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 취약할수록... 더 촘촘히 감시
성 밖에서 보면 치성이나 옹성에 위에서 아래로 길게 파인 홈을 현안이라 한다. 현안은 치성 바로 밑까지 다가온 적병을 감시하는 시설로 중요한 방어시설이다. 옹성과 모든 치성에 빠짐없이 설치한 것만 봐도 그렇다. 설치 위치는 이렇듯 옹성과 모든 치성으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현안 설치 수량은 무엇을 기준으로 했을까. 이에 대해 알아본다.
현안도 시설이므로 설치할 시설물의 구조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설치할 시설물의 너비, 높이 등 외형적 크기와의 관계다. 감시 범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설치된 곳의 높이와 너비와 관련이 있는지 따져보자.
첫째, 높이에 따라 현안 수를 결정할까. 옹성의 경우를 보자. 옹성 높이는 북옹성과 남옹성이 5.1m로 같고 동옹성 2.9m, 서옹성 3.4m다. 설치 현안 수는 북옹성 16개, 남옹성 12개, 동옹성과 서옹성 3개로 같다. 북옹성과 남옹성은 높이가 같은데 현안 수는 북옹성이 4개가 더 많다. 또 서옹성이 동옹성보다 높이가 높은데 현안 수는 같다.
치성의 경우를 보자. 봉돈이 가장 높고 적대, 동북노대, 서북공심돈, 포루(군졸), 치 순서로 높이가 낮다. 현안은 적대가 3개, 동북노대, 서북공심돈, 남공심돈, 봉돈이 2개, 그리고 포루와 치는 1개다. 이 데이터를 보면 높이가 높은 봉돈이 낮은 적대보다 현안 수가 1개 적다. 또 옹성과 치성 전체를 놓고 봐도 동옹성, 서옹성이 높이가 가장 낮은데 현안 수는 높이가 높은 치성보다 더 많다. 옹성이나 치성이나 모두 높이와 현안 수는 관계가 없음이 밝혀졌다.
둘째, 너비에 따라 현안 수를 결정할까. 옹성의 경우다. 옹성 너비는 북옹성과 남옹성이 209척, 동옹성 90척, 서옹성 110척이다. 설치 현안 수는 북옹성 16개, 남옹성 12개, 동옹성과 서옹성이 3개다. 북옹성과 남옹성은 너비가 같은데 북옹성 현안이 4개가 더 많다. 또 서옹성이 동옹성보다 너비가 넓은데 현안 수는 같다.
치성의 경우다. 치성 너비는 같은 유형 중 큰 것 순서로 보면 북포루 30척, 동삼치 25척4촌, 서북공심돈 25척, 동북노대 19척이다. 설치 현안 수는 포루와 치는 1개, 서북공심돈 2개, 동북노대 2개다. 북포루와 동삼치는 서북공심돈과 동북노대보다 너비는 넓은데 현안은 1개가 적다. 1개가 설치된 시설물이 2개 설치된 시설물보다 너비가 넓은 형국이다. 따라서 너비와 현안 수 관계는 무관함이 밝혀졌다.
정리하면 높이가 높다고 현안 수를 많이, 낮다고 적게 설치하지 않은 결과를 알 수 있다. 너비도 같은 결과다. 전면 폭이 넓다고 현안을 많이, 좁다고 적게 설치하지 않았다. 높이건 넓이건 외형에 따라 설치할 현안 수를 결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어떤 이유일까. 찾아보자.
우선 화성의 ‘시설물별 현안 수량 현황’을 보자. 북옹성 16개, 남옹성 12개, 동옹성 3개, 서옹성 3개, 북성적대 3개, 남성적대 2개, 동북노대 2개, 서북공심돈 2개, 남공심돈 2개, 봉돈 2개, 포루(군졸) 1개, 치 1개 순이다. 25개 시설물이다.
이 현황을 보시고 눈치챘을 것이다. 하나는 위 시설물 순서가 현안 수가 많은 시설물부터 적은 시설물까지 순서인 점이다. 다른 하나는 위 시설물 순서가 의궤에 기록된 순서와 똑같다는 점이다. 현안 수량 순서가 의궤 설명 순서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순서가 일치한다는 것은 규칙이나 기준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성역의궤 시설물 설명 순서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 의미가 바로 기준이 될 수 있다.
의궤에 기록된 시설물 설명 순서를 유형별로 보면 문, 암문, 수문, 은구, 장대, 노대, 공심돈, 봉돈, 각루, 포루(대포), 포루(군졸), 치, 포사, 성신사 순이다. 무슨 순서일까. 바로 이 기록 순서가 당시 화성 시설물 사이의 위계(位階) 순서다. 위계는 위아래 계급을 말한다. 조선 건축은 건물 간 위계(하이어라키)를 철저히 지켰다. 영조(營造) 규범이기 때문이다. 규(規)도 범(範)도 모두 법을 의미한다.
설치할 현안 수도 위계를 꼭 지켜야 한다. 규범을 넘어 자의적 판단으로 현안 수량을 정하면 안 된다. 예를 들면 봉돈이 아무리 넓고 높아도 위계를 앞지르며 위계가 높은 적대를 앞질러 3개가 될 수 없다. 옹성 높이가 아무리 낮다 해도 위계가 낮은 포루보다 적은 현안 수를 설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위계는 조선 건축에서 중요한 설계 요소였다. 지금의 건축법이다. 건폐율, 용적률, 건물 높이를 준수해야 하는 법이다. 궁궐, 서원, 사찰, 민가 건축에서 건물 간 위계는 분명했다. 위계의 기준은 무엇일까. 궁궐 건축, 민가 건축은 사용자의 권력에 의해 위계가 정해진다. 서원 건축, 사찰 건축은 교리에 의해 결정된다. 화성 시설물은 어떤 위계일까.
방어 취약성을 기준으로 위계가 정해진다. 전쟁시설물이기 때문이다. 방어에 취약할수록 위계를 높였다. 방어력을 더 집중하거나 더 강화해야 할수록 위계가 높다는 의미다. 이를 의궤 도설 편에 기록 순서로 남겨놨다. 의궤 기록은 문에서 시작해 성신사로 끝난다.
성에서 가장 취약한 곳은 문이다. 성을 공격할 때 문을 가장 먼저 공격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문, 암문, 수문, 은구를 맨 앞에 기록하고 있다. 모두 성의 안과 밖이 뚫린 개방형 시설물이기에 가장 높은 방어력이 필요하다. 위계가 높은 이유다. 반면 치, 포사, 성신사는 맨 끝에 기록했다. 치는 돌출됐을 뿐 원성과 같고 포사와 성신사는 성과 멀리 떨어진 성안에 위치한다. 방어력이 덜 필요하다. 위계가 낮은 이유다.
똑같은 위계인데도 북옹성이 16개, 남옹성이 12개이고 북성적대가 3개, 남성적대는 2개다. 이 또한 ‘같은 위계 안의 위계’다. 북쪽을 남쪽보다 더 취약한 곳으로 봤다. 남쪽 동래보다 북쪽 의주에 더 중점을 뒀음을 의미한다.
화성의 현안 설치 수량을 알아보며 현안 수에도 엄격한 위계가 있음을 밝혀냈다. 위계가 방어의 취약성을 기준으로 했다는 것도 알았다.
오늘은 현안 설치 수량 결정 기준을 살펴보며 위계를 철저히 지킨 정조의 엄격함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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