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 서설이 내린다. 한 해가 순백의 도화지 위에 놓였다. 안녕히 살아야지. 나의 작품계에도 희소식이 있길 웅크린 벽 너머 순국선열에게 묵념한다. 구차하지만 애송 시 한 편(전동균·주먹 눈)도 덧붙인다.
‘그래도 첫 마음은 잊지 말자고/또박또박 백지 위에 만년필로 쓰는 밤/어둡고 흐린 그림자들 추억처럼/지나가는 창문을 때리며/퍼붓는 주먹 눈, 눈발 속에/소주병을 든 金宗三이 걸어와/불쑥, 언 손을 내민다/어 추워, 오늘 같은 밤에 무슨/빌어먹을 짓이야, 술 한잔하고/뒷산 지붕도 없는 까치집에/나뭇잎이라도 몇 장 덮어 줘, 그게 시야.’
개뿔, 그림이 무슨 밥 먹여 주냐며 취화선의 장승업이 나타나 노숙자의 언 손이나 잡아주라는 식이다. 정초부터 아내에게 호출받고 탁자 앞에 앉았다. 요즘 행태에 심한 훈계를 받았다. 할 말은 많지만 훈시가 끝날 때까지 고개를 내렸다. 변명하며 대들 용기가 없다. 앞을 내다보고 주의하며 살아야지. 틈 없는 아내의 논리에 반성뿐이다.
호르몬이 변환되는 아내의 생물학적 과도기를 존중하며 가냘픈 마음을 달랜다. 아내가 내린 별다른 지시가 있다. 하루 5분 성경 통독이다. 100세에 얻은 귀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창세기 22장도 읽었다.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가 등장하는 서양 미술사의 한 장면이다. 다시, 암울한 시대의 나그네는 삼포 가는 길처럼 흐릿한 눈보라길 걸어 세류3동 재개발구역을 지난다.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