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민 역사여행작가
지방자치단체장인 도지사나 시장, 군수는 시의회의 견제를 받으며 제한된 범위에서 권한을 행사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수령은 달랐다. 이들은 왕에게 직접 통치권을 위임받아 행정은 물론이고 사법권까지 독자적으로 행사하는, 사실상의 절대 권력자였다. 왕조는 수령의 전횡을 막기 위해 암행어사제도를 운용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파견된 암행어사는 총 613회에 이른다. 그중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단연 박문수다.
박문수는 책과 드라마 속에서 탐관오리를 척결하고 민초의 억울함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정의의 상징으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정작 그가 어사로 활동한 기간은 채 1년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수백명의 어사 가운데 박문수만이 ‘어사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것일까. 그 단서를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박문수는 왕의 총애를 받았고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하지만 동시에 실록에 ‘광인(狂人)’으로 기록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박문수는 명문 소론 가문 출신으로 경종 대에 벼슬길에 올랐다. 당시 왕세제였던 영조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집권 노론에 견제를 받는 처지에 있었다. 이후 영조가 즉위하자 그는 중용됐고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공신에 오르며 입지를 굳혔다. 과거에 급제한 뒤 병조판서까지 오르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5년이었다. 정치적으로 성공한 인물임에도 박문수의 이름 앞에 유독 ‘어사’라는 호칭이 따라붙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박문수는 영조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대신들이 자세를 바로잡으라 하자 “아첨하는 노예들이 그렇게 한다”고 일축했고 결국 영조는 모든 신하가 얼굴을 들고 말하도록 명령했다. 그의 발언은 거칠었고 때론 다른 신하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정6품 수찬 한현모는 박문수의 모욕적 언행을 문제 삼아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박문수는 오히려 “한마디도 못 하는 신하들이 문제”라며 왕에게 언성을 높였다. 자식마저 희생시켰던 영조조차 박문수에게는 “성질 좀 죽이라”고 타이르는 데 그쳤다.
박문수는 당시 사회의 병폐를 직시하고 그 실상을 여과 없이 진언했다. 법의 형평성은 무너졌고 권세가 있는 자는 죄를 피해 갔으며 경박한 기회주의자들만 조정에 가득했다. 그는 조선 300년의 기틀이 무너지고 있다며 왕에게 경고했고 백성의 삶과 국정 전반에 대한 총체적인 개혁을 촉구했다. 박문수의 발언은 당시 조정에 충격을 줬고 실록은 그런 그를 ‘광인’이라 표현했다. 상식과 양심을 지키는 자가 오히려 미친 사람으로 보이던 시대, 박문수는 그 한복판에서 홀로 목소리를 냈다.
어사로서의 활동은 짧았지만 임무 수행은 인상적이었다. 그는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다녀갔다는 민담이 전해질 정도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영일만 해안에 밀려든 가재도구를 보고 함경도의 수해를 직감해 신속히 지원을 요청했고 왕에게 보고하는 절차도 생략할 만큼 과감했다. 그는 백성의 삶에 실질적으로 다가가려 했으며 용인, 대구, 울산 등에서 부정한 수령을 파직시키기도 했다.
박문수는 직언을 주저하지 않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관료였다. 진정한 리더십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공직자의 책무가 어디까지여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줬다. 실록은 그를 ‘광인’으로 남겼지만 백성은 그를 ‘영웅’으로 기억한다. 요즘 같은 시국에 박문수와 같은 인물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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