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정석 동국대 생명과학과 교수
밥 한 그릇이 주는 감동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끼 식사로 끝나는 것 같지만 그 뒤에는 수천년을 거쳐 쌓인 땅의 역사, 자연의 환경, 그리고 사람의 정성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여주쌀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는 흔히 ‘맛있는 쌀’이라고 쉽게 표현하지만 여주쌀의 맛은 단순한 미각의 만족이 아닌, 과학적이고 환경적이며 역사적인 DNA 위에 세워진 결과물이다.
여주쌀의 첫 번째 DNA는 기후와 일조량이다. 여주는 사계절이 뚜렷하고 벼가 알곡을 맺는 출수기 40일 동안 평균 6.4도의 큰 일교차가 유지된다. 이 일교차는 벼 알 속 전분과 당분의 농도를 높여 밥맛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또 여주는 높은 산이 적고 햇살이 고르게 퍼져 벼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두 번째는 물과 토양이다. 여주는 팔당상수원보호구역에 속해 있어 연중 맑고 깨끗한 남한강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할 수 있다. 토양 또한 도자기의 원료로 사용될 만큼 규산과 유기물 함량이 풍부한 황토 사양토로 벼 생육기 내내 양분을 충분히 공급해준다. 이러한 물과 흙은 쌀의 찰기와 윤기, 조직감을 좌우하는 핵심 조건이다.
세 번째 DNA는 품종이다. 여주는 조선시대부터 임금의 수라상에 올랐던 자채쌀(紫彩米)의 고장이었다. 자채쌀은 그 빛깔과 밥맛이 탁월해 임금이 직접 ‘홍자광(紅紫光)’, ‘옥자광(玉紫光)’이라 명명했을 정도다. 최근에는 이러한 전통을 계승해 ‘진상벼’라는 전용 품종을 개발했다. 아밀로오스 함량이 낮아 밥이 찰지고 시간이 지나도 식감이 유지되는 진상벼는 여주시와 품종 개발자가 공동으로 전용실시권을 보유하고 있어 오직 여주에서만 재배할 수 있다. 여주쌀의 고유성이 여기에 있다.
네 번째는 역사적 맥락이다. 여주지역은 조선시대 영조, 순조, 철종 대에 이르기까지 왕실 진상답이 운영되던 곳이다. 왕실 내수사와 수진궁에서 직접 관리한 쌀이 바로 여주쌀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약 3천년 전 여주 점동면 흔암리에서 출토된 탄화미는 여주가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지 중 하나임을 증명한다. 여주쌀은 단순한 농산물이 아니라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역사 그 자체다.
마지막으로 여주쌀의 품격을 완성하는 요소는 제도와 브랜드다. 여주는 2006년, 전국 최초이자 유일한 국가지정 쌀 산업 특구로 지정됐다. ‘대왕님표 여주쌀’이라는 브랜드는 세종대왕의 이름을 빌려 고급화의 상징이 됐다. 여주 8개 농협은 공동조합법인을 통해 전량 계약재배를 시행하고 품질 매뉴얼에 따른 과학농법과 유통 관리 시스템을 통해 소비자에게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쌀을 공급하고 있다.
여주쌀은 단순히 ‘맛있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여주의 땅, 물, 햇살, 역사, 과학, 그리고 사람이라는 여섯 가지 DNA가 스며 있다. 밥 한 그릇의 감동 뒤에 숨겨진 수천년의 시간과 수많은 손길을 떠올릴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밥맛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다. 맛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쌀, 그것이 바로 여주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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