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행복화라 부릅시다

(민화를) 행복화라 부르면 어떨까요?라는 말에 단상의 사람들은 물론 객석의 방청객 역시 미소를 지었다. 민화를 보면 한국 사람들의 행복에의 선망과 동경이 느껴진다. 이처럼 행복에의 추구가 잘 드러난 작품이니 행복화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라는 부연 설명을 듣고 한편으로는 수긍과 한편으로는 생경한 단어에 대한 이질감이 교차하는 표정들이었다. 이 말은 2013년 3월22일 금요일에서 24일 일요일까지 2박 3일 동안 경주 보문단지에서 개최된 경주민화포럼의 종합토론 때 나온 일본 동지사대학 기시 후미카즈 교수의 발언이었다. 경주민화포럼 첫날에는 민화의 스토리와 이미지라는 주제로 3인의 발표가 진행되었고 둘째 날에는 민화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역시 3인의 발표가 있었다. 특히 기시 교수의 우키요에(浮世繪)에 대한 발표와 뉴욕대학의 케빈 머피 교수의 Folk Art에 대한 발표는 이 방면 연구자들의 시야를 확장시켜 주었다. 발표 후에 개최된 종합토론에는 발표자 전원과 여러 회화사 연구자들에 의한 장장 3시간이 넘는 토론회가 열띤 분위기아래 개최되었다. 그림으로 본 삼국지의 세계라는 발표를 한 나 역시 토론회에 참여하였다. 학회에 참가한 경험을 이렇게 길게 나열하는 이유는 민화라는 그림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애정이 매우 독특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민화에의 열광은 대단히 한국적 현상이다. 우리의 민화에 해당되는 중국의 연화(年畵)는 이미 중국에서 관심이 없어져 현대에는 거의 제작되지 않고 있고 국가의 정책적 후원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역시 우리의 민화에 비견되는 일본의 우키요에 역시 현대 작가에 의한 창작은 찾아보기 힘든 과거의 유산이 된지 오래이다. 이에 비해 이번 경주민화포럼에는 민화 작가들의 수효만 해도 수백 명이 넘었고 이들은 학회의 전 일정에 빠짐없이 참가하는 등 열띤 모습을 보였다. 민화는 다채로운 색감과 분방한 상상력이 발휘되는 그림이기에 고답적인 느낌을 주는 수묵화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친밀성이 있지만 민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민화라는 용어 자체도 일본의 철학자이자 미술이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의 정의에 따른 것이다. 야나기는 민중적 수공예로서 민예(民藝)라는 개념을 제시하였고 아울러 민중의 그림이라는 의미에서 민화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었다. 그러나 민화가 민중에 의해 제작되고 민중이 향유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은 이미 알려진 내용이었고 기법적으로 볼 때 채색화를 민화, 수묵화를 일반회화로 나누는 이분법적 구분 역시 무리가 있다. 따라서 민화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해야 하는가가 이번 포럼 토론의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였다. 발표자와 토론자들이 민화라는 단어에 대한 입장을 한 사람씩 언급하는 와중에 기시 교수의 행복화라 부릅시다라는 발언이 나온 것이다. 정색하고 생각해보니 민화에 그려진 세계야말로 행복이라는 단어로 집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심각하게 들었다. 민화가 추구한 것이 행복 그것도 개인의 행복인데, 개인의 행복이야말로 우리가 교회든 절이든 가서 기도하고 절할 때면 추구하는 최상의 목표가 아닌가 싶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1차원적 행복 추구가 우리의 이상이 아니었던가. 너무 직설적인 표현이라는 생각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러분! 부자되세요!라는 적나라한 표현을 지상파에서 쓰면서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행복화라는 기발한 신조어야 말로 성공과 행복에 집착하는 우리의 생각과 현실이 외부 연구자의 눈에 선명하게 보인 예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김 상 엽 건국대 연구교수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

[문화카페] 영화인 복지제도 이대로 놔둘 수 없다

3월 영화인 복지재단 이사회에서 난리가 났다. 올해 영진위에서 복지사업비를 삭감한다는 정보가 있어서였다. 종전에 2억 5천만원 받던 것을 2억원으로 조종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이사들은 거의 확실하다는 소문을 듣고 올해 예산을 어떻게 집행해야할지 망연자실해 있었다. 대체 5천만원이 뭐길래 그리 민감한가. 2억5천만원을 갖고 원로들에게 1년에 고작 30만원씩 드리는 돈으로 쓰고 있다. 한국에는 정부가 운영하는 영화인 복지제도가 없다. 영화인 복지재단이란 단체는 과거 정부에서 보조를 해주는 영화인들의 단체로 처음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렀고 정부인 영진위 입장에서는 단지 민간단체를 보조하는 차원에서 운영하는 것이어서 책임감도 없고 의무사항도 없다. 그러니 깍는다해도 법적으로 할 말이 없고 그저 잘 봐주십쇼라고 허리를 굽힐 수밖에. 하지만 정부는 그렇게 떳떳한가? 국가는 변변한 영화인 복지 시스템 하나 운영하지 않고 있다. 국가가 못하는 일을 하는 민간단체라면 무엇보다도 일순위로 예산책정을 해야 할 것이며 특히 그 사업이 복지사업이라는데 무슨 논리가 필요하랴. 문제는 운영의 공정성과 형평성의 원칙만 잘 지킨다면 국민의 세금을 쏟아붇는 일에 인색할 필요가 없다. 대한민국에서 예술가만큼 불행한 사람들이 없다. 일생 좋은 작품으로 대중들을 감동시켰던 예술가들은 병들거나 죽을 때 아무런 혜택이 없다. 예술가들은 두 종류다. 평소 돈을 많이 버는 대중 예술가가 있는 반면 순수한 작업으로 가난한 예술가들도 있다. 또 한때 돈을 벌었다손 치더라도 일순간에 날려 파산한 예술가들도 있다. 경위야 어찌 됐든 작품은 남는다. 작품은 남아서 대중들에게 불멸의 기억으로 자리하며 문화재가 된다. 그래서 예술가들의 삶은 유한하지만 작품은 무한하다. 그래서 예술이 위대하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국가는 말로만 그렇게 할뿐 실질적으로 아무런 혜택을 주고 있지 않으니 이처럼 허망한 국가행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디 문화선진국들을 봐라. 이런 식으로 예술가들을 홀대하는 나라가 있는지. 박철수감독의 딸 박가영양은 아버지의 교통사고 보험금 때문에 민사소송을 내면서 영화감독의 정년이 65세라는 걸 알고 경악했다고 한다. 예술가들은 정년이 없는 줄 알았는데 정년이 있었다니. 사망후 보험금을 산정받는 데서도 불이익을 받아야만 하는 이런 현실적 부조리함을 이제야 비로소 영화인과 국가에게 호소하고 있다. 과거 역사를 보니 영화인들의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수십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충무로 영화가 한때 잘나갈 때 보험에 대한 개념이 하나도 없었다. 보험이란 평소에 조금씩 납부해야 나중에 혜택이 돌아간다. 지금부터라도 보험은 들어야 한다. 아직도 한국의 영화제작사들은 보험을 들어주지 않는다. 스텝들의 계약조건에 보험이 결여되어 있다. 장애보험, 생명보험 뿐만 아니라 연금 보험도 들어줘야 한다. 그래서 제작자, 배우, 작가, 감독, 스텝들이 노후에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을 것 아닌가. 임금이 낮아 가난한 삶을 산다해도 노후를 걱정해주는 제도가 필요하다. 그게 국가가 할 일이다. 그런 점에서 영진위는 문화관광부와 이러한 복지제도의 개선책을 연구하고 시행해야 할 것이다. 정 재 형 동국대교수영화평론가

