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준영 칼럼] 공감

공정과 상식을 정부 기치로 내세운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100여일이 지났다. 그러나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득표한 득표율이 무색하게도 역대 최단시간 동안 지지율이 20%로 급락했으며, 심지어 미국의 모닝컨설트가 11일 공표한 전 세계 22개국 정상들에 대한 지지도 조사에서는 긍정 평가가 19%로 전 세계 꼴찌의 불명예를 안았다.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민들에게 많은 기대감으로 높은 지지율을 받을 수 있는 임기 초반에 무엇이 이러한 사태를 만들었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는 대통령 및 보좌진들의 공감(共感, empathy)능력의 결핍이 불러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공감이란 ‘아, 그럴 수 있겠다’, ‘이해가 된다’, ‘이심전심(以心傳心)’ 등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상대방의 느낌, 감정, 사고 등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해된 바를 정확하게 상대방과 소통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렇기에 공감이라는 영단어 ‘empathy’는 문자 그대로 안에서 느끼는 고통이나 감정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능력은 단순히 학습으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활동을 함께하고 말 그대로 상대방 안으로 들어가서 고통이나 감정을 이해하려는 반복적 노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몸에 익혀지는 것이다. 수해 현장에 노란색 점퍼를 입고 기자들과 보좌진들을 대동해 방문하고 “내가 사는 아파트가 고지대인데도 1층에 벌써 침수가 시작이 되더라”라고 얘기하며 수재민들의 아픔을 공감한다고 말한 것은 사태에 대한 공감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특히 여당의 지도부는 수재민을 돕겠다고 출동한 현장에서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 등과 같은 망언을 뱉어냈다.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는 대통령과 국민을 위해 ‘오직 민생’을 외치는 여당이 공감능력이 있다면 단순히 사고현장에 나타나 보여주기식으로 ‘공감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처럼 항상 사태가 발생한 후에 공감한다고 하는 말과 행동은 결국 언제, 어디서든 그 한계를 드러내 문제를 만들기 때문이다. 지난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고자 2017년도에 제정된 국가기념일이다. 말 그대로 국가의 행사이고 당연히 국가의 수장인 대통령이 주체해야 하는 행사임에도 대통령은 어떠한 메시지도 내놓지 않았다. 여당은 저녁 6시가 돼서야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부는 이 아픈 역사의 외침이 절대 잊혀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라며 “피해자 할머니들의 편에 서서 증언과 역사적 기록을 수집하고 연구를 지원하겠다. 인권과 평화, 자유를 위해 외쳤던 소중한 역사들을 잘 보존하고 계승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참석도 하지 않고 대통령이 어떠한 메시지도 내놓지 않은 이 상황에서 이러한 논평을 과연 공감한다고 할 수 있을까?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 링컨 대통령은 “한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고 여러 사람을 잠시 속일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비법은 실체가 없고, 편법은 오래가지 못하며, 꼼수는 언젠가 더 큰 후유증과 역풍을 부른다는 얘기이다. 단순한 보여주기로 사람들을 잠시 동안 혹세무민할 수는 있다. 하지만 공감과 진정성이 없다면 이는 절대 오래갈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길 바란다. 윤준영 한세대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 칼럼] 무엇이 진정 인도주의적인가?

