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내 1세대 180명·후손들 남아... 온갖 질환·장애 앓고 있지만, 정부·道 무관심에 숨죽인 삶
오늘은 지난 1919년 일본의 식민지배에 저항하고자 온 겨레가 한반도를 태극기로 물들였던 ‘3·1 운동’ 102주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선조들의 외침은 26년이 흘러 결실을 맺었다. 독립의 결정적 계기가 됐던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으로 한반도에는 해방의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만세 소리 뒤편, 고통 속 몸부림치며 우는 이들이 있었다. 일제의 총칼 앞에 강제 징용돼 원폭 투하의 희생양이 됐음에도 국내의 냉대와 무관심 속 76년간 숨죽여 살았던 원폭 피해자와 그 후손들의 이야기다.
경기도에도 일본 군수공장으로 강제 징집돼 원폭 피해를 본 1세대 180여명과 그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현재 정부와 지자체의 보상 및 지원은 전무하다.
이에 본보는 어두운 곳을 밝혀 세상에 따뜻한 온기를 전한다는 의미를 지닌 ‘경기ON팀’을 통해 도내 원폭피해자를 조명하고 ‘특별한 희생에 따른 특별한 보상’이 이뤄질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나라가 힘이 없어 국민이 강제징용돼 원자폭탄 피해를 입었는데 당연히 나라에서 치유를 해줘야 할 것 아니오”
28일 찾은 평택시 비전동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기호지부 사무실은 낡고 스산한 분위기를 내뿜는 폐건물에 위치해 있다. 1975년 강제징용 1세대들이 원폭피해에 대한 국제사회 책임을 묻고자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마련했던 이 공간은 외롭게 투쟁해 온 1세대 대다수가 세상을 떠나 더 이상 과거의 결기를 찾을 수 없다.
건물 외벽 페인트는 벗겨진 지 오래고, 틈새 사이로 연신 시멘트가 떨어져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사무실 내부는 찢긴 창호문 사이로 찬바람이 불고, 난방이 되지 않는 바닥은 차디찬 냉골로 발을 디딜 수도 없었다. 주방은 수돗물이 끊겨 그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고,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화장실 악취로 사무실 전체는 매캐한 냄새로 가득 찼다. 협회가 활발히 활동했던 1990년대에는 이 사무실에 매일 30여명이 모여 회의를 했지만 이젠 아무도 찾지 않는다.
이곳을 운영하는 박상복 경기도 한국원폭피해자협회장(76)은 “그동안 어떠한 외부의 지원 없이 회원들이 1인당 10만원의 회비를 내 협회를 운영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어려워져 사무실 기능은 잃어버렸다”며 “40년가량 된 건물이 언제 무너져 버릴지 몰라 경기도 등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고 말했다.
이날 만난 박 회장은 히로시마의 미쓰비시중공업 군수공장에서 강제노역하다 피폭된 고 박남순씨의 아들로, 10년째 원폭피해자 모임을 주도하고 있다.
박 회장은 붉으락푸르락하게 올라온 돌기가 빼곡한 자신의 다리가 피폭 유전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며 2,3세대의 의료지원을 호소했다.
그는 “방사능 유전으로 의심되는 피부 이상 증세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왔다”며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늘 힘이 없다던 조카는 젊었을 때도 10㎏의 쌀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다른 후손들 역시 피부 질환, 청각 장애, 근력 이상 등 다양한 증상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박 회장은 정부와 지자체를 향해 눈시울을 붉히며 울분을 토해냈다. 그는 “우리가 일본에 있었던 것은 나라가 힘이 없어 강제징용된 것 아니냐. 그러나 세계 10대 강국으로 올라선 2021년에도 정부는 여전히 우리를 외면하고 있다”면서 “원폭피해자들이 내 나라, 내 조국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고 문제 해결에 나서달라”고 말했다.
[원폭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 '검은 비' 쏟아지던 그날, 내 삶도 검게 물들어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고통은 70년이 넘도록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강제징용돼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노동력만 착취당하다 영문도 모른 채 원자폭탄의 희생양이 돼야 했다. 당시 원자폭탄 투하를 직접 현장에서 겪었던 원폭 피해자 1세대들은 이미 대부분 사망했거나 건강이 악화돼 요양원에 있다.
