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영문도 모르게 철길 위로 이끌려가 기총사격을 받았고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굴다리 밑으로 피신한 난민들에게 양쪽에서 사격을 가하여 냇물이 핏물로 변했고 시체로 방호벽을 쌓았다. 울부짖는 아이로 인해 집중 총탄이 날아들자 표적이 되는 걸 염려한 아비는 자식을 물속에 집어넣기도 했다는 끔찍한 참화, 학살현장에 들어서자 한기가 엄습했다. 총탄자국에 하얀 표시가 되어있어 섬뜩한 공포감마저 들었다. 이 쌍굴 다리에서 3박 4일간 300여명이 학살된 것이다. 우리를 돕겠다고 온 미군이 피난민을 도우기는 커녕 학살을 자행하다니. 당시에 참전했던 미군의 증언에 의하면 노근리에서 발견되는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하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고향이란 무엇일까? 모태 같고 어머니의 발자국소리 같은 끌림이 있다. 헤르만 헤세는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유년의 기억과 다감한 망향의 서사를 담아냈다. 고향은 그리움과 향수와 어머니의 동이어가 된다. 가을비 오는 날 무작정 길을 나섰다. 낙엽버섯을 따거나 메뚜기를 잡겠다던 고향친구는 비 때문에 일을 망친데다 느닷없이 찾아온 불청객에게 경직된 시간마저 순순히 내 놓았다. 감나무 가로수길 따라 750년 묵은 하늘아래 첫 감나무를 찾아 나섰다.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가지가 담장을 넘어온 마을 가운데, 늙고 왜소한 이 나무는 종가집 어른처럼 엄중한 품위를 지탱하고 있었다. 썩은 몸에 새 가지를 돋아내며 건실한 감주저리를 널어지게 매달고.
가을비 머금은 바람이 상처 난 세월처럼 시리게 지나간다. 숲속에서 가랑잎 발효되는 냄새가 눅눅히 풍겨왔다. 억새위로 눕는 갈바람. 1년 후에 배달된다는 빨간 우체통이 있는 언덕에 올라서자, 푸르게 갠 하늘위로 고추잠자리가 고공비행을 한다. 나는 궁예의 떠도는 울음처럼 걸어 신선봉을 지나 삼각봉까지 갔다. 시나브로 울어대는 풀벌레소리를 경계선으로 상처 받은 민둥산 승진 훈련장을 비껴 나왔다. 명성산 아래 산정호수는 사방의 산들을 물구나무 시켜놓고도 모자라 구름까지 엎어놓은 채 하늘과의 오랜 눈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바람결에 머리빗은 각시 풀이 산자락으로 흘러내리는 오솔 길, 나는 매끈한 솔바람과 물 향기와 짧은 가을데이트를 즐겼다.
일제 강점기의 정체성 상실과 피폐한 민초들의 삶이 혼재된 채만식의 탁류를 생각하며 호남평야를 지났다. 근대란 상상력이 미칠 수 있는 가장 그리운 이미지, 이 땅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경험했던 남루한 시간들을 마주한다. 중화요리, 복성루에서 짬뽕 한 그릇을 먹었다. 무려 한 시간 반 동안 줄서 기다린 맛, 각종 해물이 수북 들어 있어 시원하고 얼얼하다. 일본 절 동국사와 일본인 히로쓰의 집을 보니 이 땅에서 주인 행세한 일본이 어처구니없다. 옛 군산세관과 조선은행, 그리고 수탈한 곡식을 송출했던 부잔교가 치욕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경암동 철길을 다녀온 후, 나는 45년 역사의 이성당 단팥빵을 풀 먹는 염소처럼 야물거리며 노을 내린 군산항을 홀로 걸었다.
지난 겨울, 쿠바를 여행했었다. 아름다운 트리니다드에서 증기기관차를 타고 드넓은 평원을 달렸다. 노예감시탑에 올라 사방이 탁 트인 사탕수수밭을 바라보던 추억도 멋졌고 시간을 뉘어 놓고 천천히 달리던 증기기관차의 낭만은 더욱 잊을 수 없다. 희뿌연 연기와 아련한 기적소리 들리는 세월을 당겨보면 우리나라의 기찻길에도 증기기관차가 있었다. 그 자취는 여러 곳에 있지만 추평령역 급수탑은 근대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추억의 장소이다. 거슬리는 것은 추풍령역이다. 인적 드문 간이역에 이런 거창한 역사가 왜 세워져야 했는지. 대합실에 걸린 사진 속의 옛 역사는 소도시의 풍경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는데 편리성만 찾는 시대가 저지른 어색하고 낯선 광경이다.
