 바르게살기운동 ○○동 위원회.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의 인성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가슴을 졸이며 걱정합니다. 실제로 젊은 세대들은 좀 더 특출한 것에 정신을 쏟습니다. 이들은 질풍노도의 시기로 사회규범에서 벗어나고 싶은 반항과 일탈의 심리를 갖는 때이기에 특히 이들의 우상인 인기연예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무서울 만큼 유행의 장을 형성합니다. 그런가 하면 입시경쟁이란 살벌한 긴장감의 연속을 매일 겪다보니 학생들은 그런 압박된 환경과 초조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잠시라도 잊기 위한 방편으로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음악과 다양한 영상에 깊이 빠져있습니다. 어느 작가의 말과 같이 우리 현실은 도덕이 무너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경이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신문에 기성세대가 만들어 가고 있는 사회의 분위기를 만화의 형식으로 표현하면서 이런 자막이 쓰여 있습니다. 권모술수, 사찰, 국정원기밀누설, 왜곡, 거짓, 부정 등입니다.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무질서를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우리의 자녀들에게 책임을 지우듯 걱정합니다. 금전만능ㆍ감각주의에 치우친 사회 곰곰 생각해 보면 이런 모든 것은 다 우리 기성세대가 그저 경제적으로 윤택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고 외치면서 선거 때만 되면 경제 살리기에 온 국민을 몰아온 결과로 봅니다. 이번 대선에도 여지없이 경제부흥이 우선입니다. 물론 우선 잘 살아야 함을 모를 리 없지만 이제는 어떻게 이 경제를 누리는 쪽으로 생각해 볼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젊은 세대뿐아니라 우리 기성세대들도 이런 착각에 빠지다 보니 어떻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가에 망설이게 됩니다. 이렇게 현대 사회는 집단 병리현상으로 금전만능과 감각주의에 너무 깊이 치우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런 현실주의에 묶여 있음을 봅니다. 이렇게 정신적인 압박감을 크게 느끼고 있는 젊은 세대들이 허무주의와 말초적 생활에 길들여지다 보니 서로를 의식하는 예의와 공동체의식이 결여되어 있음을 자주 보게 됩니다. 너무 편하고 재미있는 환경에 길들여 지다보니 많은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결혼생활을 기피하거나 자녀생산에 대한 두려움이 만연되어 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일부 대안은 우리 젊은이들이 너무 환각의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테크노음악이나 R&B 그리고 힙합 그리고 아이돌의 댄스 음악 등의 대중음악에만 치우치지 않고 클래식 음악을 통해서 우리의 정서를 차분하게 만들 수는 없는가도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요새는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압박감이라든지 여러 정신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음악치료라는 것에 많은 효과를 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음악치료의 대부분이 바로 클래식 음악이 라고 합니다. 클래식 통해 차분한 정서 일깨워야 바로 이런 음악을 통해서 보다 차분한 사회 환경을 만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도 이런 갖가지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에 맛을 들일 때까지는 대중음악에 길들여진 젊은이들이 쉽지 않기 때문에 부모들이나 기성세대들과 교육계에서도 열심히 방법을 찾아서 요새 힘들어 하는 우리 자녀들이 정서적으로도 안정감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면 얼마나 좋겠는가 생각합니다. 최재용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더위를 피해서 뭣하리!

