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의 의로운 장부들’ 두 번째 역사문화 강의 ‘안성 의병전쟁’ 시기별로 짚고 활동 과정 다뤄 수많은 무명의병 ‘폭도’로 치부, 역사 뒤안길로 성 소장 “희생했던 선열 발굴·가치 확대되길”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좋습니다.”(맥켄지의 ‘대한제국의 비극’ 중)
구한말 의병들은 일본군과 맞선 자신들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총을 들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우리는 이들에게서 어떤 정신적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무명의병의 정신적 가치를 발굴해 오늘날 통용될 의미를 찾는 두 번째 여정이 이어졌다. 경기문화재단 경기역사문화유산원은 19일 재단 강의실에서 ‘강산의 의로운 장부들: 대한제국기 경기도 무명의병은 누구인가’ 두 번째 역사문화 강좌를 열고 ‘경기남부 의병항쟁’의 특징을 짚어보며 경기도 무명의병 연구의 토대를 마련했다.
경기도가 추진하는 ‘경기도 무명의병 기념사업’ 중 하나로 마련된 이번 강의에선 성주현 1923 제노사이드연구소장이 ‘한말 경기 남부 의병항쟁의 전개와 특성’ 강의를 통해 의병의 개념과 한말 의병항쟁의 특성, ‘안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 남부 의병항쟁의 성격 등을 다뤘다.
이날 강의에서 성 소장은 경기 남부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했던 안성의 의병전쟁을 시기별로 짚었다. 안성에서는 1895년 의병을 일으켰던 곽한일, 1896년 활동한 김하락 등을 통해 1차 의병 전쟁이 벌어졌고 속리산 등에서 적극 항일 투쟁을 했던 박석여 의진이 안성으로 무대를 옮겨 2차 의병 전쟁이 벌어졌다.
특히 성 소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일제 침략에 대한 민중의 의사 표현이 강해지면서 1907~1910년 정미의병 시기에 벌어졌던 3차 의병전쟁이 가장 활발했던 점을 강조했다. 당시 안성 의병들은 친일 집단인 ‘일진회’ 회원을 처단하거나 일본 경찰 분파소나 우체국, 또 일본인의 집을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이에 당시 안성에서 활동했던 곽한일, 임옥녀 등 36명의 의병장은 이름을 남겨 현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상태다. 그러나 의병장과 함께 활동한 수많은 의병은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강도’ 혹은 ‘폭도’로 치부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성 소장은 “수십명, 수백명이 같이 의병 활동을 했음에도 역사에 이름이 남아 있는 사람은 의병장 뿐”이라며 “무명의병 연구가 활발해져 이름없는 의병들을 발굴해 국가의 서훈을 받는 유공자가 많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안성은 현재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해 공적을 기리며 기념하고 있다”며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자 하는 안성의 사례를 모범삼아 많은 지자체에서 지역의 의병에 관심을 가지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이날 강의에선 안성의 대표적인 의병장 맹달섭, 정철화, 임옥여 선생의 구체적인 활동과 함께 위정척사론에서 비롯된 한말 의병의 개념, 한말 의병항쟁의 전개 과정 등 의병에 대한 포괄적인 내용이 시민들에게 전달됐다.
또 의병운동에 대한 시대별 인식, 사발통문·동학포고문 등으로 본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의 상관관계 등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성 소장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경기도에서 무명의병을 기리는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며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우며 희생했던 선열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가치가 확대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지훈 경기역사문화유산원장은 “의병 중에서도 ‘무명’에 방점을 찍어 그들이 왜 총을 들고 싸웠는지, 종교적 이유인지 애국심인지 개인의 양심이었는지 등에 대해 찾아가는 과정”이라며 “이번 강의를 비롯해 경기도 무명의병에 대한 여러 사업을 꾸준히 진행할 예정이다. 무명의병의 생애와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살펴보는 자리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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