금산사는 임란 때 승병이 훈련했던 사원답게 넓은 마당이 인상적이다. 그로 인해 왜란의 화는 면했지만 정유재란 때 그 보복으로 80여동의 건물과 40여 암자가 전소되는 비운을 겪었다. 절을 둘러보고 나와 금산사 마실 길을 걷는데 울창한 송림 속에 연리지가 나타났다. 이 나무는 곧은 두 그루의 소나무 가지가 중간에 붙어있어 마치 팔짱을 낀 느낌이다. 놀란 것은 이 나무가 태풍 볼락으로 인해 부러진 것이다. 관계부처에서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할 텐데, 아직 방치되고 있어 걱정이다. 울창한 나무가 따가운 가을빛을 양산처럼 가려주고, 시원한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촉촉한 산길은 최고의 산책로다. 귀로에 대한민국 유일의 지평선 김제평야를 보았다. 지평선 축제를 준비 중인 황금들판은 더욱 넉넉하고 풍요롭다.
입구부터 산기슭으로 이어진 거대한 송림이 서원을 향해 제례하듯 허리를 굽히고 있다. 모퉁이의 당간지주가 의아하지만 알고 보면 사라진 고찰 숙수사가 있던 곳이다. 여말의 유학자이자 최초의 성리학자 안향 선생은 절터에 서원을 세웠다. 이후 주세붕은 안향을 기리기 위해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고 퇴계에 의해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이 탄생한 것이다. 이 지방은 순흥도호부가 있던 유서 깊은 곳으로 예를 숭상했던 선비의 고장이다. 금성대군이 이곳에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많은 이들과 함께 희생되었고 이후 부가 폐지되며 쇠퇴하였다. 영전각에 있는 국보 111호 안향의 초상은 지적인 학자의 풍모를 은연히 드러냈다.
영주에서 무섬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승객이라야 대여섯 정도지만 까맣게 탄 얼굴들이 정겹고 친숙하다. 시골할머니들 속에 중년의 아주머니 한 분이 눈에 띈다. 무섬 친정집에 가는 길이라며 안내를 자청했다. 내성천 외나무다리는 장맛비에 잠겼고, 백로 한 마리가 황톳물에 떠오르는 물고기를 긴장감 있게 응시하고 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도 멋지고 박 넝쿨 올라간 초가집도 향수적이다. ㅁ자 기와집이 궁금하여 기웃거리는데 마루에 앉아계신 할머니가 들어오라 손짓 하셨다. 대처에 나간 아들이 올 것이라며 부추김치를 나눠담고 계시다가 내게도 한입 맛보여주신다. 칼칼한 손맛이 그윽이 전해온다. 맨드라미 핀 뜨락에 마지막 폭염이 내려앉는 반촌(班村)의 한낮.
천리포 수목원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군정 정보 장교로 이 땅에 온 한 독일계 미국인에 의해서 조성됐다. 이 땅을 오가던 그는 어느새 아름다운 한국에 매료되어 정착하게 됐다. 그리고 1962년 5천평의 농원 부지를 사들여 정원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지금은 18만평이 되었다니 수목에 대한 그의 집념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지극했던 것이다. 그러나 평생을 바친 아름다운 수목원을 남겨두고 그는 2002년 미국이 아닌 저 세상으로 영원히 떠났다. 돌아오라고 수없이 편지를 보낸 그의 홀어머니를 뿌리치고 한국에 귀화하여 이름마저 바꾼 터였다. 2012년4월 8일 민병갈 선생은 생전의 소원대로 다시 수목장이 되어 나무 그름이 되었다.
강한 바람과 파도가 해안가를 휩쓸면서 오랜 세월을 거쳐 모래언덕이 생겼다. 수년전 이 사구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타클라마칸 사막이나 고비사막을 여행한 나로서는 신비로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은 그때의 커다란 모래 구렁은 볼 수가 없고 온통 다양한 식물로 뒤덮인 초원이 되었다. 이렇게 멋진 곳이 있다니, 그때 난개발이 되고 사구가 파괴될 것을 우려한 것이 불행히도 현실이 되었다. 해안의 벼랑도 사라지고 거대한 모래언덕은 마치 풀씨를 뿌려놓은 듯 잡초로 뒤덮였다. 하지만 지천에 해당화가 피어 있고 풀밭엔 방아깨비들이 세상모르고 뛰어다녔다. 바닷가 모래사장은 열사병 환자처럼 신열에 헐떡였지만 해수욕장은 벌써 열기를 잃었다.
