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민들레 홀씨’는 없다

정수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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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임? 갸웃거림이 많을까, 다 지난 얘기라는 웃음이 나올까. ‘민들레 홀씨’는 무슨 관용구처럼 쓰였던 표현. 그런데 정작 민들레 홀씨란 없다. 민들레는 홀씨식물이 아닌 까닭이다.

 

그럼에도 ‘민들레 홀씨’가 여전히 많은 것은 단어며 명칭에 대한 돌아보기가 부족한 탓이다. 아니면 동그랗게 멀리 날아가는 민들레 꽃씨 모습을 ‘홀’로 표현해야 더 시적 은유 같고 사랑스럽기 때문일까.

 

하지만 홀씨는 일반적 씨앗이 아니다. ‘단세포로 발아해서 새로운 개체를 형성’하는 식물의 무성생식세포. 홀씨는 민꽃식물인 양치식물, 이끼류, 곰팡이류 등에 있다. 확 닿지 않는 양치식물은 ‘꽃이나 씨앗을 만들지 않는 관다발의 일종’이니 고사리 같은 식물이다.

 

이렇게 조금만 살펴봐도 무의식적으로 쓴 ‘민들레 홀씨’가 좀 면구스러워진다. 안 맞는 표현에 대한 반성적 지적이 나온 지도 한참 지났건만 ‘민들레 홀씨’가 도처에서 여전히 피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가수 박미경이 ‘민들레 홀씨’와 관련된 사과를 한 적이 있다. ‘민들레 홀씨되어’(1985년 MBC강변가요제 장려상) 유행으로 잘못 고착된 표현에 대한 가수의 책임감에서다. 그럼에도 이후 기사나 시 같은 전문인의 글에서조차 ‘민들레 홀씨’가 간간이 등장한다. 간판이며 상호에 나붙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을 정도다. 그렇게 쓰는 이들은 틀린 줄 알면서도 안 고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게 뭐 대수냐고 웃어넘기는 것인지. 오히려 지적을 하는 쪽이 좀스러워 보일 지경이다. 부끄러움은 왜 저지른 사람보다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몫이냐는 세간의 탄식처럼.

 

일찍 굳어 버린 표현을 고쳐 쓰기란 어려울 수 있다. 평소의 말이나 글을 정확하게 쓰려면 스스로 그것을 찾아야 한다. 그만큼 우리가 매일 쓰고 읽는 글에서도 의외로 많이 발생하는 오류 표현이 있다.

 

애초에 잘못 알려진 단어들의 이식도 문제다. 전에 잘못 쓴 말 앞에 화끈한 적이 있었는데 일본목련을 후박나무로 쓴 기억 때문이다. 잘못 알려진 것도 모르고 여러 글에서 본 이름(나무이름표에도 한동안 후박나무로 있었음)을 그대로 썼던 것이다. 지금은 돌아보기 습관화로 익숙한 단어도 다시 확인, 오류를 줄이려고 애쓴다. 언중(言衆)의 쓰기에 따라 의미 변화나 확장이 일어난 최신 버전 단어가 많아져 확인이 늘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여느 존재의 이름 불러주기도 신경을 써야 한다. 안도현 시인의 다정한 반성처럼.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얼마나 서운했을까요?//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애기똥풀) 한때 ‘이름 모를 새, 꽃, 벌레’ 등을 마구 쓴 시인들은 이 시에 죽비를 맞았다. 미물이라도 이름 제대로 불러주는 일이 말의 바른 쓰임이고 쓰는 자의 소임이다.

 

이번에 파면 선고를 보며 문장이 참 명료하다 끄덕였다. 단어나 문장이 정확하면 뜻은 자연스레 명징해지는 법. 틀림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소소한 이름이라도 명확히 쓸 때 말도 글도 아름다워진다. 민들레 홀씨는 민들레 꽃씨라 불러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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