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신임 교황이 인류에게 보내는 메시지

얼마 전 우리 가톨릭교회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베네딕도 교황이 사임을 하고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 교회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임 교황이 당신을 교황으로 선택한 추기경들에게 첫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언하지 않는다면, 일반적인 박애주의자들의 민간기구, 소위 NGO기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걷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교회를 건설하고,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라고 천명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현대인들은 보다 안일하고 편리하고 재미있는 소재를 찾아 그것을 행복의 목표로 삼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즉 행복의 기준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착각하는 경우를 현실 속에서 자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메커니즘 환경을 개발해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을 충족시키려 돌진하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종교가 여기에 부응하여 앞장서는 것 같이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산업사회와 물질문명 개발에 앞장서 있는 그리스도 신자들이 많은 나라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 두어야 여기에 우리 현 교황이 이를 지적해서 현대의 신앙인들 특히 지도자급에 있는 성직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신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엿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신앙의 행위가 갖가지 모양으로 펼쳐지고 있지만 정작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로 교회를 펼쳐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그리스도 신앙을 갖고 사는 신자들이 신 구교를 다 합쳐본다면 무려 2천만명 가까이 됩니다. 어마어마한 세력입니다. 국민의 절반이 됩니다. 게다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크게 주는 기득권층에 있는 사람들의 비율을 보면 거의 3분의 2를 훨씬 상회합니다. 즉 그리스도 신자들이 우리나라 전반에 걸쳐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한다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제발전과 기계문명은 세계 여러 나라보다 첨단을 가면서도 이에 따르는 부의 축적은 대기업들에게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의 균형이 이미 깨져버렸기에 많은 국민들은 엄청난 상대적 박탈감에 깊이 빠져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OECD국가 중에서 행복수치가 최하위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새로 되신 교황은 크리스천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나라들이 자기 고국과 남미 일대의 경제를 얼마나 뒤죽박죽 만들어 놨는지를 잘 알고 있고 몸으로 체험하였기 때문에 이를 위한 경고를 보내신 것 같습니다. 약소국서 그리스도 모습 각인되길 중동의 자원이나 무기 개발은 미국이나 유럽나라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습니다. 중국과의 힘의 대결도 경제발전을 위해 간신히 일어서려는 우리나라를 전쟁의 현장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크리스천들의 나라가 우리를 언제고 짓밟을 것이라고 중국은 생각할 것입니다. 아랍민족의 쓰라린 역사에서와 같이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약소한 사람이나 나라들에서의 당신의 모습이 진하게 각인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십자가가 결국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근원이거나 원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인간은 욕망의 방법을 찾아 행복을 다보면 어쩔 수 없이 상대를 악용하거나 억압하거나 제쳐놔야 하고 결국엔 그 불행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엄청난 불행으로 다시 되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최 재 용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표적과 족적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족적을 남기고 싶어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도 자기의 족적을 남기려고 무리하게 많은 일들을 해내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무언가를 이룩해야 하고 또 그 결과에 대한 포상도 받아야 자기가 무언가를 한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불교 신자들도 절에서 많은 기도와 자기 자신의 성찰을 하면서 마음공부에 열심히 정진합니다. 그 기도와 참선을 공부하는 가운데 과연 무엇을 위한 기도이고 참선공부일까 하고 되물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또한 자기공부의 족적을 남기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 전이되어 성취하는 목적이 된다면 성취하지 못했을 때에는 큰 실망과 자괴감이 들 수 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표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 태도에 늘 익숙해져 있고, 그 때마다 만족과 불만족이 상반되어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만족하면서 또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이 묵묵히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큰 족적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이야기를 소개할까 합니다. 미국 시골의 통나무집에 한 병약한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 집 앞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때문에 집 출입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신중님이 꿈에 나타나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집 앞의 바위를 매일 밀어라! 바위를 옮기는 표적보다 미는 족적이 중요 실망보다 희망, 희망보다 함께 나누며 사는 삶이되길 그 때부터 그는 희망을 가지고 매일 바위를 밀었습니다. 8개월이 지났습니다. 점차 자신의 꿈에 회의가 생겼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바위의 위치를 보았습니다. 그 결과 바위가 1인치도 옮겨지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현관에 앉아 지난 8개월 이상의 헛수고가 원통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바로 그 때 신중님이 찾아와 그 옆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왜 그렇게 슬퍼하지? 그가 말했습니다. 신중님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대로 지난 8개월 동안 희망을 품고 바위를 밀었는데 바위가 전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네게 바위를 옮기라고(to move the rock) 말 한 적이 없단다. 그냥 바위를 밀라고(to push against the rock) 했을 뿐이야. 이제 거울로 가서 너 자신을 보렴. 그는 거울 앞으로 갔습니다. 곧 그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거울에 비춰진 남자는 병약한 남자가 아니라 근육질의 남자였습니다. 동시에 어떤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 밤마다 하던 기침이 없어졌구나! 매일 기분이 상쾌했었고, 잠도 잘 잤었지. 신중님의 계획은 바위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변화는 바위를 옮겼기 때문이 아니라 바위를 밀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삶에서 바위를 옮기는 표적보다 바위를 미는 족적이 더 중요합니다. 족적보다 표적을 중시하면 내리막길 인생이 되고, 표적보다 족적을 중시하면 오르막길 인생이 됩니다. 나는 지금 표적을 중시하면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족적을 중시하면서 살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성 행 청계사 주지

[삶과 종교] 용서가 만들어내는 놀라운 기적

불이 났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밤늦게 교회에 돌아와 보니 연기 냄새와 함께 여기저기 물에 젖은 잿더미가 보였습니다. 다행스럽게 불이 외벽 창고에서 시작되었고 또 빨리 발견되어 교회 내부를 태우지는 않고 모두 꺼졌습니다. 하지만 화재로 인해 연기가 많이 나고 소방차가 출동한 탓에 가까이 사는 교인들과 교회 안에 있던 분들이 뛰쳐나와 한바탕 소통이 벌어졌습니다. 경찰에서 화재 사건을 조사하면서 이번 화재가 방화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누군가 와서 불을 질렀다는 겁니다. CCTV를 확인해 본다고 하더니 다음날 전화가 왔습니다. 범인을 잡았다는 겁니다. CCTV에 방화장면이 그대로 찍혀 있는데 누군가 하고 봤더니 평소에 교회에 종종 들러 행패도 부리고 돈을 구걸하기도 하고 협박도 했던 노숙자분이었습니다. 교회에 불을 지른 그분을 보면서 장발장이 생각났습니다. 교회에 불을 지른 사람이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해 준다면 장발장처럼 새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의 몇몇 분들과도 상의했습니다. 그리고 용서해 주기로 결심하고 경찰서에 갔습니다. 그런데 담당 경찰관이 안 된다는 겁니다. 불을 지른 죄에 대해서는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이분의 경우 신원조회 결과 성범죄를 비롯한 여러 번의 전과 기록이 있고 그 외에도 절도를 비롯한 몇몇 사건들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용서한다고 해도 다른 누군가가 또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풀어줄 수 없다는 겁니다. 또한 교회에 불을 지르기 전에 몇번이나 찾아와서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을 했고, 교회의 여자 성도들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며 여러번 협박까지 했기 때문에 경찰 입장에서는 절대로 풀어줄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용서를 통해 누군가가 변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그건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러나 내가 용서했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용서는 옳은 것이지만, 용서가 또 하나의 악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용서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일 용서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변화도, 기적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제자들의 발을 직접 닦아 주십니다. 그 제자들 가운데에는 고작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롯 유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가 자신을 배신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의 발을 아무 말 없이 닦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나를 배신하고 죽이려고 하는 그 사람까지도 용서하고 품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용서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하고 사랑하면 적어도 용서와 사랑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기적을 기대할 수는 있습니다. 당장은 용서가 옳은지, 용서가 옳지 않은지 답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장발장을 꿈꿔야 합니다. 용서가 만들어내는 기적을 꿈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장발장이 수도원에서 부른 노래 중 유독 눈에 띄는 가사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이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용서를 받은 장발장은 결국 많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 용서로 인해 자신은 끊임없이 많은 어려움을 당해야 하지만 그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용서가 만들어내는 기적을 기대하며 누군가를 용서하는 놀라운 사랑이 이 땅에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김 병 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삶과 종교] 종교와 정치의 갈등