[문화카페] 지역축제를 다시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몇몇 축제는 지역 간의 연계성을 배제한 채 지역의 개별성을 강조한 저마다의 테마를 가지고 만들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방화시대를 맞이하여 지자체들이 지역을 알리고 주민의 화합과 공감대를 이루기 위해서 앞을 다투어 지역축제를 개발하거나 되살린 결과이다. 이러한 양상은 오히려 지역 축제간의 차별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비슷한 프로그램의 유사한 축제가 난립함으로써 지역특성이 오히려 감소하는 패러독스를 양산해 온 것도 사실이다. 지역축제간의 등질화(等質化)와 겉치레적 일회성 행사들이 부수적으로 따라붙고 집안잔치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으며, 예산낭비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지역축제는 협소한 지역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인식하에 지역문화의 증진과 상호교류보다는 상업주의를 바탕에 깐 지역 이기주의의 변종형태로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아울러 관광진흥을 통한 지역 활성화를 목적으로 기획되다보니 거창한 청사진에 비하여 상술(商術)이 만연하고 내용이 빈약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요즘 우리가 자주 듣는 축제공화국이라는 말은 권역별, 지역별 축제들을 비교했을 때 동일한 유형의 축제들이 광범위하게 분포한다는 점과,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난 수많은 축제가 스스로 자신의 경쟁력과 차별성을 지니지 못한 채, 그 나마의 희소성마저도 다른 지역과 그 매력을 공유해야하는 상황이 만들어 낸 자조(自嘲)적 표현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지역축제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 집단적 신명과 개인적 고취,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생산성 제고와 관광 진흥이라는 모토아래 축제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한 재점검의 시기에 도래해 있다. 사실 오늘날의 축제는 고도의 마케팅 전략에 의해서 지역의 소득창출과 고용증대는 물론 경제기반과 문화적 토대를 강화시킴으로써 지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 결과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제고시키고 시민의식을 향상시킴으로써 지역홍보와 교육적 효과까지 부수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오늘날 몇몇 지자체들에 의한 성공적인 축제들이 문화산업 및 문화예술의 활성화를 추동함으로써, 지역경제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은 축제의 순기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낙관적 자평 뒤에 늘 개운치 않은 뒷맛이 있음이 문제다. 지자체가 지역 전문 인력의 육성이나 활용에 등한시 한 채 전문가를 자처하는 외부업자나 행정주체와 연이 있는 무능한 지역 업체에게 일을 맡기다 보니, 행사의 기회 단계부터 진행, 결과에 이르는 시공간적 서사과정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축제의 목표설정 및 이미지 정립이 추상적으로 진행됨으로써 행사장 수용체계의 관리가 부실하고, 객관적 사후평가 역시 아전인수 격이 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제는 축제가 가진 사회문화적 관성을 염두에 두되, 이에 대한 패러다임은 바꿀 때가 되었다. 우리가 최고다라고 하는 자폐적 발상보다는 축제지 간의 통합이나 상호 네트워크 연결,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형태 등 정보화시대에 걸맞은 축제형태를 고려해야 할 때다. 수원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수원화성문화제가 가장 고민하는 것이 이 부분이다. 역사적ㆍ지리적ㆍ문화적 연대성이 같은 수원시화성시오산시의 지역정체성 회복과 미래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작년 수원화성문화제 단위행사를 공동으로 추진하는 것도 이의 일환일 것이다. 수원화성문화제는 향토 민속과 지역 문화예술의 전통을 다지며 애향심을 고취시키는 대표적인 지역 문화예술축제로 자리매김 되어가고 있다. 금년 가을 50회를 맞는 이 축제는 시의적절한 목표설정과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이 경 모 수원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 (예술학박사)

[문화카페] 사랑을 ‘싸랑’으로 확인하고 싶을 때

모든 가요는 사랑을 노래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사랑을 싸랑으로 확인하려 노래하기도 하고 실패한 사랑을 노래하기도 한다. 사랑, 달콤한 말이다. 하도 달콤해서 실연마저도 달콤하다. 노래는 물론 소설과 시도 사랑을 예찬하고 텔레비전 연속극이나 영화도 사랑을 빼고선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소설 적과 흑으로 유명한 스탕달은 수많은 세월과 사건 뒤에도 내게 강하게 기억되는 건 오로지 사랑했던 연인의 미소뿐!이라고 주절거렸다. 어디 연인의 미소뿐일까? 사랑에 빠지면 연인의 마마 자국도 보조개로 보일 정도로 넋을 잃는다. 눈에 콩깍지가 쓰이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사랑을 주는 것만큼 반드시 사랑을 받는 건 아니다. 노래와 문학과 영화 따위의 소재가 사랑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엇나간 사랑, 짝사랑, 갈등을 부르는 사랑만큼 좋은 소재는 없다. 토마스 만이 그의 소설 토니오 크뢰거에서 지극한 사랑을 하는 자는 이미 패배한 자이며 괴로워해야만 한다고 설파한 이유도 사랑의 비극성을 이른 것이리라. 이 말은 사랑의 승리자가 되려면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역설에 이른다. 나아가 남녀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부모 자식 간에도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부모는 자식에게 일방적인 사랑을 베푼다(요즘은 그렇지만도 않지만). 그래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도 생겼을 것이다. 자식은 부모의 일방적인 사랑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사랑에 빠진 부모를 이용하기도 한다.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지극한 사랑을 하는 자는 이미 패배한 자이다! 부모 자식 간의 경우 플로베르의 두 연인은 동시에 똑같이 서로를 사랑할 수 없다.는 말도 들어맞는다. 남녀 간의 사랑일 경우 이 말은 짝사랑이나 갈등을 부르는 사랑으로 작용한다. 그러니 가요와 각종 서사물에 사랑이 빠질 수 있겠는가? 사랑 자체가 바로 이야기가 되는데. 사랑에 빠져 있을 땐 사랑이라는 말이 불필요하다. 요즘 인터넷상에서 악플을 달고도 태연히 정신적 승리라고 주장을 하는 이가 많은데, 정신적 승리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아Q정전을 쓴 루쉰(노신)은 40대 중반 때 20대 후반이었던 그의 제자 쉬광핑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시대와 문학과 친구, 그리고 일상의 문제를 편지에 담기에 충분했다. 굳이 사랑을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삶을 함께 나누면 그만이었다. 사랑은 그런 것. 사랑이라는 말로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일상을 함께 나누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둘은 나중에 함께 살았다. 사랑을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하지 않은 경우일 것이다. 두 사람에게 사랑은 지성의 힘으로 지향하는 바를 같이 가꾸어가는 삶 자체가 아니었을까? 사랑이 끝나면 그때는 사랑이라는 말로 사랑을 확인하려 한다. 노래에서 싸랑이라고 악을 쓰는 건 이미 사랑이 끝나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사랑은 확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노래 대신 편지를 쓴 이가 많다. 이른바 정신적인 사랑의 대가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이 땅의 시인 유치환이다. 그는 이영도 시인에게 20년에 걸쳐 무려 5천통에 이르는 편지를 썼다. 유치환 시인의 사후 이영도 시인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서간집을 묶어냈다. 책 제목은 유치환 시인이 쓴 시 행복의 한 구절이다. 두 사람 모두 정신적인 사랑을 강조했고, 실제로도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유치환 시인은 다른 여인에게도 5년에 걸쳐 편지를 썼다. 이래서 우리 속담은 품마다 사랑 있다고 했는지 모른다. 정말 정신적인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과 별개인가? 철학자 스피노자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큼 신을 만난다고 했다. 그런데 능력만큼 만나는 게 신만일까? 사랑도 그러하지 않을까? 그 사람의 능력만큼 사랑도 하리라. 정신적인 사랑이든 육체적인 사랑이든 두 사람이 갈망하는 그만큼이 사랑의 능력이리라. 박 상 률 작가

[문화카페] 코닥필름의 추억

필름카메라를 쓰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미술사학과에 다니던 나는 없는 살림에 필름 값을 대느라 죽을 맛이었다. 수업마다 몇 차례씩 환등기를 이용한 슬라이드 발표를 해야 했으니 말이다. 발표 주제를 정하는 것도 어려운데 주제에 따라 읽어야 할 책과 논문은 산더미 같았고 발표 시간에 맞추어 원고 분량을 적절하게 작성함은 물론 사진자료도 만들어야 했다. 며칠을 고심하여 발표에 이용할 사진을 선정하는 것도 여간 일이 아니었고 또 촬영했다고 해서 다 잘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별별 변수가 있었다. 발표 전날 어렵게 촬영해 현상소가 몰려 있는 충무로로 달려갔더니 마침 충무로 일대에 물이 나오지 않아 현상을 할 수 없을 때도 있었고, 필름을 감지 않은 채 사진을 찍었다가 낭패한 일도 여러 번이었다. 이런 경우는 특수하다 해도 필름 값이 부담되는 것은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24장짜리가 일반적 필름이었고 36장짜리가 조금 더 대용량이었는데 필름을 감을 때 잘 만 감으면 두 서너 장 더 찍을 수 있었다. 24장짜리에서 27장, 36장짜리에서 38장까지 찍으며 느낀 희열은 아직도 생생하다. 한 장 한 장이 정확히 찍혀져야 발표를 할 수 있었기에 한 장 찍을 적에 들인 집중도와 공력은 다른 경우와 비교하기조차 힘들었다. 그 당시 가장 인기 좋은 필름은 미국 코닥사의 코닥필름이었다. 수동카메라는 디지털 카메라와는 달리 찍혀진 상태를 확인할 수 없기에 현상소 대기실에 초조하게 쪼그려 앉아 있다가 비닐 필름 주머니에 든 필름을 형광등이 켜진 라이트박스에 비추어 보기까지의 기대감과 초조함은 쉽게 표현하기 어렵다. 그런데 코닥필름이면 조금은 느긋해진 마음으로 대기할 수 있었다. 왜냐구? 코닥이니까! 그렇다. 코닥필름은 신뢰의 상징이었다. 후지필름, 현대필름, 코니카필름 등은 코닥필름에 비해 저렴했지만 잘 이용하지 않았다. 돈은 더 들어도 좋은 사진을 찍어 발표를 잘하고 싶었기 때문에 가격이 싸다 해도 다른 필름에 눈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사진관을 뻔질나게 드나들다 보니 저절로 안면을 익히게 된 사진관 아저씨가 학생, 이 필름을 써보게하시며 코닥 아닌 다른 필름을 권하셨다. 코닥이 좋지 않습니까하니 코닥이 좋은 것은 다 알지만 자네 정도의 실력이면 차이가 없으니 공연히 비싼 돈 들이지 말게하셨다. 어리둥절한 내게 코닥팔면 내가 더 이익이야, 하지만 안타까워 그러는 거야하고 일갈하시니 어쩔 수 없이 다른 필름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 이후 필름타령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진은 필름이 문제가 아니고 찍는 이의 실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 이전에는 코닥필름을 써서 사진이 잘 나오면 코닥이니까 당연히 잘 나온 것이고, 사진의 질이 떨어지면 코닥인데도 잘 나오지 않았으니 내 잘못이었다. 그런데 다른 필름을 사용해서 잘 나오면 내 덕이었고 잘 안 나오면 무조건 필름 탓이었다. 그럴 때면 싼 게 싼 값해 또는 코닥으로 찍을 걸하는 말이 절로 나오곤 했던 것이다. 당시 코닥필름은 코닥사에서 나온 필름이기 이전에 오차 없는 사진을 나오게 하는 보증수표와 같은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그 시절 코닥필름과 같은 신뢰성을 담보하는 정치인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이렇게 길게 써본다. 미국 코닥 본사의 부도, 회생 노력 소식 등을 들으니 드는 생각이다. 김 상 엽 건국대 연구교수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