동산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다. 더위가 닥쳐오니 어떻게 피하리까? 무엇 때문에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느냐? 더위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덥다. 지구 온난화 덕분인지 여름을 맞는 체감온도는 해마다 더 뜨거워지는 같다. 하긴 본래부터 삼복더위라고 했으니 더울 때가 되어 더운 것인데 중생들은 이를 무슨 새로운 사건이라도 생긴 것처럼 해마다 별스러운 일로 받아들인다. 무더위라는 낮 시간대에 국한된 더위의 고전적 표현은 이제 더워서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열대야로 이어졌다. 여름을 앞둔 일기예보의 으름장은 에어컨 수요를 더욱 부채질한다. 하지만 실내를 시원하게 만든 과보로 바깥 기온을 더 뜨겁게 만든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어쨌거나 더 큰일은 더운 것 보다는 더워야 할 때 제대로 덥지 않은 일인 것이다. 그건 재앙이다. 더워야 할 때 제대로 덥지 않은 것 재앙 여름을 맞이하는 마음가짐에도 두 종류가 있다. 더위를 피하고자 하는 피서파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이열치열을 외치는 영서파(더위에 맞서고자 하는 분류)도 있기 마련이다. 사실 선종 입장은 피서파가 아니라 영서파를 추구한다. 무정물인 연꽃은 더위를 즐기는 모양새다. 한창 더울 때 한반도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더위를 이겨내는 당당한 자태는 보는 이로 하여금 더위조차 잊게 한다. 굳이 분류하면 연꽃도 영서파에 속한다 하겠다. 예전에 추운 정월 대보름날 미리 더위팔기를 했다. 아침 일찍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재빠르게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른 뒤 내 더위 사가거라하고 외치면 끝난다. 그 공덕으로 그 해는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당해야 한다면 이건 불공평한 일이다. 모든 거래는 늘 동등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위를 사라라는 말을 듣더라도 긍정하지 않고 도리어 내 더위 먼저 사가시오라고 반격하면 오히려 상대방의 더위까지 떠안고 오게 된다. 혹 떼려다가 혹 붙이는 셈이다. 이를 학이라고 이름 붙였다. 더위가 없는 곳은 없다. 성경에는 땅이 있을 동안에 추위와 더위가 쉬지 않으리라하였다. 이슬람의 금욕정진 기간인 라마단은 그 뜻이 타는 듯한 더위라고 했다. 더위를 수행으로 극복하자는 뜻이 깔려 있다. 정조대왕의 어록인 일득록에는 나름대로 성군다운 피서법이 나온다. 더위를 물리치는데 독서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책을 읽으면 몸이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고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 생겨 바깥의 더운 기운이 자연히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독서삼매를 통하여 더위를 잊고자 하는 경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어떤 납자가 노숙에게 물었다. 날씨가 더우니 어디로 피해야 합니까? 끓는 기름 가마솥으로 피하라. 더 과격한 서어록의 표현을 빌리자면 더운 날 시원하고 싶다면 화탕노탄 속을 향해서 뛰어들라고 했다. 화탕은 물이 펄펄 끓는 곳이고 노탄은 숯불이 벌겋게 불붙어 있는 상대를 말한다. 이 말에 대하여 무비스님은 이렇게 해석했다. 덥다 생각 버리고 치열하게 정진하길 더위를 의식하고 사는 것 자체가 열렬하게 그 무엇인가에 마음을 쓰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일생을 던져도 아깝지 않은 일에 마음을 쓴다면 그 까짓것 더운 것이 뭐 그렇게 문제될 것이 있겠는가? 열심히 정진하면 더위도 잊는다. 덥다는 것은 제대로 정진하지 않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화탕노탄의 불처럼 치열하게 정진하라. 더위를 의식한다면 그게 뭐 제대로 된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마치 어떤 사람이 화탕노탄 지옥에 들어가도 타거나 데이지 않아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평상심을 영원히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떤 곳에 있다고 할지라도 영원히 휴식을 얻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이산 혜연 선사 발원문에서 말하는 화탕지옥 끓는 물이 감로수로 변하는 것이다. 성행 청계사 주지

[삶과 종교] 새로운 습관 만들기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가 유명한 현인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녀를 잘 키울 수 있습니까? 현인은 어머니를 정원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는 정원에 있는 네 그루의 나무를 한번 뽑아보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갓 심어놓은 첫 번째 나무를 아주 쉽게 뽑았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약간의 힘으로 가능했습니다. 세 번째는 심은 지 꽤 지난 나무였습니다. 어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그것을 뽑았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나무는 이미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팔을 걷어붙이고 힘을 쏟았으나 나무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현인이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자녀교육도 이 나무와 같습니다. 오랜 습관은 깊은 뿌리를 내려서 그것을 바꾸기가 어렵지요. 어린 자녀에게 좋은 습관을 갖게 하십시오. 오랜 습관을 바꾸기란 상당히 어려워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처럼 습관을 바꾸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습관을 바꿀 수 있습니다. 흑인 인권운동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입니다. 