통곡보다 더 큰 울음은 흐느낌, 박장대소보다 큰 웃음은 그윽한 미소다. 그대와 나를 이어주는 잔잔한 교감의 의미. 깎아지른 절벽위에 미학과 철학과 조형학이 두루 겸비된 이 마애불은 부처의 형상에 백제인의 얼굴을 바꾸어놓은 능수능란한 걸작이라고 느껴진다. 좀 더 예의를 갖춰보면 단순한 묘사이거나 재현이 아닌 백제인의 혼을 살려내는 재생적 발현이라는 찬탄을 할 수밖에 없다. 방금 들에 나물 캐러 나온 여인이거나, 우물가에 물 길러 나온 백제 처녀 같고, 시주 나온 노승 같이 부드러운 인상이다. 아름다움은 내면에서 풍겨오는 자애로운 미소와 따뜻한 숨결에서 더욱 깊이 우러나오는 것.
넓고 좁다란 들길 따라 외가 가던 길은 미루나무 등에 매달린 매아미가 왠 종일 울었다. 메뚜기와 방아깨비가 논 섶에서 튀어 오르고, 여치와 베짱이가 세상모르고 노래하던 길. 얼룩무늬 개구리참외가 땡볕에 달궈져 단맛 풍겨오던 밭이랑. 여름방학이면 학교 화단에 빨간 봉숭아꽃이 속 터지게 꽃씨를 잉태했다. 봉정사 가는 길은 내 마음이 가는 정든 시골길이다. 단아한 극락전도 친숙하고, 영산암 마당은 집 그늘 아래 길쌈 매던 시골집같이 편안하다. 극락전이 한국 최고의 목조건물이라는 미학과, 미술사학과, 고고학이 어쩌고 하는 學과 文에 가치를 찾는 종사자가 아니라도 낯설지 않은 봉정사. 귀로의 하늘은 먹구름이 덮쳐 소나기라도 뿌릴 듯 천기를 누설하고 있다.
태풍을 만난 한 낚시꾼의 하룻밤 피신처가 오늘날 외도 보타니아가 되었다. 그는 이 섬을 3년에 걸쳐 사들여 두고 온 북녘 고향을 그리며 일구었다고 한다. 척박한 섬은 변모를 거듭해 조각 공원과 식물의 천국이 되었고, 서양식 정원은 요정들의 집처럼 아름다웠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명소가 된 이 섬은 끊임없이 오가는 배와 관광객들로 하루 종일 북적댔다. 하지만 평생을 바친 이 섬을 두고 주인은 떠났다. 그의 부인 최호숙님의 추모시 한편이 조각공원에 새겨져 내 마음을 적셨다. 죽음으로 인한 영원한 이별은 누구에게나 이토록 슬픈 일인 것 같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삼지창처럼 뾰쪽 솟은 해금강도 멋진 풍경이다.
돈지리-지리산-불모산-가마봉-옥녀봉-금평항으로 이어지는 사량도 등산로는 희노애락의 인생역정 같다. 그다지 높지도 않지만 철 사다리, 밧줄타고 오르기, 수직로프사다리 등 암벽길이 잠복해 있다. 마치 험준한 고봉을 축소해 놓은 듯, 유격훈련장처럼 다양하다. 6시간을 소요해야할 정도지만 있을 건 다 있는 다소 지루한 길이기도 하다. 힘든 산행에 가끔 한려수도의 짙푸른 물빛을 바라보며 한 아름 시원한 해풍을 안는 상쾌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비릿한 갯내음 풍겨오는 쪽빛 남쪽바다, 그 섬이 그립다. 왜 힘든 산행을 하는 것일까? 어렵게 살아야 진정한 무엇을 일궈낼 수 있는 것일까? 힘겹게 정복한 것의 감동, 나는 문득 황동규 시인의 시인은 어렵게 살아야 1라는 시가 생각났다.
확실한 출처도 내력도 알 수 없는 곳. 당간지주와, 탑과, 부도, 그리고 부도비와, 석조만이 유골처럼 덩그러니 남아 있다. 텅 빈 내밀의 공간에 여치 소리와 매아미 소리와 이름 모를 풀벌레가 고성방가를 일삼으며 일장춘몽 같은 폐사지의 주인이 되었다. 뭉개진 바코드처럼 아무런 인식도 무의미한 잠시 다녀가는 인생.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바람만이 묵비권을 행사하며 오랜 세월의 목격자로 남아 있다. 가야산에서 흘러내리는 강당천의 맑은 물에 다슬기와 물고기를 잡으며 뛰노는 아이들도 행복한 현세의 주인이다. 부귀영화와 혹독함도 인생무상이라는, 다만 편안하고 여유로운 사유가 생성되는 이곳에 진정한 자유를 방목한다.