[문화카페] 후진국으로 떨어진 한국의 극장문화

한국의 어느 극장에 가도 영화 엔딩 타이틀이 올라갈때면 여지없이 불이 켜진다. 관객들은 우르르 일어나 나가고 대기하고 있던 청소아줌마가 올라와 청소를 시작한다. 그런데 프랑스 어느 극장이었다.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는데 극장 불은 켜지지 않았다. 몇 사람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엔딩 타이틀이 완전히 끝났을 때 불이 들어왔고 그때야 관객들은 일어나 나갔다. 프랑스에서 엔딩 타이틀에 불을 켜지 않는 것은 아직 영화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한국에서 불을 켜는 것은 영화가 다 끝났으니 나가도 좋다는 의미의 신호다. 똑같은 엔딩 타이틀을 놓고 왜 이렇게 해석이 다를까. 엔딩 타이틀은 관객에게 영화를 만든 사람들을 알려주는 자리이고 제작자 입장에서 그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이다. 어떤 엔딩 타이틀은 10분 이상 긴 경우도 있다. 또 음악을 통해 영화의 여운을 갖게 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말해 엔딩 타이틀은 영화에서 중요한 한 부분이다. 없어도 된다면 왜 엔딩타이틀을 만들어 붙였겠는가. 엔딩 타이틀 시간에 불을 켜는 일은 사소한 것 같지만 사실 영화문화의 한 측면을 상징하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사소한 거라고 지키지 않는 것.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고 넘어가는 것. 그게 문제라는 걸 요즘 새삼 느낀다. 대체 한국에는 영화 문화가 있기는 한 것인가?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 감사드린다는 그 중요한 영화예술의 문화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 극장에 대해 영화인협회와 영화제작가협회는 정식으로 항의해야 한다. 극장의 무지는 관객을 조롱한 꼴이 되어 시민들의 항의를 받아도 싸다. 극장은 영화예술과 관객의 권리를 무시하여 한국의 극장문화, 영화문화를 3류로 만든 주범이 되었다. 극장은 왜 이런 무례를 범하게 된 것일까. 돈을 더 많이 벌려고 하는 것 외에 다른 뜻이 없는 것 같다. 관객들은 많고 쓰레기는 치워야 하고 휴식 시간이 적으니 빨리 일을 해치우고 다음 회를 상영하려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돈을 벌자는 그 발상이 문제다. 지킬 건 지켜야 한다. 다시 프랑스 예를 들자면 프랑스극장은 좌석표가 없다. 영화는 항상 10분 정도 있다가 늦게 시작한다. 늦게 입장하는 사람을 기다려주는 것이다. 프랑스 극장엔 영화를 느긋하게 즐기려는 여유가 있는 반면 한국의 극장은 우르르 몰려갔다 빨리 빠져나오고 아무리 늦게 와도 자기 좌석표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상한 문화가 존재하는 차이가 있다. 분명 한국의 극장문화는 잘못된 것이다. 영화는 관객위주여야 하지 극장주 마음대로 운영하면 안 된다. 프랑스는 관객 할인 카드가 있다. 메이저 영화관들이 운영하는 할인카드는 두 종류다. 20유로만 내면 한 달 동안 개인이 마음대로 영화를 볼 수 있는 것과 35유로 정도 내면 커플이 볼수 있는 카드. 한편에 8유로 정도니까 액수로는 겨우 3편 밖에 못보는 거지만 카드를 만들면 모든 영화를 다 볼 수 있다.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이런 카드를 모든 국민이 가지면 극장은 망하라는 뜻으로 보인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이 카드 때문에 극장이 망했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다. 프랑스극장은 수지타산보다 그만큼 국민에 대한 배려가 강하다. 한국극장은 시민에 대한 경제적 배려도 없고 영화예술에 대한 예의도 없고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인식도 없다. 오직 극장 내 판매에 대한 폭리와 좌석표권리와 관객의 빠른 퇴장과 특정 영화의 스크린 독과점만 있다. 이런 것들이 없어지지 않으면서 어떻게 한류를 말하고 한국영화의 국제화를 말하는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 재 형 동국대 교수

[문화카페] 이제는 장소마케팅이다

오늘날 도시인은 소득향상으로 인한 경제적, 심리적 여유와 자아 정체성에 대한 인식확대로 인해 문화예술을 더 이상 삶의 선택적 잔여범주가 아닌, 필수적 핵심범주로 간주하고 있다. 이로 인해 관광욕구, 삶의 질과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추구 등 문화적 욕구와 이를 충족시키는 도시환경의 장소성에 대한 관심도 날로 증가하고 있다. 도시정체성 확립의 가장 중요한 전략은 바로 장소마케팅 전략이다. 장소마케팅은 도시의 역사적문화적 전통과 지리적 여건을 최대한 활용해 정체성을 발굴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는 단순히 물적 경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도시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형태라야 한다. 이러한 장소마케팅 전략의 대표적인 것이 장소 만들기(place making)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도시공간을 그 도시에 살거나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되돌려주어, 친숙하고 자주 찾는 공공장소로 만들어 가자는 개념에서 출발했다. 특정 도시만의 고유한 문화적역사적 특징은 다른 도시에는 체험할 수 없는 것이므로 도시의 중요한 홍보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 퇴락한 공업도시인 스페인의 빌바오가 구겐하임미술관 분관을 유치하여 활력을 얻은 것이나, 영국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게이츠헤드가 발틱 현대미술관과 세이지 음악당의 건립으로 일약 세계적 도시로 부상한 것이 이를 명증한다. 한편 영국예술의 경제적 중요성이라는 1988년 보고서에서 존 메이어스코(John Myerscough)는 예술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자석으로 작용하며 이는 서비스산업에 소비층 증대를 위한 장점으로 작용한다. 예술 관련 시설은 지역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지역 정체성을 제고하고 폭 넓은 발전의 촉매제로써 지역경제에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도시 재개발 차원에서 문화적 측면을 부각시키며 도시환경을 개선하기도 하고, 도심의 우범지역 혹은 소외 지역이 이러한 문화공간으로의 전환을 통하여 열악한 환경이 개선되고 사람을 불러 모아 투자를 유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문화예술을 활용한 도시 활성화 논의는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문화복지적 관점이다. 공공재로서의 문화복지서비스를 제공하여 지역주민들의 문화향수권(Cultural Right)을 실현하자는 것. 이러한 문화복지 서비스는 지역이나 계층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동등하게 누릴 수 있도록 문화적 형평성을 담보한다. 둘째는 도시 마케팅의 관점이다. 이것은 문화친화적 도시 건설로 지속가능한 도시발전을 추구하는 개념이다. 문화예술은 도시이미지 및 정체성을 높여 도시마케팅 요소로 활용될 수 있으며, 지역 내로는 투자유도, 고용 및 직업창출, 소득효과, 관광자원 효과 등으로 인해 지역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또 장기적으로는 도시의 창조성 향상을 통한 도시생산성을 증가시킬 수 있다. 그리고 예술은 소비자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에 그 지역에 경제적 활력을 제공한다. 도심의 폐건물을 활용하여 예술가를 위한 공간 마련의 궁극적인 목적은 문화관광과 도시의 활성화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도시의 문화정체성 부여를 통한 매력요인의 부각으로 시민들로 하여금 쾌적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환경으로 조성해 주는 것도 거시적인 목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수원문화재단이 수원천이나 팔부자거리, 재래시장, 문구거리 등 구도심의 활성화에 관심을 갖고 문화적 도시마케팅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경 모 수원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 예술학박사

[문화카페] 어느 집이 가장 맛있을까?