지난 13일 대통령실은 2019년 11월 7일 판문점을 통해 북송된 탈북자를 언급하며 "만약 귀순의사를 밝혔음에도 강제로 북송을 했다면 이는 국제법과 헌법을 모두 위반한 반인도적, 반인륜적 범죄행위"라고 밝혔다. 불과 3년전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국정원, 통일부 등 정부부처도 기존의 입장을 철회했으며, 심지어 외교부는 "보편적 국제 인권 규범의 기준에 비춰볼 때 당시 정부의 답변은 부족하거나 부적절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답변서 작성 과정에 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점을 대외관계 주관부처로써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반성의 입장까지 내놓았다. 북한의 영토와 북한주민은 분명 우리의 헌법에도 나와 있듯 대한민국의 영토와 주민이라는 인식에는 부정하지 않는다. 남북은 분명 우리의 의지보다는 국제관계의 질서에 의해 나누어졌고 현재에도 우리의 의지보다는 국제관계 힘의 질서에 더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이렇듯 특수한 상황이기에 북한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 중 하나가 ‘인도주의’이다. 인도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인종, 민족, 국가, 종교 따위의 차이를 초월하여 인류의 안녕과 복지를 꾀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사상이나 태도”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남북의 특수관계 상황에서는 무엇보다도 ‘우선적 가치를 어디에 두는가?’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 지곤 했다. 인간의 존엄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기아로 굶주리는 북한주민에게 쌀 등을 지원한다던지 탈북자들을 강제 송환하지 않는다는 것에 당연히 찬성하는 입장이다. 다만, ‘인류의 안녕과 복지를 꾀할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남북의 특수한 상황에서 상황마다 다르다. 분명 본인의 진술 뿐만 아니라 당시의 합동조사 내용을 보며 그들은 동료 16명을 무참히 살해한 흉악범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국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는 현재의 정부가 판단하기에 그러한 흉악범을 우리사회에 두는 것이 과연 우리나라의 안녕과 복지를 꾀한다고 판단한다는 것인가? 만약 우리 동포라 하더라도 한국인 부모님께 미국에서 태어난 이중국적자인 속칭 Komerican이 미국에서 저지른 살인범죄를 피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와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인이 되고 싶다고 한다면 우리나라 정부는 어떻게 할까? 이런 경우에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동포이기에 보호를 명목으로 미국으로의 소환을 하지 않는 것이 인도주의적인가? 특히 이번에는 북한 문제만 얘기하면 늘 ‘퍼주기만 한다’, ‘굴욕적 외교다’라는 원색적 비난을 일삼았던 국민의힘이 이번 문제에 대해 국정감사와 특검까지 거론하는 모습은 ‘과연 인도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기에 충분하다 본다.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Whats the Right Thing to Do?)』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정의에 대해 답을 내리는 것이 아닌 지속적 질문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하여 상황이 정의를 만든다는 말을 하고 있다. 결국 법의 해석보다는 처해 있는 상황에서의 상황적 판단이 무엇이 옳고 그른가의 기준이 된다는 얘기이다. 지금 우리에게 처해있는 ‘인도주의’라는 상황이 그러하다. 분명히 국가를 운영하는 주체는 국정운영의 기조가 있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자유와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중시한다”고 얘기하며 이번 탈북어민 북송문제를 제기했다. 인도주의적, 인륜적 차원에서 북한에 송환되었을 때 북한어민이 받을 불이익을 잘 알기에 같은 동포로써 북한 주민의 생명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북송을 금지 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우리사회의 안녕과 복지를 꾀하기 위해 법의 부재로 인해 사라져간 수많은 생명들의 생명과 인권을 위한 중대재해처벌법을 기업의 투자심리가 위축 된다고 해명하며 개정하겠다고 하지 말라. 우리 동포의 인권 이전에 우리 국민의 인권을 먼저 인도주의적으로 판단하라. 윤준영 한세대학교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 칼럼] 파티는 끝났다(The party was over)

미국의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발표됐다. 현지시간으로 10일 발표된 미국의 CPI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8.6% 상승했으며 초 인플레이션 시대였던 1981년 12월 이후 41년 만에 가장 빠른 속도로 물가가 올라갔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시장의 예측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떠한가? 5월 기준 우리나라의 CPI도 글로벌금융위기가 있었던 2008년 9월 이후 13년 9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치이며, 5%대로 올라온 것도 13년 9개월 만에 처음으로 우리나라도 글로벌금융위기 이후 최대의 물가인상 고비를 맞이하고 있다. 