그는 미국에서 흑인의 인권 운동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1964년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인물입니다. 그가 흑인 인권 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한 계기는 로사 팍스라는 흑인 여인이 버스 안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경찰에 구속한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일은 이전에도 종종 있었지만 그때마다 폭력 사태로 번져 결국 상처만 남긴체 실패로 끝나곤 했습니다. 폭력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잘못된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나 킹 목사는 달랐습니다. 킹 목사가 이 일로 인해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 참여해 설교를 하고 있을 때에 아내와 딸이 있는 집에 폭탄이 터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다행히 폭탄이 현관 앞에서 터졌기 때문에 잡 안에 있던 아내와 딸은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킹 목사의 집으로 몰려온 많은 사람들은 흥분했고 분위기는 험악해져서 금방이라도 폭동이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 그때 킹 목사가 군중들에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자중하십시오. 폭력은 안 됩니다. 칼로 사는 자는 칼로 멸망할 것입니다.. 우리는 백인 형제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세기가 흘렀지만 이 말씀은 아직도 우리 옆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권운동을 하던 흑인들에게 새로운 습관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여전히 인종차별은 심했고, 흑인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항하거나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흑인들은 지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의지갖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변화가능 그들이 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부터 그들은 폭력에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 감정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원수를 사랑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비폭력 운동은 성공하고 결국 그들은 평등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30번째 생일에 사람들을 초대하며 쓴 글이 있습니다. 인생의 처음 30년은 자신이 습관을 만든다. 그리고 인생의 나머지 30년은 습관이 사람을 만든다.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바꾸어줄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가십시오. 새로운 습관이 여러분들을 지켜주게 될 것입니다. 김병삼 분당 만나교회 담임목사

[삶과 종교] 생명의 위대함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누리고 있는 생명은 어떤 경우라도 절대적입니다. 더구나 신앙인은 이 생명이 절대자이신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깨달음은 석존이 사자후로서 하신 천상천하유아독존입니다. 제가 감히 불교의 가르침을 넘나보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만 이 말씀은 존재의 존귀함 즉, 존재의 본질이 영원하고 무한하고 완성적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슬람교에서도 인권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입법부 또는 지상의 어떤 정부도 하느님께서 주신 권리들에 대해 어떤 수정 또는 변경할 수 있는 권리나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 종교도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오 16장 26절)라고 인간의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예수님께서 명쾌하게 말씀하십니다. 인간 생명의 존귀함은 절대적인 것 대통령 소속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산하 특별위원회가 최근 마련한 무의미한 연명의 의료결정에 관한 권고안 초안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듣는 공청회가 며칠 전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가톨릭의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제도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윤리적 의미와 비전을 바라보는가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바탕으로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환자의 질병의 정도가 즉 임종기에 있는 것에만 국한되도록 한다는 것이면서도 여러 환자의 경우를 보면 천차만별이라서 때로는 무리수를 두는 경우를 임상에서 자주 겪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법제도화보다 꼭 선행되어야 할 것이 병원 내의 윤리위원회를 활성화하여 환자의 생명의 판단과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까다로운 사안에 대해 숙고함으로써 의료의 윤리성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 가톨릭 병원엔 들어오는 정문에 치유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라고 크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 중앙 의료원은 죽음을 맞는 이들이 하느님나라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인간다운 품위를 돕는다라는 이념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 인간의 생명에 대해 아무리 의술이 발달되었다고 해도 이를 인위적으로 제도를 만들어서 무의미한 연명의 결정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잘못하면 생명의 극에까지 의료진이 개입한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문에도 나는 인간의 생명을 그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합니다. 