종교의 속성은 영원성을 향하고 있지만 정치는 현실적이기 때문에 사실상 서로의 만남은 언제나 갈등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해럴드 라스웰(Harold Lasswell)은 정치란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느냐?(Who gets what, when and how?)라고 하였듯이 정치란 항상 시장성을 우선하다 보니 경제를 우선으로 해야 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즉 국가 정책의 최고의 승부는 국민 행복에 있기 때문에 가시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취하고 누리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무한의 세상을 향해 가기 때문에 이승의 가치보다 저승의 가치에 더 힘을 싣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의 개념도 정치와 차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물질문명이 팽배한 현대에선 어쩔 수 없이 종교도 여기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무한의 종교와 현실의 정치는 늘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종교와 정치가 잘 어울리는 것 같이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보면 종교가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것에만 목표를 두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정치가는 강력한 집단인 종교가 자기들에게 힘이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물불을 안 가리고 무섭게 접근함을 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정치 역사가 짧기 때문에 통치자와 그를 위해 힘을 실어주는 여당은 자기들의 통치기간에 나름대로의 실적을 국민들에게 과시해야 하는 강박 관념 때문에 국가 재정을 얼토당토않게 퍼붓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게다가 야당은 야당대로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당의 근본 정책으로 여길 만큼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어떤 종교집단은 선거 때를 기해서 여러 종교행사를 통해 그들의 힘을 과시하려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보면 그 종교집단은 쉽게 세속화 되어버리고 맙니다. 정치는 국민의 행복을 위해 그 존재의미를 찾고 있다고 하지만 시장의 속성과 같이 인간의 모든 것 즉, 선과 악을 포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온갖 비리는 하나도 예외 없이 정치집단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의 정치풍토도 지금과 꼭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지도자들에 의해서 희생당하는 참극을 겪으시게 됩니다. 예수님이 당시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심한 어투로 야단을 치시는 것을 4복음 전체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은 마태오 복음 23장입니다. 당시의 실권자 집단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회칠한 무덤으로 비유하면서 심하게 꾸짖으시는 것을 봅니다. 종교와 정치는 언제나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멀리도 말고 가까이도 말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야 합니다. 정치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선과 악이 공존하는 곳이라 여기에 종교가 가까이 하면 아주 쉽게 변질되고 맙니다. 중세기 때의 가톨릭교회가 바로 대표적인 예입니다. 종교와 정치가 하나였던 비극의 과거를 갖고 있습니다. 아직도 상흔이 역력히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이기 때문에 종교가 전혀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정치에 대해 이렇게 지혜롭게 말씀하십니다. 황제(카이사르)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코 12장 17절)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은 입적하셔서 이승에 계시진 않지만 불교의 성철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기억합니다. 큰 스님이 이승에 계실 때 정치의 큰 지도자가 어렵게 찾아왔었지만 만나주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불교가 하룻강아지 같은 정치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지 않았나, 감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종교가 정치에 휘둘리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어쩌다 종교가 세속화 되었는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최 재 용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삶과 종교] 천수다라니로 도 이룬 수월스님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대선사의 가장 큰 법제자인 수월스님은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살았습니다. 나이 서른에 서산 천장사로 출가하여 성원스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배우지 못한데다 머리까지 둔하여 불경을 배워도 쉽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은사 성원스님은 글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고 땔나무를 해오는 부목, 밥을 짓는 공양주 등의 소임을 3년 동안 맡겼습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월스님이 불공을 할 때 올릴 마지를 지어 법당으로 갔을 때, 마침 부전스님이 천수대비주를 송하고 있었습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나모라 다나다라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새바라야 사바하 스님은 이를 한번 듣고 모두 외울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머리가 좋지 않다고 구박을 받았는데, 총 442글자의 천수대비주가 저절로 외워진 것입니다. 이후 스님은 나무를 하러 가거나 밥을 짓거나 마냥 천수대비주를 흥얼거리며 다녔습니다. 무아지경 속 대비주 외우느라 불날 뻔 그런데 어느 날, 은사 성원스님이 법당에서 불공을 드리다가 마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땅히 제시간에 와야 할 마지는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고 밥 타는 냄새만 절 안에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부엌으로 찾아간 성원스님은 전혀 예상 밖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수월스님이 대비주를 외우면서 계속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밥이 까맣게 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솥이 벌겋게 달아 곧 불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 속에서 대비주를 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본 성원스님은 수월스님에게 방을 하나 내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오늘부터 너에게 이 방을 줄 터이니, 마음껏 대비주룰 외워보아라, 배가 고프면 나와서 밥을 먹고 잠이 오면 마음대로 자거라. 나무하고 밥 짓는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수월스님은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가마니 하나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짝에 달았습니다. 빛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천수대비주를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방 밖으로는 밤낮없이 대비주를 외우는 소리가 울려 나오고. 마침내 7일째 되는 날, 수월스님은 문을 박차고 나오며 소리쳤습니다. 스님, 잠을 쫓았습니다! 잠을! 이때 수월스님은 천수삼매를 증득하여 무명을 깨뜨리고 깨달음을 얻었을 뿐 아니라, 불망념지를 증득하게 되었습니다. 말년 백두산ㆍ간도 지방서 보살행 실천 이전까지는 글을 몰라서 경전을 외우지도 못하고 신도들의 축원도 쓰지 못하였지만, 불망념지를 이룬 후부터는 어떤 경전을 놓고 뜻을 물어도 막힘이 없게 되었으며, 수백 명의 축원자 이름도 귀로 한번 들으면 불공을 드릴 때 하나도 빠짐없이 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수삼매를 얻은 뒤에도 참선정진을 꾸준히 계속하였는데, 잠을 쫓았다는 그 말대로 일평생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년에는 백두산 간도지방 등에서 오고 가는 길손들에게 짚신과 음식을 제공하며 보살행을 실천했던 수월스님! 오늘날까지 자비보살이요 숨은 도인으로 추앙 받고 있는 수월스님의 도력은 천수대비주 기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성 행 청계사 주지