식당만 잔뜩 모여 있는, 이른바 식당 골목에 식당마다 식객의 눈길을 붙잡아 발길을 이끌려는 호객 문구를 저마다 내걸고 있다. 한 집이 먼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는 집이라고 내걸었다. 그러자 그 옆집은 다소곳하게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집이라고 했다. 이만만 해도 점잖다. 그런데 더 들어가니 진짜 강적이 있다. 이 골목에서 가장 맛있는 집이라는 문구를 내건 집! 그야말로 촌철살인이다. 대한민국과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집이라며 뻐기는 옆집들을 두고 자기 집은 그런 식당들이 있는 이 골목에서 가장 맛있는 집이라 해 버린 것이니. 맛있는 집임을 홍보하는 건 관광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관광지의 식당들엔 하나같이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내걸려 있다. kbs 00에서 방영된 집 / mbc 000에서 소개된 집 / sbs 0000 팀이 찾아온 집. 거기에 대고도 촌철살인을 하는 집이 있으니, 방송에 한번도 안 나온 집이라는 문구를 식당 문 앞에 내건 집! 모르긴 몰라도 식객들의 발길은 이 골목에서 가장 맛있는 집이나 방송에 한번도 안 나온 집이라는 식당으로 향할 것이다. 말이 홍수를 이룬다. 식당처럼 음식 솜씨를 자랑하는 곳뿐만이 아니라 개인 생활에서도 말의 물이 넘친다. 번지르르한 말에, 안 해도 되는 말이 장마철의 범람 수준이다. 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남 말에 일일이 참견을 해야 직성이 풀리고, 회의 같은 것을 할 때 자기 말만 하기 위해 수시로 잠깐만요!를 외친다. 그런데 그는 결코 잠깐만을 지키지 않는다. 그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말을 독점한다. 그런 사람들은 곁에 있는 사람이나 구성원들에게 상처를 주는지도 모른다. 옛날에 인디언들은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개성이나 환경을 그 사람 이름으로 많이 불렀다. 아이가 자라면서 나무와 사슴을 좋아하면 숲에서 온 사슴, 바람이 많이 부는 골짜기에서 태어났으면 바람의 속살 같은 이름말이다. 그런 인디언들 앞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을 소개하는 말을 장황하게 했다고 한다. 인디언 마을에 처음 간 사람은 인디언들에게 자신의 이름부터 하는 일까지 자세하게 일렀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인디언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당신의 이름은 말이 너무 많아가 되겠습니다.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일단 만나면 그 사람의 분위기와 그 사람을 맞이하는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운이 있단다. 인디언들은 그 기운을 느끼면 바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고 한다. 그들은 그게 바로 소개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말로 장황하게 자신을 소개했으니, 인디언들이 질겁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음식을 팔아야 하는 식당뿐만 아니라 개인 간의 사이에서도 말이 너무 넘친다. 이래서 말 못하고 죽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속담도 생겼을 것이다. 예로부터 입 달린 사람은 누가 들어주든 말든 자기 할 말만 하였다는 얘기이다. 이 세상을 살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오히려 말을 적게 할수록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래서 절집에서도 묵언(默言) 수행을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오로지 말로써 다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은 허풍을 치게 된다. 물건이 가진 실체보다 훨씬 더 부풀려서 소비자의 호주머니를 열게 만드는 게 자본주의 사회의 마케팅 기법이라지만 먹는 것에서까지 허풍을 치는 건 좀 아니다. 그래서 조상들이 말이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고 했겠지! 박 상 률 작가

[문화카페] 우리에게 근대란

남쪽 지방도시에 사는 선배를 만났다. 그 선배는 주로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오는 데 비행기 표는 꼭 서울 본점을 통해 구입한다고 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그 도시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남자에게 꼬리친다고 하는 생각에 여직원들이 더럽게 불친절하다고 했다. 참, 근대화가 덜 되었군요하고 껄껄 웃으며 맞장구치며 소주를 비웠다. 3시간이 넘게 먹고 마신 술자리가 대개 그렇듯이 그날 무슨 말을 했는지 희미하게 조차 기억나지 않는데, 유독 이 비행기 표 얘기는 또렷이 생각이 났다. 우리에게 근대란 무엇인지 궁금해서였는지 모르겠다. 근대는 고대, 중세 다음의 시기로 지금 우리가 사는 현대와 직접 연결되는 시기이다. 사전을 보면 공동체에 대한 나라는 개인의식의 성립이나 개인존중 등의 개인우월 사상을 내세워 따진다면 유럽에서는 보통 1516세기 르네상스나 종교개혁의 시기 이후가 되고, 자본주의의 형성이나 시민사회의 성립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1718세기 이후라 한다. 사전적 정의는 복잡하지만 근대라는 시기의 특징은 개인의식의 성립과 신분 또는 혈통 등 중세적인 속박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과연 어느 정도쯤이나 근대화되었는지 궁금해지곤 한다. 사실 개인으로서의 자각은 혈연적 종속관계에서의 탈피와 함께 도덕적 의무의 충실한 이행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시민으로서의 엄격한 도덕률의 요구된다. 매년 추석과 설날이면 명절 스트레스 증후군, 명절 스트레스를 날리는 방법 등의 기사는 신문과 방송의 단골 메뉴이다. 인간이 달나라에 진작 갔다 왔고, 컴퓨터ㆍ인터넷은 물론 페이스북ㆍ트위터 등 첨단의 이기가 난무하면서도 아직도 명절이라는 고색창연한 유물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로 인해 인간관계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대는 그 속도를 짐작하기도 어려울 만큼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우리의 생활과 관념, 인간에 대한 배려 등은 지난 시절에서 몇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명절 스트레스 뿐이랴. 번호표가 나오는 기계 덕에 우체국과 은행 등에서는 새치기가 원초적으로 차단되었지만, 번호표 기계가 없는 곳은 그렇지 않다. 멀쩡히 차려 입은 사람들이 슬금슬금 옆에 와서 얼렁뚱땅 끼어드는데 이를 지적하면 내가 새치기나 할 사람으로 보이냐고 오히려 큰소리다. 지하철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도 전에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에 짜증내면 내릴 때마다 까칠한 인간이 되고 만다. 이런 인간들은 모두 개인으로서의 도덕적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근대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부류라 보아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1933년에 이효석, 이태준, 김기림 등과 함께 문학단체 구인회를 조직했던 소설가이자 영문학자인 조용만 선생의 대동아전쟁 때 배급 줄을 세울 적에 양반과 상놈이 처음으로 한 줄로 선 게 근대의 시작이야라는 말씀을 기억한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식량과 유류 사정 등이 좋지 않아져 배급을 실시하게 되었는데, 당시 조선 사람들이 양반ㆍ중인ㆍ상민이 따로 줄을 서자 일제가 일렬로 서게 한 것이 양반과 비양반이 섞이게 된 최초의 계기라는 말씀이다. 조용만 선생의 기억은 사료적 가치가 있다는 평을 듣는 분이니 이 분의 기억은 신뢰할 만하다.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 근대라는 시대의 시작은 100년은커녕 50~60여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구에서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진 도덕률 등이 반세기 남짓한 시간 안에 이루어질 수는 없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지만 맥락 없이 씁쓸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다. 김 상 엽 건국대 연구교수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

[문화카페] 새해 소원, 영화인들 생존 문제 심각하다

새해 벽두부터 기분 나쁜 말로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영화인들 먹고 사는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 작년 한국영화 관객수가 1억명을 돌파했고 1천만명을 넘은 영화가 두편이나 나와서 자축하는 샴페인을 터트린게 엊그제인데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고 되물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영화인들이 굶어죽을 일이란 걸 설명하자면 2011년 10월21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날은 한국영화의 사령탑격인 영화진흥위원회에서 한국영화동반성장위원회를 발족한 날이다. 투자, 제작, 배급, 상영의 수직계열화, 불공정사례 등 독점적 산업구조탈피를 위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 방안의 모색, 표준상영계약서, 표준근로계약서 권고안 발표 및 표준투자계약서약관 신청 등 공정경쟁환경조성을 위한 영화산업 상생체계 마련 등이 골자다. 한마디로 위원회에서 영화인들과 기업간의 불편한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중재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김동호 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위원장으로 각계가 모여 해결책에 합의하고 잘해보자고 하는 일이다. 거기서 실행하고 있는 구체안 중의 하나가 표준계약서에 합의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표준계약서란 투자자가 투자하기 위한 조건, 시나리오 작가가 영화사와 계약하는 조건, 기술스탭들이 어떤 조건과 임금을 받을 수 있는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대단히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문건이다. 하지만 이 계약서는 현장에서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 법적인 효력이 없는 관계로 영화현장에서는 계약서를 무시한다. 대신 현장에서는 불합리한 관행을 여전히 고수한다. 영화스탭들은 4대보험도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상해가 발생할시 엄청난 부담을 져야 한다. 영화의 제작스케줄이 고무줄 늘어나듯 마음대로라서 다른 현장일로 옮겨가는 것도 여의치 않다. 결과적으로 많은 작품을 할수 없으므로 수익이 줄어든다. 일년에 몇작품이라도 제대로 할수 있다면 최저임금을 면할 수 있다고 말하는 현장인들도 있다. 하루 작업량을 초과하고도 초과수당이 없는 것은 이제 아예 바라지도 않는다. 분명한 임금 착취임에도 그게 없이 한국영화는 제작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얘기는 어디 헐리우드에서나 있는거지 한국에선 꿈도 못꾼다고 자포자기한다. 임금착취를 당연시하고 거의 무기력하게 굴종하고 있는 상태다. 정부는 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가장 기본적인 임금을 주지 않으면서 한국영화가 전세계적으로 성장했다고 샴페인을 터뜨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란 것을, 주무부서인 문화관광부와 영화진흥위원회는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궁금하다. 한편으로 노장 영화인들을 만나면 한결같이 영화인 복지문제를 들고 나온다. 한평생 영화일에 몸바쳤는데 특별한 연금이랄 게 없다. 비단 영화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문학, 음악, 미술, 무용, 연극, 영화인들 모두에 해당하는 문제다. 평소 이들이 활동할 때 계약서에 영화사와 본인이 반반씩 부담하는 연금 조항이라도 있었다면 노후에 조금씩 받는 연금이 있을텐데 말이다. 정부는 그런 제도를 확립하여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본다. 영화는 미래 부가가치 산업의 핵심이며 꽃이다. 박근혜 정부도 미래창조과학부라는 부서를 신설하여 부가가치 산업에 대해 정부가 관심을 갖고 먹고 사는 상생경제를 추구하려 하고 있다. 영화인들 먹여살리는 좋은 정책이 펼쳐지는 건지 기대해도 될지 모르겠다. 정 재 형 동국대 교수

[문화카페] 그 많던 책방은 어디로 다 갔을까?