지상(至上)이란 더 없이란 말로도 표현합니다. 영어로는 most of all이나 supremely 혹은 utmost respect로도 표현합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김홍섭 판사의 일화는 우리를 감동시키고도 남습니다. 김 판사가 1961년 피고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면서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나와 피고인 어느 쪽이 죄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의 능력이 부족해 당신을 단죄하는 것이니 이해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피고인 가족들에게 먹을 것을 들고 찾아가곤 했는가 하면 사형 후엔 그가 묻혀 있는 무덤을 자주 찾아가서 기도를 했다고도 합니다. 무의미한 연명의 결정 윤리성 중요 우리는 여기서 인간인 의료진의 한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 소설 동의보감에도 나오듯이 우리는 이런 의사들에게 나의 마지막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명의(名醫) 심의(心醫) 신의(神醫) 그리고 성의(聖醫)들이 계시다고 합니다. 심폐소생술이든 인공호흡기든 혈액투석이든 항암제 투여든 우리는 허준 같은 성의나 아니면 그의 스승 유의태 같은 신의에 맡기고 싶습니다. 그러면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의사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최재용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계율(戒律)

계율에서 계(戒)란 행위이며 습관이다. 말과 행동으로 악을 짓지 아니하고 짓기 전에 막는 것이다. 율(律)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이 지켜야 할 행동규범이다. 조복이다. 여러 가지 잘못과 악을 제복하는 의미이다. 그리고 불교의 윤리와 도덕이며, 부처님의 제자에 대한 교육관이다. 불자는 출가불자와 재가불자가 있다.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란 말이다. 먼저 재가 불자의 계부터 이야기해보자. 출가불자든 재가불자든 계를 받으려면 먼저 삼귀의를 해야한다. 첫째, 귀의불(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이다. 둘째, 귀의법(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이다. 셋째, 귀의승(거룩한 승가에게 귀의합니다.)이다. 이 삼귀의는 불교 입문의 자세를 나타내는 것으로 모든 계는 이 삼귀의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계를 받을 체(體), 즉 수계자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삼귀의만 따로 설하는 삼귀의 계는 없지만 다음의 계 등을 받으려면 삼귀의를 해야 한다. 계율이란, 불교의 윤리와 도덕이며 이어서 세가지 계율이 있다. 첫째는 5계, 불살생(자비롭게 살자), 불투도(베풀며 살자), 불사음(청정하게 살자), 불망어 (진실하게 살자), 불음주(지혜롭게 살자)이다. 둘째는 매월 6재일(음력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마다 지키는 팔관재계(八關齋戒)이다. 팔관재계에서 팔(八)은 하룻날 하룻밤 동안이라도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온갖 목숨을 일부러 죽이지 않는다. 하룻날 하룻밤 동안이라도 바늘 하나 풀 한포기라도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는다. 하룻날 하룻밤 동안이라도 다른 남녀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의 아내나 남편도 가까이하지 않는다. 하룻날 하룻밤 동안이라도 진실하지 않는 거짓말, 꾸민 말, 이간질하는 말, 욕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룻날 하룻밤 동안이라도 곡식이나. 과일이나 꽃으로 빚어서 만든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시지 않는다. 하룻날 하룻밤 동안이라도 귀금속 장신구나 고급향수를 바르는 사치나 지나친 화장을 하지 않는다. 하룻날 하룻밤 동안이라도 노래 부르거나 춤추거나 악기 연주하거나 노름하거나, 가서 구경하고 듣지도 않는다. 하룻날 하룻밤 동안이라도 호화로운 방석이나 이부자리나, 의자 같은 데에 앉지 않는다.는 등의 여덟가지 계를 뜻한다. 관(關)은 여덟 가지 악을 가로 막아서 모든 허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재(齋)는 삼간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제자에 대한 교육관 앞에 여덟 계에 있어서 아홉째 한낮이 지나면 온갖 음식이나 과일 같은 것을 먹지 않는 계(不非時戒)를 지킴으로써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의 여섯 가지 깨닫는 세계를 잘 다스려 모습, 소리, 냄새, 맛, 느낌, 고정관념의 여섯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않게 함을 말한다. 모든 악을 끊고 선을 갖추어 닦으므로 재(齋)라고 한다. 이와 같은 뜻을 합해서 팔관재계라 한다. 맹세하고 지키는 하루의 금식기도로 한 달에 여섯번 만이라도 재가자로서 수행자처럼 계를 지키자는 것이다. 셋째는 십선계(十善戒)이다. 십악업의 반대이다.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기어, 불양설, 불악구, 불탐욕, 불진에, 정견 등이다. 천수경에 십악참회(十惡懺悔)가 이 계를 범한 것을 참회하는 염불이다. 성행 청 계사 주지