요즘의 경제기사는 어디를 둘러보아도 물가 얘기 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14일 물가안정을 위해 정부의 가용정책을 총동원 한다고 했으며, 16일에는 경제부총리 주재로 금융당국의 수장들이 한데 모여 비상 거시경제금융 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회의에서는 ‘물가안정이 가장 시급한 현안’이라고 모두가 목소리를 높여 말하며 현재의 상황이 엄중하다고 하고는 있으나 감세정책 이외에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정부와 여당은 말로는 ‘민생안정’, ‘물가안정’을 외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과거’만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이다. 법인세, 부동산 보유세 인하, 52시간제와 중대재해처벌법 등 문재인 정부 이전으로의 회기만 보이며 위기에 대한 새로운 비전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에 16일, 한국국제경제학회 학술대회에서 원로경제학자들은 “물가를 안정시키려 세금을 깎아주는 정책을 펼치는 것이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며 “관세를 0%로 하고 부가가치세를 깎아주는 현재의 물가 안정책이 그렇지 않아도 높은 원달러 환율을 더 높게 만들 가능성이 있고, 재정 수입을 줄어들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지적하며 중산층과 서민층을 위해 윤석열 정부가 관세와 부가가치세를 내린 것에 대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물론 최근의 물가상승이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과 글로벌공급망 위기가 주요 원인이기에 지금 정부의 탓은 아니겠지만 전 세계적으로 위기인 이러한 엄중한 시기에 감세를 통한 인플레이션 대응과 같은 지엽적인 방식으로는 단기적 관점에서만 효과가 있지 물가상승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관점인 것이다. 더군다나 지난 15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연준)는 연방기준금리를 0.75%p 올리는 소위 ‘자이언트 스텝’ 금리인상을 1994년 11월 이후 28년 만에 처음으로 단행했다. 3월부터 시작된 금리인상이 5월 인상, 금번 6월 인상을 거치며 미 기준금리는 2020년 코로나 팬데믹에 따른 경제침체를 막기 위해 유지한 기존 제로(0)금리에서 1.50~1.75%로 높아졌다. 이로써 우리가 우려하는 한국과 미국의 금리 역전현상이 다음 달 13일 금통위에서 우리나라 금리를 0.25%p 올리고 같은 달 27일 FOMC에서 ‘빅스텝’을 밟는 다음달이면 현실화 되어진다. 금리역전현상이 발생하게 되면 지금도 떨어져 있는 원화가치가 더 떨어지면서 현재에도 심각한 물가 인상이 더욱더 심화 될 수도 있다. “물가를 못 잡는 정권은 버림받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이던 3월 31일 국민의힘 초선 의원 7명과 점심을 하면서 한 말이다. 새로운 정권의 2022년! 대통령 당선의 파티는 끝났고(The party was over) 이제는 고통을 해결해야 할 시간이다. 글로벌 위기상황에서 이제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윤석열 정부의 경쟁상대는 이미 지나가버린 문재인 정권이 아니다. 위기를 명확히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거시적으로 마련하여 말이 아닌 새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을 진정으로 보여줘야 하는 시간이다. 윤준영 한세대학교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 칼럼] 공정한 24시간에 대한 상식적 판단

지난 11일, 공정과 상식을 강조하던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첫 출근이 시작됐다. 서울시민 1천만명의 출근과 맞물려 같은 시간대에 출근하는 대통령의 첫 출근길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통령은 “글쎄 뭐 특별한 소감은 없습니다. 일해야죠”라고 당당하게 답변했다. 언론들은 일제히 대통령의 첫 출근에 대해 대서특필했다. 대통령의 출근길에 대해 서초에서 용산간 7㎞를 8분 소요해 출근했기에 우려했던 교통체증과 교통혼잡은 없었다는 우호적인 기사가 대부분의 언론사 메인기사로 등장했다. 심지어 ‘첫 출근 이상 無’라는 제목의 기사도 나왔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같은 날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인 서울행정법원이 인용한 대통령 집무실 인근의 집회 허용에 대해서 언론들은 ‘시위몸살예고’, ‘주민들 날벼락’ 등 자극적인 언사를 마구 쏟아냈으며 13일에는 법원의 판결은 언급도 하지 않은 채 경찰이 집회를 금지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고 교통혼잡의 책임이 마치 시민단체에게 있는 것처럼 책임을 전가하며 물타기를 하는 듯 보였다. 대통령 탓의 정체는 문제가 없고 집회로 인한 정체는 이렇게 냉담하게 선택적으로 쓰는 언론의 기사가 불편해져 대통령의 출퇴근에 대해 시간적 관점에서의 기회비용으로 논평을 해보고자 한다. 과연 대통령 비서실과 언론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대통령의 출퇴근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까? 비록 대통령 출퇴근에 소요된 시간은 8분이라 하더라도 이는 차량에 탑승해 하차하는데 소비되는 시간이 8분이라는 것이다. 출발 전·후 교통통제를 감안하고, 서울시민의 바쁜 아침시간이 8분의 통제로 인해 정체가 풀리는데 최소 30분 이상 더 소요된 것을 감안하면, 청와대에 있었다면 날아가지 않을법한 서울시민 천만명의 시간이 기회비용으로 날아가는 셈인 것이다. 또한, 그 시간은 직장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질 힘든 학업으로 밤을 새며 공부하는 학생들의 등교시간과도 맞물려 있기에 학생시절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아침의 1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것이라 본다. 