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면에 오디오 테이프를 펼쳐놓고 관객이 마그네틱 헤드로 직접 소리를 만들어 내게 한 백남준의 작품, ‘랜덤 액세스’. 당시 규범화된 개념과 형식을 탈피했던 백남준의 실험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정형화된 예술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미디어아트’라는 미지의 영토를 개척해나갔던 백남준의 실험적인 예술 정신을 공유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한데 모였다.
백남준아트센터는 국내외 7개 팀의 젊은 예술가들이 참여해 동시대의 실험적인 시도를 보여주는 전시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4.0’을 선보이고 있다. 올해 백남준아트센터의 첫 전시로, 백남준아트센터가 동시대의 실험적인 젊은 작가들을 소개해 온 프로젝트의 네 번째 버전이다.
참여 작가들은 현대 문명의 이면과 잠재된 가치들을 드러내고, 우리가 규정해 놓은 사고방식과 관행에 의문을 제기한다.
일본 작가 얀투는 물류창고에서 사용되는 자동 운반 차량(AGV)을 활용해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넘어 예술과 글로벌 자본주의의 관계를 탐구한다.
‘진행 중인 설치’는 AGV가 전시 공간을 누비면서 다양한 오브제를 선택하고 운반하며 전시, 철거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설치 작품이다. 인간의 고유한 영역으로 여겨졌던 ‘작품을 설치하는 행위’를 기계가 대신 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동시에 ‘예술품’과 ‘예술품이 아닌 것’이 혼재된 오브제를 옮기는 과정으로 기술적 판단의 허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호남 작가는 ‘해저 광케이블을 위한 에코챔버 시스템’ 작품으로 전 세계 네트워크 시스템의 근간인 해저 광케이블에 주목했다.
첫 번째 TV 모니터는 백남준아트센터 전시실의 서버와 전 세계 9개 도시 서버간의 실시간 통신을 통해 데이터가 광속으로 오가는 소요시간을 도시별로 보여준다. 뒤이어 배치된 9개의 디스플레이는 지연시간만큼 서로 다르게 재생이 시작된다.
작품은 텔레비전의 가능성에 주목한 백남준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광케이블의 동작원리를 가시화해 기술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려는 메시지를 전한다.
전시에선 인간과 자연, 기술과의 공존을 모색한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장한나 작가는 자연 속에서 돌처럼 변형된 플라스틱을 ‘뉴 락’으로 정의하고, 이들을 수집·관찰하면서 자연의 새로운 지층을 탐구한다. 작품 ‘신 생태계’는 자연과 인공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유도한다.
정혜선·육성민 작가는 GPS 태그를 장착한 동물을 소재로 미래의 초연결적인 동물 생태계에 대한 탐구를 ‘필라코뮤니타스’ 작품으로 표현했다.
이와 함께 고요손 작가는 이 전시를 기획한 임채은 학예연구사의 신혼여행기를 담아 ‘임채은의 오로라 여정기’를 선보였다. 임 학예사가 촬영한 사진들과 결혼을 상징하는 면사포 등 오브제를 활용한 조각 작품으로, 예술 창작의 동반자를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여 조각의 경계를 넓혔다.
이 밖에 전시에선 현대 기술문명의 아이러니를 은유적으로 드러낸 한우리 작가의 ‘포털’, 미디어에 의해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이 왜곡되는 현상을 포착한 태국 작가 사룻 수파수티벡의 ‘콰이강: 고인을 기리며 열린 추모식’ 등을 볼 수 있다.
임 학예연구사는 “전시를 통해 백남준의 예술정신을 공유할 뿐 아니라, 동시대 미술의 실험성과 창의성을 인큐베이팅하는 문화예술기관으로서 미래의 백남준을 발굴할 것”이라며 “보이지 않는 경계들을 부드럽게 허물어내고,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와 열린 마음을 일깨우게 하는 전시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6월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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