[삶과 종교] 불협화음을 아름다운 멜로디로

유학시절 제가 공부하던 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유명한 학교였습니다. 소위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여성신학의 대부인 로즈마리 루터라는 신학자가 있었고, 흑인 인권을 옹호하는 신학적 흐름도 가지고 있는 학교였지요. 때문에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주의해야 할 것들 중의 하나가 언어사용이었습니다. 혹시라도 수업시간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남성인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남성 우월주의적인 언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공부를 하는 신학생들이 서로 친구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늘 자기들끼리만 몰려 다녔습니다. 백인들은 백인들끼리, 흑인들은 흑인들끼리, 히스패닉은 히스패닉까리, 한국 학생들도 한국 학생들끼리만 어울렸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들이 조금 손해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인종차별 아니냐고 따져 묻기 일쑤였습니다. 그때 든 생각이 아무리 해방을 이야기하고, 자유를 이야기하고, 상대방을 위하는 것 같아도 정말 그 안에 상대방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행동의 변화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찾아온 한 사람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세상에 많은 가르침들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십시오. 이것보다 더 큰 계명은 없습니다 이 두 가지 대답에서 공통되는 것은 사랑하라입니다. 특별히 이웃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는데, 이웃을 사랑하되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혹시 우리 중에 누가 오늘 발에 걸려 넘어졌다고, 톱을 가져와서 발을 자르라고 하겠습니까? 혹 우리가 음식을 먹다 이가 혀를 물었다고, 이를 뽑으라고 하겠습니까? 혹 우리가 망치질을 하다 오른손이 잘못하여 왼손을 찧었다고 오른 손을 비난하기 보다는 다친 왼손을 입에 가져가 불어주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지체입니다. 아픔을 가져다 줬지만 원망하고 비난하기 보다는 감싸는 것이 지체입니다. 이것이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투나잇 쇼에서 Jack Parr라는 사람이 사회자였을 때, 호세 멜리스라는 피아니스트가 음악 책임자였습니다. 그 토크 쇼에서는 종종 깜짝 쇼가 벌어졌는데, 하루는 Jack Parr가 녹화를 하다 말고 갑자기 피아노 쪽으로 가서 마구잡이로 건반을 두드려대며 불협화음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는 호세 멜리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아요, 호세. 당신이 이 피아노로 뭘 할 수 있는지 한번 보죠. 그러자 호세는 Jack Parr가 두드렸던 건반을 정확히 짚어내며, 그 마구잡이 음에 아름답고 조화로운 음악 반주를 섞어 넣었습니다. 불협화음을 아름다운 멜로디로 바꾼 것이죠. 이 세상을 아름다운 멜로디로 가득 채우는 방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럼 도저히 들을 수 없었던 불협화음이 아름다운 멜로디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십시오! 그 사람이 마치 나인 것처럼! 이 세상이 아름다운 멜로디로 가득 채워지도록! 김 병 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삶과 종교] 종교와 세금의 아름다운 만남

종교도 국가의 존재 안에서만 평화스런 종교 활동이 보장되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존립이 가장 중요한 선결문제가 되어야 한다면 종교도 국가의 운영을 위한 모든 면에 앞장서야 하는 것이 당연한 원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히려 종교집단이 여러 복지시설 등을 통해서 국가의 지원을 대부분 받고 있음을 볼 때 세금 납부는 의무를 넘어서 당연히 우리 교회가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1994년부터 신부, 수녀에게 미약하지만 근로소득세를 원천징수하고 일부 교구(敎區)에서는 국민연금과 의료보험비도 공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와 성직자가 납세의무를 통해 신도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것은 물론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통해서 영생을 위한 성무(聖務)의 활동이 보장받거나 더더욱 활기차게 선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납세의무의 신성함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종교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종교가 정치 및 재력에까지 영향력을 강하게 미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우리 국민은 얼마나 행복한가?라고 질문할 때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종교의 역할이란 우리 국민들을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음을 봅니다. 삶의 질에서 OECD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가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대목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총체적 고민은 바로 빈부의 격차에서 비롯된 상대적 빈곤과 행복의 박탈감을 온 국민이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치권에서의 책임이 제일 크다고 하지만 그 정치권의 역할을 하는 주역들은 대부분 종교집단에서도 자기의 역할을 또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기업들은 여러 모양으로 현행법을 교묘하게 악용해서 상상도 못할 만큼의 부를 축적하고 있는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자기 기업을 키우기 위해서 일감몰아주기를 해서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재산을 키워가는 것을 봅니다. 그런가 하면 순환출자라는 방법을 통해서 같은 계열의 기업끼리 돌려가면서 이익창출을 하고 일반 사람들은 도저히 알 턱이 없는 부를 축적하면서 무차별적으로 계열사를 늘리고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우리 종교집단마저 복지기금이라는 명목 등을 통해서 어마어마한 국가예산을 떼어가는 것을 보면 이것은 마치 대기업들이 하는 교묘한 방법, 즉 일감몰아주기와 순환출자 방식을 국가와 짜고 하는 식으로 교회 세를 부풀려 가고 있음을 봅니다. 물론 교회가 그들의 조직적인 운영과 헌신적 사랑을 바탕으로 여러 복지시설 등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보다 안정된 복지국가로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보면 이로 인한 이익집단이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게다가 면세혜택까지 받는 종교집단이 우리 국민들에게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양극화의 고질적 현상을 부추기는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래서 교회지도자들이 본보여 줘야 할 것은 각 교단이 형성하고 있는 재산이나 여러 물질의 혜택을 공유하는 방법과 균형적인 소득분배의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면 국가 정책에 대해서 나름대로 역할을 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와 세금의 아름다운 만남을 통해서 지금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현 교회들이 보다 신선하고 매력있는 집단으로의 거듭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영원한 세상을 향해 함께 손에 손잡고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 재 용 천주교 수원교구 원로사목자