새로 온 우편배달부(집배원)가 출판사에서 온 등기우편물을 건네주며 조심스레 묻는다. 사장님, 혹시 책방 하다가 잘못 되셨나요? 나는 사장도 아니지만, 책방을 운영한 일도 없다. 요즘은 어디 가나 사장님이라는 소리가 남발 되고 있는데 그거야 세태 탓이려니 한다. 문제는 집안 가득한 책을 보고 집배원이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물은 책방 하다가 잘못 되었느냐는 것이다. 최근의 한 조사에 따르면 1990년대 말엔 전국에 5천 곳이 훌쩍 넘던 책방이 현재는 2천 곳에도 훨씬 못 미친단다. 이미 책방이 한 곳도 없는 시군구가 전국적으로 다섯 군데나 생겨났고 서른 곳은 책방이 가까스로 한 개가 유지 되고 있단다. 이는 책을 자본주의의 다른 상품과 똑같이 여겨 일어난 현상이리라. 박완서 선생의 소설 제목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투로 말하자면 그 많던 책방은 어디로 다 갔을까? 사정이 이러한지라 국회에서 지난 1월 9일에 출판문화산업진흥법 개정안이 발의되었다. 개정안의 핵심은 책값 할인율 상한을 19%에서 10%로 제한하면서 신간, 구간 구분 없이 모두 적용 대상으로 포함 시키자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발행된 지 1년 6개월, 즉 18 개월이 지난 책은 할인율에 제한이 없어 책 유통시장을 어지럽힌 주범으로 여겨졌다. 이에 출판계와 오프라인 책방은 아쉬운 대로 환영한다고 했지만 할인판매를 해온 온라인 서점은 반발했다. 출판계 쪽이나 오프라인 책방 쪽에선 할인 없는 완전한 도서정가제를 줄곧 외쳐왔다. 온라인 서점은 책을 싸게 살 소비자 권리를 내세우며 책을 할인해주지 않으면 누가 책을 사겠냐고 한다. 이는 책을 다른 상품과 똑같이 여긴다는 얘기다. 그동안 온라인 서점은 집에서 책을 받아보는 편리함에 마일리지니 쿠폰이니 하는 온갖 할인판매책으로 독자를 끌어 모았다. 그 결과 동네 책방은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다. 물론 동네 책방이 사라진 게 온라인 서점만의 탓은 아니다. 대형 서점의 등장도 한몫했다는 의견이 많다. 어쨌든 할인 판매 정책을 중시한 온라인 서점의 사정은 좋아졌을까? 무리한 할인정책 등으로 경영 압박을 못 견뎌 이미 한 군데 대형 온라인 서점이 문을 닫았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온라인 서점도 할인율이 높고 대중이 선호하는 가벼운 책 위주로 판매 정책을 쓸 수밖에 없다. 온라인 서점 주장대로 독자가 책을 싸게 살 수 있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게 다 망가지는 지름길이라면? 온라인 서점의 할인율을 높이기 위해선 출판사가 애초에 책을 싸게 공급해야 한다. 출판사는 살아남기 위해 좋은 책보다는 가벼운 읽을거리 위주로 책을 펴낼 수밖에 없다. 더구나 동네 책방도 대형 책방이나 온라인 책방 탓에 거의 사라져 출판사가 책을 공급할 데도 마땅치 않다. 내 발 딛고 서 있는 땅이 중요하다고 내 발이 놓이지 않은 땅을 다 없애버리면 어떻게 될까? 결국 자기가 발 딛고 있는 땅도 무너질 것이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다. 사정이 이러한대도 일부 온라인 서점은 자신의 주장만 되풀이한다. 도서정가제가 무너져 출판사가 다 망하면 온라인 서점인들 무사할까? 자본주의의 상품 유통 방식이 만능은 아니다. 책은 다른 상품과는 더더욱 다르다. 그러기에 다른 나라에서도 책을 일반 물건 취급하지 않고 보호한다. 그런데 지난 대통령 선거 시 후보로 나섰던 누구도 책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도서 정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창조창의력인문을 들먹인다. 애들 말대로 다 뻥!이다. 이런 세상에 작가로 사는 게 기적이다. 누가 내 책을 읽어주는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아무튼, 요즘 유행하는 말투로 하자면 책은 자본주의의 단순한 상품이 아니무니다! 박 상 률 작가

[문화카페] 객관적이라는 말에 대하여

새해 첫날이면 어느 분은 언제나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읽는다고 했고, 어느 분은 동해 바닷가에 가서 일출을 보며 새해 구상을 한다고 했다. 이분들의 규칙적인 모습은 게으른데다 불규칙한 생활 습성을 지속하는 나 같은 자에게는 그저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연말연시면 저절로 머리 한구석에 떠올려지는 작품이 있다. 대학시절 읽은 소설인데 연말연시는 물론 중요한 결정을 앞두거나 골치 아픈 상황과 맞닥뜨리면 본의건 본의 아니건 그 내용과 의미가 머릿속에 오락가락하는 걸 보면 신기할 때도 있다. 일본 최고의 문학상은 35세의 나이에 그저 막연한 불안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아쿠다가와 류노스케를 기리기 위한 아쿠다가와 상이다. 아쿠다가와 류노스케는 잘 정제된 보석 같은 언어로 인간의 내면과 인간사의 진리를 예리하게 묘사했다. 그중에서도 덤불 속은 압권이다. 덤불 속의 줄거리는 사실 간단하다. 산 속에서 무사의 시체가 발견되자 수사에 나선 수사관에게 사건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진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말에서 떨어진 통에 사로잡힌 도둑 다조마루는 이제 막 결혼해 길을 나선 무사의 신부에 마음을 빼앗겼다. 무사의 부인을 취하기 위해 다조마루는 무사에게 산기슭에 묻힌 보물을 찾아 나누자고 유혹했다. 으슥한 곳에서 본색을 드러낸 다조마루와 무사는 격렬한 대결을 벌였으나 무사는 악명 높은 도둑 다조마루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무사를 나무에 묶어두고 무사의 부인을 겁탈한 후 달아난 다조마루는 다리를 건너다 말에서 떨어져 체포되고 말았다. 경찰에 잡힌 다조마루는 수사관에 무사의 시체와의 연관에 대한 취조를 받게 된다. 줄거리는 복잡하지 않지만 수사관 앞에 진술하는 다조마루와 무사의 부인 그리고 무당의 입을 빌려 말하는 무사의 영혼의 진술은 달랐다. 다조마루는 무사의 부인을 차지하기 위해 무사와 결투를 벌인 후 무사를 죽였다고 했지만, 무사의 부인은 다조마루에게 정조를 빼앗긴 자신을 멸시하는 남편을 자신이 죽였다고 진술했고 무당의 입을 빌린 무사의 영혼은 수치심에 자결했다고 했다. 몇 해 전 모 대학에서 강의하다가 학생들에게 덤불 속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과제를 낸 적이 있다. 객관성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자는 의미에서였는데, 일본에서 유학 온 여학생의 레포트를 통해 덤불 속을 분석한 글이 수백편이 넘고 진정한 사실을 알고자 여러 차례 재연도 했지만 아직도 진실은 오리무중이라는 것을 흥미롭게 읽었다. 덤불 속의 진실을 알기 위한 이런 시도에 아쿠다가와 류노스케는 깔깔대며 웃어넘길지도 모르겠다. 그가 의도했던 것은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인데 겨우 누가 죽였는가에 관심이나 갖다니 하고 말이다. 우리는 흔히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또는 내가 경험한 것이니 이게 맞아! 등의 말을 쉽게 한다. 자신이 본 것이니 진실이고 자신이 겪었으니 맞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시각이라는 것 그리고 기억이란 자신의 필요와 생각,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정치적 견해와 입장 등에 따라 과거는 물론 어떠한 현상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이번 대선의 패인에 대한 민주당의 갈등과 수개표 논란 등을 보니 덤불 속 생각이 또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김 상 엽 건국대 연구교수문화재청문화재감정위원