그렇다면 대통령 본인의 첫 출근 소감에서 말했듯이 대통령으로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서울시민들의 출근과 등교의 불편을 야기하면서 시간을 빼앗아도 상관이 없다는 것인가? 최소한 후보 시절 강조했던 공정과 상식이 있다면 대통령 본인도 출퇴근을 몇 십년간 했던 직장인이었기에 충분히 상식으로 알 수 있었을 바, 청와대를 나와 본인의 준비되지 않은 집무실 이전으로 인해 시민들에게 불편을 야기하고 바쁜 아침시간을 빼앗은 점에 대해 사과를 먼저 했어야 했다. 대통령 출퇴근으로 인해 기회비용으로 빼앗은 것은 시민들의 시간만이 아니다. 출퇴근의 교통을 통제하기 위해 매일 동원되는 수많은 경찰들의 기회비용도 계산해 보라. 과연 이것이 언론들이 말하는 대로 단순 8분의 시간만으로 ‘첫 출근 이상 無’라 얘기 할 수 있는 상황인가? 우리 모두 윤 대통령의 기치로 내놓은 공정과 상식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살길 바란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공정한 24시간이고 인간의 존엄에 있어 경중을 가릴 수 없기에, 대통령 한 명에게는 8분이지만 서울시민 천만명에게 8분의 시간을 매일 출퇴근의 기회비용으로 빼앗은 것으로만 계산해 보라. 윤석열 대통령은 준비되지 않은 청와대 이전으로 인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천만 서울시민의 8분 즉, 8천만분씩을 서울시민에게 빼앗은 것이다. 그렇기에 청와대를 나오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했어야 했다. 대안이 없는 행동에 대해서는 무고한 시민들이 피해를 입는다. 인간에게는 모두 공정한 24시간이기에 상식적 판단이 무엇인지 대통령에게 기대해 보겠다. 윤준영 한세대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칼럼] 행복한 대통령, 불행한 국민

지난 3월9일, 대한민국의 5년을 책임질 20대 대통령으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당선됐다. 탄핵으로 현 정권에서는 진행하지 못했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가 10년만에 다시 재개됐고 이제 그 활동을 마무리한다. 지난 약 2개월 간의 인수위 활동을 지켜보던 필자의 눈에는 윤석열 당선인이 후보 시절 늘 강조하던 “국민만 바라보겠다!”는 말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매일 행복감에 취해 웃고 있는 대통령과 다르게 불행이 예감됐다. 우선, 지난 2개월 간 인수위가 발표한 핵심 단어 중 가장 기억나는 것이 청와대 이전 뿐이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심장인 청와대를 국민에게 개방하겠다는 목적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하는 것을 탓하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국내·외적으로 위기의 순간인 이때 성급히 집무실을 꼭 이전해야만 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냐는 것이다. 이전에 따른 비용도 문제이거니와 기존 수십 년 간 역대 대통령들이 아무 문제 없이 사용하던 공간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이전한다는 것이 과연 그렇게 국민들만 바라본다는 대통령 눈에는 인수위에서 주장하듯 국정운영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보일까?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한술 더 떠 최근에는 관저 논란까지 일고 있다. 인수위에서는 대통령 관저로 기존에 낙점해뒀던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대통령 관저로 쓰겠다는 기존 계획을 한 달 만에 철회하고 외교장관 공관을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청와대가 아닌 용산으로 집무실 이전, 육군참모총장 공관이 아닌 외교장관 공관으로 관저 이동 등 두 차례나 오락가락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정치권에서 제기돼 온 “성급하다”,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대통령이다”라는 우려가 현실로 될까 불안했다. 특히나 이번 관저 이전에 대해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검토 할 당시 이미 공관이 노후화된 것에 대해 리모델링을 이야기 하며 “수수한 당선인”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던 인수위가 “다방면 고려”라고 선회하다 이제는 민주당에서 제기하는 배우자리스크에 대해 “배우자가 후보지를 둘러보는 게 왜 문제인가?”라고 반박하며 나서는 모습을 바라보며 불안감과 실망감은 더더욱 커져갔다. 국방과 외교는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문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국제 질서의 불안함, 북한의 미사일 도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한 등 굵직한 문제가 산적해 있는 지금 이를 담당하는 주무부처에서 사용하고 있던 시설에 대한 정확한 대체를 마련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취임 10여일 전에 계획을 선회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며 국민은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동안 멀쩡히 운영하던 청와대 영빈관을 놔두고 굳이 고급호텔에서 만찬을 여는 등 역대 대통령 취임식 중 가장 큰 비용인 33억원이 투입될 것이라는 기사는 코로나19로 인한 국제 경기 침체의 상황에서 진행하는 행사라고 보기에는 공정과 상식을 기치로 낸 정부의 첫 시작으로 부적절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그렇기에 국민들은 향후 5년을 책임 질 새 대통령에게 임기 시작 전부터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고, 매일을 행복에 도취해 움직이는 대통령과는 반대로 불안함을 느껴 행복할 수 없다. 미국의 유명한 정신 분석학자 디어도어 루빈은 “행복은 입맞춤과 같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행복하지 않은 대통령을 원하는 국민은 없다. 대통령이 행복해야 국민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서다. 대통령 본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도 중요하지만 국민은 국민에게 행복을 주는 대통령을 원한다. 행복하지 않은 국민을 가진 대통령은 무엇을 하더라도 절대 행복할 수 없다는 점을 잊지 말라고 새 정부에게 당부해 본다. 윤준영 한세대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칼럼] 두 마리 토끼는 잡을 수 없다

