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균의 어반스케치] 고색에서

image

계절은 헤어지는 연인처럼 쌓인 정을 뿌리치고 간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라는 님의 침묵처럼 말이다. 차마라는 단어는 고결하다. 슬픔을 삭이는 절제의 미학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노란 은행잎 쌓인 가로수 길을 걷는다. 새소리가 요란하다. 말 없는 자연과 더불어 살지만 새의 언어는 소리로 통한다. 사람의 언어도 자연을 담은 의성어에서 비롯됐고 자연을 본뜬 상형문자가 되기도 했다. 자연은 소리와 표정과 질감이 있다.

 

고색동 청춘 보리밥집에서 수제비를 먹는다. 배고프던 시절 주식처럼 먹던 것들이 이젠 절대 미감을 살려준다. 여럿이라 더욱 맛있다. 부근의 한옥 카페에서 그윽한 만추의 커피에 물들 때 가을 철새처럼 공허함이 밀려온다. 수인선 모뉴먼트를 찾아 봤으나 철길은 다 걷어 냈고 남아 있는 건 표지석뿐. 옛 협궤열차의 온전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코스모스 핀 철로 위를 외발을 교차하며 걷던 추억, 철로 위에 귀를 대고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던 시절, 열차 안에서 보는 세상은 동화처럼 아름다웠다.

 

부근 마을을 산책하다가 한 통나무집을 봤다. 아름다운 카페와 ‘나그네 길’이라는 간판도 낯선 변두리 마을의 서정이다. 10여년쯤 친구와 왔던 수인선 닭발집 원탁 앞에 앉았다. 소주 한 잔 부어 놓고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신호가 간다. 그의 목소리가 궁금하다.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