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요가의 본질과 전용

일전에, 요가와 피트니스 강의를 통하여 대중들에게 심신의 건강과 균형을 찾도록 지도해온 지인이 대화하다가 난감한 고민을 토로하였다. 고민인즉, 그분의 수강생들이 수업의 심화를 위해 유튜브 영상을 검색해 보았더니 거의 모두라고 할 정도로 상업적 의도의 선정적인 영상뿐이어서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영상은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만들어진 영상까지 가세해서 요가의 본지를 흐리고 초심자에게는 적지 않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어서 우려가 크다는 게 요지였다. 즉 이미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인 요가라는 이름으로 선정적인 눈요기 영상을 올려 조회수 높이고 광고 수익이나 노리는 영상이 대체적인 경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요가의 전통에 따르는 입문과 학습은 독학이나 자습이 아닌 스승을 통하여 정신원리와 물질원리의 이치를 밝히고 조화로 나가는 긴 수행의 여정이다. 그래서 요가(Yoga)라는 말 자체가 산스크리트어의 어근인 유즈(yuj, 영어의 yoke에 해당)에서 나온 말로 결합 또는 통합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인간의 다양한 감각의식을 근본적인 의식인 마음과 통합시키는 것으로 궁극적인 근원이 드러날 수 있도록 일체의 감각 기능을 통제하고 억제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요가 수행은 외계의 사물에 집착을 일으키는 개별의식을 근본적인 마음과 결합시키는 것으로, 일체의 마음 작용을 정지시킴으로써 해탈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요가는 아리야인이 인도 대륙에 들어오기 전부터 행한 오랜 역사를 갖는 수행법이었다. 이러한 실천법이 파탄잘리(Pata0148jali)의 요가 수트라(Yoga-s016Btra)를 통해 체계화되고 그 체계화된 전통이 요가학파로 전승되었다. 오늘날 요가란 말은 요가학파의 전유물이 아니라 종교를 초월하여 해탈을 위한 실천 수행법 일반을 가리키는 폭넓고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요가 수트라에 의하면 요가 수행의 목적은 마음 작용의 정지에 있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8실수법이라 불리는 8가지의 실천체계이다. 즉 해서는 안 되는 것,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것, 심신을 편안하고 안정되게 하기 위한 좌법, 호흡의 조절, 외계로 향하는 감각기관의 의식을 제어,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것, 선정, 삼매 등의 체계를 지닌다. 요가는 인도의 정신수행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로, 또한 요가학파의 전통을 통해 오늘날 풍부한 정신문화를 간직한 나라로 인정받고 있다. 이와 함께 인도의 윤회사상 가운데 아귀계라고 하는 세계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아귀의 생태는, 어떤 상황에서도 타자의 불행이나 행복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부류를 말한다. 무슨 일에 종사하든 한 번쯤 자신도 돌이켜 볼 일이다. 최성규 철학박사ㆍ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삶과종교] 건강한 꿈을 갖는 나라 만들어 가기

그녀는 미국 처음의 시각, 청각 시청각 장애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미국의 작가였고 교육자이며 인문계 학사를 받았다. 그녀의 이름은 헬런 애덤스 켈러(Helen Adams Keller)다. 헬런 켈러는 태어날 때부터 시각, 청각에 문제가 있는 장애인으로 태어나지는 않았다. 그녀는 생후 19개월이 됐을 때 성홍열과 뇌막염에 걸려 시청각 장애인이 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신체적 약점을 통해서 오히려 앞을 보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정치적 활동을 통해 인권운동을 할 수가 있었다. 그녀가 남긴 유명한 어록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눈먼 상태보다 눈은 보이지만 아무런 삶의 비전(vision)을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나쁘다라는 의미 있는 말이 있다. 인간의 소중함은 각자의 인생에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꿈이라고도 말하고 존재목적이라고도 말한다. 이것은 인간만이 하나님께 받은 하나님 형상의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자녀교육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며 사회활동을 통해 목적을 만드는 것도 꿈이 있기 때문이다. 산업부흥이 일어나던 시절 시골 사는 우리 부모님의 꿈은 소를 팔아 장남을 서울로 보내 공부시켜서 출세하게 하는 것이었다. 전쟁 폐허 가난 속에 살던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 만큼은 기름진 땅을 물려주고자 하루에 12시간 넘는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고통 속에서도 우리 내 부모님들에게는 이런 꿈들이 있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4장에는 예수께서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해 40일 금식 기도를 하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모습이 나온다. 마귀는 40일 동안 아무 음식도 먹지 않으셨던 예수님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명령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시험을 한다. 이 시험은 본질과 비본질을 바꾸는 시험이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단순하게 먹고 마시는 것으로 무너뜨리려는 아주 음흉한 시험을 보여 준 것이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라고 본질적인 당신의 꿈을 선포하시면서 마귀를 꾸짖으신다. 예수님은 결코 인간의 본질적 존엄성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조정 당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꿈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을 본래의 인간답게 회복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의 꿈은 너무 가시적이며 육체적, 충족적이다. 인간의 인간다움이 아닌 온종일 자신의 배설물에 뒹굴며 편하게 먹고 자는 짐승과 같은 안일함의 꿈이다. 이제는 우리 자손들이 우리를 위해서만 살지 않고 우리나라보다 가난하고 힘들어하는 나라들을 도우며 함께 살아가는 선진국의 품격이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 몇몇 세계적인 스타들이 한국을 대표하지 아니하고 한국의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여유로우며 정의로우며 자애가 있으며 주변을 배려할 줄 아는 그런 일등시민의 수준 있는 삶의 자태를 보고 싶은 꿈이 이뤄지길 바라고 있다. 보수적인 삶 속에는 조금 더 모든 사람들을 품고 함께 가는 넉넉함을, 진보적인 삶 속에는 예와 기품을 가진 뜨거운 사람 사랑하는 품격 있는 그런 국민이 사는 나라 동방의 예의지국 대한민국이 되는 꿈이 실현되는 그날을 보고 싶다. 그런 건강한 꿈을 갖는 나라 만들어 가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성경은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서로서로 선한 것을 심고 양보를 심고, 기다려 줌을 심은 후에 이 열매들을 볼 때쯤엔 이 동방의 작은 나라는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에 있으리라 한낮의 꿈을 꿔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AI가 넘볼 수 없는 인간의 능력