[삶과 종교] 짠맛 나는 소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복음 5:13) 지금은 소금이 참 흔하지만 예전에는 소금이 참 귀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귀한지 그리스에서는 소금의 가치가 금의 가치와 비슷하였으며, 고대 로마 시대에는 군인들의 급료를 소금으로 지불할 정도로 가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금이라는 salt라는 단어가 일꾼들에게 주는 봉급이라는 salary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소금을 얻는 방법이 우리 나라와는 조금 다릅니다. 요단강에서 사해에 이르는 1천킬로미터에 이르는 요단 지구대는 해수면보다 고도가 낮은 지형입니다. 학자들은 이 곳이 빙하기 이전에는 바다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합니다. 과거 바다였던 때문인지 이스라엘에는 소금 광산이 많이 있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소금같은 사람 바닷물로 소금을 만들어 내는 대신 이스라엘에서는 땅에서 소금을 파냅니다. 그런데 소금 중에는 모양은 소금이지만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소금이 있습니다. 빗물로 인해 짠 맛을 모두 잃어버린 소금입니다.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소금을 파내게 되면 사람들은 실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맛을 잃은 소금은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혀지게 됩니다. 사람에게도 저마다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고난이나 어려움을 겪으면서,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자신의 모든 맛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짠 맛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중해 연안에서 서식을 하는 들오리들이 여름동안 노르웨이로 이동하는데 마침 네덜란드의 상공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날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느 농가의 뜰에서 집오리들이 평화롭게 모이를 줍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 들오리가 갈 길은 아득하고 또한 피곤하여 그만 평화롭게 보이는 집오리 떼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 앉았습니다. 그 집오리들은 들오리에게 융성한 대접을 해 주었습니다. 며칠 후에 들오리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자기 대열을 찾아 가려고 날아 보았으나 그 동안 몸에 기름이 끼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겨울이 되어 창공을 날아가는 자기 대열을 보자 허전해지고 마음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날개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쳐다만 볼 뿐이었습니다. 해가 거듭되면서 그러한 양심의 가책마저도 없어졌습니다. 몇 년 후에는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게 되었고 들오리는 완전히 집오리가 되어 시궁창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짠 맛을 내는 소금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때문에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답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세상속으로 녹아 소금의 사명 다하길 소금이 더 큰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알갱이 그대로 있기 보다는 녹아지고 어우러져야 합니다. 국 속으로 녹아 들어가고, 음식 속에 어우러져야 합니다. 제가 섬기는 교인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짠 맛 나는 소금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세상 속으로 녹아져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세상 속으로 녹아 들어가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짠맛 나는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시길 부탁드립니다. 김병삼 분당 만나교회담임목사

[삶과 종교] 기성종교와 신흥종교의 갈등

지금 한국의 그리스도 교회는 신 구교를 막론하고 어떤 신흥종교의 출현으로 몹시 긴장하고 있습니다. 이 신흥종교는 며칠 전 6일과 7일에 서울에서 대성회라는 이름으로 큰 집회를 가졌습니다. 이런 신흥종교의 출현은 사실상 어느 때든지 기성 종교가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사회의 아노미(anomie-무규범 상태나 가치관 혼란 상태)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때 이런 신흥종교의 집단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법이 정의의 편이 아니고 기성집단 특히 지도 집단들이 탈선하고, 올바르게 사는 대중이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이 더 잘 사는 사회가 되는 기현상이 두드러질 때 이런 사회의 불협화음이 생기게 됩니다. 작금의 한국 사회는 지도자들에 대한 논란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많은 이들이 나라의 지도자들을 뽑을 때 깨끗한 무능보다는 손때 묻은 유능을 어쩔 수 없이 택하는 경우를 봅니다. 실상 요새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에겐 도덕이라곤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습니다. 기성종교 제역할 못해 기현상 야기 이번에 새로운 정부가 시작되면서도 우리는 청문회를 통해서 이들이 얼마나 순수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묵인하고 나라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 그러다 보니 올바른 가치관이 붕괴되고 도덕기준이 없어져서 사회적이거나 개인적으로 무질서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사회비평가인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가 쓴 제3의 물결이나 부의 미래에서 하나같이 지적하는 것이 사회의 고독과 구조의 상실 그리고 의미의 붕괴가 현대인들을 몰아가고 있다고 보면서 겉보기에 지성적이고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신흥종교에 빠져들게 됨을 정확히 지적합니다. 