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립미술관, ‘예술을 통한 돌봄’ 공공 프로그램 실천 고립, 소외, 고령화 등 사회문제에 미술관의 새 역할 제시
“캔버스를 흰색 물감으로 전부 덮겠습니다. 이번에는 나를 감싸는 온갖 부정적인 것들을 모두 걷어낸다고 생각하고 손톱과 스크래퍼를 이용해 캔버스를 덮은 흰색 화면을 긁어내 봅시다.”
마치 흙 속에 감춰진 진주를 찾듯이 11명의 참가자들이 각자의 앞에 놓인 조그마한 캔버스 위를 열심히 긁어냈다. 감정을 억눌렀던 규범에서 벗어나 흰 화면에 감춰졌던, 각자의 소중한 감정의 색채가 하나둘 드러날수록 이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지난 30일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된 ‘마인딩: 마주하기’ 프로그램의 ‘손끝의 위로와 마주하기’ 회차는 한 마디로 ‘비워내고, 다시 채워내는’ 시간이었다. 시민 참가자들은 이날 자신을 억누르는 사회·감정적 규칙과 규범에서 벗어나 각자의 내면을 들여다봤다.
‘마인딩: 마주하기’는 수원시립미술관이 고령화, 우울, 단절 등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예술로 치유하는 사회적 처방 프로그램 ‘SUMA Wellness(웰니스)’ 가운데 일부이다.
수원시립미술관은 지난해 시민의 심리 정서적 돌봄을 위한 ‘SUMA 웰니스’를 시범 운영을 했는데, 올해엔 전문성 강화를 위해 홍익대 교육대학원(미술치료 전공)과 업무협약을 맺고, ‘마인딩: 마주하기’ 프로그램을 공동 기획했다. 미술관이 단순한 관람의 공간이 아닌 치유적 공간으로, 시민들의 삶에 예술이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값비싼 미술 치료프로그램은 미술관이란 특별한 공간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무료로 진행된다.
지난달 9일부터 본격 시작된 ‘마인딩’ 프로그램의 5회차에 접어든 이날은 박다은 홍익대 교육대학원 미술치료 강사의 진행으로 이뤄졌다. 박 강사는 “현대인은 자기 감정을 마주하는 시간이 부족한데, 진정한 마음 챙김의 시작은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러분은 승차권을 내고 개찰구를 들어갈 수도, 개찰구를 뛰어넘어 무임승차를 할 수도 있습니다.”
제일 먼저 수원역 지하철을 모방한 전시장 입구 앞에서 사회적 규칙을 벗어나는 과정이 시작됐다. 참가자들은 각자의 손에 든 표와 옆에 자리한 다른 이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당황하면서도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미술작품 감상 규칙 깨기의 시간이었다. 고개를 거꾸로 돌려보기도, 앉아서 쳐다보기도 각자의 방식으로 작품을 즐겨본 이들은 2층에서 본격적인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나에게 중요한 감정, 소중한 것, 물질적 가치가 아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떠올려보고 엽서에 적어보겠습니다.”
가족, 건강, 사랑, 행복, 안정, 평온함 등 참가자들은 연필을 쥐어 들고 엽서에 단어들을 적어 내려갔다. 이번엔 소중한 감정에 어울리는 색의 물감을 하나씩 꺼내 들고, ‘붓’이 아닌 손가락을 이용해 캔버스를 채워갔다. 미끄러우면서도 부드러운 물감을 손끝의 감각을 이용해 거칠 화면에 그려나가는 체험은 일탈이었다.
이날 현장엔 20대 취업 준비생부터 간호사 직장인 친구, 10년 차 부부, 아픈 어머니를 위한 시간을 마련한 모녀 등 다양한 시민들이 모였다. 참가자들은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며 각자의 걱정과 불안 등 많은 이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간호대학 동기와 함께 자리한 김연주씨(가명·20대)는 “직장에서 일하며 ‘감정’은 불필요한 ‘소비’라 느껴져 일부러 꾹꾹 닫아뒀는데, 오늘 억눌린 감정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심장전문의 간호사인 김씨는 이날 자신이 좋아하는 색으로 커다란 심장을 그렸다.
아내와 함께 현장에 자리한 이기엽씨(38)는 “평소 미술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는데, 프로그램을 따라가다 보니 예술이 가깝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아내 강초롱씨(35)는 “처음 그림을 그릴 때는 ‘잘못 그렸나’라고 생각했는데 완성된 그림을 보니 너무 만족스럽다”며 “후회하는 습관 대신 나 자신에게 만족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련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남기민 수원시립미술관 관장은 “앞으로도 ‘예술을 통한 돌봄’이라는 주제로 미술관의 적극적인 사회적 역할을 담은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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