지난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AlphaGo) 간의 바둑 대결은 세간을 뜨겁게 했다. 최고 중 최고 인간 실력자와 최고의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과의 대결, 이세돌의 신의 한수로 알파고가 버그를 일으킨 장면은 인간이 인공지능에 결코 질 수 없다는 통쾌함을 선사했지만 최종적으로 4대 1로 진 대결이었다. 혹자는 AI가 인간을 뛰어넘어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신기하게도 인간에게는 AI가 넘볼 수 없는 능력이 있다. 바로 메타인지(Metacognition)라는 자기 성찰 능력이다. 이는 자신의 인지적 활동에 대한 지식과 조절을 뜻한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 아는 것에서부터 모르는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는 전 과정을 말한다. 다시 말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모르는 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이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이 메타인지 능력이라는 것이다. 즉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도 같은 능력이다.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생들은 거의 10년 가까이 가톨릭 대학교에 머물며 철학과 신학 수업을 배운다. 세상 사람들은 바보같이 시대에 뒤처진 학문을 왜 공부하고 있냐?라고 물을 수 있다. 과연 어리석은 일일까? 신학생들은 여러 철학자의 사상과 역사를 배우는데 특히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워주고자 문답의 방법으로 사상을 전파했다.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반복해서 표현하고 그 표현을 구사하기 위해 더 많이 사고한다. 이 문답을 통해 자신이 모르거나 착각한 부분을 발견해 스스로 부족한 점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바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어록은 메타인지 향상과 닮아있다. 그뿐만 아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정말 후회할 만한 순간이 넘쳐난다. 교회 분열, 중세 종교재판, 십자군 원정, 유대인과 타종교인들에 대한 박해, 여성에 대한 억압, 원주민들에 대한 폭력,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에 대한 파문, 2차 대전 중 나치에 대한 묵인 등 교회의 여러 가지 과오들이 많다. 하느님 앞에 부끄럽고 스스로 교만했기에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교회 역사 2천년을 돌아보며 하느님과 인류에게 용서를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끄럽게도 저지른 일들이 무엇인지 몰랐고 그러다 보니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슬프지만, 교회는 이런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당당히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반성하고 또 반성하려 노력한다. 바로 메타인지, 자기 성찰 능력을 끊임없이 발휘하기 위해서다. 인공지능 시대라는 새로운 도전으로 인해 인간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마주할 것이다. 또 실수하고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후회하고 일어날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후회하지 않을 일이 무엇인지 인식하는 삶이 뒷받침될 때 말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인정한다는 것, 힘들지만 분명히 멋진 일이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2021년 첫눈과 김장운력

새벽예불을 마치고 법당문을 열고 나서니 눈 손님이(11월11일) 찾아와 손짓을 하는 듯했다. 가을이 미련을 두고 떠나지 않은 끝자락에 겨울을 재촉하는 첫눈이 산사(山寺)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오봉산 석굴암이 해발 500여m에 자리하다 보니 첫눈은 채 녹지 않고 절 마당을 얇게 덮었다. 어둠이 가시니 마치 하얀 도화지를 펼쳐 놓은 듯했다. 해가 뜨면 눈이 사라질까 한참을 바라봤다. 혼자서 첫눈을 감상하는 것이 미안해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을 지인들과 함께 공유했더니 곧 답장이 이어졌다. 도시에는 눈이 오지 않았어요, 우리 동네는 눈 대신 비만 살짝 왔어요라는 아쉬움과 더불어 기분 좋은 선물을 받았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첫눈은 누구나 동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초겨울이 준 선물이었다. 사실 산사의 겨울은 도시보다 빠르게 찾아온다. 사찰도 현대화돼 예전처럼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거나 눈 때문에 길이 막히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겨울을 준비하는 것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마을보다 앞서 김장을 미리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지난 6일 봉선사는 배추 2천 포기로 김장을 했는데, 사찰에서는 김장 운력(雲力)이라고 한다.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서 일하는 것을 절에서 운력이라고 하는데 오래전부터 전통을 이어오는 울력이라고도 한다. 운(雲)이란 한자를 사용하는 것은 구름처럼 모여 함께 힘을 모아 일을 하는 까닭이다. 일종의 공동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봉선사에서 김장할 때 주지 초격 스님은 물론 여러 대중스님과 신도, 자원봉사자 등 100여명이 참여한 것도 운력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봉선사와 비롯하여 전국에 사찰에서도 바쁘게 김장울력을 하고 있다. 김장은 절에 있는 연못에서 직접 길러 수확한 연잎 가루를 넣어 별미다. 남양주 봉선사는 여러 사람의 정성이 깃든 김장을 지역의 여러 가지로 어려운 독거노인이나 소년소녀 가장에게 해마다 자비의 손길로 나눠 전하고 있다. 운력에는 화합(和合)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려면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각자의 입장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고 상대를 배려하면서 공동작업을 해야 효율성이 크다. 현대사회에서는 많이 사라졌지만 우리는 품앗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 크고 작은 일이 생기면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나서 힘을 보탰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심화되고 아파트 생활이 주를 이루면서 이웃에 누가 사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도시에서 품앗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을 사라졌다. 이웃이 함께 김장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김장을 사다 먹으라는 TV 홈쇼핑 광고를 들을 때면 마음이 쓸쓸하고 허전하다. 그래도 중소도시나 시골에서는 품앗이가 실낱처럼 이어지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예전처럼 이웃까지는 아니라도 가족이라도 모여 김장을 하면 어떨까. 어머니나 부인만 김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온 가족이 함께하는 김장은 우리 시대의 품앗이이며 운력이다. 어려울수록 김장을 이웃과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는 문화가 이어지면 참 좋겠다. 지난 7일 입동(立冬)이 지나고 나니 겨울은 더욱 속도를 내면서 깊어가고 있다. 마을에도 첫눈이 올 것이고, 때로는 폭설도 올 것이다. 시대는 바뀌고 인심도 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겠지만 눈 손님을 맞이하면서 조금은 더 따뜻한 마음, 함께하는 마음, 나누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오봉도일 스님

[삶과 종교] 악의로 농담하지 마라

요즘 우리 사회의 언어는 자기모순에 빠진 듯한 극심한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나와 주위의 언어 표현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수용을 넘어 찬양의 수준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상대방의 언어가 주는 선의나 비전에 대해서는 폄훼는 물론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티샤는 말한다. 악의로 농담하지 말라고. 11세기에 활동한 아티샤가 이미 그와 같은 경구를 남겼다는 것은 이것 또한 오래된 인간의 습속인가도 싶다. 아티샤는 동인도 사호르 국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왕위를 계승하지 않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나란타의 대논사가 되었다. 그는 티벳으로 가서 가르침을 전하였는데 그의 ??수심요결??에 이 말이 중요한 가르침으로 나온다. 아티샤는 붓다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고 또한 선(禪) 쪽의 사람들도 같은 맥을 잇고 있다. 악의로 농담하지 말라는 이 경구는 농담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농담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농담의 이면 심리를 깊이 파고들어가 농담 뒤에 숨겨져 있는 근본 이유를 살피라는 것이 그가 뜻하는 바이다. 아티샤로부터 천 년이나 지난 후에 프로이트가 나타나서 아티샤의 그 일을 다시 했다. 프로이트가 생각하기에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소재로 농담할 때는 농담의 대상이 되는 그 사람을 향한 분노가 있고 그 사람을 공격하고 싶어하는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는 것이다. 농담 형식을 빌려 우회적으로 익살스러운체하기는 하지만 진짜 동기는 공격하는 데에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실제로 아티샤가 의미하는바 역시, 말로라도 폭력적이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농담으로라도 폭력적이지 말라는 의미이다. 폭력은 폭력을 부르고, 분노를 부르면서 끝없는 악순환에 빠져들어 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에 대해서 외견상으로는 진짜 동기를 타자는 정확히 알 도리가 없지만 그러한 의도의 농담을 하는 자신은 알고 있다. 만약 마음에 누군가를 해치고 싶고 공격하고 싶은 고의적인 의도가 있을 때는 그것을 농담으로 표현하지 마라, 그러나 그렇지 않고 순수한 익살 감각에서 그저 재미로 하는 농담이라면 그리고 이 인생을 너무 무겁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감각에서 우러나오는 농담이라면 전혀 문제 될 게 없으며 주위를 유쾌하게 한다. 순수한 익살은 전혀 난폭하지 않게 농담으로 표현할 수 있다. 가끔은 표현상으로 난폭하게 보이더라도 듣는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농담하는 사람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헤치기 위하여 웃을 수도 있는데, 그런 웃음은 잘못이 된다. 폭력적 의도를 숨기는 비열한 전략은 결국 폭력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속 깊이에 인생에 대해서 더 많은 즐거움과 더 많은 웃음을 자아내고 싶은 바람이 전제되어 있다면 무엇이든지 덕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아티샤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는, 고의로 사람을 해치기 위하여 남의 잡담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잡담은 농담도 아니고 재미도 아니고 익살도 아닌 폭력이기 때문이다. 최성규 철학박사ㆍ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삶과 종교] 길 만드는 사람들