[삶과종교] 계사년 설날을 맞으며

계사년 설날을 맞이했다. 서양력으로 인해 새해를 맞이하였으나 음력설이 지금 우리의 설이다. 정말 정답고 가슴 설레이게 하는 날이다.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새로운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고, 새학기, 새직장 등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계절이다. 하지만 새로운 설레임 대신 걱정이 태산이다. 오르는 물가는 서민들을 더욱더 힘들게 하고, 늘어나는 청년실업률, 급변하는 세계정세 등 하루라도 편안한 날이 없다. 이럴수록 우리는 희망과 용기를 갖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바꿔야겠다. 인간은 태어날 때 세가지 삼독심(三毒心) 즉, 탐, 진, 치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욕심을 내게 되면 화가 생기고 그렇게 되면 지혜의 종자가 사라져 항상 번뇌와 망상에 사로잡혀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나니, 그것을 버리면 항상 맑고 바르게 생활하게 되며 자비심으로써 베풀게 될 것이다. 천지동근(天地同根), 만물일체(萬物一)라 하늘과 땅도 나와 더불어 하나의 뿌리이고,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한 몸이라 하였는데 법성(法性)과 나의 성품이 같은 뿌리이고 진여(眞如)와 무명(無明)이 하나의 몸통이라 하지 않았던가 모든 자존심과 허상을 벗어버린다면 우리에게 참된 성품으로 관(觀)할 것이다. 세상만물은 모두 생명을 지니고 있다. 중아함경에 보면 올바른 진리를 깨닫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땅, 물, 불, 바람의 생명현상을 개인의 소유물로 파악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 고 하셨다. 서해안을 바라보는 덕숭산 수덕사의 만공스님 사리탑에는 지금도 너와 나, 해와 달, 하늘과 땅, 공기와 물이 둘이 아니라 같은 뿌리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다 는 뜻의 세계일화(世界一花) 라는 문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누가 잘하고 누가 잘못을 하는가를 가리기 전에 스스로가 잘잘못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가 반성을 하고 참된 진리의 깨달음을 체득을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생명에 두고 우리가 생존하는 모든 생명에 대해 서로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올해 교수들이 뽑은 사자성어가 거세개탁(擧世皆濁)이었다. 이 말의 뜻은 온세상이 모두 탁해 홀로 맑게 깨어있기 힘들다 라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초나라의 충신 굴원이 지은 어부사(漁父辭) 에 담겨있다. 모함으로 벼슬에서 쫓겨난 굴원이 강가를 거닐며 시를 읊고 있자 고기잡이 영감이 그를 알아보고 어찌 그 꼴이 됐냐고 물었다. 이에 굴원은 온 세상이 흐린데 나만 홀로 맑고 뭇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어 쫓겨 났다고 답했던 고사에서 비롯됐다. 어떠한 상황과 어려운 경우가 닥치더라도 밝은 지혜로써 처신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배려하고 자비를 베푼다면 절망이 희망으로 불신이 믿음으로 바뀌어 질 것이다. 昨夜夢中頭頭佛(어젯밤 꿈속에 서는 머리 머리마다 부처이더니)今朝開眼物物薩(오늘 아침 눈을 뜨니 물건 물건마다 보살이구나!) 遠着窓外處處主(멀리 창밖을 바라보니 곳곳마다 주인이요) 秋來黃葉念念一(가을이 와 잎 노라니 생각 생각이 하나로구나!) 이 게송은 우리 모두 부처가 되자, 주인공이 되자 는 뜻의 게송이다. 부처를 이루려면 보살도를 실천해야 한다. 보살이란? 나보다 남을 이롭게 하는 이를 가르킨다 보살도를 실천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니, 가까운 곳을 한번 살펴보는 계사년 한해가 되기를 서원한다. 우리 속담에 원수는 모래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다.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은혜는 모래에 새겨 금방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버려야 할 원수는 돌에 새겨 두고두고 기억하는 것이다. 은혜를 마음에 새기면 고마움이 남아 누구를 만나도 무슨 일을 만나도 즐겁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음에 원수를 새기고 나면 그것은 괴로움이 되어 마음속에 쓴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된다. 우리는 정말로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고 있다. 한나라의 대통령도 새로운 정책을 준비하고 세계의 모든 나라가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는 작금에 우리 스스로도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믿음이다. 성 행 청계사 주지

[삶과 종교] 궁합

목사가 쓰기에는 좀 거시기한 제목인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요리를 좋아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직접 만들어 먹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어제 아침에는 요즘 한창 바쁜 아내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남은 갈비찜 약간과 신 김치를 넣고 볶다가 밥을 넣어 깊은 냄새가 베도록 하고, 약간의 후추와 참기름을 얹어 볶음밥을 준비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갈비와 김치가 너무 잘 어울립니다. 음식을 만들 때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궁합입니다. 몸에 좋은 음식들을 많이 먹는다고 할지라도 궁합이 안 맞으면 오히려 독이 됩니다. 몸에 좋은 장어이지만 복숭아와 함께 먹으면 안 좋다고 합니다. 장어는 지방이 많아서 소화가 느리기 때문에 복숭아와 함께 먹으면 설사를 유발한다고 합니다. 굴과 꽃게, 모두 건강에 좋은 음식입니다. 그러나 굴에는 타닌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부패가 빨리 되는 꽃게 요리와 함께 먹으면 소화불량과 식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합니다. 시금치와 두부도 모두 좋은 건강음식이지만, 함께 먹으면 시금치의 수산성분이 두부의 칼슘과 결합하여 수산칼슘을 만들게 되는데 이로 인해 담석을 유발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함께 먹으면 좋은 음식도 있습니다. 궁합이 좋은 음식들이죠. 돼지고기를 먹을 때 새우젓을 함께 먹으면 좋다고 합니다. 새우젓이 돼지고기의 지방과 단백질이 잘 소화되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소주를 자주 먹는 분들은 오이를 함께 먹으면 좋다고 합니다. 술을 섭취하면 몸속의 칼륨이 빠져나가게 되는데 오이에는 칼륨이 풍부해서 빠져나간 칼륨을 보충해 준다고 합니다. 한 잔의 커피는 정신을 맑게 해 주고 피로를 풀어줍니다. 그러나 공복시에 마시는 커피는 위산 분비를 촉진하기 때문에 우유나 치즈와 함께 먹으면 좋다고 합니다. 멸치를 볶을 때 풋고추를 넣어주면 멸치의 칼슘이 몸에 잘 흡수되도록 풋고추의 철분이 도와준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어쩐지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잘 어울리는 것들이 있고,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잘 어울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전혀 내 인생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고, 일어나지도 말아야 할 것 같은 일들이 내 인생을 참 맛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 여러분 인생 가운데 끊임없이 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 가운데에는 계획했던 일도 있지만 계획하지 않았던 일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하나 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우리의 삶을 참 맛깔 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치즈를 한 장 얹으면 어떨까요? 좀 느끼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삶에 고추장을 한 스푼 풀어본다면 어떨까요? 좀 매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삶에 소금 한 스푼을 넣는다면 어떨까요? 좀 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는 대신 기대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로 인해 오히려 더욱 맛난 인생이 시작될 거라고 기대해 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일에 궁합을 만들어가는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승리하는 한해가 되길 축복합니다. 김 병 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삶과 종교] 침묵의 힘