[문화카페] 퓨전의 힘, 미래 한류산업의 원동력

마이 리틀 히어로(김성훈). 이 영화는 뮤지컬 음악감독인 유일한(김래원)과 혼혈청소년 영광(지대한)의 브로드웨이 입성기이다. 유일한은 브로드웨이 입성이 꿈인 젊은 음악감독이다. 재능은 있지만 가난해서 유학을 가지 못한채 꿈을 접어야 했던 그는 대가들의 작품을 짜깁기하는 것으로만 인정받은 처지였다. 열등의식과 속물근성에 젖어 있던 그에게 행운이 찾아온다. 새로운 뮤지컬 음악감독과 신인청소년 배우를 선발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정조대왕의 어린 시절을 연기할 뮤지컬 배우에 하필이면 필리핀 혼혈인 영광이 선발된다. 유일한은 민족적 편견을 갖고 있었고 영광을 가르칠 의욕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영광은 노력으로 자신이 못하는 춤을 마스터하여 뮤지컬 배우로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낸다. 이 영화는 혼혈이 과연 한국인인가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완득이 이후 메이저영화로서는 두 번째 혼혈아동 소재영화다. 뮤지컬의 고장 뉴욕은 그야말로 혼혈의 전시장이다. 유럽계, 중남미계, 아시아계 백인이든 흑인이든 이미 미국 뮤지컬은 혼혈시장 그 자체다. 미스 사이공의 여주인공인 베트남계 여자역을 따기 위해서 수천명의 아시아계 미국혼혈 여자배우들이 지원한다. 그런 현실을 보면 이 영화가 제기하고 있는 혼혈아 문제는 우물안개구리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은 오랫동안 단일민족 신화에 젖어서 마치 한국이 한혈통인줄 착각한다. 이미 한국안에는 수많은 혈통들이 혼재되어 있다. 신라시대 때부터 회회아비라고 표현되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문헌에 등장하고 처용도 중동지역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임진왜란 이후 잡혔다가 조선에 귀화한 일본인들이 많고 거꾸로 끌려간 조선도공의 후예들이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수대째 살고 있다. 박수건달(조진규)은 건달이 어느날 박수무당이 되어 양쪽을 오가면서 벌이는 코미디이다. 이 영화는 무당이라는 소재를 조폭과 비빔밥으로 버무려 만든 퓨전 코미디다. 무당소재는 한국적이고 조폭소재는 서구 갱 소재에서 온 것이다. 한국과 서양이 만나 코메리칸 퓨전이 만들어진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 사랑과 영혼에 보면 서양 무당이 등장한다. 우피 골드버그가 연기한 그녀는 죽은 남편의 영혼을 몸에 넣어 아내에게 당부의 말도 하면서 아내를 감동시킨다. 아내는 흑인 여자의 몸속에 죽은 남편이 살아있음을 확실히 느낀다. 이 똑같은 장면들이 박수건달에 살아있다. 그건 사랑과 영혼의 모방이기도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의 굿 문화 속에 존재하던 장면이었다. 오히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사랑과 영혼이 무당굿을 훔쳐간 것처럼 보인다. 퓨전은 이렇게 서구화된 동양적인 것을 다시 재탈취해 내것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두편의 한국영화는 퓨전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롭게 제기한다. 하지만 그건 새로운 게 아니다. 이미 우리 유전자 속에는 퓨전을 통해 역사를 일궈왔던 위대한 피가 흐르는 것이다. 신년벽두에 개봉된 두 편의 한국영화는 최근 불어닥친 서구의 한류인기를 어떻게 연속시킬 것인가에 대한 화두를 제공한다. 무엇이 한국적인가. 그 문제의 답은 여기에 있다. 한국적인 것이 한국적인 것이 아니다. 퓨전화되어 우리 것이 아닌 것이 한국적인 것과 어우러진 것이 한국적인 것이다. 싸이의 강남스타일도 우리 것이 아니다. 그건 세계인의 음률이고 세계인의 동작이다. 그걸 자꾸 우리 거라고 우기는 논법이 우물 안 개구리다. 남의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인 누가 봐도 한국적임을 느낀다. 그걸 강변하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랴. 정 재 형 동국대 영화학과 교수?영화평론가

[문화카페] 도시와 환경미술

문화가 외부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환경 결정론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인간 삶의 공간을 물리적으로 구성하는 건축이나, 공동체를 유지존속시키는 식(食)문화, 그리고 인류의 감성과 지적 욕망을 채워준 예술 등은 모두 생태환경적 조건이 근본적으로 반영되어 왔다. 따라서 환경은 개인의 전유물이거나 소수집단의 것이 아니라는 말의 권위를 부여받고, 여기에 미술의 특징인 공공성이 더해져 환경미술이라는 분야가 생겨나게 되었다. 고대 신전건축이나 공공시설물을 지을 때는 건축가와 미술가가 늘 머리를 맞대고 숙의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우는 모더니티라는 새로운 힘이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면서 무자비한 파괴와 개발의 동력으로 전통적 생활양식과 도시 형태를 허물고 획일적 형식의 건축물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면서 이미 깨져 버렸다. 기능성을 최우선으로 함으로써 상자 속의 국제양식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아온 현대건축물의 무미건조함을 상쇄시키기 위하여 옥내외에 환경조형물을 등장시켰던 것이다. 바야흐로 환경미술은 도시 공간 미화작업을 일컫는 개념으로 정착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환경미술은 현대사회의 다양한 문제점들이 산적해 있는 부정적인 공간으로서의 도시가 아니라 도시를 살맛나는 삶의 터전으로 바꾸고자 하는 시도로써 자연과 조화된 작품으로 눈길을 돌려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환경미술은 단일한 조형물의 미학적 아름다움만을 고려하거나 고립된 조형물로서만 형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파편화된 환경조형물과 주변환경과의 어우러짐을 통해 쾌적한 도시공간 조성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또 공공미술은 공동체의 공유문화, 시민의 참여문화에 대한 충족과 소통의 측면까지 고려하고 도시의 생명작용을 주도하는 문화장치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환경미술이 도시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갖는 것도 그 이유이다. 이 때문에 환경미술은 도시건축물과 불가결한 부분으로 일체화하며 존재해야 한다. 환경미술은 공공적 차원에서 황폐해진 도시환경을 인간화하고, 동시대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을 나타내며, 이 과정에 예술가가 개입함으로써 예술의 사회적 기여를 정초시킨다. 도시공간 속에서 미술과 건축의 파트너십의 일반화는 현대조각뿐 아니라 회화, 디자인, 모자이크 등 형식주의 미학에 의해 분리되었던 미술 제 장르들을 건축물을 구심점으로 통합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수원문화재단에서 추진하고 있는 문화예술이 흐르는 수원천 공공예술프로젝트는 수원천의 역사와 도시환경을 문화예술적 관점에서 재조명하여 수원천이라는 장소성의 가치와 복원의 의미에 대하여 알리고 도시형 하천이라는 일상공간에서 시민과 관광객이 생태환경과 문화예술을 가깝게 향유하는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제공하고자 기획된 사업이다. 수원유람 팔부자거리 발굴육성 프로젝트 역시 대상지 내 문화자원, 역사적 배경, 도시환경 등에 대한 특성을 기초로 공공예술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해석된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설치하는 환경미술적 관점에서 고려된 사업이다. 이러한 사업을 통하여 문화도시 수원의 정체성 확보와 문화적 역량 제고가 가속화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 경 모 수원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미술평론가

[문화카페] ‘레미제라블’의 또다른 이름 ‘사랑으로’

노도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내던져진 개인의 삶은 나룻배처럼 격랑에 휩쓸려갔지만 유일한 탈출구는 오직 사랑이었다. 조건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가톨릭 사제의 따뜻한 배려는 절망하는 한 인간을 어둠에서 밝은 빛으로 이끄는 원동력으로 승화된다. 1862년 프랑스에서 발간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이 바로 그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소설 속 장발장은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죗값으로 19년간의 형벌을 받고 풀려나지만 프랑스 대혁명 이후 전개된 혼돈의 시대에서 방황한다. 성당에서 다시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죄를 저지르고 붙잡히지만 미리엘 주교의 종교애적 사랑에 구원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참혹한 운명을 지닌 장발장은 신분을 속이고 산업혁명의 와중에서 시장으로, 기업의 대표로 출세하지만 운명의 여인 판틴을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 그녀의 딸 코제트를 양녀로 키우게 된다. 또한 1832년 6월 공화파의 무장봉기에서 양녀 코제트를 사랑하는 혁명가 마리우스의 목숨을 구하는 헌신적 사랑을 실천한다. 그의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는 인간애적 사랑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서 비롯된다. 그가 가톨릭 사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희생적 사랑은 없었을 것이다. 절망 속에서 종교적 사랑의 힘으로 정신적 구원을 받았던 장발장은 한없는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다 하느님의 품에 안기며 눈을 감는다. 그래서 소설 레미제라블의 또 다른 이름이 사랑으로라고 생각된다. 지난주 휴 잭맨 주연의 레미제라블이 극장가에 개봉되었다. 2012년 말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 레미제라블은 최근 선거로 분열된 우리 사회를 다시 결속시킬 좋은 소재가 되고 있다. 소설 속 장발장의 행동에는 시종일관 가톨릭의 사랑이 근저에 깔려 있었다. 어찌 보면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화해와 용서의 샘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수단이자 목적이 종교가 아니겠는가! 지난 12월 19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 후폭풍은 우리 사회를 세대별로 분열시키고 있다. 편가르기와 상호 비방은 프랑스 혁명기의 혼돈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장발장의 무한한 사랑과 희망이 자베르 경감의 가혹한 정의를 굴복시켰듯이 우리의 계층간 불화도 슬기롭게 극복되리라 믿는다. 최근 레미제라블의 인기가 다시 치솟고 있다. 지난달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공연을 시작했는가 하면 출판계에서도 난리다. 이러한 풍조는 결코 최근 우리 사회의 혼란상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여 해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서로 화합하라는 교훈을 던져주는 것은 아닐지? 레미제라블의 또 다른 이름이 사랑으로라는 첫 번째 이유가 소설 속의 사랑이라면, 사랑을 현실에 반영하고 실천하라는 것은 두 번째 이유다. 대통령 선거는 끝났다. 과거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위기를 얼마나 슬기롭게 대처하느냐가 향후 국운을 좌우한다. 내 잣대를 갖고 자베르 경감처럼 맹목적으로 내 주장만을 내세워서는 발전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사랑을 실천하여 분열된 사회를 포용과 통합으로 이끌 수 있는 장발장이 더 중요하다. 새해에는 분노와 증오로 소외된 질곡의 시간에 빠져드는 것보다 레미제라블의 줄거리처럼 사랑을 실천하고 화합을 이루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진 종 구 환경안보아카데미 원장