이에 이들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있는 도서를 통해 원폭 피해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가늠하고 원폭 투하 당시의 상황을 엿보고자 한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서 발간한 ‘한국원폭피해자 65년사(2011년 발간)’와 미쓰비시 히로시마 전 징용공피폭자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에서 편집한 ‘한(恨) 46인의 한국인 징용피폭자(2013년 발간)’ 등을 통해 본 원폭 1세대의 ‘그날의 기억’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한국원폭피해자 65년사’는 1945년 8월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 투하에 따른 피폭 당한 한국인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이를 후세에 남겨 100년을 기획하는 자료로 삼기 위해 발간된 책이다. 지난 2011년 4월부터 11월까지 서울과 합천, 부산 등지에서 진행된 51명의 원폭피해자의 인터뷰도 담고 있다. ‘한(恨) 46인의 한국인 징용피폭자’는 미쓰비시에 징용돼 일을 하다 피폭당한 46명의 한국인의 증언, 재판과정을 조명한 책이다.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원자폭탄은 사람, 쇠, 항아리 등 재질을 불문하고 모두 녹였다. 원자폭탄이 투하되는 현장에 있었던 원폭 피해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같이 떠올렸다.
#1.
한국원폭피해자 65년사에 담겨 있는 하서운씨(1928년생)의 증언을 보면 하씨는 그날 하늘에서 ‘검은비’가 내렸다고 전했다.
히로시마 오테마치에 거주하다 피폭당한 하씨는 기차역에서 기차를 타기 전 원폭을 목도했다. 하씨는 “벼락이 떨어지고 나서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뒤집히고 수백년된 수양버들 나무가 뿌리째 자빠져 있었다”면서 “(주변에 있는)집에 모두 불이 났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비가 왔는데 검은 비였다. 사람이 그 비를 맞으니 감자 껍질 벗겨지듯이 껍데기가 ‘싸악’하고 벗겨졌다”면서 “지옥이었다”고 회고했다.
#2.
히로시마 요시마쵸에서 피폭당한 박철우(1942년생)씨는 인터뷰에서 원폭이 떨어질 당시 5살의 나이였지만 강에서 목격한 끔찍한 장면은 생생히 기억난다고 말했다. 박씨는 “강에 뛰어든 피폭자들이 마치 폐수에 죽은 물고기가 하얗게 떠오르는 것처럼 죽어 있었다”며 “아버지의 모습은 얼굴과 전신이 퉁퉁 부어 오른 몸으로 엉거주춤 한발 한발 걷는 모습이었다. 그 넓은 바닥에 시체들과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죽어가는 피폭자들이 나뒹굴고 있는 모습은 영원히 잊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박씨는 몸에 화상의 흉터가 그대로 있고 항상 두통과 현기증 등을 겪었다.
#3
변연옥씨(1936년생)는 원폭 투하 이후 겪었던 후유증을 담담히 전했다. 변씨는 “원폭 투하 이후 보라색 반점이 전신에 생겼다. 사람들이 나병환자 취급을 해 목욕탕도 못갔다”고 회고했다. 이어 “매일매일 울었고 시어머니도 나를 정말 싫어했다”면서 “나를 내쫓으라고 병충이를 왜 데리고 사냐는 말도 들었다. 그래도 그때 안 죽은 것이 참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한국원폭피해자 65년사’에 담긴 발간사에서 김용길 당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은 “고향을 등지고 멀리 일본 땅에서 온갖 고난을 겪다 원자폭탄 피폭까지 당한 것이 (당시 조선인들의)현 주소”라며 “한국 원폭 피해자들을 향한 차별과 무관심을 해소하고 원폭 피해자의 권익이 꼭 찾아졌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 원자폭탄 피폭 영향
원폭에 의한 방사선 노출은 인체 내 세포를 파괴하며 각종 후장해(後障害)를 일으킨다.
미국 질병예방센터(CDC)가 지난 2019년 공개한 ‘급성 방사선 증후군’ 자료를 보면 피폭 초기 메스꺼움과 구토, 식욕 부진, 설사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이후 잠복기를 거쳐 골수와 위장관, 심혈관, 중추신경계의 줄기세포가 파괴된다. 피폭 후 살아남더라도 여러 합병증이 찾아올 수 있다. 대표적으로는 백혈병이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백혈병 증례(1946~1975)에 따르면 백혈병 발생 빈도가 원폭 피해 후 증가한 것으로 확인된다. 아울러 폐암, 위암, 갑상선암, 유방암 등 여러 종류의 암 발병 우려도 있다. 이 같은 증상은 방사선을 받은 시간, 조직의 종류, 방사선을 받을 당시의 나이, 방사선량 등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으며 발병시기는 10~3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밖에 눈의 후장해로는 피폭 후 눈의 렌즈(수정체)가 혼탁해 지는 원폭백내장 증상 등이 있다.