모든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만들어 가는 개개인의 추억의 앨범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인생이라는 시간의 앨범은 각자의 삶 속에서 자신이 걷는 삶의 방향을 가늠하게 한다. 인생의 길을 걸으며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내 삶의 나침판이며 때로는 지도가 되어 주는 길 안내를 추억의 앨범이 인도해 줄 때가 있다. 어릴 적 기억 속에 시골에 살던 집에 갈 때면 잘 닦여진 새 길은 멀리 돌아가기에 짧은 논두렁을 밟고 길을 만들어 학교에 다녔던 추억이 있다. 어릴 적 그때의 바람은 누가 이 먼 길 돌아 걷지 않도록 짧은 지름길 만들어 주기를 기도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지형적으로 국토의 전체 면적의 4분의 3이 산지로 이루어져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지게 문화가 신라시대 이전부터 사용됐다고 학계는 보고 있다. 지게는 어깨에 짐을 메고 다니는 운송수단이다. 손쉽게 만들 수 있고 특별한 장치가 없어서 모든 서민들이 이 지게로 모든 것을 운송하며 농업과 상업에 만능으로 쓰인 없어서는 안 되는 삶의 절대적 필수품이었다. 지게는 어느 산이든 어깨에 메고 오를 수 있으며 사람이 갈 수 있는 정도의 길은 문제없이 다니는 수단이었다. 지게 문화는 넓은 길이 필요하지 않다. 세상을 지배했던 강대국들이 전쟁과 물자 수송과 여러 통치에 필요한 부분들을 위해서 만들어 낸 것은 곧으며 넓은 길이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만들어졌듯이 길을 만들고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됐다는 것이 역사의 증명이 아닌가. 그 길을 만들고자 가장 필요했던 것은 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지도자이지 않았을까? 국력이 약한 나라는 길을 넓히지 않는다. 넓은 길은 오히려 침략자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지게를 지고 유연하게 자연의 지형에 익숙해지는 것이 편리하고 쉬운 운송수단이 될 수 있었겠지만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진취적인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고속도로는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명품 길이 됐다. 동남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일부 유럽의 도로까지 한국 고속도로공사의 실력은 공사실적을 가지고 인정을 받고 있다. 이제 자연의 환경을 바꾸고 터널을 뚫어 길을 만드는 대한민국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물질적인 길을 만드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나라가 가야 할 길을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바른 삶을 위해 길을 선택하라고 요구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해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장 13-14절) 이제는 우리가 바른 가치관을 가진 길을 만들어 가야 한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정직하고 진취적인 길을 가야 한다. 새로운 길을 이 시대에 만들 수 있는 사람에겐 분별력이 필요하다. 세상을 분별하고 시대를 분별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가 부러워하는 경제의 기적을 맛본 나라가 됐다. 여러 나라 들이 경제발전의 모델로 뒤따르고 싶어하는 모범의 나라가 됐다. 대한민국이 다시 한 번 이 시대에 새로운 가치의 길을 만들어 세상의 리더의 나라가 돼주길 기대한다. 좋은 가치관의 지도자들이 나오고 미래의 좋은 사회의 대안을 가지는 새 길을 만드는 지도자들이 있을 때 이 나라는 다시 한번 동방예의지국으로서 칭송을 받던 아름다운 나라로 일어서게 될 것이다. 시대를 선도해 가는 길 만드는 사람들이 일어서기를 기도해 본다. 조상훈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요!”

유네스코는 지난 2012년에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2013년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을 기념해로 지정한데 이어, 올해에는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세계 기념해로 지정하였다. 국법을 거슬러 참수(斬首)된 죄 없는 사형수의 역설에 전 세계가 공감한 이유는, 조선이라는 계급 사회 안에서 기득권적 삶을 포기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평등사상과 인간의 존엄, 생명, 진리, 정의 등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생애 때문이다. 김대건(金大建, 1821-1846년) 신부는 19세기 중반의 인물이다. 당시 조선은 혼란의 시기였다. 대외적으로 서구 열강들이 중국을 넘어 조선에까지 통상을 요구하며 위협해 왔고, 대내적으로 세도 정치의 등장으로 정치 기강이 흔들리고 국가 운영의 기준인 삼정(三政)이 문란해져서 가혹한 수탈과 지역 차별로 인한 각종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경제력을 쥔 상인 계급의 등장으로 양반 제도가 점점 힘을 잃어 가면서 사회 구조의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정부는 서학의 유입이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지배 질서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고 판단,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탄압하였다. 1836년 1월 조선 천주교회에 가장 시급한 일이 하루빨리 사제를 육성하는 일이라고 여겨 소년 김대건과 두 소년을 뽑아 마카오로 보내 사제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조선 천주교회는 세 명의 선교사와 100여명의 신자들이 목숨을 잃는 어려운 시기를 맞이한다. 타국에서 조선의 천주교 박해 소식을 접한 김대건은 하루빨리 신부가 되어 조선 땅을 밟는 꿈을 꾼다. 1845년, 한양을 떠난 지 10년여 만에 신부가 되었지만 선교사 영입과 더불어 선교활동에 힘쓰다가 조선 입국 7개월 만인 1846년 6월 5일 백령도 해역 순위도에서 체포, 한강 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형(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에 매어 달던 형벌)을 언도받고 25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당신은 천주교인이오? 김대건 신부가 옥중 취조 때 받은 질문이다. 당시 아니오라는 말만으로도 풀려날 수 있었지만, 김대건 신부는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답한다. 그리고 차별이 엄격하던 신분 사회에 하느님으로 인해 만민이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천주교 교리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박애 정신을 가르친다. 상놈이 양반에게 형제 혹은 자매라고 부를 수 있고 모두가 공생하는 사회를 꿈꾸면서 말이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 생태계 파괴와 기후 위기, 경제적 양극화 등의 위기 속에서, 이기심과 분열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들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2021년 유네스코의 기념인물에 김대건 신부가 선정된 이유 역시 그의 생애와 정신이 현 인류에 가장 필요한 가치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연꽃처럼 살아야

