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자 시조시인
설레니. 어느 날 스쳤던 말에 새삼 설렌다. 두 청춘의 대화가 날아든 것은 막 우산을 펴는 순간이었다. 친구의 답은. 나도 모르게 쫑긋 커지는 눈귀를 얼른 돌렸다. 지나는 대화에 덩달아 설레는 기분이라니, 마침 문학 강의를 마친 가을 오후라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오다 말다 하는 빗발에도 설렘이 묻었는지 파문이 내내 번졌다. 그들은 그 오후의 설렘을 어떻게 펼쳐 놀았을까.
신선했던 설렘이 문득 떠오른 것은 아무래도 가을하늘 탓이지 싶다. 사실 우리네 일상에서는 설렘이랄 것이 많지 않다. 아니 설렘의 감정을 자주 갖기 어렵다고 할까. 일과 사람과 장소의 규칙적 반복, 그게 현대인의 평범한 나날이니 말이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쌓여 일생이 된다. 별다른 무엇을 찾아 나서지 않는 한 어제와 별다르지 않은 오늘을 감내하듯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일상이라는 반복의 지루함을 견디는 것도 일종의 수행인 셈이다. 어쩌다 예기치 않은 사고나 시련이 닥치면 그때서야 지루해 몸을 뒤틀던 일상의 반복도 고맙고 소중하게 받들긴 한다. 그러다 일상을 되찾으면 그 안온함에 안도하면서도 금세 또 지루함에 뒤척이기 십상이지만.
설렘은 들떠 두근거리는 것. 그런 감정의 발현은 가슴을 뛰게 하고 감각의 각질을 떼어내 준다. 아무 두근거림도 없는 지루함으로 자신을 갉아 먹히는 느낌에 들뜨는 균열을 내주는 것이다. 그러니 더 무기력해지기 전에 소소한 설렘이라도 변화를 찾고 만들어 갈 필요가 있다. 잠시라도 지루함을 깨는 설렘을 찾고자 마음만 먹으면 큰 비용과 시간을 안 들이고도 가능한 게 많다. 그런 마음 자체가 두근댐의 시작이니 새로운 재미에 설렘의 감각까지 깨울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과 함께하는 세상이니 만남의 약속이 그럴 만하고 영화나 전시회 혹은 음악회 등도 설렘의 감각을 불러낼 좋은 시간을 준다. 그냥 어제와 다른 길이나 골목을 찾아 오늘의 산책을 해보는 것도 낯익은 대상과 새롭게 만나는 설렘을 즐길 수 있겠다.
오늘의 설렘은 하늘에서도 찾을 수 있다. 너무너무 높푸른 날 누군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서정주)고 외친다면. 무슨 도발이라도 하듯 시구(詩句)를 던져 봐도 그리움 같은 감응이 일지 않는다면 감정이 무뎌진 것이다. 때로 무디다는 게 편한 면도 있겠지만 대부분 무딤은 감수성이 굳어 가는 징조다. 피부 각질이 두꺼워지고 귀가 어두워지듯 다른 감정이 무뎌지면 감각도 늙는 까닭이다. 세간의 변화에 무덤덤해지면서 생각마저 경직되면 자신의 삶 자체를 뒤처지게 만든다. 그럴수록 자신을 일으켜 어떤 일이나 대상 앞에서 새롭게 두근거릴 수 있도록 설렘의 감각을 찾아 즐겨야 한다.
나를 설레게 하는 것. 그렇고 그런 일상에 낯선 충격을 가하는 것. 그런 설렘을 찾아야 더 두근거리는 감정과 젊은 감각을 유지한다. 설렘을 자주 만들다 보면 자신이 찾아온 생의 가치를 더 많이 담아갈 수 있다. 설렘이야말로 자신을 새롭게 맑게 하는 감정의 다정한 여행이니 말이다. 오늘 아침의 하늘빛에 설렜다면 두근두근 맞이할 일이다.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설렘의 보석을 발견하고 내 앞의 나날에 더 눈부시게 새겨갈 테니.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