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어둠에서 빛을 꺼내듯

정수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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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들고 어둠 속을 걸을 것이다.”

 

‘영화 하얼빈’의 대사가 불꽃을 일으킨다. 덩달아 후끈 달아오르는 ‘까레아 우라’도 있다.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러시아식으로 세 번 외쳤다는 ‘대한독립만세’(김훈 소설에서는 ‘코레아 후라’로 나온다). 절로 뜨거워지는 이런 문장은 뒤를 잇는 울림도 크게 마련이다. 불을 들고 어둠 속을 함께 걸었던 기억들을 불끈 다시 꺼내보게 하는 것이다.

 

영화관을 나오면 다시 어수선한 상황. 그러잖아도 한 해 마무리에 정신없이 바쁠 때인데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들 황망한 표정이다. 지금 이전의 일상만큼이라도 얼른 되찾을 수 있기를. 그러면서 어둠 속으로 나아갈 불을 든 손이든, 코앞의 일에 붙잡힌 손이든, 평온한 삶의 회복을 바랄 뿐이다.

 

인류사를 보면 지옥 같은 큰 전쟁은 확실히 줄었고 삶의 질도 확연히 나아지고 있다는 연구자들의 진단이 맞을 테니 말이다.

 

그런 가운데 불을 들고 나서는 눈빛들을 돌아본다. 우리가 불을 들고 하는 일이란 대체로 경건한 의식이나 기도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기나긴 불의 역사를 떠나 근래의 경험치 안에서만 보더라도 불을 드는 일은 손을 모으는 행위로 이어졌다. 일상의 성냥불도 손을 모아 전했지만, 광장의 촛불들도 시대의 어둠을 밝혀나갈 손을 모으는 일이었다.

 

즐거운 경험으로 캠파이어의 불을 봐도 촛불 들고 고백하기나 부모님께 편지 쓰기처럼 자기 내면 들여다보는 손 모음이 대부분이었다. 초를 켜거나 연등을 달며 손 모으는 모습들은 보는 사람까지 숙연케 하는 힘을 품고 있다. 어둠의 물리침을 넘어 지금보다 나은 삶을 위한 바람을 불 앞에서 더 간절히 올렸다고 할까.

 

새삼 불을 들고 서는 마음가짐이 뜨겁게 닿는 때. 큰 고비마다 불끈 솟던 횃불이며 들불의 격정적인 마음의 발화를 생각한다. 그 안에는 슬픔을 다독이며 위로를 나누던 연민의 마음도 들어 있었다. 함께 어깨 겯고 어둠을 헤쳐 가려는 연대의 마음도 꿈틀거렸다. 어떤 마음으로 불을 들거나 뜨거운 마음의 분출이 모여 더 널리 번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피우고 전하고 나누는 불 앞의 마음 모음은 어둠 속에서 빛을 꺼내는 행위다. 서로서로 빛을 꺼내 더 환한 세상으로 가는 길을 밝히는 빛의 행진이다. 꺼지지 않는 불의 상징으로 유독 반짝이는 응원봉 속에도 그런 빛의 행진이 어둠 속에서 더 싱싱하게 피어나고 있다.

 

동지가 지나자 이제부터는 밤이 짧아질 일만 남았다는 말이 이마를 번쩍 쳤다. 밤이 짧아지면 어둠도 줄어들 테니 당연한 말이련만 시대적 함의에 따라 파문이 파랗게 일었던 게다.

 

자연의 어둠은 순리를 따라 줄었다 늘었다 계절을 조절한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어둠은 인간의 마음이 불을 피우고 모으며 물리쳐 갈 것이다. 그런 마음 모음으로 우리네 새벽을 열어 왔듯 겨울밤 거리에서 외치는 이들도 더 환한 아침을 위해 추운 어둠 속을 더불어 걷지 않겠는가.

 

아침을 연다는 것. 예사로 쓰던 말이 세상에 없는 날빛으로 닿았던 2024년 12월을 보낸다. 밤새 안녕을 뒤집었던 새벽을 지나 더 소중한 나날을 맞고 있으니 서성이는 마음도 다잡는다.

 

이제부터 밤보다 낮이 길어지듯 이 난데없는 어둠도 잘 물리치고 새로 또 나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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