어떤 종교든지 침묵하는 행위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고 이를 통해서 종교가 목적하는 곳을 향해 많은 수행자 수덕자들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4대종교라고 할 수 있는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그리스도교 등은 구원을 향한 인간들의 부단한 노력 즉 자기 수행의 과정을 통해서 절대자와의 관계 속에 들어가려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방법이 바로 침묵을 통한 수행 수덕의 과정입니다. 불교에선 동안거, 하안거라 하여 거의 1년에 6개월여 동안 수행에만 전념하면서 참다운 깨우침을 하게 되거나 진정한 진리를 터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석가모니가 고행과 법을 통해 정각(正覺)을 하게 되는 과정을 본받는 행위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창시자 예수는 광야에서 침묵 중에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소명을 깨우치게 됩니다. 지금도 천주교의 사제들이나 수도자들은 일 년에 의무적으로 약 10일간 피정(避靜)을 하게 되는데 대침묵이란 분위기에서 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그런가 하면 마호메트도 명상과 기도를 통해서 신의 음성을 듣게 되고 추종하는 신도들도 기도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힌두교도 고행과 요가를 통해서 보다 높은 인간의 경지에 오르려 합니다. 이를 볼 때에 침묵의 행위는 종교적인 것에서부터 인간 모든 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침묵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했는지 실감했습니다. 대선에 나선 사람들끼리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책제시보다도 신랄한 비판에만 몰두하는 것을 보면서 청중들은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입후보자가 이 사람은 절대로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고 이를 적극 저지하기 위해 나섰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을 때 바로 침묵 중에 있는 일반 국민은 서서히 분노를 하게 되고 힘이 모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SNS를 통해서 일반 대중을 우롱하는 것을 보면서 침묵의 힘이 심하게 격분하였음을 봅니다. 결국 투표의 결과를 보면서 많은 국민들이 의외로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침묵하는 국민들이 힘을 모을 수 있게 되면서 선거에 임하는 출마자들이 이젠 침묵하는 국민들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절실히 깨우치게 됐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여러 가지 선거를 통해서 출마하는 사람들이 어떤 양식을 갖고 예의 바르게 서로를 존중하고 비록 결점이 있더라도 서로 인격적으로 대중들을 대면하는가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국민의식이 진일보한 성숙한 선거의 장이 되었습니다. 우리 천주교회에선 교황을 선출할 때에 선거권이 있는 추기경급들이 로마의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의 콘클라베(conclave:열쇠로 잠근 방)에 모여 선거에 임하는데 바로 중요한 것은 침묵과 기도 중에서 투표를 하게 됩니다. 우리 성당에서 봉사자를 뽑을 때엔 투표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침묵 중에 누가 훌륭한 지도자가 될지 마음속으로 그려보면서(일명 소명 의식) 참여합니다. 이젠 어떤 형태의 선거이든 모든 출마자들이 침묵 중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국민 대중을 의식할 것입니다. 이번 대선은 또다시 우리 국민의 선거의식을 진일보시킨 선거를 통해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비록 내가 선택한 사람이 선출되지 않았다 해도 이젠 그와 그의 협력자들이 펼쳐가는 정책들을 위해 온힘으로 함께 도와야 할 것입니다. 최 재 용 천주교 수원교구 원로사목자

[삶과 종교]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길

2013년 계사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맘 때면 우리는 새롭게 각오를 하게 됩니다. 설사 그것을 다 이루지 못하더라도 뭔가 더 낫게 살아보려는 의지여서 아예 생각조차 않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봅니다. 희망으로 가득 찬 모든 분들에게 올해는 지혜로운 한해가 되도록 정진하기를 권하면서 그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이 온통 다 번거롭게 보입니다. 반면,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세상 또한 맑고 깨끗해질 것입니다. 또 가까운 이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좋아하고 가까운 이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함께 힘들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스스로 좋은 일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 것이며, 스스로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또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처럼 시시각각 변해가는 것이 세상이치인데, 중생심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거기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각자가 겪는 행복과 불행, 기쁨과 즐거움, 고통과 괴로움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자작자수요 자업자득이며 자승자박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 곳에만 집착을 하고 거기에만 온통 정신이 매몰되어 결국에는 일을 그르치고 마는 것이 중생들의 삶이요 인생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불자라면 한 곳에만 집착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마음을 제어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기쁨과 즐거움, 고통과 괴로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무지함과 의심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번뇌가 동반합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마음속의 번뇌는 결국 고통과 괴로움을 가져다주게 됩니다. 인생을 살만큼 산 분들에게 물어보면 대다수가 괴롭다고 대답합니다. 어떤 이는 괴로워서 못살겠다고 합니다. 괴로워 못 살겠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왜 사람들은 매일 매일 고통과 괴로움 속에 내몰려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탐진치 삼독이라는 번뇌로 인해서 오욕락이라는 망상이 죽 끓듯 끓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얽매임이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은 전도몽상으로 드러나는 공포를 다 여의게 되고 헛된 삶으로 끄달리는 그릇된 집착이나 속박으로부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바새계경에서 신심이라는 생명력을 가진 이가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좋은 벗을 가까이함이요, 둘째는 성내는 마음을 끊음이요, 셋째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름이요, 넷째는 연민의 정을 일으킴이요, 다섯째는 부지런히 정진하는 일이니라. 보리심은 자기의 본심인 참마음을 의미합니다. 참마음을 지니고 있고 참마음을 일으키는 이는 좋은 벗을 가까이할 수 있고, 성냄을 끊을 수 있으며,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연민의 정을 일으키며, 진지한 자세로 부지런히 정진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성행 청계사 주지

[삶과 종교] 아름다운 채움

많은 종교와 명상은 비움에 대해 강조합니다. 욕심도, 명예도, 돈도 다 비우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비우려고 노력해도 정말 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엇인가를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비우고 버리려고 노력해 본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무모한 일인지 금방 알게 됩니다. 제가 목사로 돈에 대해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고 참 많은 노력을 합니다. 저는 목회하는 동안 통장에 돈을 모으지 않고, 제 이름으로 집을 소유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청빈이라는 명예욕이 머리를 듭니다. 내가 이렇게 버리고 포기한다고 산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 생깁니다. 기독교 역사에도 보면 청빈하게 살려고 돈과 가족도 다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들 사이에 명예 때문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 많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서로 주교가 되겠다고 음모를 꾸미고 속이고 하는 일들이 실제로 수도원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비워서 진공 상태가 되면 블랙홀이 되어 무엇이든지 빨아들인다 무조건 비운다고, 포기한다고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요즘 다이어트를 하는 분들이 많은데 가장 흔한 다이어트 방법이 무조건 먹지 않는 거라고 합니다. 살을 빼겠다고는 욕심에 밥을 먹지 않고 수일을 버팁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며칠 동안 먹지 않으면 허기가 심해지게 되고 결국에는 폭식으로 이어져 결국 얼마 정도 줄었던 몸무게가 오히려 늘어나게 됩니다. 제대로 살을 빼기 위해서는 적당히 먹어야 합니다. 무조건 안 먹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음식을 섭취하는 겁니다. 탄수화물을 줄이고 야채와 단백질 섭취를 늘리는 식단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적당한 운동을 해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비운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무조건 포기한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 갈 때에 건강해지고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기차가 달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개구쟁이들이 괜스레 지나가는 기차를 향하여 돌멩이질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별생각 없이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기차의 유리창이 깨어지기도 하고, 타고 있던 승객들의 머리가 깨지는 등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그래서 시간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구쟁이들의 장난질은 끊어지지를 않았습니다. 하루는 선생님 가운데 한 분이 좋은 생각을 해 내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철로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기차가 지나갈 때 이렇게 아이들에게 외쳤습니다. 얘들아! 저 기차를 향해서 손을 흔들어 주자. 그래서 선생님과 더불어서 아이들이 손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열차 안에 타고 있던 승객들도 덩달아서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은 손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돌멩이를 던지는 장난질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돌멩이를 던지지 말아라는 말로는 장난질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손을 흔들면서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으로 바뀔 때, 자연스럽게 돌멩이를 던지는 장난질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삶에 무조건 비우려고 하기보다는 선한 것으로 채워가면 어떨까요? 그럼 더욱 아름다운 세상으로 바뀔 겁니다. 김 병 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삶과 종교] 투표하는 우리의 손을 거룩하게 하소서

