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정치부 차장
무호동중 이작호(無虎洞中 狸作虎), 호랑이가 없는 고을에서 너구리가 호랑이 행세를 한다. 높은 사람이 사라지니 보잘것없는 이가 위세를 부린다는 뜻이다.
이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요즘, 생각이 한 가지 사실에 멈췄다. 그날 호랑이는 분명 그 고을에 있었다.
사상 초유의, 유례 없는, 그리고 뜬금없는 계엄령이었다. 평온했던 저녁, 한순간 대한민국을 둘로 가르며 일상을 침범했다. 그날을 떠올리며 가장 많이 한 말은 ‘이게 진짜야?’였다.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는 원수(元首)다. 막강한 권력을 갖는다. 그러나 분명 직위도, 권력도 모두 국민이 준다. 5년 간 나를 대신해 나의 고을을 잘 살펴 달라고 부여한 권한이다. 주인 행세하며 위세를 부리라고 준 권한이 아니다.
그런데 이 너구리들의 주인 행세가 도를 넘는다. 한밤중 국민은 느낀 적 없는 위기가 찾아왔다며 헌법의 존엄 위로 군홧발을 디뎠다. 나는 물론이고 고을의 어떤 이로부터도 선택받지 못한 너구리가, 내가 다른 너구리에게 준 권한을 빼앗아 본인이 행사하겠다고 한다. ‘국정 공백’ 사태를 막겠다는 미명이 붙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자니 이들은 누가 호랑이인 줄 모르는 게 아닐까 싶다. 아니, 어쩌면 호랑이가 자리를 비운 적 없이 우리의 고을을 지키고 있었음을 잊은 듯하다. 평온하게 관전하던 호랑이의 일상으로 정치, 언론, 표현의 자유를 짓밟으며 들어오는 게 국정이라면 그깟 국정 공백이 좀 생기면 어떤가.
갈등은 분명, 국민이 원한 바는 아니다. 신속하게 통합의 길로 가야 하는 것 역시 맞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있다. 그곳을 지켜본 호랑이, 주인은 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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