주말에 갑자기 기온이 내려갔다. 비까지 쏟아져 가을은 건너뛰고 겨울이 앞당겨 온 것 같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온이 따뜻해 반소매 입은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고 몇십 년 만에 찾아온 추위에 모두 두꺼운 옷을 껴입고 종종걸음을 한다. 자연 앞에 무기력한 것이 사람임을 실감케 한다. 산사에는 추위가 조금 더 빨리 찾아온다. 대부분 절이 산에 있는 까닭이다. 광릉 숲 곁에 자리한 25교구 본사 봉선사에도 가을과 겨울이 함께 물들어가고 있다. 기온이 뚝 떨어졌지만, 가족끼리 손을 잡고 나들이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부터 이어지는 코로나19로 지구촌 인류가 큰 고통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 역시 이로 인해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2차 백신 접종률이 70%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묵묵히 참고 인내하면서 방역수칙을 지켜온 결과다. 집단면역이 형성되면 예전의 일상으로 조금 더 빨리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사찰이나 성당, 교회도 이 변화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상과 단절돼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연결된 것이 종교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마거사도 말씀하기를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고 했고 부처님도 중생들이 괴로우면 당신도 괴롭다고 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종교는 사람들이 그동안 소홀하게 여겨온 내면을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현대문명이 짧은 기간에 극도로 발달하고, 물질을 우선하는 풍토가 확산돼 왔기에 코로나19같은 무시무시한 감염병이 창궐한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우리와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탐욕과 이익을 앞세운 결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내 안의 마음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현대사회와 물질을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지만, 내 마음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선 삶의 균형을 찾아갈 수 없다. 나 자신이 중요하듯 남도 중요하다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마음이 중요해진 오늘날이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맑은 마음과 행동이 모일 때, 모두가 상생하고 화합하는 길이 열리고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봉선사에는 연못이 있다.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살지만 오염되지 않는 연꽃을 보면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세상을 오탁(五濁) 또는 예토(穢土)라고 한다. 다섯 가지 번뇌가 세상을 더럽히는 진흙 같은 세상이란 의미다. 그런데 연꽃은 오탁과 예토에 있지만, 거기에 물들거나 휩쓸리지 않고, 여여하게 꽃잎을 피워낸다. 그렇다고 저 혼자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꽃들, 생물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렇기에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 한다. 요즘 날씨를 보면 금세 겨울이 올 것만 같다. 무상한 세월의 흐름을 바라보면 우리를 지금 힘들게 하고 있는 코로나도 언젠가는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물들지 않은 채 공존하는 연꽃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이 어려운 난관을 우리 모두 이겨냈으면 한다. 그리하여 언젠가, 저마다의 마음에서 연꽃을 피워낼 수 있는 뜻 깊은 삶이 됐으면 좋겠다. 오봉도일 스님

[삶과 종교] 감로도와 현실인식

지금까지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불화(佛畵) 형식으로 감로도(甘露圖)라는 것이 있다. 일반적으로 돌아가신 분을 위한 재의식 불화여서 영단화라고도 한다. 그 구성을 살펴보면 상단은 일곱 여래와 함께 자비의 화신인 관음과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든 이를 빠짐없이 구원하고자 하는 구원의 화신인 지장, 그리고 구원된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해 가는 인로보살 등이 표현돼 있다. 중단은 망자를 위한 시식단(施食壇)과 작법승중(作法僧衆)에 의한 의례(儀禮)의 모습이 나타나 있으며 그 아래의 하단은 감로도의 구성에서 가장 흥미롭고 독특한 곳으로, 중앙의 큰 아귀를 중심으로 육도 윤회상이 그려져 있다. 즉 지옥계를 상징하는 지옥의 여러 장면과 아귀계를 상징하는 아귀의 무리, 축생계를 상징하는 개나 소의 묘사와 아수라계를 상징하는 격렬한 전쟁의 장면, 또 인간세상의 현실적인 장면이 묘사된 인간계, 그리고 천인과 선인들을 묘사한 천계 등이 하단에 묘사돼 있다. 이러한 정황을 극명하게 잘 보여주는 경우로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구원을 위해 당대의 화승인 상겸에게 그리게 한 수원 용주사의 감로도를 들 수 있겠다. 하단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인간 행위의 갖가지 장면을 수식이나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보이고 있다. 술 취해 싸우는 사람, 짐을 잔뜩 실은 수레에 깔려 죽는 사람, 굶어 죽는 사람, 우물에 빠진 어린아이, 의지할 곳 없는 노인, 죽어 가는 자식을 바라만 보고 있는 비정한 부모, 간통한 것을 들켜 곤욕을 치르는 사람, 전쟁 장면, 남사당의 한바탕 공연, 어린아이가 병든 아버지를 간호하는 모습 등 인간의 삶 속에서 겪는 온갖 삶의 모습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온갖 고난은 당연한 줄 알았던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은 수많은 생명을 위로하고 천도하려는 목적이다 보니 있는 그대로 모두 드러내놓아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에는 상단에 있던 지장이 다시 하단에 내려와 석장을 짚고 목련 존자와 함께 있다.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한 장한 아들, 효성의 상징인 목련 존자는 재를 올리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여러 장면을 구름으로 적절하게 나눠 배치하면서 어색함 없이 화면을 통일시키는 놀라운 구성력도 보여준다. 불화는 종교회화이고 종교회화는 이상 세계를 시각화시킨다는 점에서 상징주의적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런데 감로도는 상징주의적 성격과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는 사실주의적 성격이 공존하는 독특한 불화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감로도의 성격으로 인해 끊임없이 변해가는 각 시대의 풍속을 반영할 수 있었고 또한 화승(畵僧)들에게는 의궤에 따라 그대로 그리는 제한적 작업에서 벗어나 예술가로서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도 제공해 줬다. 감로도를 보면서 끈질기게 지녀온 우리 민족의 창의적인 현실 극복의 힘을 느낄 수 있으며, 나아가 현재 우리가 겪는 각 분야의 난관을 우리의 삶, 우리의 현실 안에서 극복할 수 있는 귀중한 교훈을 선조들이 이미 마련해 놓았음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최성규 철학박사ㆍ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삶과 종교] 선진국 만들어 가기

