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다섯 글자, “도와주세요” [그림자 가장이 산다③]

어릴 때부터 '가족 돌봄' 희생…성인 돼도 생계 책임 계속
취업 시 지원 끊길까 걱정…맞춤형 복지 지원 확대 절실

가족돌봄 청소년이 짊어진 가장의 무게는 어른이 된다고 가벼워지지 않는다.

 

이른 나이부터 학업·진로·사회생활을 포기하고 ‘남’을 위해 살아왔기 때문에 청년이 돼도 ‘나’의 미래에 대해선 회의적이고 익숙지 않다.

 

특히 사회적 시선이나 또래와의 관계 등을 우려해 도움을 청하기 어려운 어려운 아이들을 사회가 먼저 발굴해주는 체계가 요구된다.

 

(좌)청소년 시기부터 할머니, 고모 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가족돌봄 청년 김수연씨(24·가명)가 경기일보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우)의왕에 거주하는 김씨가 학교를 마치고 3시간 거리의 집으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이연우·한준호기자
(좌)청소년 시기부터 할머니, 고모 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가족돌봄 청년 김수연씨(24·가명)가 경기일보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우)의왕에 거주하는 김씨가 학교를 마치고 3시간 거리의 집으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이연우·한준호기자

 

가족돌봄 청소년으로 살아온 대학생 김수연씨(24·가명)는 부모가 이혼한 만 13세부터 지금까지 청각장애를 가진 할머니(66), 시각·지적장애를 가진 고모(37), 동생(22)과 의왕에서 살고 있다.

 

어릴 때부터 숱하게 들었던 말은 “엄마, 아빠가 없으면 네가 엄마야”였다. 가족에 대한 책임이 강박으로 다가와 중학생 시절 심리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당연히 우리 가족은 내가 챙겨야 된다’고 생각하는 가족돌봄 청년으로 자랐다.

 

“아버지는 따로 가정이 있으시고 어머니는 혼자 사시는데 저는 두 분 모두와 교류가 거의 없어요. 생계는 저랑 동생이 책임지는 편이에요. 학교 다니면서 국가근로장학생으로 일하거나 주말 아르바이트 4개씩 하거나 하는 식으로요.”

 

평일엔 학교, 주말엔 아르바이트에 전념하며 개인 시간이 없지만 김씨는 그런 자신의 삶을 감추진 않는다. 사정을 아는 주변인들이 적극적으로 ‘이런 지원이 있다던데 알아보면 어때?’ 하고 권하기도 한다. 그 일환으로 월드비전과 연이 닿아 지원을 받기도 했다.

 

“어릴 때는 도움을 청하거나 제 얘기를 하는 게 부끄럽고 싫었는데 막상 도움의 손길이 오니 ‘진작 할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그냥 제 삶을 받아들여요. 졸업을 앞두고 현실적 여건이나, 평소 관심사를 고민하며 장애인 복지나 사회 복지 분야로 진로를 정하겠다는 다짐도 하고 있고요.”

 

그는 경제적 여건이 나아지는 해법이 ‘취업’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빨리 취업하려고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어요. 근데 취업하면 수급자 지원이 끊겨서 가족에게 더 큰 피해가 될까봐 고민도 들어요. 솔직히 전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그 꿈은 잠시 접어뒀어요. 당장은 힘들어도 언젠가는 가능하겠죠?”

 

가족돌봄 청소년에서 가족돌봄 청년으로 성장한 김씨의 소원은 소박하다.

 

그는 “옛날부터 ‘배낭여행을 가보고 싶다’, ‘드럼을 꼭 배우고 싶다’는 로망이 있어요. 저와 비슷한 분들도 저 같은 바람이 있을 거에요. 작은 게 모여 큰 걸 만드는 것처럼 이런 이야기들이 전해져 사회적 지원이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매일 찾아보는 복지 지원 사이트에서 내일은 조금 더 신청할 수 있는 게 많아지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좌)어머니 간병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던 박희진씨(21·가명)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음악 엔지니어를 꿈꾸는 박씨는 자신의 목표와 현실 속에서 고민 중이다. 한준호기자·김미지인턴기자
(좌)어머니 간병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던 박희진씨(21·가명)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음악 엔지니어를 꿈꾸는 박씨는 자신의 목표와 현실 속에서 고민 중이다. 한준호기자·김미지인턴기자

 

안양에서 만난 박희진씨(21·가명)의 삶도 다르지 않다. 그의 ‘희생’은 여덟 살 때 시작됐다. 어머니가 간성혼수(간성뇌증)를 앓으면서부터다.

 

“세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엄마랑 단둘이 살았는데 갑자기 병이 생기면서 일상이 달라졌어요. 제 하루는 엄마 건강 상태에 맞춰 움직였죠. 학교가 유일한 도피처였는데 엄마가 위급하면 조퇴해 언제든 집으로 돌아와야 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24시간 대기하는 기분이었다고 해야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 건강은 악화했다. 유일무이한 해결책은 ‘간 이식’이었다. 수술을 받고자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도통 순서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열여섯 살이 된 박씨는 자신의 간을 이식하기로 결심했다.

 

“간 이식을 하면 마침내 돌봄 고통이 끝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너무 오랜 시간 끝이 보이지 않았거든요. 엄마도, 주변 사람들도 계속 ‘네가 해야 하지 않겠냐’고 얘기하셨고, 저도 ‘어차피 내가 해드려야 할 일’이라 생각했어요.”

 

애석하게도 현실과 이상은 달랐다. 간 이식 후에도 어머니는 병원을 오가며 치료받아야 했고, 박씨의 돌봄은 계속됐다.

 

“저는 엄마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얽매여 있었어요. 동시에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되지’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돌봄 제공자가 저밖에 없는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나만의 삶을 살아볼 기회를 갖고 싶다는 생각, 그 자체가 저한테는 죄책감처럼 다가왔어요. 도움을 얻을 곳도 없었고, 용기도 없었고.”

 

최근에야 ‘가족돌봄 청소년’이라는 개념을 알게 된 박씨는 본인이 가족돌봄 청소년이었음을, 지금도 가족돌봄 청년임을 인지하게 됐다. 그리고 지역 사회복지관의 도움으로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등과 연결돼 모금을 받기도 했다. 그때 그는 비로소 ‘나 같은 사람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결심했다.

 

“자조모임에서 돌봄 청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절망하는 감정을 많이들 공유했어요. 가족에게 느끼는 억울함, 친구에게 받는 상처, 아무도 몰라주거나 당연하게만 여기는 데서 오는 화. 그런 부분을 담아 가족돌봄 청소년과 관련된 에세이를 쓰며 아픔을 나눴어요. 저희 같은 사람들도 평범히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박씨는 언젠가 ‘음악 엔지니어’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해외 유학을 희망한다.

 

“엄마랑 떨어져야 한다는 게 가장 큰 고민이죠. 넉넉한 형편에서도 쉽지 않은데 이런 형편에 음악 유학이라니 너무 이기적인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돌봄을 져버리도 괜찮은지, 도전을 해보는 게 맞는지, 저 같은 고민에 갇힌 돌봄 청년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길이 생기겠죠?”

 


 경기α팀 : 경기알파팀은 그리스 문자의 처음을 나타내는 알파의 뜻처럼 최전방에서 이슈 속에 담긴 첫 번째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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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사업 몰라서…'10명 중 6명' 도움 못 받았다 [그림자 가장이 산다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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