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인간의 인식을 기반으로 한 기억, 선택, 선형적인 서술 방식의 편집이 작동하는 표준화된 체계를 갖는다. 아날로그에서 벗어난 디지털 세계는 어떤가. 영구할 것이라 믿는 디지털 데이터는 각종 저장 장치와 매체 환경을 옮겨 다니며 때론 소멸된다. 인간에 의한 기억도, 기록도, 디지털도 삭제와 망각이 발생하고 중심부의 이야기만 살아남게 된다.
안양시 동안구에 위치한 독립 예술 공간 ‘아트 포 랩(Art For Lab.)’에서 지난 7일 개막한 ‘Archive Error : 기록의 바깥’ 전시는 표준화된 기록 체계에 의구심을 던진다. 관객은 주류에서 제거되고 밀려난 ‘다름’의 존재, 주변화되거나 소외된 존재에 주목하며 예술을 기술에 접목해 잊혀진 서사를 복원하는 시도와 만나게 된다.
이번 전시에는 올해로 4회를 맞이한 ‘아트 포 랩’의 전시 공모 프로젝트 ‘사각지대’에서 선정된 이진선 기획자와 곽한비, 방선우 작가가 참여했다. 이들은 2025년 공모 주제인 ‘기술과 인간성의 경계’를 통해 인간의 존재가 현대의 기술 발전과 어떻게 충돌, 융합하는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각지대를 탐구한다.
전시는 한 편의 설화처럼 시작된다. 전시를 기획한 이진선은 “망종 무렵, 전갈별 아래로 은빛 가시가 내려왔다”는 문장을 시작으로 ‘은빛 가시’라는 상상의 매개가 두 작가의 작업 세계를 어우름을 설명한다.
선형(線形)을 거부하는 은빛 가시는 오랫동안 억눌려온 기록의 잔해를 어루만지고 근대의 견고한 기록 체계에 균열을 만든다. 시간과 권력의 그늘 속 침묵하던 이들은 깨어났고, 효율성과 체계라는 이름 아래 배제되고 누락된 이야기들이 되살아난다.
곽학비와 방선우의 작업은 기억과 기록을 지우고 다시 쓰는 행위다. 오래된 식물도감과 서랍 속 기록물들을 호출하며 두 작가는 아날로그 기록 매체가 지닌 물질성과 방식을 해체하고 현대 기술언어와 교차시킨다.
곽한비는 디지털 기억의 소멸성과 인간의 망각을 연결하며 기억을 분류하고 저장하는 도서관과 서랍 속 사물에 주목한다. ‘기억의 조건’(2025)은 유년 시절 다니던 도서관의 페계 직전 회전 서가에서 영감을 얻은 미디어 설치 작품이다. 한때 공공의 기억와 기록을 보관하던 서가는 개인적 기억과 뒤섞이며 타임머신처럼 작동한다. 관객은 스마트폰으로 작품의 NFC를 스캔해 특정 데이터와 기억에 접근할 수 있다.
‘오래된 서랍’(2025)은 작가와 가족이 오랜 시간 사용해 온 나무 서랍 속 사물들을 통해 사적 시간의 축적과 기억의 층위를 소환한다. 서랍은 기록과 망각이 공존하는 장소로 손때, 긁힌 자국 등 손길이 남아 있다. 그런가하면 ‘잃어버린 것을 위한 청구기호’(2025)는 도서카드목록함의 물리적 구조와 분류 체계를 해체해 작가가 고유의 분류 체게를 따라 청구기호를 새롭게 작성한다.
방선우는 식물 분류학과 명명 체계 속에 숨겨진 권력 구조를 해체한다. ‘조선 식물도설 유독식물편’에 수록된 식물 도상을 분석하고, 도감이 가진 선형적 서술과 편집의 규범성을 비틀며 시적 언어와 생성형 인공지능을 활용해 기존의 기록 회로를 벗어난다.
그의 작품은 구조화된 식물 군집에 주목하며 식물의 생태적 네트워크와 우주의 천체 질서까지 아우른다. ‘궤적의 환상근’(2025)에서는 식물 세포 식물 세포의 섬유질 조직(근)은 뿌리의 생태적 네트워크와 은하계 별들의 연결을 은유하며 미시-거시의 이분법 해체를 논의한다.
‘희미한 꽃들의 이탈된 몽상 궤적’(2025), ‘궤적의 환상근’(2025), ‘기억괴’(2025) 등 일련의 작업은 식물 세포에서 우주 구조까지를 연결한다.
아트 포 랩은 “두 작가의 작업은 분류보다 뒤섞임을, 완결보다 열림을, 표준보다 비표준을 택한다”며 “사라졌거나 잊힌 것들, 설명되지 못한 존재들이 다시 나타나는 실험은 밤하늘의 별처럼 흩어져 있지만 결국 연결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전시는 무료이며 오는 29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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