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연 아태반추동물연구소 연구원·농학박사
사막의 낙타, 남미 고지대의 라마는 약 4천년 전부터 사막과 고산지대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사람의 이동을 활성화하고 인류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보급해 주던 동물이다.
이와 달리 대평원을 달리는 데는 말(馬)만한 동물이 없었다. 말은 5천500년 전 중앙아시아에서 최초로 가축화됐고 이후 4천200년 전 서부 유라시아 대초원에서 또다시 가축화돼 이동과 운송을 위해 인류와 길고 긴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최고속력 시속 60~70㎞, 하루 최대 이동거리 100㎞를 달리는 말이 인류사에 가져다 준 업적은 실로 눈부셨다.
특히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에서 출발해 페르시아와 인도까지 거대한 제국을 확장하는 원정에서 말은 중요한 교통수단이자 전투 도구였다. 이후 13세기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은 말을 이용해 유라시아 전역을 빠르게 정복했고 중세 유럽에서는 기사가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이 군사 전술의 핵심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고구려와 발해의 기병대, 고려의 기마무예, 조선의 파발제 같은 통신제도를 통한 말의 활약은 독보적이었다.
19세기 유럽 이주민들이 북미에서 서부 개척지를 탐험하고 정착해 농장을 일구기까지 말은 미국의 개발과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했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말은 참호전 격전지에서 병참과 물자 수송을 담당했다고 하니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불과 100년 전까지 이동과 수송, 전쟁과 교통에 기여한 말의 헌신은 상상을 초월한다. 만일 말이 없었다면 인류 사회는 느리게 발전했을 것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 법하다.
왜 하필 말일까. 잘 달리는 동물에는 얼룩말이나 사슴도 있고 힘 좋은 동물에는 코끼리나 소를 따를 자가 없다. 그런데도 굳이 말이어야 했던 이유는 기동성과 지구력을 모두 갖춘 신체적 덕목이 선행됐겠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사람을 믿고 따르는 말 고유의 성격이 신뢰와 행복감을 전해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말은 운송·통신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스포츠, 레저, 관광 같은 새로운 일을 맡아 인간 사회에 남게 됐다. 특히 신체 균형을 바로잡고 마음 치유를 돕는 재활 승마는 자폐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말에게 의지해 더 나은 세상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성취감과 도전정신을 북돋우고 심리적 안정과 자아 존중감을 되찾게 한다. 자유롭고 강인한 말은 신뢰의 아이콘이 돼 인류의 새 시대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속담에 ‘안정적인 친구를 원한다면 말을 길러라’는 말이 있다. 말이 얼마나 헌신적인 믿음과 안정을 주는 동물인지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윈스턴 처칠은 “훌륭한 말을 타고 있을 때가 가장 좋은 자리에 있는 것”이라 했다. 말에서 느끼는 자유로움과 행복감이 매우 큼을 의미한다.
경주마, 승용마, 조랑말, 은퇴마. 먼 훗날 세월이 흘러 지금 하는 말의 역할이 쓸모없어진다 해도 미래의 말은 여전히 인류의 좋은 파트너로 새 역할을 찾아갈 것만 같다. 수천년간 쌓아온 깊은 역사적 유대를 바탕으로 하는 고마운 말이기에 우리 인류가 앞으로 말과 함께할 공존의 관계를 더 소중히 준비하고 가꿔 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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