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가 고향인 K로부터 설 끝에 호출을 받았다. 겨울빛이 창을 뚫고 사랑채 깊숙한 테이블에 앉았다. 차 한잔과 맛난 정담이 더없이 안온하다. 돌아오는 길에 낡은 골목길을 걸었다. 많은 추억과 경험의 사유가 꾸역꾸역 고여 들었다. 옆구리엔 K에게 받은 조롱박처럼 큰 한라봉이 친절한 충만감을 준다. 생각의 창고가 가득 찬 넉넉함.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 형의 보편적 사상을 빌려 발걸음을 느리게 옮겼다.
주름이 덕지덕지한 여관 골목을 주소지 없는 길냥이처럼 살피다가 익숙한 길에 도달했다. 가끔 막걸리 먹던 추억을 쌓아둔 동막골 전집은 혼자라서 포기하고 옆에 낀 60년 노포 영화루에 들었다. 점심시간이라 테이블이 찼다. 이민이나 타지에서 돌아온 분들이 이곳부터 찾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마 짜장면 한 그릇에 깃든 추억이 사무치게 그리웠을 것이다. 아직 사장님과 종업원 사이에 오가는 중국말이 정통성과 신뢰감을 보장해 주고 있다.
오늘은 향수 젖은 이 골목길을 트리 희(희영, 희선, 희정)의 에이스(?) 희정님이 그렸다. 70년대 소설 속 창백한 환자처럼 자주 아파 늘 걱정이었는데 요즘은 동료들과 잘 지내고 결강도 없어 다행이다. 그림도 나날이 좋아져 부디 오래오래 우리의 교실에 머물러 주길 바라는 게 나의 내심이다. 설 지나 벌써 정월 대보름이다. 농가월령가는 바야흐로 쌍 제비 옛집 찾듯 분주하고 새 학기 새봄이 그대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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