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사방공사로 망가진 계곡

한무영 ㈔물과생명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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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여름, 계곡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차가운 물살을 따라 송사리를 쫓고 돌 틈에 숨은 가재를 잡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흐르는 물소리와 햇살에 반짝이던 물방울, 아버지 손에 이끌려 갔던 천렵은 단순한 유년의 추억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연 그 자체였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에게 계곡은 콘크리트 바닥에 물이 조금 흐르는 ‘정비된 공간’일 뿐이다. 물이 고여 있지 않고, 돌부리도 없고, 물고기도 사라졌다. ‘계곡 정비’라는 이름 아래 전국의 산간 계곡이 굴착기로 파헤쳐지고 있다.

 

이른바 사방공사다. 토사 유출을 막기 위해 설치된 사방댐은 계곡을 가로막고 바닥은 평평하게 정리된 후 콘크리트로 덮인다. 현장에서는 토사 유출을 막기 위한 구조물이라고 설명하지만 그 과정에서 돌과 흙, 뿌리와 생명, 물소리와 기억이 함께 제거된다.

 

그런데 잠깐, 묻고 싶다. 토사는 왜 내려오는가. 수천년간 멀쩡하던 계곡이 왜 갑자기 무너지는가. 해답은 계곡 아래가 아니라 상류에 있다. 도로가 생기고, 건물이 들어서고, 주차장이 만들어지면서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모두 아래로 쏟아져 내리게 된 것이다. 공학적으로는 이를 ‘유출계수 증가’라고 부른다. 같은 비가 내려도 예전보다 세 배 가까운 양이 계곡 아래로 쏟아지는 현상이다.

 

토사를 막는답시고 계곡을 덮는 것은 결국 증상을 가리는 대증요법에 불과하다. 원인은 그대로 두고 결과만 막는 방식은 예산 낭비이자 자연 파괴이며 무엇보다 지속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을까. 있다. 계곡으로 들어가는 작은 물줄기, 즉 지류와 경사면에 ‘물모이’라는 작은 물웅덩이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의 계곡은 하나의 선(線)처럼 물이 집중돼 흐르지만 경사면 곳곳에 물모이가 생기면 그 물이 흡수되거나 증발돼 결국 계곡으로 내려오는 물의 양을 줄일 수 있다. 물모이 하나하나는 작지만 그것이 수십 수백개로 늘어나면 계곡으로 유입되는 물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킬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상류 지역에서 빗물이 급속히 내려오도록 만든 구조적 원인을 줄이기 위해 건물 옥상이나 주차장 등 불투수면을 만들 때는 적절히 설계된 빗물저금통(저류조)을 설치해야 한다. 빗물을 저장하고 천천히 흘려 보내면 하류 계곡의 유출량 증가와 토사 유실을 근본적으로 줄일 수 있다.

 

최근 기후위기가 심각해질수록 우리는 자꾸 더 큰 장비, 더 단단한 구조물로 대응하려 한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것은 돌 하나, 흙 한 줌의 소중함을 아는 감각이다. 계곡은 물이 흐르는 곳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기억과 자연의 질서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장비가 들어간 계곡엔 더 이상 추억도, 생명도, 미래도 흐르지 않는다. 우리 후손에게 이런 풍경을 물려주지 않도록, 그 비용마저 떠넘기지 않도록 지금 우리가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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