오늘날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대한민국을 2021년 올해에 선진국 그룹에 포함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국민은 아직은 선진국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OECD 37개 국가 중 35등이다. 왜 우리나라 국민은 자신을 선진국의 국민으로 자랑스러워 하지 못하는 것일까? 일찍이 서유럽 중에서도 민주주의를 싹 틔운 선진국은 프랑스이다. 프랑스는 민중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최초의 혁명으로 근대의 여명을 연 시민혁명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프랑스가 일찍이 선진국의 그룹에 우뚝 서게 된 것은 단지 경제적인 측면이 아니다. 프랑스는 국민이 저녁을 오래 먹는 이유는 토론하기 위해서다라고 한다. 프랑스는 이 토론을 교육의 주체로 사용해왔다. 프랑스의 정치철학가이며 역사학자였던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1805년에 태어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가 남긴 민주주의 사상은 프랑스라는 국가를 민주주의 국가로 세우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가 가르친 자유와 평등을 통한 민주주의의 흐름은 프랑스라는 나라의 중요한 영양소가 되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사람을 존중하고 상대방을 인정해 주는 관계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바로 창조자이시며 만물의 왕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의 발아래서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기신 섬김의 모본이 아니겠는가? 기독교 신앙에 기초를 두고 태어난 미국이라는 나라가 전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리더의 국가가 되어 있는 현실에서 토론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다시 한번 되새겨 봐야 한다. 선진국이란 단지 돈 많은 강대국을 뜻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민주주의 꽃을 일찍이 피웠던 프랑스의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이 선거 유세 중에 한 젊은 남성이 던진 삶은 계란에 투척 당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남성에게 이 말을 남겼다.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 달라고. 진정한 선진국은 상대방과 서로 대화할 줄 아는 국민이 있는 나라이다. 서로 존중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토론하는 문화를 만드는 지도자들이 바로 정치가들이다.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에게 귀를 내어주는 지도자가 있는 나라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상대방을 향하여 험한 인상과 흥분된 논조로 비난과 조롱을 일삼는 삼류지도자들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 우리나라 20대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오고 있다. 이번 대선의 후보들에게서는 거칠고 유치하게 자신의 귀를 막고 자기 목청만 높이는 후진국 대통령 후보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불안의 시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전 세계에서 코로나19 방역을 잘하는 나라로 꼽히는 대한민국이지만 사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불안한 요소들은 너무나 많다. 부끄럽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자살률 1위 국가다. 현재 코로나19 사태로 희생된 분들에게 국가적 관심이 높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어서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낮은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출산율은 거의 세계 최저 수준이기에 학교들이 점차 문을 닫고 있다. 그뿐인가? 1998년 외환 위기부터 우리나라는 구조 조정의 시대, 대량 해고의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위기에서 벗어나는 해법이 항상 해고였다. 그리고 OECD 국가 중 남녀 임금 격차가 큰 나라가 우리나라다. 항상 노심초사해야 하는 사회, 일명 불안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자. 천주교에서는 20~30대를 찾아보기 어렵다. 왜 그럴까? 이 불안한 세상에서 기성세대들 중심 사목에 집중한 천주교회는 젊은이들에게 큰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무한 경쟁에 내몰려 생존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에 지치고 힘들 수밖에 없다. 그것에 대한 실질적인 대안은 없고 교회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이상주의로 인해 지치고 힘든 젊은이들에게 오히려 문제의 화살을 돌리곤 한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천주교를 기쁨과 매력을 주지 못하는 교회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천주교의 성직자 중심 사목으로 인해 교회 구성원들은 더 이상 대화도 기대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환경에 살아간다. 아마 20년만 지나도 천주교에 봉사할 신자들은 거의 없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불안의 시대, 종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차적으로 모든 사람이 기본권을 누리고, 아플 때 돈 걱정 안 하고 병원에 갈 수 있고 배고플 염려하지 않고 어느 수준까지 교육받을 수 있는 국가적 정책을 위해 가톨릭은 물론 종교 단체들이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많은 이들이 돈 있는 사람들한테 거둬서 가난한 사람들한테 주는 것을 복지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북유럽식 복지는 사회보험을 공동구매하는 방식이다. 의료보험, 교육보험, 연금보험 등을 국민 모두 공동 구매한다면 가격을 낮추는 효과로 국민 전체가 큰 혜택을 보는 시스템이다. 즉 우리 모두에게 정책적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또한 종교가 할 수 있는 큰 능력 중 하나는 위로(consolatio)가 아닌가 생각한다. 라틴어로 함께라는 의미의 con과 달램이라는 solatio의 합성어다. 즉 함께 달래주고 안심시키는 일이 위로하는 일이다. 사실 천주교에서 젊은이들은 많지 않지만, 독특하게 누군가 돌아가시면 신자들이 장례식장에 벌떼처럼 찾아와 기도하는 문화가 있다. 돌아가신 분의 영혼을 위해, 그리고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신자들은 처음 보는 망자와 유가족을 위로한다. 망연자실한 유가족들에게 특히 지인이 많지 않은 유가족들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된다. 불안의 시대, 우리 모두 위로하며 함께 살아가는 상생의 삶이 필요하다. 김의태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연꽃처럼 물들지 않고 살아가기

예로부터 어른이 돌아가시면 천이나 종이에 애도의 글씨를 써서 만장(輓章)이라 불리는 깃발을 만들었다. 세속에서는 사라졌지만 절집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전통을 잇고 있다. 지난 7월22일 열반한 월주대종사 빈소가 마련된 김제 금산사에서 만장을 쓰는 울력에 동참했다. 큰스님을 기리는 이들이 추도의 마음을 담아 요청하면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붓을 들었다. 송하진 전북도지사 부인 오경진 여사 등 애통한 마음을 담은 이들의 요청으로 100여장 가까이 쓴 것 같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돌아보는 소중한 공부의 시간이 됐다. 역사 아닌 삶이 있겠는가. 그러나 큰스님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어른으로 존경받는 분들이 남긴 자취는 후인들에게는 교훈이며 등불이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과 대통령 훈장을 수훈한 봉선사의 운허 스님도 그런 삶을 살았다. 스님은 1972년 1월에 미리 남긴 유촉(遺囑)에서 장례를 간소하게 하고, 소장한 도서를 기증하게 하는 등 10가지 유훈을 문도들에게 당부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는 운허 스님과 더불어 동암 스님, 운경 스님 등의 유지를 이으며 전 역경원장이시며 현 조실 월운 스님과 전 월로의장 밀운 스님이 행복한 삶의 방법을 세인들에게 선물하고 있다. 어른들의 삶은 연꽃과 같다.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물들지 않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예토(穢土)라고 한다. 사바(娑婆)의 또 다른 표현으로 욕심과 갈등으로 가득 찬 인간세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세상에서 연꽃처럼 수행의 꽃을 피우고 향기를 선물한 분들이 바로 어른들이다. 광릉수목원 둘레길의 봉선사 경내에 자리한 연못에 핀 연꽃은 무엇 하나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연못에 활짝 핀 꽃들로 사람들에게 기쁜 마음을 선물하는 것은 물론 몸에 좋은 연꽃차 한잔의 여유를 느끼게 한다. 또한 연근(蓮根)은 반찬도 만들고 연잎은 밥을 지어서 사람들에게 이롭게 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흔쾌히 내놓는 연꽃과 같이 우리들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운허2022성철2022월주2022법정 스님과 인연이 깊은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신 후에도 존경을 받는 이유도 타인(他人)을 위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낮은 곳에서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했기에 지금도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아름다운 연꽃처럼 살았던 분들 덕분에 인류의 역사가 조금씩 전진했던 것이다. 명성을 남긴 위인뿐 아니라 이름을 전하지 못한 범부 가운데도 연꽃처럼 살다 간 분들이 많다. 예기치 못했던 코로나19가 지구촌을 휩쓸면서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고통을 많이 받고 있는 현실이다. 코로나19에 빠진 세상, 예토가 아니고 무엇이랴. 방역 당국에 따르면 접종 상황 등을 고려해 위드(with) 코로나를 염두에 둬야 하는 상황이다. 이럴 때일수록 앞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혜를 보여준 어른들의 삶에서 교훈을 발견해야 한다. 나보다는 우리를 우선하며 자비와 사랑을 실천한 그분들의 가르침에서 해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모든 것을 남김없이 선물하는 연꽃처럼 살다 가신 어른들이 그리워지는 때, 우리도 어른들처럼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 하루속히 정토세계(淨土世界)를 이루길 바란다. 오봉도일 봉선사 문화원장ㆍ양주석굴암 주지스님