원폭 피해 후유증이 2,3세대로 대물림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일본 정부는 원폭 피해자 2세의 피폭 유전성이 없다고 발표했지만, 연구자들은 사례를 장기적으로 연구하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발간한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실태분석 및 보건복지욕구 조사 연구’ 정책보고서도 원폭피해자 자녀들의 건강수준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다고 분석했다. 원폭피해자 2세 74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본인의 건강수준을 ‘나쁨’으로 평가한 경우는 전체 38.2%로 일반 인구집단(16.4%)에 비해 2배 이상 높았고, 건강상의 문제나 신체·정신적 장애로 일상생활 및 사회활동에 제한을 받고 있다는 응답도 17.8%로 일반 인구집단(5.2%)에 비해 3배가량 높게 나타났다.
[경기도 원폭 피해자는 모두 강제징용...평택역에서 짐짝처럼 실려 일본으로]
보건복지부의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실태조사(2019년)와 경기복지재단이 발간한 연구서(2020년)를 보면 경기도 원폭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대부분 징병ㆍ징용으로 일본에 징집됐다.
이들은 일본 침략전쟁이 지속하면서 노동 착취, 갖은 핍박 등 인권을 철저히 유린당하면서 전쟁의 수단으로 쓰였다.
여기에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피폭까지 당해 그들의 삶은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됐다.
미쓰비시 히로시마 전 징용공피폭자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에서 편집한 ‘한(恨) 46인의 한국인 징용피폭자(2013년 발간)’를 보면 일본은 아시아 태평양으로 침략전쟁을 확대하면서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1939년 국민징용령을 제정했다.
이는 일본 뿐아니라 조선의 노동자까지 동원하는 계기가 됐다.
조선에서 강제 동원이 시작된 시기는 1944년으로 ‘징용’이라는 법적 의무 아래 같은 해에만 20만명이 일본으로의 이주가 이뤄졌다.
경기도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도 일본의 무자비한 칼날을 피하지는 못했다.
평택과 안성 지역 등 경기도는 강제 동원 당시에도 인구가 많았던 탓에 일본으로 징집되는 일이 잦았다.
‘연령징용’을 통해 징용 연령에 부합하는 사람들은 모두 차출됐다. 징용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시 21세가량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집의 기둥이었지만 이런 것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갑자기 징용영장이 집으로 오면 무조건 지정된 장소로 가야만 했다. 징용에 응하지 않으면 가족이 체포될 것이라고 협박을 당하거나 가족에게 노역임금의 절반을 송금한다는 설명을 듣고 단념한 채 일본을 향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과정으로 강제 소집된 사람들은 평택역에서 화차에 짐짝처럼 쑤셔넣어 진 채로 부산을 향했다. 부산에 도착한 뒤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에 도달한 뒤 히로시마로 이동했다. 이들은 ‘징용영장’이라는 한 장의 종잇조각에 의해 삶이 송두리째 바뀔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들은 히로시마 기계 제작소나 히로시마 조선소에 배치, 각각 수용된 채 군수산업 물품을 만드는 데 투입됐다.
일본으로 강제 동원된 경기도민은 약 2만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미쓰비시 히로시마 조선소의 조선인 명부에 등재된 총 1천903명 중 1천818명이 경기도 출신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이처럼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조선인들은 태평양 전쟁 승기를 잡은 미국이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현재까지 인류 역사상 살상 목적으로 핵무기가 사용된 유일한 사례다.
원자폭탄 투하로 인한 피폭된 한국인 피해자는 10만여명으로 추산됐다. 이중 히로시마에서는 3만5천여명이 사망했고 3만5천여명이 생존한 것으로 추정되며 나가사키에서는 약 1만5천명이 사망하고 1만5천여명이 생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해방 후 귀국선에 오르거나 불법 쪽배인 암선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원폭 후유증으로 인해 병마에 시달리면서 남은 인생을 보내야만 했다. 현재 경기도내 거주하고 있는 원자폭탄 투하 당시 생존자는 180여명으로 추산된다.