최근 경제뉴스를 핫하게 달구는 용어가 있다. 바로 스테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다. 스테그플레이션은 경기침체인 스태그네이션(stagnation)과 지속적 물가상승의 인플레이션(inflation)이라는 단어의 합성어다. 보통 호황 때는 인플레이션이, 불황 때는 지속적 물가하락의 디플레이션(deflation)이 발생하지만 스태그플레이션은 불황임에도 불구하고 물가마저 오르게 되는 상황으로 케인즈혁명이라고 불리며 그 당시 잘나가던 거시경제학을 한 번에 종식시키며 하이에크를 세계최고의 석학 자리에 올려놓고 노벨경제학상까지 받게 만들어 준 바로 그 경제괴물의 끝판왕 개념이 스테그플레이션이다. 하지만 하이에크조차도 명확한 스테그플레이션의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전 세계 모든 경제학자는 이 괴물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러한 괴물의 징조가 국내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징후로 한국석유공사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지난 7일 국내로 수입되는 원유기준인 두바이유 가격이 지난해 말 대비 62.3% 급등했다고 발표했으며,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제제 대상에 에너지 거래가 포함 될 경우 국제유가가 더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뿐만 아니라 원자재 가격도 급등하고 있어 물가상승의 압력도 커지고 있다. 실제로 스테그플레이션을 우려해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이를 대변하듯 얼마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안철수 인수위원장은 스테그플레이션의 초기 징후가 감지되는 바 충분한 손실보상과 재정건전성 유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대책 마련에도 속도를 내야한다고 주문했다고 했다. 그러나 안 위원장의 말뜻을 살펴보면 스테그플레이션의 해답이 없는 것은 고사하더라도 손실보상과 재정건정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사실상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손실보상의 측면에서 본다면 코로나19에 대한 소상공인 지원으로 50조원 손실보상을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후보시절부터 약속했다. 결국 50조원이나 되는 막대한 예산은 국민들의 세금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세금의 감면을 약속했던 정부이기 때문에 세금을 마음대로 올릴 수도 없다. 아무리 다른 복지비용을 축소한다 하더라도 대한민국 전체예산의 약 8%나 되는 50조원이나 되는 비용을 감축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국채발행 밖에는 답이 없다. 하지만 국가채무비율이 2021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47.3%로 이미 전문가들의 우려수준인 40%를 넘어선 상황이기에 국채 발행도 만만치 않다. 더욱이 국채를 발행하게 되면 재정건정성은 당연히 악화될 수밖에 없다. 또한, 국채를 늘려간다면 선심성 복지와 지원을 늘리려는 시도로 국채가 증가했다고 문재인 정권을 정권 내내 공격했던 본인들의 말에 모순이 된다. 이것이 안 위원장의 손실보상과 재정건정성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말은 서로가 모순되는 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렇게 대안이 없는 공약을 실천으로 옮기려다 보니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준비 부족으로 코로나19로 인한 소상공인 지원은 허울뿐인 지원이고, 50조원이나 되는 국채를 통해 재정건정성은 더욱 나빠지게 돼 두 마리 토끼를 둘 다 놓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생긴다. 또한, 이러한 지원으로 스테그플레이션을 극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준비부족의 공약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경제회복의 골든타임을 놓치는 우를 범할까 걱정이 된다. 공약은 지킬 수 있을 때 빛을 발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차기정부가 선거를 위해 공약한 정책에 본인들의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지 지켜봐야 할 일이다. 윤준영 한세대학교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칼럼] 진실인가, 정의인가

