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선 법무법인 광장 고문∙前 관세청장
오전 9시 우수리스크 마르코폴로 여관을 씩씩하게 출발한다. 7월9일 아침 기온 15도, 낮 기온은 25도 이내로 매우 쾌적하다. 시베리아는 여름에도 이불을 덮고 잔다. 오늘 목적지는 하바롭스크. 680㎞를 가야 한다. 부산에서 평양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실제로 오늘이 시베리아 대평원 자동차여행의 첫날이다. 우수리스크를 벗어나자 멀리 아무르강 하류 우수리강이 보인다.
■ 헤이그 밀사 ‘이상설 선생’ 유허비
우수리강에 헤이그 밀사 정사인 이상설 선생 유허비가 있다. 이 선생은 1917년 우수리스크에서 사망했는데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유해를 화장 후 우수리강에 뿌렸다. 광복회가 우수리강에 이 선생 유허비를 세웠다.
이 선생은 신식 서양 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독학으로 수학, 화학, 법학을 공부했고 영어, 프랑스어 등 7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탁월한 언어 실력으로 헤이그에서 열리는 1907년 ‘만국평화회의’ 대표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학책을 직접 지어 조선인 학생에게 ‘수리 과목’을 가르쳤다. 근대 ‘한국 수학의 아버지’로 불리고 20대 나이에 성균관 대사성을 거친 천재 학자임을 알게 됐다.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 역대 대사성 명단과 함께 선생의 기록이 있다고 한다.
“유유히 흐르는 아무르강에서 맴도는 고혼(孤魂)이시여 이제는 평안하소서.” 멀리 고국에서 온 후생(後生) 인사드립니다.
■ 시베리아 대평원을 향하여 출발
원주민 언어로 시베리아는 ‘잠자는 땅’이란 뜻이다. ‘시베리아’ 하면 연상되는 단어들이 있다. 원시림, 광활함, 혹독한 추위, 자작나무 숲, 영화 닥터 지바고 설원 등 광활한 대자연 단어가 연상된다.
여행은 언제 가느냐가 중요하다. 겨울철과 여름철 대자연의 얼굴은 전혀 다르다. 현재의 시베리아는 초여름 연녹색의 향연이다. 위도가 높아 봄이 늦게 시작해서 그런지 나뭇잎 색깔이 연한 녹색을 띠고 있다. 차창 밖 줄지어 서있는 연녹색 산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하다. 도로 옆으로 자작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산림 사이사이에 작은 농가 몇 가구, 널따란 대초원, 커다란 필지의 농지가 나타난다.
우수리스크를 벗어나 두 시간이 지나니 인가도 거의 없다. 도로 옆으로 모스크바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만났다 헤어졌다 계속 달려간다. 아마 바이칼호까지 약 3천700㎞를 철도와 나란히 서쪽으로 달려갈 것이다.
■ 위험한 시베리아 국도
모스크바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 국도는 고속도로가 아니고 편도 1차선(왕복 2차선) 으로 협소한 길이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와 동쪽 태평양을 연결하는 국가의 중요한 간선도로임에도 사회간접자본(SOC) 투자가 미흡함을 느낀다. 산업용 도로이기 때문에 관광객이나 승용차는 적고 대부분 화물차다.
겨울철 눈으로 파손된 도로는 제때 보수가 안 돼 곳곳에 포트홀이 매우 많고 자동차가 튀어 오르는 바운딩이 자주 있어 운전 여건 최악의 위험한 길이다. 조금만 전방 주의를 소홀히 하면 포트홀에 빠지고 차가 위아래로 요동친다. 앞쪽의 화물차들은 천천히 달리므로 화물차를 만날 때마다 추월해야 한다. 반대 차선에서 마주 오는 차를 피하면서 중앙선을 넘어 추월해야 하므로 시속 150~160㎞의 위험한 급가속 운전을 해야 한다. 우크라이나전쟁으로 러시아 재정이 어려워 도로 보수가 지체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를 검색해 보니 러시아 국방비가 전쟁 전 국내총생산(GDP)의 4.3%인데 지난해는 6.7%(한국은 2.9%)로 증가했다. 전비 조달을 위해 금년에 세금을 대폭 인상한다고 한다. 소득세율은 전쟁 전 13% 단일세율에서 금년부터 최고 22% 누진세율로 인상, 법인세율도 전쟁 전 20%에서 금년부터 25%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 평화스러운 숲속 길 드라이브
‘카메이트’인 L실장은 여수에서 온 분이다. 향후 두 달 동안 좁은 차에서 함께 보내야 할 자동차 가족이다.
점심은 휴게소의 야외 식당에서 샤슬릭 꼬치구이를 먹기로 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우리를 유혹한 것이다. 샤슬릭 꼬치를 굽는 러시아 직원이 과거 마산에서 일했다고 하면서 반갑게 인사한다.
우리는 계속 광활한 산림과 대평원을 지나간다. 언어와 단어로 광활한 대평원의 느낌을 전달할 수 없다. 현대인들은 속도의 경쟁에서 중압감을 받으며 살아간다. 빌 게이츠가 말한 ‘빛의 속도로 변하는 시대’에 뒤떨어지면 낙오자가 된다.
문명 세계의 속도, 빠름, 효율성, 날짜, 요일, 시간 관념을 이곳에서는 잠시라도 잊고 싶다. 무심히 창밖의 초원. 산림, 하늘만 쳐다볼 뿐이다. 하바롭스크까지 680㎞의 먼 거리를 달려 가면서 수시로 급변하는 다양한 얼굴의 시베리아를 마주한다.
어느 구역은 소나기가 계속 내리고, 어느 구역은 햇볕 쨍쨍한 파란 하늘이다. 어디는 흐리고, 어디는 안개가 짙게 끼어 있다. 동해안에서 서울까지 280여㎞ 짧은 거리를 차로 올 때도 날씨가 여러 번 변하는 것과 비교해 본다.
녹색의 대초원과 자작나무 숲속을 지나 석양 무렵에 목적지 하바롭스크 화려한 러시아정교회 첨탑을 마주한다.
첫날 680㎞를 무사히 달려왔다. 마침 시내에 고려인 식당이 있어 저녁식사는 한식으로 한다. 고객은 러시아인들이고 외국인은 우리 일행뿐이다. 검색해 보니 고려인 후손이 8천명 산다고 한다. 1991년 소련 해체 후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다.
이곳은 하바롭스크주의 주도이며 러시아 극동에서 가장 큰 도시다. 아무르강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아무르강변의 호텔은 전망도 좋고 침대와 샤워 시설이 매우 깨끗하다. 샤워실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하루의 여독이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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