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따뜻하더니 계절이 본색을 드러낸다. 추위는 툰드라의 늑대처럼 거칠게 닥쳐올 것이다. 작업실 뒷문은 내년 봄이 올 때까지 밀폐되리라. 벚꽃이 필 즈음 뒷문을 열면 비로소 봄빛을 들여놓을 수 있을 것이다. 겨우내 난로가 피어 있고 작업도 움츠릴 수밖에 없다. 전시도 뜸하고 외부와의 소통도 겨울잠을 잘 것이다.
수강생들과 식사 후 커피 한잔할 요량으로 전망 좋은 산자락 골목길을 오른다. 그런데 뜻밖의 청초한 길이 빛과 그림자 사이로 열렸다. 아스팔트 위의 꽃 같은 골목길은 오르는 정감이 있다. 지나간 청춘은 늘 앞만 보이는 오르막이었지만 이젠 오르막도 내리막같이 좌우가 보인다. 급하게 시간을 굴려 갈 이유가 없다. 오늘 새벽 집을 나올 때 한 미화원이 보도 위의 낙엽을 도로 위로 쓸어내는 걸 봤다. 어떨 땐 모터가 달린 청소기로 마구 쓸어내고 있었다. 소음이 극심했다. 차들이 달리자 낙엽들은 바스러져 심한 먼지를 일으켰다. 무엇이고 한꺼번에 치우려는 관행은 시민의 정서적 여유를 박탈하고 있다.
가로수의 낙엽이 벤치에도 보도에도 시처럼 내려 포근한데 겨울로 이동할 때까지라도 그냥 두면 딱딱한 보도블록보다 낫지 않을까. 짧은 시집 같은 가을을 지우지 말았으면 좋겠다. 낭만 가득한 길은 도시의 때를 벗을 수 있는 순수한 탄력을 길을 수 있다. 언덕 위의 카페에서 커피 향이 핀다. 그곳에서 저무는 가을에 잠시 머물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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