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인간이 인간을 부리던 시대였다. 노예 문제다. 결국 이 사안으로 충돌했다. 한쪽은 농업 위주여서 필요했지만 다른 측은 공업지대가 많았다. 한쪽은 포기할 수 없었다. 인권 문제에 앞서 생활 그 자체여서다.
노예제를 지지하던 이들은 군대를 꾸렸다. 국가로부터 분리를 선언했다. 이후 공격을 감행했다. 큰 상처를 안겨준 내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1861년 4월이었다. 그 포화는 1865년까지 4년 동안 이어졌다. 미국 남북전쟁의 서사가 그랬다.
노예 소유를 허용하던 남부와 이를 금지하던 북부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링컨 대통령은 노예제를 시행하는 주(州)에 노예제 철폐법안을 제안하진 않았다. 하지만 연설을 통해 노예제 확산을 막고 국민의 마음 속에 노예제 폐지가 불가피하다는 믿음을 심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1850년대 정치적 갈등의 줄기는 노예제 확대 여부가 주를 이뤘다. 남부는 연방에서 분리되고자 노력했다. 북부와 남부 모두 노예제가 다른 지역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범위가 축소되거나 결국 폐지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노예제에 반대하는 세력에 연방정부 통제권이 넘어갈 것에 대한 남부의 우려와 노예제 지지자들이 연방정부에 휘두르는 영향에 대한 북부의 혐오는 위기를 맞았다. 노예제의 도덕성, 민주주의의 범위, 자유노동과 노예제 간의 경제적 이득에 대한 논쟁 등이 도마에 올랐다.
그 전쟁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1865년 4월9일이었다.
북부군은 36만여명, 남부군은 26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패배한 남부는 황폐화돼 경제적 손실이 막대했다. 더구나 전쟁 전까지 노예를 부려 목화를 재배하던 남부는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으로 경제적 기반이 무너졌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북부와 남부 모두에 큰 시련이었다. 미국은 이를 극복하고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이전보다 훨씬 더 단합된 국가를 이뤘다. 태평양 건너편 나라의 역사이지만, 요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사뭇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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