즉 한마디로 기성종교가 자기의 진정한 역할을 못하다 보니까 오늘날 같은 기현상이 야기됩니다. 더구나 기성종교집단 특히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큰 교회가 세속의 형태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하느님 안에서 머물고 싶고 무엇인가 보람을 찾으려고 하는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교의가 어떻든 그곳에 가면 왠지 속이 후련해지고 무언가 최면에 걸리듯이 빠져들어 갑니다. 그러다 보니 가족이고 미래의 삶도 포기한 채 그런 집단에 휘말려 살게 되는 딱한 현상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기성종교집단은 무지몽매한 많은 사람들이 더구나 우리 교회의 신도들이 교의에 어긋나고 사이비 같은 신흥종교에 빠져들어 가고 있다고 아우성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우리 기성종교의 부패나 아니면 위에서 지적한 대로 사회의 병리현상에 함께 동조하며 한 파도를 타고 있는 기성교회에 하느님께서 일침을 주시는 것을 빨리 깨우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흥종교의 출현을 나무라고 있습니다. 무신론자의 대표로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만들어 진 신,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란 망상이라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가 하면 몇 해 전 영화로도 인기를 몰아왔던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예수님을 순수한 한 인간으로 주장한 것은 기성종교가 제대로 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사작용임을 우리는 가슴 아프게 하느님께 사죄해야할 것입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말합니다. 신흥종교 두각 하느님께 사죄해야 이 세상에 종교집단이 없으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가만히 역사와 세계를 살펴보면 수많은 전쟁과 살상은 어떻게 보면 그 비극 안에는 종교의 힘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봅니다. 얼마 전 서울의 큰 명문대학의 이사장을 역임하다 최근에 물러난 한 천주교신부가 말합니다. 인간이 갖고 싶어 하는 종교성은 다른 것이 아니라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함께 걸어갈 줄 알고 다른 사람 아프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 아프면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곳이 진정한 교회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최 재 용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부처님 오신날

석가모니 부처님은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나무 아래서 탄생하셨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난 뒤, 두 손을 하늘과 땅을 가리키면서 사자후를 외쳤습니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모든 생명 존귀하다. 세계의 고통 받는 중생들을 내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이 외침은 장차 고통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선언, 즉 고통의 바다에서 헤메고 있는 눈 먼 중생들을 위하여 걸림 없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법을 제시하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이러한 선언은 태자의 신분을 버리고 6년간의 고행 끝에 부다가야의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후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다섯 비구를 상대로 법을 설함으로 시작하였고, 이후 45년 동안 인도 전역을 다니면서 중생들을 올바른 삶의 방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부처라는 말은 샨스크리트어 붓다(Buddha)를 따서 만들어 졌으며, 깨달은 사람을 뜻합니다. 깨달음이란, 부처님 체험 통해 증득 깨달음이란 단순한 개념이나 관념이 아니며 부처님이 체험을 통하여 증득한 것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신 그 가르침 또한 배워서 알아야 하는 지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그 가르침을 받고 그에 따라 실천 수행해야 합니다. 깊고 참된 진리를 깨달은 이는 마침내 생사의 괴로움이 완전히 없어진 불교 최고의 이상인 열반을 성취합니다. 부처님은 모든 이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고통 속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구제하게 위해 이 사바세계로 내려오셨습니다. 그 분이 나신 곳은 호화찬란한 궁궐이 아니라 길가의 동산 위입니다. 길에서 나서 길에서 살다 가신 우리 스승의 탄생은 그 자체가 중생에 대한 끝없는 연민과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떠나 진리를 구하지 않으셨고 중생가운데서 중생과 함께 하신 자비의 걸음이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부처님은 우리곁에 계시어 뭇 중생을 안락과 행복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2천만 불자들은 부처님의 탄생을 경배하는 것은 물론 참 나를 찾겠다는 발심을 내고 부처님의 중생구제원력을 세워 실천하도록 해야 합니다. 