[닦아주지 못한 눈물] 원폭피해자 지원의 역사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정부의 무관심 탓에 처절하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다. 원폭피해자 1세대는 물론 그 후손까지도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지만, 정부의 모르쇠는 여전하다.
한국의 원폭피해자 지원책을 보면 이 같은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국 정부가 원폭피해자를 위한 지원책 마련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원폭 피해가 발생한 지 28년 만이다. 원폭피해자 1세대인 손진두씨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피폭자를 위한 진료소가 경남 합천군에 처음으로 설치됐다.
손진두씨는 지난 1927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1944년 히로시마로 이주했다가 피폭당했다. 손씨는 1951년 외국인으로 등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제 송환됐다. 그러나 손씨는 국내에서 원폭피해로 인한 후유증을 치료하는 곳이 전혀 없어 1970년 도일치료를 받으려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불법입국죄로 손씨를 구속했지만, 손씨는 원폭 치료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일본에 있다며 ‘피폭자건강수첩’ 교부를 신청했다. 결국 1978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손씨의 손을 들어줬다.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으로도 처음 교부수첩 지급을 허가한 것이다. 이 같은 손씨의 사연이 한국 정부에 전달되면서 1973년 피폭자 진료소가 마련됐다.
정부는 일본과 도일치료를 위한 본격적인 협상에도 들어갔다. 양국은 논의 끝에 1980년부터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위한 도일치료에 합의해 5년간 치료가 이뤄졌지만, 양국의 합의가 1986년 종결되면서 이마저도 중단됐다. 이후 한ㆍ일 양국은 1990년 한국인 원폭피해자에 대한 배상금으로 40억엔을 지원하는데 합의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이 자국 내 원폭피해자에 지원하는 연간 예산(1천300억엔)의 약 3% 해당하는 수치로,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더 큰 문제는 한국인 원폭피해자 2ㆍ3세대다. 정부는 후손에 유전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별도의 예산마저 책정하지 않았다. 이들 후손은 피폭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각종 잔병치레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실태조사(2004년)에 따르면 원폭피해자와 그 후손은 일반인보다 우울증 93배, 백혈병 70배, 빈혈 52배, 정신질환 36배나 높다.
원폭피해자 2세인 박제훈씨(76)는 “일본은 피폭자원호법까지 마련해 원폭에 의한 증상이 확인되면 그 후손까지도 국가가 책임진다”며 “이미 원폭피해 1세대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더 늦기 전에 한국 정부도 적극 나서달라”라고 호소했다.
[닦아주지 못한 눈물] 원폭피해자 외면한 경기도
경기도가 말하는 ‘특별한 희생에 따른 특별한 보상’은 원폭피해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일본에 원폭이 투하된 지 74년 만인 지난 2019년. 경기도의회가 ‘경기도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 조례안’을 제정했지만, 그 이후로도 2년이 지난 현재까지 경기도는 원폭피해자들과 그들의 가족을 철저히 외면했다.
1945년 원폭이 일본에 투하된 이후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각종 소송까지 펼쳐나가는 등 인고의 세월을 보냈지만, 경기도를 비롯한 대다수의 지방자치단체는 지원 근거조차 마련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2019년 5월, 정희시 도의원(더불어민주당ㆍ군포2)은 당시 보건복지위원장으로서 토론회를 거쳐 ‘경기도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 조례안’을 대표 발의했다.
조례는 경기도지사가 원폭피해자 지원계획을 수립ㆍ시행하고 피해자 지원을 위해 실태조사를 실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또 원폭피해자의 복지 및 건강에 관한 체계적인 지원을 심의ㆍ자문하기 위해 경기도원폭피해자지원위원회를 설치하도록 규정했다. 원폭피해자 지원시책 개발 및 연구, 복지지원 프로그램 개발, 의료 및 상담지원ㆍ교육, 추모 사업 등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았다. 해당 조례는 2019년 6월12일 경기도의회 본회의에서 의결됐다.