[문화카페] 고목나무에 꽃 피우기

지난 11월22일 제4회 오프앤프리 국제영화예술제가 일주일간 열렸다. 개막작은 1948년 윤대룡 감독의 흑백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이었다. 무성영화는 일제 시대때부터 시작해서 해방직후까지 존재했던 특이한 문화유산이다. 무성영화 감상은 두 가지 방식이 가능한데 하나는 고유자막을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변사를 쓰는 방식이다. 이날 마지막 변사인 신출(84)의 출연으로 관객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신출은 일제 강점기 향유했던 무성영화들을 위시하여 많은 작품을 연기했던 변사이고 해방직후 무성영화가 한동안 존재했던 그 시기 마지막 변사였다. 왜 마지막 변사인가. 그에겐 제자가 없기 때문이다. 몇 번 제자를 길러냈으나 미래가 없다는 이유로 몇 개월하고는 나갔다는 것이다. 변사란 영화를 구성지게 해설해주는 감초같은 존재며 예술전수자와 같은 존재이다. 정말 판소리를 많이 닮았다. 변사는 국악의 판소리명인처럼 대회를 통해 보존하든지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출 이후로 대한민국에서 변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현재 영상자료원에서는 최근 발굴한 안종화 감독의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1934)를 복원하여 감상회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병훈 원장의 얘기를 들어보면 서울역에서 했던 그 사업은 많은 돈을 투자하여 브랜드 가치를 높였으며 관객들의 인기도 대단하다고 한다. 12월2일 영상자료원과 동국대학교에서는 메카디미어라는 국제 학술컨퍼런스를 개최하였다. 메카디미어란 단체는 일본만화 및 애니메이션을 연구하는 국제학술단체다. 올해 처음 한국에서 개최되어 한국애니메이션 한편을 상영하는 행사를 갖게 되었다. 신동헌 감독의 홍길동전(1967)이었다. 2008년 일본에서 발견되어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된 이 영화는 한국 최초의 창작 장편애니메이션 영화다. 이 영화를 보게된 전세계 70여명의 외국애니메이션 학자들은 한국의 애니메이션 기술과 기법, 미학에 다문 입을 벌리지 못할 정도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그당시 낙후된 한국의 기술로 이러한 위대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단 말인가. 애니메이션 하면 일본을 떠올리고 한국은 일본이나 미국 월트디즈니의 하청작업만을 해온 나라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걸작 창작애니메이션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보다도 더 놀란 것이다. 사실 한국사람들은 제 안에 숨겨진 보배를 전혀 모른다. 외국의 기술에만 기대고 항상 짝퉁만을 만든다는 열등의식에 젖어있어 한번도 자신이 위대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역사속에서 배운 적이 없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 역사교육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동우 그림, 신동헌 감독의 홍길동전, 호피와 차돌바위를 역사속에서 배운 적이 없다. 영화과 학생들조차 한국영화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정권이 바뀔 때면 영화인들은 저마다 돈만 대달라고 아우성이다. 정말 필요한 돈은 전통의 복원과 확대에 써야한다. 우리가 그동안 전승해온 위대한 전통들, 그 보물들을 때 빼고 광내서 지금 시대에 다시 선보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신출의 후계자도 전승시키고 창작애니메이션을 격려하여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부터 챙길 일이다. 고목나무에 꽃을 피우는 것, 그게 우리의 살 길이며 블루오션이다. 정 재 형 동국대 교수

[경기시론] 크리스마스 단상-680켤레의 양말

지난 일요일 성당의 주일미사에 참석했더니 강론시간 중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언급한 크리스마스 행사계획이 참으로 놀랍고도 신선했다. 가족, 친지, 불우이웃 등에 대해 계획하고 있는 크리스마스 선물이 있다면 주소를 명기하여 성당에 제출할 경우 본인과 보좌신부님, 그리고 봉사자들이 힘을 합해 직접 전달해 주겠다는 것이다. 경기도에 국한된 주소라는 조건이 붙었지만 산타클로스를 자임한 신부님의 열정과 그 행사가 줄 따뜻함이 미리 마음 깊숙이 베어들어 왔다. 한 움큼의 사랑, 그 나눔의 요체가 우리 사는 곳곳에 드리워짐을 바라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1978년 유달리 춥던 겨울 성탄전야에 나는 인천소년교도소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다. 명절 등 특별한 날은 늘 상부로부터 경계강화지시가 하달되었으니 그날도 긴장한 상태로 근무에 임했었다. 바깥 세상은 온통 떠들썩한 성탄전야지만, 홀로 떨어져 있는 듯한 자조감보다는 사회방위의 일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열정으로 펄펄 끓던 이십대 덞은 시절이었기에 외로운 줄도 몰랐었다. 각 근무개소의 감독순시 등으로 부지런을 떨고 있었는데 외정문 근무 직원이 인터폰으로 보고를 해왔다. 젊은 여성 2명이 위문품을 전달하겠다며 찾아 와 책임자와의 면담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야심한 시각의 뜬금없는 방문객이 내킬리야 없겠지만 수형자를 위한 위문품을 가져왔다는 데에 물리칠 일도 아니어서 바깥청사 사무실에서 그녀들을 마주했다. 한명은 20대. 다른 한명은 30대 초반으로 보였고 모습들이 아주 단정하고 고왔다. 내방한 이유를 조심스레 묻자 나이가 많은 쪽인 듯한 여인이 조금 겸연쩍은 듯 미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저희들 학익동○○회 회원들입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이곳 교도소에 수용된 사람들이 안쓰러워서. 작은 위안이라도 되었으면 싶어 겨울양말을 준비해 왔습니다.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구입하였는데 육백팔십 켤레 정도 될 거에요. 그녀들은 이른바 학익동 집창촌 아가씨들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갑갑해 왔고 이어서 아려왔다. 절망의 바닥에 단계야 있으랴마는 결코 녹녹치 않을 처지에서 다른 이웃에 가슴을 열줄 아는 그녀들이 고마워 정중히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우리 모두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살아가자는 격려의 말도 더듬거리며 조심스레 건넸다. 그녀들이 머무는 곳 또한 결코 오래 머물 곳은 아닌 것 같다는 건방진 충고까지 곁들어서. 그러자 그녀들이 밝게 웃었다. 그녀들을 배웅하러 청사를 나서자 길을 따라 줄지어 선 잎 떨어진 벚꽃나무 사이로 겨울 칼바람이 길게 울고 있었다. 외정문 밖 어둠 속으로 전날 내린 눈을 사각사각 밟으며 두 손을 꼭 잡고 멀어지는 두 여자의 모습이 그러나 결코 추워 보이지는 않았다. 인생이 나아가는 만큼 사는 것이라면 그녀들은 반드시 성공한 인생을 살 것임을 믿고 또 기도해 주리라 마음먹었었다. 그 해의 크리스마스는 아름다운 은유를 담고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아 머물렀었다. 사랑은 항상 생각보다 가까이 우리와 함께함을 깨우치게 하며. 이 태 희 前 법무부교정본부장

[문화카페] 도시마케팅과 문화공간

도시마케팅(urban marketing)은 도시의 차별화된 분야를 발굴하여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홍보하고 이를 브랜드화 해 국내외에서 도시의 경쟁력과 자산 가치를 높이기 위한 문화산업적 활동이다. 이러한 도시마케팅은 장소마케팅(place marketing)의 일부로서, 도시정부가 주체가 되어 도시의 경제적, 사회적, 기능과 조건을 표적 집단의 욕구에 따라 구성하여 자본, 방문객, 이주민 유치를 위해 도시공간을 판매하고 교환하는 마케팅활동이자, 도시경영의 원칙이며 도구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도시 전반에 대한 매력요소를 향상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따라서 문화공간의 활성화는 인간적인 도시, 문화적인 도시, 소통의 도시를 조성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흔히 문화공간을 활용해 지역마케팅에 성공했다고 하는 사례를 보면 내부적 수요에 의해 추진한 것도 있고, 도시재생 전략의 하나로 문화시설을 만들어 효과를 거둔 경우도 있으며, 의도적으로 지역이미지를 지역판촉에 이용하기 위해 잘 디자인된 시설을 만드는 경우도 있어 지역특성에 맞게 선별적으로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수원시립미술관 건립이 졸속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위해서 수원의 역사성과 장소성 등 인문학적인 고려가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예술과 개인의 일상적 삶이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면서 도시민들은 끊임없이 미술문화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고 미술가들은 창작활동에 매달려 작품을 생산한다. 이러한 수요공급 원칙에 의해 이룩된 미술관은 일반 대중의 정신적 안식처이며, 미의 향연장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생활의 한 부분으로 미술을 찾기 시작하였으며, 창조의 예술세계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을 찾아 나서고 있다. 지방정부에서 미술관을 만들 때에는 거기에 부수되는 문화환경, 입지환경, 지역 형평성 등과의 연관성을 도시마케팅의 입장에서 고려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현재 수원시립미술관 부지로 고려되고 있는 행궁동 일원은 최적의 입지조건을 가졌다. 과거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대표되는 문화시설은 국공유지나 기부체납용지 등 부지확보가 결정된 곳에 있어 이를 가꾸고 이용하는 예술가와 시민의 체감거리와 동떨어진 경우가 많았고, 이는 결국 취약한 운영 현실로 이어지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향후 문화시설이 어디에서 운영되고 역할을 해야 되는지에 대한 면밀한 의사결정은 더욱 중요하다. 그 이유는 문화시설의 입지가 해당지역의 가치를 제고하는 도시마케팅의 핵심요소이며 도시맥락적인 입지 판단에 따라 해당 시설의 기능과 역할, 그리고 발전양상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시마케팅은 급속한 시대적 환경변화에 의해 기존도시의 쇠퇴를 방지하고 다른 도시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단순히 도시의 장점을 내세워 발전시키는 것이 아닌 도시라는 물리적, 공간적, 사회적 공간에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활동이다. 그래서 도시를 하나의 브랜드로서 상품으로 개발하는 문화산업적 접근과 사후 벌어질 사회경제적 파급을 고려한 정책이 추진되어야 한다. 따라서 수원시립미술관 건립은 이의 문화산업적 관성을 염두에 두되 수원의 문화적 환경은 물론 수원화성, 행궁과 원도심, 수원천과 전통시장 등 장소성 전체의 인문적 타당성을 고려하고 미술관의 성격 등 구체적인 운영프로그램 수립과 연계하여 미래의 비전을 담고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 경 모 수원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미술평론가

