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하고 자유로운 글씨에서 한 노인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일반 양모가 아닌 나뭇잎의 예측할 수 없는 질감이 묻어난 글씨는 유독 시선을 붙잡는다.
70세가 넘은 노년의 서예가는 40여 년간 자연과 동행하고, 산에 오르면서 꾸준히 글씨를 써 왔다. 화선지에 눌러담은 진심을 만날 수 있는 이찬복 서예가(73)의 첫 개인전 ‘잎과 먹’이 고양특례시 일산동구청 2층에서 지난 29일까지 진행된 데 이어, 31일부터 내달 10일까지 고양시 고양아람누리 갤러리 누리에서 열린다.
그에게 40여 년 간 함께해온 서예는 삶의 동반자와 다름 없다. 그는 기술직에 종사해오면서도 근무 이외 시간을 활용해 서예를 배웠다. 그랬던 그는 10여 년 전, 그라인더 사고를 당해 오른손에 치명상을 입었다. 근육과 신경 등을 연결하고 봉합하는 등 대수술을 거치고 나니 손에 감각이 없었다. 좌절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모든 걸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작가는 생계를 챙겨야 했고, 가족들을 저버릴 수 없었기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처음엔 되는 대로 가까운 뒷산에 올랐다. 그저 굴러다니는 돌과 나뭇가지들을 쉴 새 없이 쥐었다 폈다 하며 악력이 돌아오길 바랐다. 그렇게 몇 년 간 전국의 산을 돌다 보니 기적처럼 변화가 찾아 왔다. 그는 “의사들이 다 안 된다고 했죠. 그런데 산에 꾸준히 오르다 보니 손에 감각이 서서히 돌아 오더라고요.”
이후 그의 손에는 나뭇잎 붓이 늘 들려 있다. 나뭇잎으로 만든 붓 역시 산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 “산을 통해 건강을 되찾았으니 서예를 할 때도 산의 기운을 받는다면 내면의 목소리를 더 잘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그는 북한산, 지리산 등 전국의 산을 돌면서 나뭇잎을 채취해 붓 제작에 돌입했다. 잘 말려 형태를 잡아 놓은 나뭇잎 뭉치에 소금물을 먹인 뒤 여러 차례 찌고 말리는 시도 끝에, 3년 남짓 흘러 마침내 붓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상수리나무, 도토리나무, 대나무, 소나무 등 전국 각지의 산에서 채집해온 각양각색의 나뭇잎들이 붓으로 재탄생했다.
오랜 기간 캘리그라피 작업도 병행한 덕분에 전시는 다양한 서예 작품과 캘리그라피 작품들이 균형감 있게 배치돼 있다. 먹물을 적당량 희석한 뒤 붓을 털어내는 방식으로 그려낸 작품들도 볼 수 있어 도구의 활용에 따른 서예의 다양한 표현법도 느껴지는 전시다.
이렇듯 배치된 글씨들을 가만히 살피다 보면, 문득 글씨 한 획 한 획의 질감이 기존의 서예 작품과는 확연히 달라 보이는 작품이 여럿 눈에 밟힌다. 정갈함과는 거리가 먼, 거칠게 꿈틀거리는 글자들이 벽면에 늘어서 있다. ‘흙’, ‘길 도’, ‘청춘’, ‘연풍(산들바람)’ 등 각각의 글자들이 나뭇잎으로 쓰여 그 의미가 더욱 확장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양모가 아닌 나뭇잎 붓으로 적힌 글자에선 자연에 대한 애정과 예찬, 강렬한 힘을 느낄 수 있다.
이 작가는 첫 개인전을 열고 나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조금씩 보인다고 전했다. 그는 “지금껏 치열하게 살면서 뒤돌아볼 여유는 없었다”면서 “작품들에 녹아 있는 내 삶을 이번 전시를 통해 비로소 돌아볼 수 있게 됐다”고 소회를 밝혔다.
송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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