중생의 병의 종류에 맞춰 약을 주셨던 부처님과 같이 우리 불자들은 이 시대의 중생의 고통에 맞게 처방을 해주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이변에는 빈부격차와 정신적 혼돈, 그리고 분단이라는 굴레 속에서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갈등과 이념의 대립으로 고귀한 생명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 또한 우리 불자가 이 시대에 처방해야 할 과제들인 것입니다. 탄생 자체가 중생에 대한 끝없는 사랑 부처님이 오셨습니다. 자비의 손과 지혜의 눈이 열렸습니다. 자기이 것을 덜어서 부족한 자에게 채워주고 원망을 감사의 마음으로 돌리도록하며 본래 우리는 하나이며 한 몸이라는 동체대비의 이상을 실현하며 나의 평화가 이웃의 평화로 이웃의 평화가 세계의 평화로 이루어짐을 설파하고 계십니다. 세계는 하나의 꽃입니다. 윤회를 거듭하는 삶은 어리석음에 얽메여 끌려다니는 노예의 삶입니다. 윤회를 벗어난 삶은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자유로운 주민의 삶입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아무런 차별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부처님 우리 마음안에 오신 부처님께 찬탄과 공경을 올립니다. 성 행 청계사 주지

[삶과 종교] 청춘에게 고함, 아름다운 포기

요즘 제가 고민하는 것은 대형교회 목사로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성도들이 많아지고 교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임에도 포기하는 것, 그것이 교회가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많은 예배를 드린다면 성도는 더 많이 모이겠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은 성도를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성도님들을 잘 관리하고 기도하는 것이 지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히려 예배를 줄이는 것에 대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더 큰 예배당을 짓는다면 교회는 더 많은 성도와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대신 어려운 이웃과 교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 둘 내 기득권을 포기해 나가면서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 늘 선택의 문제가 따라다닙니다.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포기가 쉬운 일도 있지만 정말 포기하기 어려운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해야 할 때에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포기는 어렵지만 아름답습니다. 청년 시절은 미래 인생 준비할 때 장용호 씨가 쓴 건축가, 세계에서 인생을 배우다라는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청춘에게는 시간을 들여 돈을 만드는 것보다 돈을 들여 나의 시간을 만드는 것이 더 가치 있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젊은이들에게도 돈은 참 요긴합니다. 그 시절 사야 할 건 왜 그리도 많고, 돈이 들어가야 하는 곳은 얼마나 다양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젊음이들 가운데에는 스스로 돈을 벌어서 학교를 다니고 자신의 용돈을 마련하는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마련하고 용돈을 벌어 쓰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기특하다고 칭찬합니다. 또한 본인 스스로도 그런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물론 자신이 돈을 벌지 않으면 학교를 다닐 수 없을만큼 어려운 젊은이들의 경우는 예외입니다. 하지만 돈을 버는 이유가 단순히 삶을 보다 여유있게 살기 위해서 혹은 즐기기 위해서라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음의 때는 돈을 모으기보다 돈을 써서 시간을 가치 있게 만들어야 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돈은 다시 벌수 있지만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 저도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때는 참 어려웠습니다. 부모님의 도움이 없이 혼자 일하며 가족들을 부양하고 공부를 마쳐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유학생으로 벌수 있는 돈이 한계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계산을 해도 돈을 벌며 시간을 쓴다면 공부하는 기간이 너무 길어질 것이고, 그 기간동안 들어가야 할 생활비가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버는 대신에 더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타자. 일할 시간에 공부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고, 돈을 버는 것보다 일찍 공부를 마치는 것이 결국에는 더 큰 돈을 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즐거움 잠시 내려놓는 용기 필요 3년을 공부해야 마치는 미국 신학교의 대학원 과정을 2년에 마쳤습니다. 박사과정에 들어가서도 주말 교회 사역과 방학 때 일한 것을 빼고는 늘 도서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결과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공부를 해야 할 때가 있고, 돈을 벌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청년의 시절은 돈을 버는 것보다는 실력을 키우고 앞으로의 인생을 준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즐거움을 잠시 내려놓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시 오지 않을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기억하세요. 해야만 하는 일을 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가 온다! 김 병 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