[삶과 종교]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음두기

코로나19는 나와 우리를 넘어 인류의 삶 전반에 전례 없는 불안정을 가져 왔다.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다양한 고통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전한 붓다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해간다는 것(제행무상)과 그러한 변화유전은 그 존재 속의 개별자인 나 자신도 예외일 수는 없다는 것(제법무아)이 고통의 원인에 대한 대전제다. 모든 현상은 변해가며 동시에 어떤 현상도 다른 현상과 서로 의존하지 않고 완전히 독립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간단한 실상을 나의 욕망으로 인해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스스로 고통의 규모를 키우고 넓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붓다는 고고(苦苦), 행고(行苦), 괴고(壞苦)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고고는 본래부터 괴로운 조건에서 생겨난 것이다2044 추위나 더위, 갈증 등과 같이 괴로운 조건에서 생기는 것을 말하고, 행고는 모든 것은 흘러간다.는 뜻으로 항상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행고에 대해 필연으로 따르는 것이 괴고다. 즐거움이 파괴되는 것은 고다라는 뜻이다. 부귀를 마음껏 누리던 사람이 몰락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이가 돌고 돌아 자신이 당하게 되는 비애를 겪게 되고, 활짝 피어났던 꽃도 이윽고 지고 만다. 즐거움이 올 때는 즐거움을 누리며 때가 돼 사라지고 받아들이면 되겠지만, 나의 욕망을 투사해 탐착하게 되므로 그것이 파괴될 때 갈망과 괴로움을 느낀다. 파도가 동쪽으로 흐르는 해류를 거슬러 서쪽으로 갈 수 없듯이 나의 호불호에 따라 변해가는 현상을 거스를 수 없음에도 내 입장을 고집함으로 해서 외부세계를 적으로 만드는 게 아닌가 살펴볼 일이다. 매사추세츠 의과대학 명예교수인 존 카밧진은 불교의 명상수행법에서 착안해 만든 마음챙김 프로그램은 구글페이스북 등 기업들의 생산성 향상 도구로 활용되고 다보스포럼 프로그램의 하나로 자리를 잡으면서 서구 사회는 물론 국내에서도 학회와 일반 힐링 강좌로 한창 유행 중이다. 이 프로그램에서와 같이 우리가 겪는 고통은 결국 외부 세계에 대응하는 내 마음의 문제라는 마음챙김의 메시지는 하루하루 고난으로 얼룩진 삶을 견뎌내는데 분명 위로가 된다. 그러나 최근 로널드 퍼서는 마음챙김의 배신에서 마음챙김의 유행이 연기적으로 이루어진 개인과 사회적 외부세계에 대해서 자비와 이타행 같은 불교의 도덕적 가르침을 견지하지 못하고 단지 자기 계발의 옷을 입은 자기 훈련의 도구만 남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나 에게만 매몰돼 외부세계와의 구조적 관계를 도외시하게 되면서 모순적 상황에 놓이게 되고 또 다른 심리적 갈등과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을 받고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는 나의 자유를 말한다. 그러나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에서 말하는 자유는 나로부터의 자유였다. 나와 나의 것을 설정하면 성장은 정지하고 소통은 사라지게 된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고립감이 짙어지고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겹쳐오지만 이럴 때 나와 우리의 공동체적 유대를 생각하는 사회적 마음을 챙기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붓다는 이것을 진정한 청정함이라 했다. 최성규철학박사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삶과 종교] ‘복음’을 기다리는 우리

복음(福音)은 유앙겔리온이라는 그리스어 를 번역한 표현이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 혹은 그리스도교 문화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리스도교 저자들은 자신의 저작에서 유앙겔리온, 곧 복음이란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마르 1,14-15 참조) 혹은 사도들이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1코린 15,3-5)와 관련 있다. 예수는 2000년 전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하였음을 선포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고, 사흗날에 부활한 이후 사도들은 부활 사건의 증인이 됐다. 그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를 통해 하느님 나라가 완성됐다는 것과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했다는 것을 전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역사적 사건이자 하느님의 약속이 기록된 성경 말씀을 실현한 구원사건이라고 고백했다(1코린 15,1-8 참조). 이렇듯 유앙겔리온이란 단어는 그리스도교적 색채로 깊게 물들어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창작물이라고 볼 수 없다. 이 단어는 이미 1세기 그리스-로마 문화권 안에서 널리 알려진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사용된 복음은 황제들과 관련된 사건과 깊이 연관된다. 특별히 황제의 생애 가운데 중요한 사건들, 예를 들면 황제의 탄생이나 즉위식, 황제 추대나 성년식을 알리기 위해 복음이란 용어가 사용됐다. 또한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은 복음이었다. 이렇듯 당시 한 지역이나 도시가 번영하고 평화롭기 위해 황제의 안녕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소아시아 프리네에서 발견된 한 비문(기원전 9년)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탄생일을 복음, 곧 기쁜 소식의 시작으로 선포했다. 신약성경에서 등장하는 복음이라는 용어는 황제들에 관한 기쁜 소식을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코로나19가 흔들어 놓은 혼란의 상황 속에서 복음을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19의 위협과 공포로부터, 그리고 언제 일상을 회복할지 모르는 막연함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가까운 아시아의 국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복음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의 장악으로 여성들은 자신의 인권을 유린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다. 미얀마 국민도 복음을 원한다. 군사정부의 쿠데타로 이미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권력에 눈이 먼 이들이 빼앗아간 자유와 평화를 미얀마 국민은 되찾기를 원하고 있다. 과거 로마 황제의 복음은 국가와 도시의 번영과 안녕을 보장했고, 예수의 복음은 죄로부터의 해방, 곧 구원을 선사했다. 지금 우리는 복음을 원한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 공포와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사람답게 살아가고 싶다. 우리는 그러한 세상에서 살아갈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평화와 고요한 마음

코로나19의 세계적인 대유행으로 1년을 미루다가 가까스로 열린 2020 도쿄 하계올림픽이 10여일 전 막을 내렸다. 올림픽에서 감동을 준 많은 선수에게 감사와 격려의 마음을 전한다. 쿠베르탱에 의해 시작된 근대올림픽의 정신은 스포츠를 통해서 심신을 향상시키고 문화와 국적 등 다양한 차이를 극복하며 우정, 연대감, 페어플레이 정신을 가지고 평화롭고 더 나은 세계의 실현에 공헌하는 것이라 한다. 이번 올림픽을 통해서도 우리 인류가 평화로운 세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갔길 기대한다. 나는 붓다가 꿈꾼 평화로운 세계를 생각해 본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여의고 즐겁게 사는 세계를 꿈꾼 것 같다. 붓다가 이룬 정신 경계는 니르바나(Nirvana), 즉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마음의 평화에 다름 아니다. 붓다가 이룬 마음의 평화로부터 스스로 어떤 폭력도 없는(Ahims) 자비로운 상태가 됐다. 모든 인류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어떤 종류의 전쟁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모든 인류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지 못한다면, 전쟁을 완전히 없애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류 역사 전체를 보면 전쟁이 없는 시기가 없었다. 붓다가 살았던 시대도 인도가 16개 국가 간에 정복전쟁을 통해 마가다국에로 통일돼 가는 시기였다. 붓다가 겪은 세상도 그렇게 어둠이 짙은 시대였다. 그런데 붓다의 모습은 따라하기가 어렵고 남다르다. 증일아함 등견품에 따르면, 붓다는 자신의 고향인 카필라성을 무저항과 비폭력으로 지키려고 했다. 붓다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신통제일 목건련(目健連)은 무력으로 지킬 것을 붓다에게 건의했다. 붓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붓다가 한 일은 여러 차례 침략해온 코살라국 유리왕(流離王) 일행이 침략해오는 길목에서 크고 무성한 나무 그늘 대신 마른 나무 아래서 그저 뙤약볕을 맞으며 앉아서 명상수행을 할 뿐이었다. 붓다는 은유적이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기 뜻을 밝혔다. 유리왕도 이를 알아차렸고 성자를 무시할 수 없어 발길을 돌렸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그 길을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렸을 때 카필라성 방문에서 겪은 수모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당시 정복전쟁 시대 속에 있었던 왕으로서 전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결국 코살라국의 유리왕에 의해 카필라성은 망했다. 그리고 이 성에 살았던 붓다의 고향 사람들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불교의 초기경전에서는 붓다의 전쟁에 대한 위의 태도가 반영된 불살생과 비폭력을 제1원칙으로 삼는다. 다만, 일부 경전에서는 정법이 실현되는 불국토 수호를 위한 부득이한 방어전쟁을 허용한다. 재가 신도들에 한해 전쟁 참여를 허용하고 승려가 이들과 친구 되는 것도 가능하다. 살생을 허용하지 않는 불교계율과 부득이한 방어전쟁을 하다가 부득이하게 이뤄지는 살생 사이에는 공통의 전제가 있다. 그 전제는 내면의 평정심이다. 피할 수 없어 싸우게 되더라도 고요한 마음을 잃으면 안 된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평화와 고요한 마음