우리는 종종 일상에서 사실인데 뭐가 문제야?라는 말을 쓰고 들어왔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의로우며 공공의 안녕과 이익에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과연 사실은 항상 정의로울까? 2020년도 6월에 개봉한 결백이라는 영화가 있다.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필자는 과연 법은 다 정의의 편에 서 있는가?, 과연 사실만이 정의인가?라는 두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며 이 사회에서 가지는 정의의 시스템 오류로 인해 뒷맛이 씁쓸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법이 지배하는 법치주의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법은 만인 앞에 공정해야 하고 공공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꼭 필요한 시스템이며, 이러한 법이 사실(fact)을 넘어 진실(truth)되고 정의(justice)롭기를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이러한 질문을 뱉어내지 못했다. 과연 사실과 진실은 항상 같은 말이며, 진실은 항상 정의의 편일까? 우리는 살면서 수도 없이 진실과 정의라는 말과 마주하게 된다. 진실의 사전적 의미는 거짓 없는 사실로 사실은 실제의 일을 뜻하며, 정의는 마땅하고 공정한 것을 말한다. 공공의 안녕과 이익을 위해 마땅하고 공정하게 되기 위해 거짓 없는 사실이 필요하겠지만 사실이 과연 정의로운가?라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No다. 과연 사실만을 말하는 세상은 정의롭고 공공의 안녕과 이익에 부합할까? 필자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실제로 교육역사제도생활 등 모든 분야에 있어 사실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며 전혀 정의롭지 않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손쉽게 알 수 있다. 하나의 예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우리는 범죄자를 연행할 때 당신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고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다 하는 말을 자주 들었을 것이다. 이를 미란다 원칙이라 한다. 1966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례로 제정된 이 원칙은 미란다라는 청년이 납치, 강간혐의로 체포되는 과정에서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은 상태로 조사를 받으며 본인이 죄에 대해 자백을 하고, 자백자술서를 직접 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술거부권과 변호인선임권 등의 권리를 고지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던 일을 계기로 생겼다. 아무리 인권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이 경우 중범죄에 대해 사실은 정의로 결론됐는가? 사실이 난무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자. 뚱뚱한 사람에게 뚱뚱하다고 하는 것, 머리가 나쁜 사람에게 머리가 나쁘다고 얘기하는 것 등을 사실이라는 이유로 얘기한다면 이 또한 정의로운가? 변하지 않는, 거짓 없는 사실을 우리는 진실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원인(cause)이고 정의는 결과(effect)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이 정의로우려면 그 과정에서의 공동체의 공동선(共同善)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렇기에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마이클 샌델은 공동체 내에서의 안녕과 이익을 위한 노력의 결과가 정의이기에 모든 사람을 납득시킬 수 있는 정의는 없다는 말을 한다. 이는 시대적, 상황적으로도 언제든 정의는 변할 수 있다는 말로, 거짓 없는 사실로 변하지 않는 진실과는 대조되는 말이다. 물론 진실을 외면한 정의는 살아남을 수는 없다. 진실과 정의가 늘 같으면 더 없이 좋겠지만 진실과 정의가 늘 합치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는 진지하게 공공의 안녕과 이익을 위해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한다. 과연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진실한 세상인지 아니면 정의로운 세상인지를. 윤준영 한세대학교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 칼럼] 노블레스 오블리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사회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라는 말이다. 사회지도층이라면 법률에 나와 있지 않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의무가 있고, 이를 행하지 않을 때에는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비난을 받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분명 자본주의 시스템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임에 틀림없다.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담스미스(Adam Smith)는 그의 저서 국부론에서 자유로운 시장만이 개인과 국가를 부자로 만든다고 말했다. 그러한 자유로운 개인의 이익추구라는 이기심이 결국 부의 원천이고 이를 통해 개인과 국가가 모두 성장 한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본주의에 살고 있으면서 아담스미스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은 기업이고 이러한 기업의 가치는 주가로 결정된다. 그리하여 현재의 주식시장을 아담스미스의 주장에 대입해 보면 돈을 벌고자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기심이 집약적으로 집중돼 자유롭게 개인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말 그대로 자본주의의 끝판왕인 셈이다. 