[문화카페] 늙음의 미학

동양의 옛 그림에는 대개 노인들이 등장한다. 화면 한 구석에 지팡이 들고 어디론지 걸어가는 노인이나 나무 밑에 앉아 상념에 잠긴 노인 등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인데, 어쩌다 노인이 아닌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는 노인을 모시고 심부름하는 아이들 정도이다. 서양화에서는 큐피드나 천사는 물론이고 젊음과 청춘의 군상이 많이 그려지는 데 비하여 동양에서는 왜 노인들이 주로 그려질까 궁금해지는 것이다. 젊음을 찬양하고 늙음을 비하하는 경향이 유럽문화권의 대체적인 경향인데 비하여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늙음의 경지를 동경하고 높이 평가한다. 중국에서 남을 가르치는 직위에 있는 사람은 나이가 많건 적건 라오쓰老師이다. 여기에서 노(老)란, 늙었다는 현실적 나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존경받을 만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양에서의 노인은 기욕(嗜慾)이 식고 총명이 눈을 뜬 경지를 의미한다. 기욕의 기(嗜)란 즐긴다는 의미이니 기욕이란 좋아하고 즐기려는 욕심이다. 다시 말해 기욕이 시들어서 물처럼 냉정한 태도취미가 동양에서 추구하는 이상적 경지인 늙음의 경지이다. 동양노인 서양노인 젊음은 기욕이 왕성하고 사색과 창작에도 열정이 있지만 늙음은 존재를 직시하지 않고 그것에 대하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관계적으로 보게 된다. 나이가 들면 젊음의 급박했던 마음이 가라앉아 보다 더 크고 넓은 입장에서 그 존재의 전반을 내다본다는 의미이다. 서양에서는 노인을 대하는 태도가 동양에 비해 부정적이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노인의 지혜를 칭송했지만 로마의 시인들은 노인을 매도했고 중세에는 노인을 죽음과 거의 마찬가지로 여기고 꺼렸다. 늙은 남자는 무가치하고 늙은 여자는 마녀라고 하는 등, 노인에 대한 경멸의 감정이 절망적일 정도로 활개를 쳤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놀랍게도 노인을 더욱 멸시했다. 르네상스는 인간 찬미와 반(反) 중세의 큰 축에 더하여, 고대 그리스 문화의 부흥이라는 또 하나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애초에 고대 조각이 잇따라 발굴되었던 것이 르네상스가 꽃피는 계기가 되었기에 고대 조각에서 보이는 완벽한 육체의 아름다움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는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육체미와 인간의 운동능력을 인간 평가의 중요한 열쇠로 삼았다. 이렇게 되면 노인이 이제까지보다 더욱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는 건 필연적이었다. 젊음의 아름다움이 각광받을수록 늙음은 조롱받고 매도되었다. 방동미의 역설 동양의 선비나 학자라면 도학자와 같은 고고한 모습으로 늙음과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선비나 학자라고 해서 늙음과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대만의 유명한 철학자 방동미가 1977년에 78세로 돌아갈 때 삶에 보인 집착은 유명하다. 그의 삶에의 집착이 너무나 속물스러운 양태를 보이게 되자 제자들은 두 패로 나뉘었다고 전한다. 연로하신 선생님의 인간적인 모습이니 이해하자는 쪽과 너무도 좀스러워 보이는 스승의 행보에 실망을 느껴 제자이길 포기하다시피한 쪽으로 나뉘었다는 삼류소설 같은 이야기가 그것이다. 인간이 약한 존재임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일인데, 방동미의 생에의 집착은 역설적으로 인생이 살아볼 만 하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다. 이젠 방동미를 이해할 듯도 하니 역시 나이를 먹게 되었나 보다. 김 상 엽 건국대 연구교수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문화카페] 여자마음 훔친 ‘늑대소년’의 순정

영화 늑대소년이 400만을 넘었다. 늑대소년은 늑대가 된 외로운 소년과 또 한명 외로운 소녀의 눈물없이 볼수 없는 이별의 멜로 드라마다. 둘은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며 사귀지만 결국 헤어지게 된다. 이때 극장안은 눈물바다가 된다. 특히 그 눈물을 줄줄 흘려대는 관객들이 다름아닌 40대 이상의 여성들이다. 이 영화는 요즘 취향의 쿨한 멜로가 아니라 60년대식의 요란한 울음을 연상케 한다. 다시 복고가 된 것이다. 늑대소년은 여성취향 멜로의 새로운 공식을 쓴다. 전통적으로 멜로에서 여자들은 항상 수동적이고 종속적이었다. 늑대소년에서 여자는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다. 발칙하고 능동적이며 심지어 남자에게 명령까지 한다. 여성멜로에서 여성이 중심이 되어 능동성을 보인 영화는 이 영화가 근래 들어 처음이다. 늑대소년의 주관람층이 20대를 넘어서 40~50대 여성까지 육박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여성관객층을 되아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년여성들에게 순정멜로는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과거에 젖게 한다.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 중년여성들에게 어필한 이유도 그런 것이었다. 배용준을 통해 묘사된 지고지순한 캐릭터는 패전이후 건실하게 살며 여자만을 위해 순정을 바쳤던 일본 남자들에 대한 향수가 배어 있다. 일본의 중년여성들은 일에 미쳐 경제 동물이 된 일본 남성들이 그런 순수함을잃어버렸다고 생각했고 90년대 이후 한국 드라마에서 그런 남성을 만난 후 넋이 빠져버린다. 비슷한 현상이 한국에서도 늑대소년의 캐릭터와 배우 송중기에게 일어났다. 하찌 이야기 라는 일본 영화를 보면 충성스런 개의 모습이 나온다. 개는 주인이 죽은 이후에도 버스역에 나가 죽어 더 이상 오지 않는 주인을 종일 기다리고 그 모습에 많은 관객이 눈시울을 적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내 남편도, 내 아내도, 내 친구도 저랬으면 하는 순정의 마음으로 흐느껴 울었다. 인간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이고 그 외로움은 아무도 대신하지 못한다. 인간이 피곤한 것은 자신을 위로해줄 단 한사람이 이 세상에 거의 없기 때문이다. 순정멜로가 성공하는 지점은 그곳에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남성보다 여성의 위로가 더 시급하다. 남자는 직장에서만 치이지만 여성들은 직장과 가정 양쪽에서 시달리니 얼마나 피곤하겠나. 반면 여성을 위로할 영화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 남성들이 쓸데없이 힘을 과시하는 영화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역대 최고 흥행영화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라는 점도 그런 면에서 시사적이다. 스칼렛 오하라, 바로 절망을 극복하는 사랑스럽고도 처절한 여성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늑대소년이 애무한 부분은 바로 그곳이다. 명령하는 여성, 그 명령을 따르는 충직한 남성. 그 둘은 상사-부하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목숨마저 내놓고 순수한 애정을 나눈다. 써니 이후로 중년 여성들은 영화관 출입이 즐거워졌다. 공감할 대상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도둑들에서도 중년 여성들이 공감할만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김해숙이 열연한 캐릭터이다. 홍콩의 중년 도둑과 사랑에 빠져 목숨을 거는 열정의 순간을 보여준다. 그건 그녀에게 있어 마지막 사랑이다. 여성관객들은 그 마지막 사랑의 장면에 열광한다. 중년에게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인가. 돈, 명예 다 필요없다. 온 마음 다 바친 불같은 사랑이다. 현실에서 그런 사랑은 오지않는다. 순정멜로는 그지점에서 여성관객과 터놓고 공감한다. 영화를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는 욕망 충족이라 정의한다면 현대 사회가 순정을 억압한채 달려간다는 차가운 현실을 읽어내게 한다. 늑대소년이 주는 교훈은 그것이다. 어른이 되도 늙지 않는 젊음. 그게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 순수함이란 영화에서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부문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그걸 잃어버린 어른은 가장 불행한 어른이고 말이다. 정 재 형 동국대 영화학과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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