오늘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게 될 최고의 어른을 선택하게 됩니다. 참으로 거룩한 날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선거운동기간 중에 들은 것과 기대하고 있는 것들을 경건하게 생각하면서 투표장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과 함께 나라의 모든 것들을 진두지휘할 강력한 집단이 형성되기에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저는 한 종교의 봉사자이기 때문에 나의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마음을 갖고 투표장에 가서 거룩한 한 표를 행사할 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하면서도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어른을 선택함에 있어서 북한까지 품어 안을 수 있는 넓은 가슴과 도량을 겸비한 분이 선출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발표된 수많은 공약들 가운데 정작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본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어서 참으로 아쉽습니다. 이것은 바로 도덕 정치입니다. 즉 도덕이 사회의 근본 바탕이 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관은 결코 물질이나 감각적인 것에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것이 행복추구의 첫걸음인 경우는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의 목표는 아닌 것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과 강의를 통해서 정의와 공정이 무엇인지 세계인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미국 하버드대의 마이클 샌델 교수가 쓴 왜 도덕인가?라는 책을 통해서 지구촌의 성실한 지도자들은 다들 이것을 공감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여러 나라에의 정치 논쟁은 복지와 자유를 큰 이슈로 삼고 있는데 행복한 인간의 삶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삶 즉,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희생과 봉사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시민 의식의 형성과 도덕적으로 함께 공감을 할 수 있는 시장의 환경을 조성하고 그리고 불평등을 해소하고 결속의 공감대를 만들며 시민들이 덕성의 소중함을 추구할 수 있도록 일깨우고 그래서 결국 도덕적 참여의 정치를 펼쳐나가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오늘 선거에 임하면서 제가 늘 읽고 기도하곤 하는 신약성경의 이런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마태오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세 가지 유형으로 유혹을 받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만민을 위한 구세주의 삶을 계획하면서 광야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지내던 중 한 유혹자가 와서 세 가지 유혹을 하게 됩니다. 이중에 가장 첫 번째 유혹은 바로 40일 동안 단식을 한 상태에서 돌에게 빵이 되라고 했을 때 예수님의 허기가 극에 달한 상태라 가장 쉬운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라고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약 30여 년 전만 해도 너무 가난했기에 당시엔 먹을 것, 입을 것, 쉴 곳이 모두 인줄만 알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아님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이젠 우리가 정신적인 것에서 삶의 풍요로움을 찾아나서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이클 샌델 교수가 제시하는 좋은 삶 즉, 개인의 욕심을 뛰어넘어 공유의 삶 안에서 행복을 찾아 나서도록 우리 새 대통령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도덕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는 분을 우리가 모셨으면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온 국민의 투표하는 손들을 거룩하게 하소서라고 빕니다. 최 재 용 천주교 수원교구 원로사목자 신부

[삶과 종교] 행복도 불행도 내가 짓는 것

여보시게 친구 산을 오르면 절이 있고 절에 가면 부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절에 가면 인간이 만든 불상만 자네를 내려다보고 있지 않던가? 부처는 절에 없다네. 부처는 세상에 내려가야만 천지에 널려 있다네. 내 주위 가난한 이웃이 부처고 병들어 누워있는 자가 부처라네. 그 많은 부처를 보지도 못하고 어찌 사람이 만든 불상에만 허리가 아프도록 절만 하는가? 천당과 지옥은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가? 살아있는 지금이 천당이고 지옥이라네. 내가 살면서 즐겁고 행복하면 여기가 천당이고, 살면서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하면 거기가 지옥이라네. 자네 마음이 부처고 자네가 관세음보살이라네. 여보시게 친구 죽어서 천당가려하지 말고 사는 동안 천당에서 같이 살지 않으려나? 즐겁고 행복하면 여기가 천당 자네가 부처라는 걸 잊지 마시게 그리고 부처답게 살길바라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에 있어서 어떻게 하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 또한 어떻게 하는 것이 불행한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여기 한 예를 들자면 어느 마을에 유명한 의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모두 그를 찾아가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는 환자의 얼굴과 걸음만 봐도 어디가 아픈지 알아내 처방을 하는 명의(名醫)였습니다. 그런 그가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사찰의 스님은 임종을 앞둔 의사를 찾아가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죽음을 앞둔 그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보다 훨씬 훌륭한 세 명의 의사를 소개하겠습니다. 그 의사의 이름은 음식과 수면과 운동입니다. 음식은 위의 75%만 채우고 절대로 과식하지 마십시오. 12시 이전에 잠들고 해 뜨면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걷다 보면 웬만한 병은 나을 수 있습니다. 말을 하던 의사가 힘들었는지 잠시 말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음식과 수면과 운동은 다음 두 가지 약을 함께 복용할 때 효과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조금 전보다 의사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육체와 더불어 영혼의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웃음과 사랑입니다. 육체만 건강한 것은 반쪽 건강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고루 건강한 사람이 되십시오. 웃음은 평생 꾸준히 복용해야 합니다. 웃음 약은 부작용이 없는 만병통치약입니다.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많이 복용해도 됩니다. 사랑 약은 비상 상비약입니다. 이 약은 수시로 복용하십시오. 가장 중요한 약입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거기가 지옥 의사는 자신이 살면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을 알려준 후 평안한 모습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우리는 돈도 안 드는 이 약을 얼마나 섭취하고 있습니까? 성 행 청계사 주지

[삶과 종교] 최선의 선택

해안선에 등대가 우뚝 세워져 있었습니다. 배들은 항상 등대 불빛을 보며 방향을 잡고 안전하게 항구로 들어오곤 하였습니다. 등대 기름 창고에는 기름이 늘 충분히 공급되어 있었습니다. 등대에 불을 밝히라고 정부에서 공급해 주는 기름이었습니다. 어느 날 자동차가 지나가다가 기름이 떨어져 오도가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주유소가 없는 곳이라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기름을 조금 주었습니다. 이튿날 가난한 할머니가 오더니 추워서 못 자겠다면서 기름 보일러에 기름을 좀 채워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정이 딱하여 조금 주었습니다. 또 한 자매가 와서 내일이 시험인데 등을 밝힐 기름이 떨어졌다고 기름을 달라고 하기에 입장이 난처하여 조금 주었습니다.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조금씩 기름을 주다보니 등대에 넣을 기름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기름이 떨어진 그 날 밤 배 몇 척이 파선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며칠 후에 조사단이 파견되었습니다. 기름을 충분히 주었는데 왜 등대 불이 꺼졌는지를 조사하였습니다. 등대지기는 사정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그 말을 다 들은 당국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기름을 공급한 이유는 오직 하나 등대에 불을 꺼뜨리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직무 유기입니다. 구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선택을 하면서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핑계를 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기에 내리는 결정은 잘못된 결정인 경우가 많으며, 최선이 아닌 차선인 경우가 많습니다. 올바른 결정, 최선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삶에 원칙이 세워져야 합니다. 원칙은 상황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원칙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스프라울(R.C.Sproul) 이 쓴 반대 의견의 극복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에는 독일에서 성장한 유대인 소년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 소년은 자기 아버지를 존경하며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유대인 회당에 충성을 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들도 신앙으로 하나가 되게 하였습니다. 10대 소년이 되었을 때 그의 가족은 조그만 시골 마을로 이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는 유대인이 없어서 유대인 회당이 없었습니다. 다만 루터교회 하나가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 거의가 다 루터 교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가족을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유대교를 포기하고 루터교로 개종한다 가족들이 물었습니다.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버지가 대답하였습니다. 이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루터 교인이다. 루터 교인이 되어야 사업상 유리하다 이 말을 들은 소년은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얼마 후 그 소년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유명한 이론을 정립하였습니다. 종교는 아편이다. 하나님 없는 민중, 종교 없는 나라를 만들자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를 만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공산주의를 창설한 칼 막스(Karl Marx)입니다. 원칙이 없이 상황에 따라 자신의 선택을 번복하여 최선이 아닌 차선의 선택을 한 아버지 때문에 공산주의가 생겼습니다. 내 삶의 중요한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지키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차선이 아닌 최선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원칙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 치열한 헌신과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드는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김 병 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삶과 종교] 한국의 신자본주의 정신

