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밭에서 햇감자를 캤다. 외할머니는 이를 갈아 부침개를 만들어 주셨다. 산기슭이나 냇가 등지에 제단이 설치되기도 했다. 동네에선 굿판도 벌어졌다. 어렸을 적 외갓집에서의 추억이다.
농촌에선 이맘때가 추수 때만큼 바쁘다. 메밀 파종, 누에치기, 감자 수확, 고추밭 매기, 마늘 수확 및 건조, 보리 수확 및 타작, 모내기, 그루갈이용 늦콩 심기, 대마 수확, 병충해 방제.... 해도 해도 농사일은 끝이 없었다. 남녘에선 단오 무렵 모를 심어 이맘때 마무리한다. 장마도 시작된다. 하지 이야기다. 오늘이 그날이다.
이날은 태양 황경이 90도가 되면서 지구의 자전축이 하지점에 멈춘다. 북반구에선 이 시기 낮의 길이가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다. 여름의 중간 지점이자 1년 중 가장 덥다. 실제로 24절기 중 기온이 가장 높은 날은 입추다. 남중고도와 기온이 꼭 비례 관계가 아님을 의미한다.
농경사회에선 절기가 농사일의 기준인 ‘농사 달력’이다. 모내기가 끝나면 비가 와 논에 물이 가득 차야 벼가 잘 자랄 수 있다. 논에 물 대기가 그해 농사를 좌우하고, 가뭄이라도 들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1970~1980년대는 농부들의 ‘제 논 물 대기 다툼’이 큰 싸움으로 변했다. 얼마나 바쁘고 힘들었으면 ‘하지가 지나면 발을 물꼬에 담그고 산다’나 ‘유월 저승을 지나면 팔월 신선이 돌아온다’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였다.
올해도 절반이 후딱 지나가고 있다. 고물가와 경기 침체에 집단휴진까지 겹친다. 이런 사안들이 쉽게 해결될 수 있을까. 싹수가 노랗다. 국회는 강 대 강 대치로 어수선하다. 상임위조차 구성 못하는 등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밥그릇 싸움만 하는 꼬락서니가 역대급이다. 정치가 본업을 내팽개치니 이 모양이다. 계속되는 폭염으로 눈앞이 캄캄한데 세상사가 우리를 더 지치게 한다. 하지라는 절기에게 되레 겸연쩍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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