주식을 사는 사람 파는 사람 모두 하루 종일 움직이는 숫자놀음을 바라보며 누군가는 환호를, 반대로 누군가는 눈물을 머금는다. 그렇다면 주식시장도 아담스미스의 주장대로 위법하지 않다면 자유롭게 본인의 이기심을 발휘해서 이익만 추구하면 되는 것일까? 최근 카카오페이 경영진의 스톡옵션 매도 사태를 한번 보자. 호재라고 생각되어 대대적으로 기업홍보를 하던 코스피 200지수에 편입된 당일 다수의 경영진이 한꺼번에 주식을 팔아치운 것은 아마도 주식시장이 생긴 이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특히 부정적인 장중 여론을 의식해 시간외 대량매매로 팔아치운 것을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경영진 개인들도 개인의 이익을 위해 한 일이며 어떠한 불법적 요소는 없었다 하더라도 이로 인한 나비효과는 기업전체에 악영향을 줬고, 특히 기업을 믿고 투자한 개미투자자들은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기업의 경영진도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개인이기에 위법하지 않게 본인의 이익을 추구했다 하더라도 과연 이러한 행동은 정당한 것일까? 경영진들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도 문제지만 이른바 고래라고 불리며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개인들의 도덕적 해이도 문제다. 만약 민간인이었다면 그냥 묻혔겠지만, 최근 모 대통령후보 배우자가 주가조작에 가담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과연 이것이 위법, 부당한 일인지는 조사를 해봐야 하겠지만 국민(개미)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나서는 후보자의 배우자가 특정집단(고래)들과 과거 행한 일이 과연 정당하고 문제가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모두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고,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인간은 무한경쟁의 경제 활동을 통해 삶을 영위해 나가기에 우리의 경제시스템은 마치 정글과 같다고도 혹자는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이 사나운 정글 같다 하더라도 정글의 맹수도 힘이 있다 하여 아무 때나 함부로 사냥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하라. 법률이 없는 사회는 문명화가 되지 않은 사회이지만, 도덕심이 없는 사회는 동물의 사회와 같다. 우리 스스로를 동물로 만들지 말자. 윤준영 한세대학교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 칼럼] 진정한 사과는 결국 본인을 위한 것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실수와 잘못을 연속적으로 행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완벽의 선에 모든 것을 놓고 판단하다 보면 지나온 세월은 항상 실수와 잘못의 연속으로 후회만 남게 되고, 후회는 반성으로 이뤄져 본인의 삶을 더 발전시키는 토대를 만든다. 소크라테스는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할 만큼 우리의 삶에서 반성은 발전과 반전의 훌륭한 기회가 되곤 한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은 자아성찰의 기회로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행해진 잘못은 사과로 표현돼야 한다. 사과는 반성의 결과이며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과정에서 보이는 진정성을 보고 상대방은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 로버트 풀검(Robert Fulghum)은 삶이 복잡하고 어렵다 느껴질 때 어린 시절 배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시작하는 단순한 지침 앞에 문제를 놓아보라. 삶의 지혜는 대학원의 상아탑 꼭대기가 아니라 바로 유치원의 모래성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며 정정당당하게 겨뤄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면 용서를 구하라는 등 중요한 철학을 말해주고 있다. 지난 26일,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의 아내 김건희 씨가 본인의 허위이력에 대한 공식 대국민 사과를 기자회견을 통해 전달했다. 유력한 대선후보의 아내이기에 당연히 여론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고, 기자회견의 내용에 모든 국민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필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몇 번을 다시 들어보았으나 결국 자신의 사담과 남편에 대한 존경심을 담은 신파만 존재하고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사과는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잘못해 사과하는 건지 명확해야 한다. 과정이 어떠했던지 간에 김건희 씨는 대학원의 상아탑 꼭대기에서 박사라는 최고의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 후보의 부인인데 이런 분이 하는 어법과 내용으로 보기에는 누구에게 무엇을 사과하는 내용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윤석열 후보와 관련한 사과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개 사과로 한차례 사과에 대한 진정성에서 오해를 받은 상황이라면 사과의 자세와 태도에 본인이 아닌 배우자라 할지라도 신중했어야 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네 믿음은 네 생각이 된다. 네 생각은 네 말이 된다. 네 말은 네 행동이 된다. 네 행동은 네 습관이 된다. 