코로나19의 세계적인 대유행으로 1년을 미루다가 가까스로 열린 2020 도쿄 하계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올림픽에서 감동을 준 많은 선수에게 감사와 격려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을 대과 없이 마무리한 일본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쿠베르탱에 의해 시작된 근대올림픽의 정신은 스포츠를 통해서 심신을 향상시키고 문화와 국적 등 다양한 차이를 극복하며 우정, 연대감, 페어플레이 정신을 가지고 평화롭고 더 나은 세계의 실현에 공헌하는 것이라 한다. 이번 올림픽을 통해서도 우리 인류가 평화로운 세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갔길 기대한다. 나는 붓다가 꿈꾼 평화로운 세계를 생각해 본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여의고 즐겁게 사는 세계를 꿈꾼 것 같다. 붓다가 이룬 정신 경계는 니르바나(Nirvana), 즉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마음의 평화에 다름 아니다. 붓다가 이룬 마음의 평화로부터 스스로 어떤 폭력도 없는(Ahi?s?) 자비로운 상태가 됐다. 모든 인류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어떤 종류의 전쟁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모든 인류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지 못한다면, 전쟁을 완전히 없애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류 역사 전체를 보면 전쟁이 없는 시기가 없었다. 붓다가 살았던 시대도 인도가 16개 국가 간에 정복전쟁을 통해 마가다국에로 통일되어 가는 시기였다. 붓다가 겪은 세상도 그렇게 어둠이 짙은 시대였다. 그런데 붓다의 모습은 따라하기가 어렵고 남다르다. 증일아함 「등견품」에 따르면, 붓다는 자신의 고향인 카필라성을 무저항과 비폭력으로 지키려고 했다. 붓다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신통제일 목건련(目健連)은 무력으로 지킬 것을 붓다에게 건의했다. 붓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붓다가 한 일은 여러 차례 침략해온 코살라국 유리왕(流離王) 일행이 침략해오는 길목에서 크고 무성한 나무 그늘 대신 마른 나무 아래서 그저 뙤약볕을 맞으며 앉아서 명상수행을 할 뿐이었다. 붓다는 은유적이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기 뜻을 밝혔다. 유리왕도 이를 알아차렸고 성자를 무시할 수 없어 발길을 돌렸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그 길을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렸을 때 카필라성 방문에서 겪은 수모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당시 정복전쟁 시대의 흐름 속에 있었던 왕으로서 전쟁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결국 코살라국의 유리왕에 의해 카필라성은 망했다. 그리고 이 성에 살았던 붓다의 고향 사람들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불교의 초기경전에서는 붓다의 전쟁에 대한 위의 태도가 반영된 불살생과 비폭력을 제1원칙으로 삼는다. 다만, 일부 경전에서는 정법이 실현되는 불국토 수호를 위한 부득이한 방어전쟁을 허용한다. 다만, 재가 신도들에 한해 전쟁 참여를 허용하고 승려가 이들과 친구되는 것도 가능하다. 살생을 허용하지 않는 불교계율과 부득이한 방어전쟁을 하다가 부득이하게 이루어지는 살생의 경우 사이에는 공통의 전제가 있다. 그 전제는 내면의 평정심이다. 피할 수 없어 싸우게 되더라도 고요한 마음을 잃으면 안 된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삶과 종교] 코로나로 무너진 ‘이웃·삶’ 회복해야

어느 TV 드라마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던 남편이 아내에게 들킨 후에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내 몸 가지고 내 마음대로 했어. 이런 태도는 다른 사건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내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쓰는데 웬 말이 많아. 이런 자세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태도가 이웃에게 미치는 영향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하는 말과 내가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영향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가장 사랑하며 돌봐야 할 가족에게 너무 무례하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사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태도는 엄격히 말하면 심각한 폭력이다. 그래서 이웃을 잃어버린 사회는 서로 폭력적인 관계가 된다.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인해 우리는 일상이 무너졌다.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우리는 너무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이 시대를 살기 위한 재정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붙들어야 한다.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잃었던 것들 중에 회복할 것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이웃을 위해 자신을 절제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말씀을 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린도전서 10장 23절) 워낙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익숙해진 사람들이 비웃을 말씀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자기만 생각하고 사는 것이야말로 무모한 것이며 사회를 어지럽히는 태도다. 자유롭게 사는 것과 무질서하게 사는 것은 다른 것다. 자유롭지만 질서를 지키며 서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길이 바로 이웃을 배려하는 것이다. 내게 유익하다고 해서 남을 짓밟고 자신의 욕심만 채우는 사회는 야만적인 사회다. 약육강식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밀림의 생존방법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재다. 이것은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창조된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서로 귀하게 여겨야 한다.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회복돼야 한다. 이런 태도는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모든 인간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다. 내 자식이 귀한 줄 알면 남의 자식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내 재물이 아까운 줄 알면 남의 재물도 아껴줘야 한다. 내 생명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남의 생명도 소중한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반드시 남을 파괴하거나 짓밟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가능성 앞에서 이 결정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될 것인가 한 번만 스스로 묻는다면 그리고 남의 유익을 위해 과감하게 결단할 수 있다면 작지만 큰 변화가 하나씩 나타날 것이다. 안용호 기흥지구촌교회 목사

