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구석에서 꺼낸 ‘홍범 14조’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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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독립 확립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갈수록 열강의 침략이 노골화되던 시대였다. 지방관제 개혁과 지방관리 권한 제한 등도 시급한 어젠다였다. 신분제도 폐지와 평등사회 구현도 빼놓을 수 없었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현실이 그랬다.

 

이 와중에 등장한 게 ‘홍범 14조’였다. 교과서 한구석에서 끄집어낸 역사의 한줄기다. 고종이 선포했다. 앞서 영의정 김홍집은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바로 1년 전이었다. 이후 나온 법률이었다. 정치제도 근대화와 독립국가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제정된 국가 기본법이었다. 이를 통해 조선이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개혁 방향이 명확하게 제시됐다. 격변하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정치·사회적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자 주력했다.

 

당시로 돌아가 보자. 내부적으로는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다. 외부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 다툼 속에서 국가 존립마저 위협받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조선이 국가의 존립을 위해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선포했다.

 

정치개혁 측면에선 왕권과 신권 조화를 추구하며 입헌군주제 기초가 마련됐다. 기존의 전제적 왕권에서 탈피해 법에 근거한 통치가 지향됐다. 관료제 개선을 통해 부패를 근절하고 효율적인 행정 시스템 구축 의지도 담겼다. 경제개혁 측면에선 조세제도 개혁과 재정의 투명성이 강조됐다. 신분제도 폐지와 평등사회 구현 등도 제시됐다. 모든 국민이 신분에 관계없이 평등한 권리를 갖추고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도 정리됐다. 전통적인 신분제를 극복하고 근대적 시민사회로의 전환도 모색했다.

 

고종은 세자와 대원군, 종친 및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로 가 독립의 서고문(誓告文)을 알리고 선포했다. 근대 최초로 순한글체와 순한문체 및 국한문 혼용체 등 세 가지로 작성됐다. ‘열 네 가지의 큰 법’이라는 뜻을 지닌 법률은 그렇게 이 세상으로 나왔다. 1895년 1월8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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