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지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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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도 벌써 어둡다. 아직 꽃도 피지 않았는데 눈 내리는 꽃샘추위라니. 호두야 카페 뒤에서 좁은 골목을 발견했다. 돌개바람이 상모춤을 추며 골목을 휭 지나간다.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듣지 않아도 한잔의 술을 마시고 싶은 오후, 하얀빛은 담벼락에 붙어 전신주의 그림자를 붙안고 있다. 거리엔 이른 봄나들이를 한 사람들이 허기를 채우려 분주히 기웃댄다. 칼국수집, 국밥집, 돈가스집, 짜장면집. 우리는 늘 빈 배 채우기에 일생을 보낸다. 미나리꽝, 못골, 지동시장을 지난다.

 

오늘 저녁 서울에서 최동호 시인이 오신다고 기별이 왔다. 일방적 통보지만 사랑채에서 차 한잔 마시며 서정적으로 시인을 기다린다. 이윽고 단오에서 시처럼 인자한 시인을 만났다. 맛난 저녁을 함께하고 표 사장이 내 온 차 한잔 나눈다. 내용물 없는 맑은 차를 수묵담채 같은 시담으로 채웠다. 낯선 대화가 넓은 간극을 오솔길처럼 좁히며 무쇠솥의 시루떡처럼 보슬보슬 익어간다.

 

시인의 표정은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서사적 풍요로움이 엿보이며 오가는 대화 또한 시를 짓는 느낌이다. 시인은 수원 남문 언덕, 코모호수, 화령전 등 자신의 시에 곡을 입힌 성악곡을 들려줬다. 소프라노와 바리톤의 목소리에 시가 음표를 탄다. 가곡을 들으면 선생님의 풍금 소리에 맞춰 스와니강을 부르던 중학교 교실로 옮겨간다. 반들반들 초 칠한 마룻바닥에 비친, 시골 소년의 초상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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