위의 제목은 2005년 박우희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 두 분의 석학들이 공저로 펴낸 책의 제목입니다. 이 두 분의 석학들이 특강도 겸해서 했던 출판기념회에 저도 참석했는데 이 자리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한국의 정치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하거나 할 수 있는 젊은 학자들이 대거 참석한 것을 보면서 한국에 싱그러운 경제정신이 새롭게 탄생될 수 있겠구나 하는 설레는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위의 이 두 분이 제시한 한국의 신자본주의 정신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나눔이란 큰 틀을 형성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즉 국가 경제규모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에 복지사회를 위한 막대한 자금은 세금이란 제도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해 경제발전을 해 나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 근본 바탕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 이윤추구를 허용하는 체제라서 어느 체제보다도 성장 동력이 강력하지만, 이에 반해서 경제혜택을 함께 공유할 수 없는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형성되기 쉽고 환경파괴가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 있게 되고 자원고갈 등을 통해서 어쩔 수 없이 유전자 조작이라든지 변형된 생산품에서 인류가 시달림을 받게 될 수밖에 없는 현상이 사회를 혼탁하게 만들어 가는 부정적인 면이 대두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유럽이나 미국은 빈부의 격차는 우리 모두의 책임임을 의식하고 동반성장이라는 결코 쉽지 않은 경로이지만 이를 향해 부단히 헤쳐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함께 나누는 크리스천 정신과 같은 맥락에서 비롯됨을 봅니다. 그런데 인간의 속성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욕망에서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가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세금제도를 통해서 부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방법이 얼마나 힘든지를 공산주의 탄생과 우리나라에도 최근엔 지난 노무현 정권의 예를 통해서 볼 때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오 복음 19장 24절과 마르코 복음 10장 25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인간의 약점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교회는 국민 모두가 함께 행복하자는 복지사회를 위한 여러 가지 사업에 열심히 동참하고 있습니다만 많은 교회들이 국가의 예산을 더 많이 따내서 자기 복지 시설을 크게 키우려는 일들을 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교회기관은 면세혜택을 보는데다가 여러 다양한 복지 기관들이 대부분 국가의 예산을 받아서 하는데 많은 교회들이 자체로 부담해야 하는 법인 지원금에는 별의별 방법을 써서 명목만 걸고 실제로는 국가예산만을 갖고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기업가는 자기에게 부과되는 세금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사회에 환원해야함을 위의 두 분 학자들이 제시하고 있고 교회는 더 많은 부를 나눌 수 있도록 기업가나 기득권층에 있는 부자들과의 중간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교회의 세를 불리는데 혈안이 되고 있는 현실은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참신한 학자들이 주장하는 신자본주의 정신은 크리스천 정신에 입각해서 함께 나누고 동반성장을 하자는 강력한 뜻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아름다운 기업풍토가 조심스럽게 생기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 사회적 기업정신이란 말 그대로 기업주나 근로자들이 함께 행복하게 그리고 이익창출은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정신입니다. 바로 교회가 이런 아름다운 운동에 앞장서자는 것입니다. 최 재 용 천주교 수원교구 수원대리구장ㆍ신부

[삶과 종교] 겸손·학습·성실 베푸는 삶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무리 정직하고 노력하고 고생을 해도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 이유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치 서울을 가야 할 사람이 대구를 출발해 부산 방향으로 간다면 서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길을 돌아가야 할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열심히 노력하지만 자신의 목표는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한다. 먼저 자신의 운명을 또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의 의미를 분명히 파악하고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조금만 노력해도 자신의 성공을 찾아가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그 원리는 불교의 연기관에도 잘 표현하고 있다. 법구경에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는 의미이다. 고집과 아집 내려놓기 위해 마음공부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겸손하라. 길을 모르면 물어서 가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계속 고집하다가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면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될지를 생각해야한다. 그러니 절대 고집(固執)은 안 된다. 고집과 아집은 모두에게 고통만 줄 뿐이다. 그러기에 고집과 아집을 내려놓기 위해서 불교에서는 마음공부를 시키는 것이다. 또 한 방편으로는 지관 좌선법(호흡법)과 자기 자신을 내려놓기 위해 절하는 수행법도 가르치는데 108배, 500배, 1080배, 3000배, 기타 등등 불교의 수행법은 무궁무진하다. 둘째, 학습하라. 지식은 버리는 공부이며 지혜는 나누는 공부이다. 지식은 말하려 하지만 지혜는 들으려한다. 어떤 일이든지 시작하기 전에 충분한 지식을 습득한 뒤에 그 지식을 잘 다스려 지혜를 발휘한다면 보다 훌륭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성실하라. 누구나 인생을 살다보면 많은 일들이 생기게 마련인데 그저 넋 놓고 있다면 자기 앞에 다가올 운명은 불을 보듯 뻔한게 아니겠는가?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 어느 누구라도 고비가 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이득이 없듯이 최선을 다하여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넷째, 베푸는 삶을 살아라. 지식은 버리는 공부, 지혜는 나누는 공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게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나누는 기쁨이다. 그것은 재물도 높은 권력도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작지만 가장 큰 삶인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대기업이던 작은 구멍가게를 하더라도 누군가가 자신의 일을 분담하는 이가 없다면 자신의 경제적 가치를 유지할 수가 없다. 반면 아무리 가난해도 몸과 마음으로 위로하고 함께 즐거워해주고 축복하고 기도해준다면 언젠가는 그들도 당신을 위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줄 것이다. 성행 청계사 주지

[삶과 종교] “당신의 미래는 당신의 과거와 같지 않으리라”

늘 지나고 나면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도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대하는 태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좋았던 기억들, 행복했던 시간들은 잊지 않도록 깊이 간직해 두어야 합니다. 아픈 상처들, 힘들었던 시간들은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아픔을 통해 배운 가르침은 깊이 새겨두어야 합니다. 행복한 추억들은 오늘을 살아갈 힘이 되어야 하고, 아픈 상처들은 다시는 똑같은 일로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교사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요즘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고, 과거의 아픈 기억 때문에 미래에 대한 소망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즘 리사 비비어의 통제 불능의 상황에서도 나는 즐겁기만 하다라는 책을 보고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으로 넘어져 울고 있는 시온의 딸을 향해 선지자가 부르짖습니다. 일어나라! 너의 미래는 결코 과거와 같지 않으리라! 그런데 우리는 과거의 상처와 실패를 기억하면서 우리의 미래도 실패한 과거와 다르지 않다라고 미리 절망하며 낙심하고 있습니다. 이번 대선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선택입니다. 이 땅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위험한 발언이긴 하지만 대통령 후보에 대해 말을 좀 하려고 합니다. 누구를 뽑든지 간에 우선은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은 안 될 것 같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되 과거의 일들 때문에 미래의 발목을 잡으려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미래를 이야기하되 소망을 주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쓰레기 더미를 밑거름으로 사용하여 비옥한 땅을 만들어 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황무지도 개간할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민족의 역사를 인정하고 서로를 칭찬해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혁명과 유신 군부정권, 민주화 투쟁,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매 시대마다 이렇게 가다가는 나라가 무너질 것 같은 위기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마다 아픔을 딛고 누군가의 피와 헌신을 통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도 위기이지만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의 말과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아는 사람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아침 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찾고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그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반드시 찾게 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야 저도 다가오는 미래 역사를 책임지는 한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묵상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미래가 결코 과거와 같지 않으리라는 것,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삶에 기가막힌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서도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일어설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야 일어서라! 일어서라! 저도 한 번 일어나 보렵니다. 사람 때문에, 과거 때문에, 내 경험 때문에 주저 앉았던 일들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두 다리에 바짝 힘을 주고! 김병삼 분당 만나교회 주임목사