하지만 조례가 통과된 후에도 집행부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이에 도의회는 2020년도 경기도 본예산에 원폭피해자 실태조사 연구비 1억원을 편성하고자 했지만, 집행부가 이마저도 부동의해 예산 편성이 불발됐다. 더욱이 올해 예산안 편성과정에서는 도 복지국이 관련 예산을 편성하고자 했지만 예산부서에서 전액 삭감했다.
이에 경기도원폭피해자협의회(회장 박상복)는 지난해 12월 경기도의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사과와 예산 확보를 주문했다.
경기도원폭피해자지원위원회도 개점휴업상태다. 경기도는 원폭피해자 지원 조례가 마련된 이후 지난해 1월 단 1차례 회의를 열고는 문을 굳게 닫고 있다.
박노극 도 복지정책과장은 “조례 제정을 기점으로 경기도가 원폭피해자 지원을 시작하게 됐지만 예산 확보는 미진한 상황”이라며 “올해 복지재단에서 실태조사를 시작하는 만큼, 결과에 따라 예산을 확보해 원폭피해자를 위한 지원책 마련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례를 대표 발의한 정희시 의원은 “원폭피해자 1세는 물론 2, 3세들에게 드러나지 않은 고통이 큰데 경기도가 그간 관심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라며 “지원 조례에 담긴 사업들이 실행되도록 경기도가 의지를 가져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경기ON팀 = 이호준ㆍ송우일ㆍ최현호ㆍ김승수ㆍ이광희ㆍ손원태ㆍ윤원규기자
편집 = 이은지ㆍ이윤제기자
※ '경기ON팀'은 어두운 곳을 밝혀(Turn on) 세상에 온기(溫氣)를 전합니다.
[특별기고] 피해자 구제,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다
1945년 8월, 미국에 의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수십만명의 무고한 피해자를 낳았다. 이들 가운데에는 우리나라 희생자 약 10만명도 있었다. ‘국민징병제’로 인해 강제로 머나먼 타국 땅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원자폭탄의 희생자가 되었다. 원폭피해가 발생한 지 75년이나 지났으나 원폭피해자들의 삶은 해방신화에 가려져 역사적 피해자로 인식되지 못한 채 역사와 사회로부터 방치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 역시 이들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원자폭탄은 우리나라의 해방을 가져오게 된 존재인 줄만 알고 있었지, 그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 원폭 피해자들이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피폭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원폭의료법(1957년)과 원폭특별조치법(1968년)이 제정돼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노력이 현재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원폭피해를 알리기 위한 기념관 전승자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들에 대한 지원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내에 많은 수의 원폭피해자가 존재하고 있음에도 이들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은 1965년 중국 신문에 일본에서 민단 재한피폭자실태조사를 파견한다는 기사가 보도됨으로써 처음 시작되었다.
원폭피해자들은 1965년 한일협정에서 재한 피폭자 문제가 제외된 것을 알고 이때부터 재한 피폭자는 자신의 권리 회복을 위해 나서기 시작했다. 1967년에 원폭피해자협회가 발족했고 일본정부에 끊임없이 피해구제를 요구했다. 그 결과 일본으로부터 일부 수당과 의료비 지원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됐으나 그 지원이 매우 미흡하다. 국내에서는 원폭피해에 대한 진상조사와 지원대책을 위한 법률 제정이 계속해서 무산되다 피폭피해가 발생한 지 72년이 지난 2017년에야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17.7월 시행)」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조차 피해자 범위를 1세에 한정하여 후손들이 제외된 반쪽짜리 법률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피폭의 영향은 피해 당사자인 1세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원폭피해자들은 피폭영향이 유전될 수 있기 때문에 결혼이나 출산을 포기한 경우도 있으며, 2세 역시 사회적 차별이 두려워 그 사실을 노출하지 않고 있었다.
필자가 원폭피해자 1,2,3세대를 인터뷰한 결과, 이들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사회에서 관심을 받아온 것과 다른 현실 속에서 더 큰 차별과 소외를 느끼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피해당사자인 원폭피해자에 대한 지원과 다시는 역사 속에서 원자폭탄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절대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비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제 우리 사회는 과거의 아픈 역사의 희생자들에 대한 치유를 통해 통합의 시대를 맞이해야 한다. 원폭피해자 1세대 생존자의 최연소 나이는 76세로 길어야 앞으로 5~10년 내에 이들이 사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지원책 마련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유병선 경기복지재단 연구위원 [경기도 원폭피해자 지원 방향 연구(2020년)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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