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엄동설한이었다. 말총모자와 무명 두루마기 등으로 온몸을 덮었다. 이 같은 차림으로 전국을 누비며 음식이나 일용품 등의 토산품 애용을 외쳤다. 조선물산장려회의 태동이었다. 장소는 평양이었다.
좀 더 들여다보자. 조만식·김동원·오윤선·김보애 선생 등 당시의 선각자들이 주축이었다. 70명이 뜻을 모았다. 민족자본을 육성하고 경제 자립을 도모하자는 게 취지였다. 그래야 일제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남녀노소, 빈부계층을 가리지 않았다. 많은 백성이 호응했고 실천에 나섰다. 1907년 한반도를 뒤덮었던 국채보상운동을 이어가자는 범민족적 경제 살리기 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국산품 장려, 소비절약, 금연·금주 등의 운동을 벌여 전국적으로 호응을 얻었다. 이후 유진태·이종린·백관수 선생 등 20여 단체 대표들이 모였다. 이번에는 서울이었다.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준비위원회를 꾸렸다. 이후 서울 낙원동 협성학교에서 창립총회가 열렸다. 조선물산장려회가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산됐다. 1923년 1월20일이었다.
이후 집행기관으로 이사회를 두고 그 아래 경리부·조사부·선전부가 설치됐다. 회의 실무를 계획·집행하는 상무이사와 이사장에는 유성준 선생이 선출됐다. 본부는 서울 견지동에 두고 각 지방에 분회가 설치됐다. 강연회 개최, 가두시위 등을 통해 백성들에게 외래품 배척과 경제적 자립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일대 민족운동을 펼쳤다. 그후 활동 방향을 전환했다. 소비조합 조직, 조선물산진열관 설립, 조선물산품평회 등 새로운 사업을 모색했다.
기관지도 발행됐다. ‘조선물산장려회보’와 ‘실생활’ 등이 대표적이다. 조만식·명제세·김성준 선생이 10여년을 이끌었다. 1934년부터 재정난을 겪으면서 일제의 탄압으로 1940년 강제로 해산됐다. 완결되지 못한 경제 분야 독립운동이었다.
계엄과 탄핵 정국으로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워졌다. 제2의 조선물산장려운동이라도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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