[삶과 종교] 종교의 힘과 마력(魔力)

저는 그리스도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 자칫하면 편파적인 신앙관을 갖고 때론 이 편협된 교의를 신자들이나 비신자들에게 잘못 전하지 않을까 늘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종교와 종파의 교리서적들을 학생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 왔습니다. 물론 니체의 초인적 사상을 조심스럽게 넘나보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종교의 힘은 무엇이며 그 영향이 어떻게 인류에게 미치고 있는가를 유심히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덴마크의 사상가인 키르케고르는 두려움과 떨림이란 저서에서 구약성서의 아브라함이 자기의 귀한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을 받는 과정에서 하느님을 독대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사상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니체는 교회가 허상을 쫓고 있다고 하면서 인간 실존 자체에 더 큰 의의를 부여하게 되는 사상을 폈습니다. 바로 이것은 당시의 교회집단이 예수님이 세우신 참다운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에 의해 교회가 무섭게 변질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 종교지도자들의 경우를 보면 오히려 사회를 자기들의 세속적 이익을 위해 앞장서는 것 같이 보이는 때가 허다합니다. 프랑스에서와 같은 유럽의 반 교회운동이나 니체시대엔 적어도 교회집단은 호되게 야단을 맞아도 유태인 출신인 시몬느 베이유라든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같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는 깍듯한 예의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회 분위기는 예수님을 재물의 신, 명예의 신, 욕망의 신, 광란의 신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 교회집단이 이기주의에 빠졌거나 물질주의 그리고 현실주의에 빠져버린 타락한 집단으로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를 기업경영과 같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이 운영하는 여러 상점에 가보면 대부분 자네 시작은 보잘 것 없었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라는 욥기 8장 7절의 말씀이 걸려있는 것을 쉽게 보게 됩니다. 성경 말씀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현세적인 것에 너무 치우치다 보니 금권 및 정치권력이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의 영성과는 동떨어진 이익 집단으로 변질된 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개탄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신도들이 날로 증가하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요. 그러나 이로 인해 재물에 따른 물의가 빚어지는 것은 분명 교회의 타락인 것입니다. 교회는 재물을 쌓아두는 창고가 아니라 불우한 이웃을 위한 자선 배급소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꼭 해야 할 몫이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내용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대권을 향한 선거열풍이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이럴 때 나타나는 현실은 대권을 향한 사람들이 자기 신앙과는 전혀 다르거나 어떤 때는 못마땅해 하는 교회나 사찰에 가서 합장을 하거나 부복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라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부패하였는가를 보게 됩니다. 현재의 우리나라의 종교 지도자들이 분명히 알아차려야 할 것은 종교집단이 이 사회를 정의롭고 아름다운 환경을 만들어 가는 큰 힘도 있지만 사회를 부패시키는 상상할 수 없는 마력(魔力)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보면 정확히 지적되고 있습니다. 단언하건데 대권을 향한 누군가를 종교 집단에서 공공연하게 지지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뿌리부터 타락한 것이라고 봅니다. 종교는 현세적인 정치집단, 기업집단이 아니라 인간영혼을 위한 영원한 가르침을 제시하고 인도하는 곳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최재용 신부천주교 수원교구 수원대리구장

[삶과 종교] 용감한 사람은 자신을 이기는 사람

세존께서 라자가하의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무실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욕쟁이 바라드와자 바라문이 자기 족성을 가진 바라문이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세존을 찾아가 오만불손하고 거친 말로 욕하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안온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실 뿐이었습니다. 욕쟁이 바라드와자는 자신이 참기 힘든 심한 욕설을 했기 때문에 세존이시다 하더라도 이에 대응할 줄 알았는데, 이에 동요치 않으시자 오히려 당황하며 화를 내지 않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바라드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의 친구와 동료나 가족과 친척들이 그대를 방문하러 오는가? 고따마 존자여, 때때로 나의 친구와 동료나 가족과 친척들이 나를 방문하러 옵니다. 바라문이여, 그러면 그대는 그들에게 여러 가지 음식들을 내놓는가? 고따마 존자여, 때때로 그들에게 여러 가지 음식들을 내놓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런데 만일 그들이 섭수하지 않으면 그 음식은 누구의 것이 되는가? 고따마 존자여, 만일 그들이 섭수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 것이 됩니다. 욕하고, 모욕주고, 시비 걸어도 섭수하지 않으면 그대 것 참으로 그러하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우리가 아무 욕도 하지 않는데도 욕을 하고, 모욕을 주지 않는데도 모욕을 주고 시비를 걸지 않는데도 시비를 건다. 그러나 우리는 그대의 것을 섭수하지 않으므로 그것은 그대의 것이 된다. 바라문이여, 욕하는 사람에게 맞서서 욕을 하고, 모욕을 주는 사람에게 맞서서 모욕을 주고 시비를 거는 사람에게 맞서서 시비를 걸면 이것은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고 서로 교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대와 함께 음식을 먹지 않고 서로 교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대의 것이 된다. 왕과 왕의 신하들은 고따마 존자에 대해서 아라한이라고 말하던데 고따마 존자는 지금 화를 내고 있습니다. 유순하고 바르게 생계를 유지하고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하였고 지극히 평화롭고 모든 것에 여여하고 분노가 없는 자가 어떻게 분노하는가? 분노에 맞서서 분노하는 그런 자는 더욱 더 사악한 자가 되나니 분노에 맞서서 분노하지 않으면 이기기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하도다. 그런 사람 자신과 상대 둘 다의 이익을 도모하는 여여한 사람이니 상대가 크게 성이 난 것을 알면 마음 챙기고 고요하게 처신하노라. 그런 그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까지 둘 다를 구제하나니, 이런 그를 어리석다 여기는 사람들은 법에 능숙하지 못한 자들이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눈 있는 자 형색을 보라고 어둠속에서 등불을 비춰 주시듯,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에 출가하고자 합니다. 욕쟁이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세존 곁으로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분노 맞서서 분노하지 않으면 자신과 상대방 둘 다 구제 부처님께서는 가장 용감한 사람은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지금 내가 부처가 되어서 천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홀로 삼계를 거닐며 안온한 마음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다 인욕수행으로 인한 공덕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인욕은 험난한 바다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커다란 배와 같고, 병을 고칠 수 있는 좋은 약과 같아서 중생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공양 올려 마땅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 성행 대한불교조계종 청계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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