네 습관은 네 가치가 된다. 네 가치는 네 운명이 된다고 말했다. 반복되는 습관들은 하나의 가치로 완성되고 그 가치는 결국 인생을 완성해 주는 중요한 과정이 된다. 반복되는 사과의 진정성 시비가 붙을 때마다 국민은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의 기본적인 자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의심이 깊어질수록 국민의 피로감은 더해지고 불신은 누적돼 후보자 본인의 운명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실수나 잘못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잘못했을 때는 다시 한 번 유치원 시절로 돌아가 생각해 보라. 우리는 분명 사과는 상대방에게 명확하고 진정성 있게 하라고 배웠다. 명확하고 진정성 있는 사과는 우리가 서로 실수하고 잘못을 하는 존재이기에 내가 앞으로 저지를 실수나 잘못에 대한 일종의 보험이 되어준다. 그러므로 결국 사과의 가장 큰 수혜자는 본인이라는 점을 잊지 말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통해 본인의 가치와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도록 하길 바란다. 윤준영 한세대학교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윤준영 칼럼] 노동의 진정한 가치

독일의 저명 철학자인 페터 비에리(Peter Bieri)는 저서 삶의 격: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에서 노동은 물질적 자립이라는 면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준다고 말하며, 일 없이는 인간의 존엄도 없다고 역설한 바 있다. 하지만 MZ세대에게 이러한 얘기는 일명 꼰대들의 라떼처럼 느껴지곤 한다.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박탈된 N포세대로 대표되는 MZ세대들에게 노동은 그저 가치의 창출일 뿐이고, 가치의 창출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폐쇄된 공동체 안에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늘어나면 가치가 상승하게 되는 특성상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노동과 화폐의 가치는 달라진다. 이를 증명하듯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일명 코린이(코인+어린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며 코인 투자에 대한 광풍이 전 대학가를 뒤흔들고 있다. 각 대학에는 코인동호회까지 등장하며 마치 새로운 기회처럼 MZ세대에게 다가오고 있다. 얼마 전 전국경제인연합조사에서는 20~30대 10명 중 4명이 암호화폐에 투자해본 경험이 있다고 답변해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노동이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땀 흘려 일하는 노동과는 거리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그도 그럴 것이 투자ㆍ투기로 부자가 된 사람이 주변에 적지 않으며, 기성세대들이 땀 흘려 일하는 직장이 이제 MZ세대에게는 부업이 되고 있다는 뉴스 등을 볼 때 암호화폐 시장은 달콤하고 솔깃하다. 경험을 강조하는 기성세대에 비해 MZ세대는 가능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가치평가의 수단으로 그들에게 암호화폐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최악의 실업난과 부동산가격 폭등으로 인해 청년들이 암호화폐에 투자를 많이 하는 것은 기회의 불평등이 낳은 결과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기성세대의 대표적 투자처로 여기던 아파트는 부동산 폭등으로 인해 MZ세대들에게 꿈만 같은 이야기이며, 노동력을 제공할 취업의 문턱은 점점 좁아져 자본주의 경쟁시장에서 MZ세대가 기성세대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발휘할 영역이 디지털 기반의 암호화폐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MZ세대가 기회의 불평등을 해소할 탈출구로 암호화폐를 선택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들에게 암호화폐는 단순한 투자 수단을 넘어 화폐 이상의 가치이며 계층 이동의 사다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맞다 틀리다의 이분법적 사고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부인한다 해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우리는 분명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그의 저서 국부론을 통해 모든 가치는 노동에 의해 생기므로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노동량으로 정해야 한다고 정의했다. 현재보다 싼 값에 매수해 시간을 투입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노력으로 고부가가치를 이루고 있다고 암호화폐 투자자들은 말하지만, 과연 이것을 노동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또한 모든 사람들이 투자를 통해서만 부를 축적해 나간다면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생산이 없는 사회에서 부의 축척이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과연 그런 삶이 가치 있는 삶이라 할 수 있을까? 노동은 생산이다. 투자는 생산이 아닌 소비에 가깝다는 점을 명심하며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길 소망해 본다. 윤준영 한세대학교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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