[삶과 종교] 술락 시바락사의 불교관

태국은 불교국가로 알려졌지만, 우리는 정작 태국의 불교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 술락 시바락사(Sulak Sivaraksa)는 태국의 저명한 참여적 지식인이자 재가불자다. 술락은 1933년에 방콕에서 태어난 중국계 태국인이다. 그는 영국에 속하는 웨일즈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영국에서 법학학위를 받았다. 술락은 1971년에 코몰킴통 재단을 창립했는데, 이 재단의 목표는 젊은 사람에게 이상주의 정신을 불어넣어 젊은 사람이 민중을 위한 사업에 헌신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정신을 되살리고자 하는 것이다. 또 술락은 달라이라마, 틱낫한 등과 함께 1989년에 국제참여불교연대를 설립했다. 국제참여불교연대의 목적은 단일한 논점만을 고집하는 편협함에서 벗어나서 세계 전체에 대한 이해를 갖도록 도와주는 것에 있다. 술락이 참여한 단체는 12개가 넘는다고 한다. 술락은 불교를 두 가지로 나눠 구분한다. 하나는 관습적이고 의례적인 불교다. 이는 광신적 민족주의와 호응하는 불교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비(非)본질적 찌꺼기를 제거한 불교의 본질적 핵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술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특별한 신앙을 고백할 필요가 없다. 부처를 숭배해야 할 필요도 없다. 어떠한 의례에 반드시 참여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 속에서 당신이 성장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기적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며 서로 착취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술락은 5계 가운데 불살생(不殺生)을 새롭게 해석한다. 불살생은 다른 생명체를 죽이지 않는 것인데, 술락은 그 의미를 확장한다. 불살생에는 대량살상무기의 생산과 사용을 포기하는 것도 포함된다. 또 술락은 사람들에게 적절한 생계수단을 빼앗는 것도 살생이라고 한다.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사용해서 토양을 망치고 미생물을 말살하는 것도 살생에 포함된다. 핵폐기물과 화학오염물은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도 살생의 범위에 들어간다. 또 다른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고 죽음에까지 이르는데도 한쪽에서는 사치와 낭비를 일삼는 것도 술락의 관점에서는 불살생의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다. 술락의 불살생에 대한 해석을 한반도에 적용한다면,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하지 말아야 하고 또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내용은 북한도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에 더 이상 집착하지 말고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핵폐기물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핵폐기물이 나오는 원자력발전소를 대체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세우기 위해서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목표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실제적 방법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병욱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삶과 종교] '역설'이 주는 진리

저는 누군가 화성에 생명체가 살고 있다고 말한다면 믿을 수 있겠지만, 이 세상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고 말한다면 믿지 못하겠어요! 유학 시절, 인연을 맺은 한 젊은 수학자의 말이다. 독일의 한 대학 부설 연구소에서 교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던 그는 아내와 함께 한인 천주교 공동체에 나왔다. 아내 홀로 신자였기에, 필자는 그에게 천주교 신앙을 가져보라고 여러 차례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신앙을 받아들이길 주저하였다.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져볼 수 없으며 들을 수 없는 대상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요? 젊은 수학자의 질문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수학이라는 논리적 학문과 싸움하며 지낸 시간이 짧지 않았으니, 실제로 검증하고 확인할 수 없는 대상을 믿는다는 것이 그에게는 무척 어려운 과제였을 것이다. 필자는 대략 3년 전부터 천주교 사제가 되길 원하는 학생들의 양성을 맡고 있다. 그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기숙사에서 함께 거주하며 그들을 동반하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한 새내기부터 연말이면 사제가 될 시간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 곧 부제들이 하나의 생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20대 젊은 나이에 그들은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세상을 위하여 살아가고자 결심하면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누가 혹은 무엇이 그들을 이곳까지 불렀을까? 무엇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면서까지 사제가 되려고 하는가?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하늘이 주는 희망에 자신의 미래를 걸고 사제의 길을 선택한 젊은이들이 대견하고 기특하다. 세상은 인간의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현상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 역시 존재한다. 세상의 사건들을 대부분 과학적 검증을 통하여 이론적 설명이 가능하지만, 반대로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구체적 사례 중 한가지로 꼽을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추문이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형수에 관한 규정 때문이다. 죽을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을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그날로 묻어야 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신명 21,22-23; 갈라 3,13). 천상 권능을 가지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시어 이스라엘의 원수를 물리치는 절대적 군주의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 저주받은 이들의 상징이었던 십자 나무에서 힘없이 최후를 맞이한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십자가 위에 매달린 예수를 바라보며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놀렸다. 하지만 하느님의 선택은 변함없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였다. 그의 방법은 역설적이었지만, 구원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어떠한 의료적 지식과 방법으로도 구명하기 어려웠던 환자가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하느님의 존재와 활동을 부정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 의사가 떠오른다. 반드시 신앙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성으로 믿을 수 없는 역설(逆說)을 순수하게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겸손한 용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삶과 종교] 유교적 삶과 죽음 그리고 제사

김원명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이 지속되는 가운데 마른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무더위 속에서 우리 자신의 유한한 삶에 대한 유가(儒家)적 사색을 해본다. 유가에서 바라보는 한 개인의 삶은 유한하고 일회적이다. 유가에서는 사람이 혼백(魂魄)의 기(氣)로 이뤄졌다고 본다. 혼백의 기는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게 됐다가 사후에 소멸된다. 기가 모이면서 한 개인이 태어나고, 그 개인이 죽게 되며 모여 있던 기가 흩어지게 된다. 사람이 죽으면 가벼운 기운인 혼(魂)이 위로 올라가며 흩어지고, 죽으면 무거운 기운인 백(魄)이 땅으로 내려가 흩어져 스며든다. 그런데 조상의 일부 정기가 자손에게 전해지며 조상의 사후에도 흩어져 사라지지 않고 후손에게 존속하게 된다. 유교에서는 조상과 후손 사이에 이어져 존속하는 이 기를 통해 일종의 연속성을 인정한다. 정기를 통해 조상의 기가 후손에게 물리적으로 이어지고, 후손의 기억을 통해 조상의 정신이 후손의 정신에 새겨지며 이어진다. 죽은 조상과 살아있는 후손 사이에는 이처럼 정기와 정신을 통해 동질성이 이어진다. 제사는 살아있는 후손이 죽은 조상을 현존하는 자신 안에 불러오는 의식이다. 죽은 조상은 살아있는 후손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가슴 속에서 심리적으로 함께한다. 그런데 현대 한국사회에서는 제사가 사라져가고 있다. 제사가 사라져가는 표면적인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나 편의를 위해서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한편으로 살아있는 후손들이 그들의 기억과 가슴 속에서 죽은 조상을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조상에게서 멀어지며, 그들 자신의 뿌리를 망각하게 된다. 그들의 정신은 더욱 외롭고 가난해지는 것이다. 제사가 사라져가는 내면적인 이유는 제사가 가족과 친족 사이에 불편함을 주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제사 안에는 조선 후기 시대의 위계질서가 남아있다. 이것을 현대에 적용하기에는 시대가 변했다. 제사는 이제 더 이상 친족을 만나 조상을 기억하며 우의를 다지는 즐겁고 행복한 의식이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조선 후기 위계질서 문화와 기억이 현재와 미래에 재현되는 전통적인 방식의 제사는 이어지기 어렵다. 제사의 내용과 형식을 변형해 즐거운 일이 되지 않는다면 제사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현대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시민의식 속에서 자라난 세대에게 편하고 즐거운 제사로 변화하는지에 따라 그것의 존속 여부도 결정될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 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자녀 또한 자연스런 일이다. 제사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부모와 조상에 대한 고마움의 기억이자 표현이다. 인간의 삶은 여전히 유한하고 일회적이다. 그렇지만 유한하고 일회적인 개인들도 수없이 돋아났다가 사라졌던 조상과 동일한 원기에서 발원한 것이다. 그것은 고대인들이나 현대인들 그리고 미래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 사회가 현대적이고 미래적인 제사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원을 묻고 기억하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라면, 근원을 그리워하며 기억하는 것은 곧 제사다. 기억이 제사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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