창덕궁엔 울창한 숲과 각기 다른 정자가 이어진 후원이 있다. 능선을 오르내리며 만난 옥류천 골짜기엔 궁궐에서 유일한 초가 정자 청의정이 서있고 자그마한 논엔 벼가 자라고 있었다. 임금이 직접 벼농사를 지으며 농심을 헤아린 곳이다. 한무리 도시 아이들이 해설사의 이야기에 토끼처럼 쫑긋 귀를 세웠다. 오월 말에 모내기와 시월 말에 벼 베기 행사가 있다고 한다. 정자나무 그늘 밑에 좌차를 정한 후에 점심그릇 열어놓고 보리단술 먼저 먹세. 반찬이야 있고 없고 주린 창자 메인 후에 청풍에 취포하니 잠시간 낙이로다 농가월령가의 한 대목을 생각하다가 두고 온 고향이 왈칵 떠올랐다. 논두렁의 황새가 정자위의 선비처럼 풍류를 은유하던, 푸른 논이 있는 곳.
박수근 미술관은 한적한 양구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하지만 한국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는 작고 작가의 미술관 치곤 내용면에서 빈약하다. 초기 작품외의 그림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과 고가임을 감안하더라도 진품은 몇 점 되지 않고 그나마 판화, 삽화, 드로잉이 대부분이다. 뒷산에 부인과 함께 잠들어 있는 그들의 묘비명만이 영혼을 위로해 주고 있다. 이등병이 거수경례를 하며 맞는 민통선 안에 들어서자 잊었던 군 시절이 떠오른다. 지뢰 표시가 있는 철조망 안에서 노루가 달아나는 것도 신비롭고, 뚜렷한 한반도 형상을 드러내는 두타연 폭포는 60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살아있는 생태공원이다.
산허리를 감싼 밤꽃이 자취방의 남자냄새처럼 퀴퀴하게 풍겨오고, 언덕을 뒤덮은 망초꽃은 환영 속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아래로 흘러내린다. 나는 오묘하게 미소 짖는 메릴 스트립을 만난 듯 그윽이 취했다. 흰 나방이 날개 짓 할 때, 저녁 드시고 싶으면 언제라도 오라던. 산자락 뽕잎에 매달린 까만 오디가 옛 생각을 몰고 온다. 추억은 발효처럼 기억의 독안에서 소리 없이 익었다. 세월은 벌써 한해의 반환점을 돌아 속도를 낼 기세다. 팔봉산 감자 캐기 축제에 와서 씨알 굵은 감자를 거두며 배고팠던 시절의 어두운 부뚜막을 떠올린다. 다시 서해가 스카이라운지 창처럼 내다보이는 팔봉산에 올라 먼 이국의 오지로 떠나고픈 허기를 느낀다.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고,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 라고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푸른 담쟁이넝쿨이라는 청라언덕은 몽마르뜨를 연상시킨다. 100여 년 전 서양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왔다. 그들은 가난하고 병든 환자를 구하는 게 더 절실하여 의술을 베풀다가 전염병에 걸려 죽기도 했다. 의료박물관 앞 묘지의 헌신 앞에 숙연해진다. 계산 성당에 새겨진 한국성인상 스테인드글라스는 너무나 아름답고, 계산예가에서 비명에 간 대구의 천재화가 이인성의 그림을 보며 어렴풋한 근대의 그리움을 느낀다. 이상화 고택의 시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영전에 화려한 긍정의 응답을 바친다. 한송이 꽃처럼, 봄은 진정 왔노라고.
초여름 갈대밭에서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 갈대 숲 속 보이지 않는 새소리. 숨어있는 건 모든 게 그립다. 감춰진 날들, 아직 만나지 못한 누군가가 궁금한 것처럼. 금강이 횡으로 누워있고 짙은 초록의 갈대밭은 젊고 왕성하다. 서천이 아름다운 건 이뿐만이 아니다. 한산 소곡주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한산 모시짜기가 있다. 세모시 옥색치마에 그네 타던 단오가 가까워올 무렵, 마침 모시 문화제가 붐볐다. 모시 차, 모시 막걸리, 모시 떡. 나는 곱디고운 모시에 취해 정에 취해 행복한 발걸음을 춘장대 해변으로 옮겼다. 송림속에서 야영하는 캠핑족, 해수욕장에서 파도를 밟는 군상들이 벌써 여름을 부른다. 바람에게 전한다. 요즘 잘 지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