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문화재단, 역사문화강좌 대단원 막 道 의병 시기별 짚고... 추모 방안 제시 김 교수 “추모비 건립… 가치 전해지길”
경기문화재단 경기역사문화유산원이 경기도 무명의병의 가치를 발굴·확산하기 위해 마련한 역사문화 강좌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경기역사문화유산원은 지난 26일 재단 강의실에서 ‘강산의 의로운 장부들: 대한제국기 경기도 무명의병은 누구인가’ 강좌의 세 번째 순서로 ‘경기의병의 항일현장에서 미래를 만나다’를 열었다.
경기도가 추진하는 ‘경기도 무명의병 기념사업’ 중 하나로 마련된 이번 강의에선 김명섭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초빙교수가 강의자로 나서 경기도 의병의 활동을 시기별로 짚고, 해외 사례를 통해 경기도 무명의병 추모·기념 방안에 대한 이정표를 제시했다.
이날 강의에서 김 교수는 한말 경기의병의 탄생이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단발령’에서 비롯된 점을 짚었다. 이후 경기도에선 1896년 1월1일 김하락이 이천에서 의병을 조직, 같은 달 18일 ‘광현전투’에서 일본군에 맞서 처음으로 승리한 점을 강조했다.
이후 경기의병은 남한산성으로 이동해 다른 지역에서 온 의병들과 연합의진을 형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1904년 러일전쟁 시기 경기의병은 안성, 용인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당시 용인에서 활동한 이인응은 “갑오 이후로 외해가 날로 심해져 우충소격에 신민의 의를 펴고자” 의병을 조직했다. 전쟁을 거치며 의병 400여명은 칠장사에 주둔하기도 했는데 김 교수는 1905~1906년 당시 황성신문 기사를 자료로 들어 설명을 이어갔다.
이후 경기의병의 활동은 1907년 고종이 퇴위하고, 군대가 강제 해산되면서 절정을 맞이했다. 김 교수는 이 시기부터 여성과 농민, 평민이 등장해 의병활동이 이어진 점을 강조했다.
김 교수는 “군대 강제 해산 후 평민들이 등장하면서 시민이 중심이 된 의병활동이 시작됐다”며 “이때 우리나라 민주의식, 자유의식, 시민의식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3차 의병활동에 들어서며 부대가 50여명 등 소규모 단위로 움직이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참여하면서 기동력도 강해졌다”고 덧붙였다.
이날 강의에선 그동안 조명되지 않았던 다양한 의병장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농상공부 주사로 관직을 지낸 공무원 출신의 양평 의병장 ‘임옥여’, 광주 유생 ‘남상목’, 해적 의병 ‘정주원’, 여성 의병장 ‘윤희순’ 등이다.
특히 양주 출신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은 ‘병정의 노래’, ‘안사람 의병가노래’ 등 의병가사 17편을 작사했는데 강의에선 이들 노래 가사를 낭독하며 경기의병이 꿈꿨던 미래와 가치를 되새기기도 했다.
이와 함께 김 교수는 영국 웨스터민스터 사원, 프랑스 개선문, 러시아 알렉산드로프 공원,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 폴란드 바르샤바 샤스키 공원 등 전 세계 12개국에 조성된 ‘무명용사의 묘’를 소개하며, 경기도 무명의병을 기억·추모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김 교수는 “경기도 의병들이 꿈꿨던 백성의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공동체를 위해 수많은 사람이 희생했지만 경기도엔 무명의병을 기리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며 “경기도가 무명의병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 건립 등을 해 의병정신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오래 전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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